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게 부를 묻다 10 - 쇼펜하우어
타고난 탁월한 두뇌와 막대한 유산덕에 돈걱정없이 글만 쓰면 되는 여유를 지녔으니까. 브루주아의 자식으로 태어난데다 그릇된 성품으로 수많은 비판과 비난이 그를 따라다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참 좋고 고맙고 가엽다.
유독 비판이 많은 쇼펜하우어여서 혹여 그가 전하려는 '부'에 대한 견해가 희석될까봐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조금 피력해보려 한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발타자르그라시안을 그도 좋아한다는 사실때문에 시대를 초월해 공감과 동질감이 느껴지는데다 둘째,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있지, 그 사람이 어떻다 저떻다를 논하는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 말도 거칠고 생활도 방탕하고 염세적인 그이지만 그가 세상을 향해 내지른 용감한 철학이 분명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쳤)기 때문이다.
수세기를 지나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에 대한 왈가왈부에 나를 보태기 싫다. 그에게 아무것도 준 것 없이 배우기만 하니 그의 개인적 성품은 감싸주고 배울 점만 잘 배우는 것이 그에 대한 나의 의리이자 보답이라 여긴다.
그의 '의미와 표상으로의 세계'나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나에게 아주 어려운 책이었다. 네 한계가 여기까지야! 라며 그는 내 지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그런데도 깨지지 않아 몇 번이나 나로 하여금 책을 덮게 만들었으니 내가 그를 비판하고 그의 철학을 이해했다고 말하기엔 근거가 약하다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 지식의 바닥, 이해력의 한계에 들러붙은 채 겨우겨우 읽어내는 끈기라도 길렀으니까
그 시간으로 인해 나의 지력은 나름 강해졌을테니까
나는 쇼펜하우어에게 감사하고 보답할 것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그가 '부'를 논하는 것에 대해 나 역시 적잖은 반항도 있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당신이 뭘 알아?'하는 시건방이 계속 내 안에서 튀어 나오곤 했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철학적 견해에 대한 나의 의식적인 비판이 아닌 나의 내면에서 이는 질투와 편견때문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후 나만 부끄러운, 뒤쳐지는 꼴이 됐다. 이 지면이 하늘에 있는 그에게도 닿는다면 죄송하다고, 게다가 '부'에 대해 알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꼭 전하고 싶다.
그는 자신의 글처럼 '부자였지만 불행하다고 느끼는' 한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신에 흥미를 가져다 줄 '철학'을 심오하게 파고 들며 '헤겔'에게 덤비곤 했겠지. 어쩌면 그의 정신적 갈구는 그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물질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정신의 소비, 즉 균형을 위한 의무였던 것이다.
자, 그럼 그가 주장한 부에 대해 언급해보자.
그는 아주 명철하게 말한다!
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부, 즉, 쓰고 남을 정도의 부는 우리들의 행복에는 거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 부자들 중에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참된 정신적 교양이 없고, 지식도 없어서 정신적인 일을 할 수 있을만한 기초가 되는 그 어떠한 객관적인 흥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 인간의 소유물에 비해 행복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더 큰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정신적인 교양을 쌓기보다는 부를 쌓는 일에 천배나 더 노력을 바친다.그렇기 때문에 이미 얻은 부를 늘리려고 앉아있을 틈도 없이 바쁘게, 개미처럼 부지런히, 아침부터 밤까지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중략)
정신이 텅 비어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중략)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난 도련님이 막대한 유산을 순식간에 탕진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이런 낭비의 원인은 사실 정신의 빈곤과 공허에서 일어나는 권태감에 있다.
(중략)
내면의 빈곤이 외면의 빈곤까지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주1).
음..
다른 시대를 살아온 쇼펜하우어이지만 그가 조언하는 '부'는 현실적으로 아주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어쩔 수 없이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가난과 재난의 고통 속에 사는 이들도 물론 세상에는 많지만
흔히들 '중산층'이라 불리는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죽을만큼 해봤어?'
'목숨걸고 해봤어?'
'미친 듯이 치열해봤어?'
'이거 아니면 안된다고 덤벼봤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젖지도 못하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아닌,
그의 말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개미처럼 고생은 하지만' 그다지 치열한 것도 아닌,
그렇다고 게으른 것도 아닌 이런 이들은
'정신적 추구'를 출구로 한 '물질적 안정감'이 주는 '행복한 자신'이 아니라
'주어진(정해진)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관성화된 편안함'에 길들여진 '행복을 쫒는 자신'밖에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보다 빠른 '얼리어댑터(early adopter)'가 되어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 하고
외로울 땐 더 외로운 이를 찾아 술값 써가며 위로해주는, 바라지 않는 자선으로 인정도 받아야 하고
세상을 뜨악시키는 이슈들로부터 낡고 닳은 혀를 움직여 지적허기를 채우는 안도감도 느껴야 하고
뱀의 머리가 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데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고 주장하며 만족감에 젖는...
적당한 중산층의, 적당한 가정에서, 적당한 학벌로, 적당한 경제적 여유와 적당한 서울근교, 적당한 보금자리에서, 적당히 도전하고, 적당히 포기하며, 적당히 가진 것으로, 적당히 즐기고, 적당한 수준에서, 적당한 안정감에, 적당히 만족하는, 적당한 인생...
그래서, 나는
적당히의 모순에 빠진 나를 내치기로 하고!
결코 적당하지 않은 마음의 무게로,
결코 적당하지 않은 인생의 책임앞에서,
결코 적당하지 않은 나의 자아실현을 쫒아,
결코 적당하지 않은 삶의 행복을 누리려,
결코 적당하지 않은 모험을 해볼까 하는...
정체없는 '적당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
'적당히를 넘어선 삶'을 보기 시작했고
이제는 '적당히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아
그 간의 '적당히'를 깨뜨리고 싶었다!
쇼펜하우어의 이 단 한문장은 에머슨이 말한 '부를 얻는 기술은 근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며 저축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정신의 질서 속에 있다(주2)'는 말과도 일맥상통하기에 나의 뇌리에 각인시킬만한 충분한 명제였다!
어쩌면 이들 철학자들이 '부'를 보는 나의 시선을 물질에서 정신으로 돌려놨기에 5년여전 '새벽독서'가 시작되었고 지금 나의 정신의 물질화는 발동이 걸렸고 이제는 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연역해 보는데 이런 의미에서 나의 새벽독서의 시작과 지속은 철학자들의 가르침덕이다.
여하튼 나는 '적당히'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왠만큼 가졌는데 왠만큼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불행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삶이 주는 답답함과 한결같음에 지루한건지 익숙한건지 괴로운건지 스스로의 상태도 모르는, 말 그대로 '헛똑똑이', '바보지식인'인 나는 나에게 등을 돌리기로 한 것이다.
이는 '정신의 빈곤과 공허'를 달래기 위해 감정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 각성에 시간과 정신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었다.
즉,
정신이 허기진데 심장에 먹이를 주며 헛배부른 느낌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제대로 된 양분을 채워 지속적으로 허기를 없애기로 한 것이다.
의식적 각성에 나를 놓아두니 나의 정신은 무지 바빠졌다.
무료할 틈을 주지 않는 끊임없는 갈구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애처로운 공허
결코 스스로와 타협되는 않는 지독한 양심의 잣대
정신의 노동없이 채워진 유한(有限)과의 직면
도망가려는 정신을 민감하게 잡아채어 제자리에 앉혀야 하는 집착
눈동자는 앞을 향하지만 시선은 이상(理想)을 향하고
수많은 소음과는 침묵하고 내면의 소리에는 수준높은 경청을 유지하며
세상을 향해 내지르고 싶은 말이 넘치지만
스스로가 타당한 근거를 갖기 전에는 함구하고자 맘먹고
나는 '정신의 부'가 조금씩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신에 시간을 허락하고
정신의 호흡을 달래주며
정신으로 나의 기를 모아보내어
정신의 기후를 차갑게 유지해주며
나의 공허와 허무로 대변되는 빈곤이 정신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실제 정신을 채우느라 돈을 쓸 여유가 없어졌고
정신을 비우느라 돈이 뭔 짓을 하는지 관심가질 여유도 없었던 탓에
자연스레 내 주머니에서 돈은 새어나갈 겨를이 없었고..
그래선지
돈도 마음놓고 스스로를 불릴 태세를 갖추게 되었는지
정신의 부가 외면의 부를 불러온다는 그의 말이 나의 세계에서 입증되어감을 경험하고 있다.
빈곤을 가장 안전하게 방지하는 길은 내면의 부, 정신의 부를 쌓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부는,
그것이 우수함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료함이 만연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퍼올려도 마를 줄 모르는 사상의 활발한 움직임,
내면세계, 외면세계의 각기 다른 여러 현상에 접하며 끊임없이 새로이 솟아오르는 사상의 유동,
시시각각으로 다른 사상의 결합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이것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충동들 때문에(주3).
가식과 가증을 조금도 남김없이 빼낸 채 솔직히 말하건데
내 상태가 지금 그러하다.
아무리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사고의 솟구침 덕에 사상의 유동은 더욱 활발해지고
시시각각 결합하려 덤벼드는 새로운 사상들을 결합, 연합하고자 하는 못말리는 충동덕에 나는 결코 빈곤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다. 내 정신이 고양될수록 나의 물질도 덩달아 그 수준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여기,
쇼펜하우어는
는 것을 충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부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 부는 없어서는 안될 것, 유일하게 활용가능한 생활요소, 이른바 공기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처럼 그 부를 지키며, 따라서 대체로 정돈하기를 좋아하고 세심하며 검소하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빈곤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따라서 후에 어떤 계기로 부가 굴러 들어오게 되어도 그것은 덤과 같은 것, 오로지 향락과 방탕을 위한 것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그 부가 없어지게 되면 그것으로 그만, 다시 예전처럼 생활하며 오히려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져버린 것이라 여긴다.
노년기에 있어서의 빈곤은 커다란 불행이다. 빈곤을 정벌하고 건강을 유지한다면 노년기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연령기이다. 한가롭게 있고 싶다는 것과 안심하고 지내고 싶다는 것이 노년기의 주요한 욕구다(주4).
길들여진다는 건...
참으로 무섭다.
부에 길들여질지 가난에 길들여질지 선택하면 된다.
정신의 부로 물질을 나에게로 이끌지
물질의 부로 정신을 나에게서 밀칠지
전자는 지속과 영속적인 부를 향하며
후자는 단절과 일시적인 부를 향한다.
이 역시 선택하는 것이다.
길들이는 주체는 나니까!
아니, 지금까지의 내가 나를 요모양으로 길들였다면
이제 '미래의 나'가 나를 길들이도록.
주1,3,4>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인생론, 2010, 나래북
주2> 랄프왈도에머슨, 수상록, 2013, 나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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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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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MZ세대에게 남기는 '엄마의 유산']
금 5:00a.m. [느낌대로!!! 나홀로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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