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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뭘 증명하려는 걸까?

ch1. 나를 해체해보니 11

by 지담

이 글은 한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 작성하는지라 그냥 죽죽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다소 문체나 흐름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글이라는 것이 쓰고 나면 반이상을 버려야 하는 것임을 감안하여 그저 날 것 그대로 노출하고 있답니다. 본 글은 매거진 '어떻게 살 것인가'의 1편부터 연이어 읽어나가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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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뭘 증명하려는 걸까?]


결과는 원인이 존재한다. 즉 원인은 결과로 증명된다.

현실은 과거가 원인이다. 즉 과거는 현실로 증명된다.

행동은 감각, 감정, 사고가 원인이다. 즉 이들은 행동으로 증명된다.


자, 나에게 온 감정은 무엇을 증명하려고 온 것일까?

이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는 개입,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증명해내려는 결과를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우주에 존재하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것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부정의 감정 이면엔 긍정의 감정이 딱 달라붙어 있다고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것에는 대립되는 상반된 개념이 존재한다. 진짜 감정을 제대로 알려면 감정 전체를 봐야만 한다.


앞서 예를 들었던 ‘원망’의 경우 원망이라는 단어가 품은 피상적인 것만 보면 억울함, 상대탓과 연결되지만 그 이면까지를 들여다 보면 말이 달라진다. ‘원망’이라는 감정이 찾아온 것을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내 앞에 세워둔 채 나는 아무런 이유없이 당한 피해자로 스스로가 자신을 거기 세워둔 것이다. 피해자니까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하고 나약한 나여아만 하는 것으로 스스로 규정해놓은 것이다. 원망과 붙어 있는 대립개념, 뭐가 있을까? 용서? 이해? 사랑? 자, 이 단어쪽으로 내가 자리를 옮긴다면 나는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강한 내면을 지닌 용서하는 너그럽고 관대한 내 안의 자아를 만나게 된다.


결국, 어떤 감정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그 이면까지를 들여다본다면 피상적인 해석으로 하는 행동과 깊이 있게 내면의 자아가 지시하는 행동은 아마도 반대의 결과로 도출될 것이다. 그래서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결과가 나는 것이다. 원인은 같지만 결과가 다른. 이 사이에는 나의 선.택.이 있다.


감정도 선택할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같은 원인이라도 결과는 원인 이후 선택에 따라 달라지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한다는 것은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의지다.

선택한다는 것은 방해 요소에 저항하겠다는 의미다.

선택하겠다는 것은 내면에 존재하는 내가 아는 나보다

더 큰 나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결정이다.

감정도 선택할 수 있다.


부정적 감정이 날 덮쳐올 때 나는 선택하지 않았으며 그저 ‘자극’에 ‘반응’한 것뿐이다. 기분나쁜 소리를 들으면 상대에게 미운 감정이 생기고 무서운 영화를 보면 비슷한 장면만 나와도 공포스럽고 새로운 시도를 앞두고는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긴장감에 쩔쩔 맨다.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응’을 거부하는 선택도 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자극, 원인). -> 상대가 미워진다(반응, 결과).
화살표에서 나는 STOP을 외칠 수 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자극, 원인) -> STOP!


나는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않았고 선택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감정이 어디로 이동하든 상관없이 나는 의식적으로 멈춘 것이다.

그리고 선택해 보는 것이다.

상대를 미워할지 외면할지 선택하면 된다.

이것을 상대를 비난하고 인간적으로 무시하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상대와는 무관한 것이다. 상대가 어떤 의도를 품었든 관심가질 바 아니다. 상대에 의해 내게 온 감정을 무시하라는 것이고 관심갖지 말라는 것이다.


STOP ->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주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구?’ 난 기분 안 나빠. 미운 감정이 왔구나 그래서 어쩌라구? 난 하던 일이나 할래. 그러면 되는 것이다. 감정도 선택할 수 있다.


자극이 원인이면 반응은 결과다.

같은 원인이라도 결과는 달라진다.

미워하는 부정의 감정을 거부하는 선택을 할 수 있고 미움 이면에 붙어 있는 다양한 긍정감정들 가운데 하나를 꺼내어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엔 ‘그래서 어쩌라구?’다. 현상과 감정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면이 아니라 인정.이다.

‘네가 나에게 상처줬지?’ 인정.

'그런데 어쩌라구? 감정은 알아서 제 갈길을 가겠지.'

나는 멈춰서 다른 감정으로 날 이동시킬 선택의 권리, 자유의 패를 꺼내 쓰는 것이다.


모든 현상에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사실 코로나가 창궐하던 때에도 온 주변이 죄다 코로나로 걱정하고 조심하고 아파했지만 나는 멀쩡했다. 실제 감염자와 함께 있었지만 나는 감염되지 않았다. 한집에 사는 모두가 감염됐지만 나는 거뜬했다.


코로나가 우리집에까지 왔구나(자극) -> 조심해야지, 큰일났네. 뭘 더 신경써야 하지와 같은 걱정(반응)

코라나가 우리집에까지 왔구나(자극) -> STOP! -> 그래서 어쩌라구? -> 제 아무리 전염병이라도 내가 끄떡하나봐라(선택한 반응)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전염병으로 인해 내가 걱정하고 고민하는 부정의 에너지를 멈추고 나는 내 안의 큰 내가 외치는대로 '나는 건강할거야. 끄덕없을거야' 라는 긍정의 에너지로 날 전환시킨 것이다. 이런 사고패턴은 아주 곳곳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지금 이 시간에 주차할 데가 없을걸(자극) -> 다른 곳으로 갈까? 어디로 가지? 와 같은 고민, 탓, 포기(반응)

지금 이 시간에 주차할 데가 없을걸(자극) -> STOP -> 그래서 어쩌라구? -> 가봐. 분명히 차 한 대가 나갈 거야.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을 그냥 가보자구!(반응)


시간은 없고 차는 막히고 주차할 곳은 없고..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음직한 소소한 일들. 이런 일이 있을 때 대다수가 짜증, 방향전환, 왜 여길 가자고 했느냐는 원망 등으로 결국, 주차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약속시간은 늦고... 이렇게 일이 진행된다. 그런데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거의 이런 일이 없다. 그래서 어쩌라구? 덕이다. 항상 차 한 대가 쑥 빠져나오면서 빈자리를 내준다. 그러면 내가 한마디한다. ‘것봐! 에너지라니까!’라고. 가는 내내 걱정하는 상대에게 나는 ‘암것도 걱정하지 마. 분명히 자리 있어. 거기 얼마나 맛있을까?’ 하며 결과를 즐기는 상상으로 짜증, 원망 이면의 감정으로 날 이동시킨다. 부정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자, 같은 원인인데 STOP 하나로 결과는 정반대로 이어진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워요, 힘들어요, 그게 가능한가요? 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에 대해 당신 스스로 답을 해보면 어떨까?


감정이 당신을 찾아와 당신에게서 무엇을 증명하려는 걸까요?


원망이라는 감정이 나에게 왔다면 원망은 상대를 가해자, 나를 피해자로 만들며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평생 한탄하는 나를 증명하러 온 것일까. 원망이면의 용서와 이해에 먹이를 주며 오히려 상대로 인해 내가 세상을 알게 되었노라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커다란 나와 조우하는 결과를 증명하러 온 것일까?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면 자신에게 물어보라. 과연 자신이 증명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무기력에 빠져서 원망하고 한탄하고 좌절하는 자신인가? 무기력 이면의 내면의 힘을 들춰내어 자기 인생을 전환시키고자 하는 자신인가?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과연 감정이 증명하러 온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내가 선택하면 된다. 자신이 증명하고 싶은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에너지에 힘을 보태면 된다. 그거면 끝이다. 나머지는 에너지가 알아서 할 것이다. 에너지는 자체자석력으로 스스로를 키워내니까.


나를 지배하려는(역으로 말하면 내가 지배되는) 감정을 내려놓고 그 이면의 감정이 나를 위해 일하게 만들면 된다. 나는 길을 터주기만 하면 된다. 부정감정 이면에 긍정감정이 딱 달라붙어 있음을 인지하고 부정감정이 난리를 피고 있으니 그 이면의 긍정감정이 힘을 쓰지 못하는구나를 깨달으면 된다. 앞서 말했듯 무의식적으로 반응했지만 STOP을 외친 후 감정(반응)을 선택하면 된다. 이것이 부정감정을 외면하고 ‘자각’의 수준을 높여서 현실에 지배당한 작은 나에게 가려져 있던 내면의 위대한 나를 깨우는 것이며 위대한 내가 맘껏 힘을 뿜으며 갈 길을 의식적으로 터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감정에 대한 긴 이야기를 했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몇 가지의 원리다.

첫째, 감정은 야누스와 같다. 한쪽에는 반드시 상반된 다른 모습이 맞물려 있다.

둘째, 감정은 자가증폭한다. 또한, 내가 관심두는 쪽이, 집중하는 쪽은 더 빠르게 증폭한다.

셋째, 감정은 에너지다. 내가 보낸 에너지는 무한의 자석력으로 무한의 공간에서 동종끼리 만나 무한정 증폭된 상태로 나에게로 다시 온다.

넷째, 감정은 증명하라 강요한다. 내가 무엇을 증명할지 선택하면 선택된 감정이 역할에 몰두한다.

다섯째, 감정의 진가는 나를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자각하는 순간, 사라진다.


뭐니뭐니해도 단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저절로 분명하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발생근원은

‘내가 마음먹은 곳, 내가 힘주는 곳’이 현실이 된다는 사실이다.


==>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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