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던 어느 날
오늘 아침 눈을 뜨고 밖을 나가보니 거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사이로 하얀 무언가가 섞이어 내 볼에 닿더니 이내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인가? 싶었지만 정체는 눈이었다. 어려서부터 눈을 잘 못 봤던 탓인지 눈이 오면 무척 행복했고 그날을 기억했으며, 겨울이라는 계절을 좋아하게 되었다.
최전방 부대에서 막 상병을 달았을 때쯤 처음 제설작업을 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치우다 보니 어느새 눈사람이 몇 개 만들어져 있었고 문득 전우들이 그저 나와 같은 막 성인이 된 어린아이구나 싶었다.
난 제설하는 날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온통 하얗게 물든,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아래를, 눈바람에 보이지도 않는 그 광활한 광경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오늘 눈을 세차게 맞고 산책하다 들어와서 옷을 털다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이 자주 오고 그걸 볼 수 있는 창문을 가지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 같다는 생각.
하지만 그 행복이 일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계속 행복으로 남아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오늘 고기를 먹어도 내일 고기가 먹고 싶은 것처럼 행복의 빈도가 계속되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커피머신만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해 커피를 마시다가 익숙해져 이내 평범한 일상이 되어 버릴까?
(소유의 행복과 존재의 행복은 다르지만)
모든 행복은 일상이 되어버린다면 행복의 상대지수는 처음보다 낮아진다. 이는 지극히 증명되고 우리 모두가 이성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의 상대지수가 낮아지지 않도록 절제하여 살아야 하는가? 마치 쾌락주의자들이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절제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큰 행복이 아닌 이 정도면 된다고 하는 사소한 주관적 행복이 일상이 된다고 해보자,
여기서 어떤 사람은 그 일상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루 행복의 빈도가 증가하되 상대 지수는 낮아졌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이 그 행복한 일상이 지속되지 않고 한 달의, 일 년의 이벤트로 나타났다. 행복의 빈도는 낮아지되 상대 지수는 상승했다.
오늘 몇 년 만에 엄청나게 내린 눈을 보았다. 그렇다고 몇 시간이 행복했을까? 단 1시간도 되지 않았다.
난 일상으로 녹아들어야 했으며,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휴가를 내거나 바닥에 들어 누워 더 만끽할 수 있겠지만, 1시간이 2시간이 될 뿐 나의 일생에 행복의 총합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빈도 행복은 행복절대크기가 작아도 자주 발생함으로써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횟수가 많아진다.
사실 우리는 행복의 크기, 쾌락의 크기보다는 지속적인 행복을 원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저빈도(지속적인) 행복을 생각하며, 아 오늘은 집에 들어가면, 또는 일어나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는, 갑작스러운 행복이 반복해서 일어남으로써 내일을, 내년을, 더 가서는 죽음을 버티게 해 주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지속적으로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