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 못하는 나에게
말부터 가르쳤습니다

나는 나를 키웁니다. - 마인드리셋 1

by 지담

프롤로그 - 나는 나를 키우기로 합의했다.


식물을 참 못 키운다.

자체 생명력이 있을 거라 믿고 물과 영양분을 잘 주는데도 이 녀석들은 크다 말고 잘 크나 싶으면 이내 시들거리며 죽는다. 그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식물 키우기를 포기하려다가도 포기가 안 된다. 게다가 계속 꿈만 커진다. 거리를 지나다 예쁜 꽃을 보면 검색해서 그 씨앗을 사다가 심어 보지만 싹이 나고 살짝 꽃이 피다가 비실거리기 일쑤다.


작년 설악초가 너무 좋아 설악초 씨를 사다 심었고 그 씨앗을 받아 올해 아주 풍성한 설악초꽃을 피웠으나 길고 강하게 자라지 못한 채 때 이르게 씨앗을 맺고는 이내 시들었다. 볕도 잘 들고 바람도 선선한 테라스에서 키우는데도 이 모양인 걸 보면 아무래도 토양의 근본적인 문제이거나 더 심각한 것은 나의 정성이 많이 모자라서인가보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랑 식물이랑 궁합이 안 맞던가.


그래도 나의 꿈은 마당 있는 집에 가서 대문 옆으로 멋지게 유실수들을 심는 것이다. 난 죽고 나면 내 유골을 내가 지은 집, 내가 심은 나무 아래 뿌려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난 지금의 생각을 죽어서까지 유지시키고 싶은 것 같다. 늘 나무처럼 땅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며 굳건히 나의 삶의 기둥을 세우고 싶나보다. 물론, 나무를 길러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나무를 꼭 기를 것이라 다짐을 굳힌 지는 오래다.


나무를 키우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다른 생명에게 나누고 그 씨앗을 또 심어 보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직접 해보는 삶 속에서 나도 그 아래에 묻혀 ‘나’라는 열매에 딱 ‘나’만큼의 양분으로 세상에 보태지길 바란다.


그러다 문득(정말 문득) 나이 50을 가까이에 두고서

나는 나를 봤다.


나는 나를 키워봤나?’


아!!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머리가 멍. 심장은 쿵. 손은 살짝 떨렸다.


나는 나라도 제대로 키워봤나?

혹여 곧 죽을 녀석처럼 씨앗부터 떨구게끔 비실거리게 키우고 있는 건 아닌가?


100세 인생시대에 50...

나,

나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 거지?

제대로 자라고는 있나?


생각해서 생각난 게 아니라

생각없었는데 생각이 쳐들어왔다.

그런데, 떨렸다.

식물이나 동물키울 생각말고

얘들도 다 키웠겠다, 나를 한 번 키워볼까?


그리

보려해서 본 건 아닌데

보여지지 않아도 보이는 나로 인해

보이지 않던 내 삶들을 들여다보니


가슴이 텅 비었고

내면은 혼탁했고

정신엔 부패..

이성은 감정에 패하기 직전이었으며

영혼은 날 위해 마지막 힘을 쏟느라 지쳐 있었다.


식물 키우기보다 ‘나 키우기’가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난생 처음’ 느낀 자극을 실천해야겠다는 느닷없는 생각의 침입이자 진입은 나의 도망간 정신을 서둘러 불러들였고 호출된 정신은 이성부터 챙기며 내 몸 구석구석에 명령할 꺼리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했지만 힘에 지친 영혼은 드디어 자신을 방해, 방어, 방치하지 않는 정신에게 맑은 미소 한번 보낸 후 서둘러 ‘나 키우기’ 작전에 들어가라 지휘하기 시작했다.


식물, 동물도 잘 못 키우지만 고등동물인 2녀석(아들, 딸)은 그래도 잘 키워낸 전력이 있으니 식물이나 동물보다 인간 키우기가 조금 더 수월할 것 같았고 그 중 유일하게 나밖에 할 수 없는, 나여야만 하는, 내가 제일 잘 키울 수 있는 ‘나’부터 키우기로 나는 나와 합의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나와는 종(種)이 다른, 나에게 온전히 기대고 있는 식물이나 동물 같은 개체보다 내가 젤 잘 알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나 키우기가 훨씬 쉬운 게 아닐까? 라는 본질적인 믿음에 의지하여 여하튼 나는 초자연적 정신상태를 가진 나를 키우는 것에 갑자기 들뜨기 시작했다


신체와 정신과 정서와 영혼.

뭣부터 건드려야 할까?

건드리려니 뭘 알아야지?

알려니 나에게 관심 좀 가져야겠지?

관심 좀 가지려니 지금 정신말고 또 다른, 나를 들여다볼 정신이 필요했다. 서둘렀고 약간은 들떴었다. 여하튼 나는 지난 4년여 나를 키우는 데 열중이었고 그것을 후루룩 적어보니 목차와 같은 절차를 거쳐왔던 것 같다.


지금 이 글은 그저 50이라는 나이를 앞둔 4년 전, 40대 후반의 나에게로 다가가 그 때의 정신과 신체와 영혼을 들여다보는 재미난 작업이 되었다.


사람의 삶의 방식은 단 2가지,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나는 지난 4년간 나의 사고와 행동의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나를 키웠고 이를 통해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고백같기도 반성같기도 일기나 기록같기도 한 어정쩡한 이 글은 2023년 여름의 끄트머리,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날 새벽 느닷없이 적기 시작한 글이다. 집필중이던 책에 온통 정신이 쏟겨 있었는데 그 한쪽 귀퉁이에서 지난 시간들이 저장된 내 인식의 창고를 살짝 열어 이것저것 뒤적거리는 재미와 함께 무엇을 버리고 무엇으로 다시 인식을 채워넣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하지만 지난 4년 나를 키워온 행적을 아주 가뿐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적어 내려간 쉼터같은 글이다. 앞으로 살다가 내가 가끔 들춰볼만한 나의 서사이기도 한, 그런 글이다.




목차


프롤로그 - 나는 나를 키우기로 합의했다.


[마인드 리셋]

1. 말 못하는 나에게 말부터 가르쳤습니다.

2. 자기가 뭘 잘하는지 모르니 그것부터 찾으라 했구요.

3. 본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사실'을 보게 했더니

4. 보이는 대로만 이해하려 해서 이면을 알려줬어요.

5. 들리는 대로 들으면 되는데 자기해석을 자꾸 해서

6.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 했구요.

7. '그냥' 믿고 하라 했지요.

8. 인식 말고 의식으로 걷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9. 골통의 설사제 덕을 톡톡히 본 것이구요

10. 그러니 일단 순종하라 일렀습니다.


[행동 리셋]

1. 운동시키기가 젤 어려웠어요.

2. 기다리려구요.

3. 단백질 안 먹으면 밥을 안 줬어요.

4.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는 못쓰게 했으며.

5. 목표를 정하고 잊어버리라 하고선

6. 새벽에 무조건 일어나

7. 1일 2시간, 1일 1편의 글에 목숨 걸어보라 했지요

8. 그렇게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못난 나를 드러내야 잘나진다는 것을 알게 했더니

9. 단 두 개의 단어만 남더군요. 루틴/그냥.

10. 네미시스를 훈육관으로 둔 덕입니다.


[미래로 걷기 연습]

1. 뿌연 것은 뿌옇게, 어려운 것은 어렵게 가기로!

2. 공부보다는 책, 스펙보다는 스토리!

3. 멘토를 너머 스승에게 배우고!

4. 지도, 이제부터는 지도를 충실히 따르기로!

5. 정신의 임신은 쉬지 말 것이며!

6. 용기, 의지, 열정 다 필요없으니!

7. 퓨처셀프와만 대화하고!

8. 보상은 복리로 불어남을 믿고!

9. 하기 싫은 것부터 해치우기로!

10.기회와 운은 미래에만 존재하니.





[마인드 리셋]


마인드, 멘탈, 생각, 사고, 인식, 인지, 이성, 정신, 지성, 의식, 사유,..

정말 엇비슷한 다양한 언어들이 아주 사소한 차이로 숱하게 존재하지만 그냥 ‘마인드’라는 단어 하나로 퉁쳐서 표현한다. 앞서 언급했듯 사람은 단 2가지의 삶의 방식을 지닌다. 사고방식, 행동방식. 한마디로 생각과 행동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그중 ‘사고’에 해당하는 단어를 여기서는 ‘마인드’라고 표현하겠다. 원래 마인드라 하면 마음가짐 정도로 해석하지만 마음과 정신이 하나로 연결되고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만큼 마음에서 전해진 이성 내지 감성적 사고를 총칭해서 ‘마인드’라고 표현래도 무방할 듯하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겨우 5%밖에 안된다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기존의 나는 아마도 후자쪽이었던 것 같다. 아니 후자쪽이었다. 엄청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았지만 헛똑똑이 짓거리였을 뿐, 내가 아는 선안에서만 ‘생각’한, 과거에, 경험에, 인식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변화를 원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바꾸겠다는 결의나 의지이기 때문에 기존의 마인드를 외면하고 저항해야 한다. 이왕 바꾸려면 더 좋고, 더 바람직한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바람직하다는 것은 옳은 방향을 향해야 한다는 의미와 함께 누군가가 나에게 뭐라고 하더라도, 다들 큰 길을 걷고 있다 하더라도 좁은 나의 길에 나만의 이상향이 존재한다면 그 길을 묵묵히 걸을 수 있는 힘이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차원에서 마인드를 리셋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했다. 나에겐 내 정신을 뜯어고치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몽테뉴의 '골통의 설사제'라는 6글자가 너무 강렬하게 날 흔들었으며 지속적으로 나는 ‘나로서의 삶’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 하기 때문이다.


마인드리셋은 절실했다.

왜?

머리가 시키는대로 손발이 움직이니까.

정신이 질서잡힌대로 판단하고 선택되어지는 것이니까.

긍정의 정서가 긍정의 기운을 불러오는 것이니까.


마인드를 리셋하는 과정은 만져지는 무언가의 모양새를 뚝딱 바꾸는 것도 아니고 어디가 고장나거나 미워서 뚝딱 성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 마음가짐, 더 깊이 있는 사고체계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4년간 해본 결과 지독하게 어렵고도 지겨운 일이었다. 그리고 4년째 지속되지만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정량화도 안된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마인드의 변화가 나의 삶 전체를 바꾸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게 느낀다. 혹 나와 같이 마인드를 바꾸길 원하는 이가 있다면 내가 했던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는) 아래의 10가지를 지루하게 한 번 해보시라. 지루하게 해야 한다. 한두번으로는 안된다. 될 때까지, 되는지 안되는지 늘 의심이 들더라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 인스타그램 틀 (1080 × 1080px) (3).png


마인드 리셋1. 말 못하는 나에게 말부터 가르쳤습니다.

왜 말부터 가르쳤냐면,

‘말’은 ‘표현’이라서.

'마인드'의 소리가 ‘말’이라서.

‘마인드’의 변화는 ‘말’로부터 드러나니까.

마음과는 달리 전달되는 게 싫어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싫어서,

마음을 잘 알아주기를 바래서,

가끔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 내 입 밖으로 뱉어지는 소리를 나.는. 아니까.

궤사(그리고 괴사)한 혀에서 쏟아지는 궤변은 단지 혀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래서 ‘말’부터 잘해보기로 한 것이다. '뱉어진 마음의 요동의 정도'에 따라 머릿속, 마음속 언어가 제대로 표현됐는지의 여부를 조금은 알 수 있으니 내면을 키우기 위해 외부의 자극으로서 하루종일 사용하는 ‘기능’으로서의 ‘말’을 나에게 다시 제대로 가르쳐 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어버버 거리거나 발음이 안 좋다거나 뭐, 그런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할 말을 제때 하지 못하고

안 해도 될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기도 하고

정작 꼭 필요한 말은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한 채 속으로 끙끙대기도 하고

내 잘못이 분명 아닌데도 불구하고 화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는 말만 계속 하며 나 스스로를 기만하고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한 충격적인 사건에 있어서도 바보처럼 침묵하거나 큰소리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괜한 오해가 싫어서 부연 설명을 했다가 나만 더 초라해진 경험도 숱하다.

이러한 것에서의 탈피를 위해 나에게 말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언어란 사고의 표현이다. 결국, 언어를 바꾸기 위해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하기에 마인드와 혀의 관계는 아주 밀접한 이란성쌍둥이같다. 이란성쌍둥이는 각자 다른 존재지만 보여지는 것은 비슷하다. 나의 언어도 모국어를 사용하고 단어도 한정되어 있지만 그 말을 하는 데에 있어 어떤 단어를, 어떤 호흡으로, 어느 정도 소리의 강도로, 게다가 눈코입의 움직임에 둘러싸여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바보’라는 단어도 진짜 바보천치를 말하는지, 천재를 말하는지 가늠이 된다.


나에게 말을 가르치면서 몇 가지를 스스로에게 지시했는데

1.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을 것.

2. 논리와 근거 없는 말은 하지 말 것.

3. 주장, 견해일 경우에는 강조하지 말고 꼭 ‘주장이나 견해다’라는 말부터 먼저 할 것.

4.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가장 적절한 단어는 혀 끝에 힘을 주어 받침을 정확하게 발음할 것.

5. 항상 소리보다 눈빛이 더 중요함을 잊지 말 것. 즉 상대의 눈을 바라볼 것.

등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를 키우는 과정이기에

그간의 말에 대한 습관을 바꾸는 차원에서 일정 기간 위의 것들을 훈련시켜 본 것이다.

오해와 오류는 군더더기 말에 기생하기에 꼭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되도록 삼갔으며

논리와 근거를 의도적으로 주입하는 과정을 통해 말이 주는 신뢰성을 높일 수 있었고

주장이나 견해는 그저 나의 것이니 타인이 받아주지 않아도 그만이라 타인의 반응에 특별하게 자극받지 않을 수 있게 해주며

혀 끝을 윗니 바로 안쪽 잇몸에 붙이며 말하는 것은 아주 미세한 소리의 감각에 조금 더 명확성을 강조하는 트릭이랄 수 있으며

눈을 바라보며 말을 나눈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이 5가지를 중심으로 나를 키워본 것이다.


이러한 기술(혀의 기능일수도)이 조금 숙련될 즈음에 다음 단계로 조금 더 어려운 과정으로 날 진입시켰는데 바로 머리와 혀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말하고 있는 나를 들여다보는 나’를 만들어 본 것이다. 말하는대로 생각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대로 말이 나오는, 더 바람직한 기능인으로 나를 성장시키고 싶었다고나 할까.


말은 기능이고 말 속의 의미는 추구다.

추구하는 바의 전달을 위해 말이 기능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의미다.

추구하는 바가 없으면 기능이 뛰어나더라도 일시적이며

추구하는 바가 약하면 기능은 그저 기능으로서 달가울뿐이며

추구하는 바가 강렬하다면 기능에는 혼이 담겨 장인으로서의 능력을 드러낸다.


나를 키우는 것에 있어 ‘말’을 새롭게 가르치는 훈련은

인격의 함양과 사고의 질서를 다시 잡는 단계를 견인하며 나를 이끌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기는 이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