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덥기도 선선하기도 한 10월, 유명한 소설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책을 나눠 읽어서 그런지 끊어진 이야기를 읽은 것 같기도 하다. 1부 2부.. 7부 를 나눠서 읽고 해석을 읽어보았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이 책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읽기 쉬우며 현실에 비춰 경험들을 얘기한다. 체코, 공산당 얘기는 크게 와닿지 않지만 간접경험을 한 느낌이다. 감시하는 사회.. 키치라는 용어의 시작과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
우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기에 무거움을 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 없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생의 무거움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없이 가벼운 것은 잘못된 것인가?
존재의 가벼움은 의미 없고 반복적인 삶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의미를 찾는다면 행복한 가벼움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반복적인 삶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회가 맺어준 인연들로 살아간다는 것 사르트르는 이것에 대한 구토, 키치로 인한 반복에 대해 구토를 느꼈다.
하지만 쿤테라는 그 반복 내에서 점차 가벼워져 낙원으로 날아갔다. 키치라는 것은 없을 수는 없다.
해방은 낙원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우리는 키치에서 해방될 수 없기에 도저히 그곳에 도달할 수 없기에..
그곳을 낙원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지막장은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보인다. 마지막에 네 명의 사람들이 호텔 방엔에 모여든 얘기가 있다. 나는 이 문장이 결국 사바나, 프란체, 토마시, 테라자가 한 곳에 모인다라고 느꼈다.
네 명의 자리가 있는 그 호텔방에 말이다. 그 호텔방에 사바나, 프란체가 왔는지는 모른다. 나의 감상일 뿐
마지막 장은 영원회귀에 대한, 무거움에 대한 반박이라고 보인다.
키치를 품고, 존재에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저항하며 무겁게 살든 가볍게 살든 끝은 같고 우리는 죽는다는 것이다.
결국 그 끝에는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문도 없다. 그렇기에 무겁게 살아야 하는가?
아무 의미 없는 이 삶에 왜 그렇게 무거움을 추구하는가? 쿤테라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가끔은 키치를 내려놓고 무거움을 내려놓고 살아도 된다고 위안을 주는 것 같다.
결국 끝은 같고 그 무거움은 나의 오늘보다 내일보다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