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그리고 脈! 1
이 글은 차후 출간을 목표로 집필중입니다. 현재 매일 쓰는 초고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브런치에 옮기는 중이라 다소 문체나 흐름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본 글은 매거진 '어떻게 살 것인가'의 1편부터 연이어 읽어나가시길 권해드리며 본 글은 '2장, 해체, 그리고 맥'의 1. 기준을 높이고 수준을 쌓는다 1편입니다.
얼마 전 아들에게 상체근력 운동을 배웠는데 내가 얼마나 내 몸을 무시하고 살았는지 처절하게 절감했다. 무릎을 접고 팔굽혀펴기를 하는데도 단 1개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아들이 허리를 살짝 잡아주지 않으면 바닥에 엎드린 채 배와 땅 사이에 공간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당시, 나는 아들한테 큰소리쳤었다. ‘엄마가 얼마나 근력이 좋은 줄 알아? 팔 힘은 없어도 금방 배워! 5개는 거뜬히 할걸!’ 내 상체근육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 줄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망언을 한 것이다.
아들이 내게 묻는다.
‘엄마, 그래도 이제 시작했으니까 하루에 몇 개씩이라도 꾸준히 해야지? 몇 개씩 할 수 있겠어?’
난 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팔굽혀펴기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기준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준은 기본이 자리를 먼저 잡아야 그 다음에 자리가 난다.
기본이 없는 기준은 없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고서 방정식을 풀 수 없고
100미터도 제대로 뛰지 못하는데 마라톤에 참가할 수가 없으며
된장이 맛이 없는데 된장찌개가 맛있을 리 없고
나를 알지 못하면서 나를 성공시킬 리 만무하다.
나는 상체근력을 조금 탄탄하게 하기 위해 일단 기준을 1일 5개로 잡았다. 그런데 웬걸! 결코 할 수 없었다. 5개는 기준이 아니라 내겐 너무 높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AB****라는 기구로 기본부터 다지기로 했다. 15개 정도 하니 조금씩 팔과 어깨와 배에 힘이 붙는다. 기본기를 갖출 때까지,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그래야 팔굽혀펴기를 하루에 몇 개를 해낼 지 기준을 잡을 수 있다.
수준이 높든 낮든 일단 수준차원으로 가려면 ‘이하로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기준이 필요하고 기준은 기본이 갖춰졌을 때 기본보다 조금 더 높게 정하면 된다. 기준이 없거나 너무 낮으면 수준을 높이는 것이 상당히 어렵거나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기준이 높다면 수준이 높지 않아도 상식적인 판단으로 ‘기본 이상’이라 말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게다가 조금만 노력해도 높은 기준으로 인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수준을 높이려면 기준이 높아야 하고
기준을 잡으려면 기본이 마련되어야 하며
기본을 갖추려면 기초부터 단계별로 가야 한다.
기초를 세워 기준이 잡힐 때까지는 어떤 타협도 안 된다.
기준은 기분이 아니라 기본에 의해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수준있는(높은)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는
기분에 좌우되서는 기준을 잡을 수가 없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언제부턴가 나의 사상이 담긴 나만의 글이 쓰고 싶다는 욕구가 내게서 발견되었고 이를 위해 '어느 정도 수준의 책을 쓰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더니 몽테뉴가 말했듯이 죽기 전에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글' 정도는 써야할 것 같다는 메시지가 내 안에서 들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글쓰기의 기준을 잡아야 했는데 그저 카페에 끄적거리는 정도의 글솜씨와 읽고 싶은 책을 읽은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욕구임을 알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매일 책읽기와 매일 글쓰기다. 기본을 갖추기 위한 첫단계였다.
기초를 다지고 기본까지 도달하기 위한 실천이다.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듯 읽는 양이 많아야 나의 정신이 사상을 만들 것이고
그것들이 언어화되는 기능적인 부분과 혼을 불어넣는 예술적인 혼합으로
출력된 글이 탄생하는 것이니
나는 매일 읽고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 즉 기초행위라 판단했다.
기초를 다져 기본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수준을 논하면 안된다. 수준은 한참 멀리 있는 일이다. 난 기준을 잡을 수도 없는, 가령, 어느 정도 퀄리티의, 어떤 문체를, 어떤 대상으로, 어떤 주제로 글을 적어야 한다는 기준조차 잡을 수 없으니까 기초과정에서는 맹목적으로 읽고 쓰고 읽고 쓰고 계속 계속 읽고 쓰고를 반복하여 양을 쌓는 것, 그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는 멈추지 않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이러한 기초 시기에는 절대적으로 정량적인 양이 중요하다. 가령, 1일 1시간 읽고 1시간 쓴다. 와 같이 질보다는 정해진 양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축적이 어느 순간 감(感)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아,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준이 잡히는 것이다. 이제 됐다. 기준이 잡혔으면 가늠해볼 수 있다. 기준이 높은지 낮은지.
'나에게 나무를 베는 데 6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날을 가는데 4시간을 쓸 것이다.‘
유명한 링컨의 명언이다.
링컨이 도끼날부터 갈았다는 실천은
나무를 베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수용과
주어진 조건 모두를 이해한 지각과
그것들을 오로지 받아들인 그의 열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방향을 지목했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목적하는 바를 위해 시간의 함수 안에서
기본(도끼날을 가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결과를 위한 효율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기준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면 기준이니까 그 아래로는 갈 수 없는 경계다.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 직진신호이며
우왕좌왕하더라도 어떤 선은 넘지 않겠다는 타협없는 지점이다.
먼 길을 더 효율적으로 갈 수 있으면서도 결코 이 기간을 지나지 않고는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할 수 없도록 단단히 무장시키는 마법의 기간이다.
선생은 선생다운 기준이 있고
부모는 부모다운 기준이 있고
군인은 군인다운, 공무원은 공무원다운, 정치인은, 종교인은, 학생은, 사장은, 여성은, 남성은, 모든 역할을 부여받은 이름에는 ’기준‘이 있다.
그 이하는 상식선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기준을 잡았다면 그 지점을 최하로 두고 수준을 논해도 된다. 그 때부터가 진짜 시작인 것이다. 진짜 부모다운, 진짜 여성다운, 진짜 군인다운, 진짜 학생다운.. 이런 것이다. 기준 위에서 수준이 갖춰졌을 때 우리는 ’~다운‘이라는 표현을 선사한다. 그런데 기준을 너무 높게 잡으면 ’난 이 정도를 해낼 수 없는 나약한 자‘라는 위축으로 수준은커녕 포기부터 하려 들테지만 너무 낮게 잡으면 기준인지 기본인지 헷갈려서 임계점통과는커녕 상식이하 취급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본을 갖춰가는 과정에서 포기부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새벽독서를 하면서도 기본을 갖추려면 일단 최소 1달이상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정량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며 그것이 몸에 조금 익을 때 기준을 세우면 된다. 4시에 일어나 1시간을 읽을지 5시에 일어나 2시간을 읽을지를, 그리고 나서 수준을 논한다. 어떤 책을 얼마나 집중해서 어떤 방식으로 읽어나가면 좋을지에 따라 독서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일단 5분이든 1시간이든 매일 정량적인 시간을 채워야 한다. 1줄을 쓰든 10페이지를 쓰든 시간을 채운 후 조금 익숙해지면 '매일 1시간을 쓴다'는 기준이 잡히고 그리고 나서 습관이 되면 글의 깊이를 줄 수 있는 주제, 소재, 어휘력, 문체 등등을 수정해가면서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기준을 잡는 기본과정에서 수준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현주소를 인정하는 것이다.
오만하지 않게 자신의 실력을 가장 아래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기본적 배움에 순종하겠다는 다짐이다.
기준이 잡혀 수준을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만하지 않게 기준 밑으로 내려가면 안된다. 이는 나는 기준이하로 해도 높은 수준을 출력해낼 수 있어라는 오만이 무의식에 존재한다는 의미니까.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지속적인 수준향상을 위한 도전을 해야 한다. 수준을 논하는 차원에서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준정도만으로도 난 높은 수준으로 점프할 수 있다는 과한 자신감인 것이다.
===> 다음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