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인 행복의 탐구
단순히 감정으로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통찰과 사색으로 행복'함'을 얻는 것은 가능할까? 현재 한국에서는 애석하게도 감성적이고 위로에 가득 찬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있는 사람은 '감정적 마취'로만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이 아니라 한쪽 다리로만 서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하여금 현대의 문명을 쌓아 올렸듯, 이성적 성찰로도 행복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간의 감정적 타격으로도 행복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꺼려하는 것은 바로 '삶의 비참함에 대한 직면'이다. 우리 삶의 근본은 허무하고 공허하며 죽음이 끝을 정해놓은 단편적인 불행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것들을 맨 정신으로 마주한다면 웬만한 정신력을 갖추지 못한 이상 회피하려 하고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무엇이 행복한지 합리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하게 인간 존재의 근원적 비참함이 무엇인지를 통찰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다음 이렇게 불행하고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적 타당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행복을 감정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하여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에 함몰된다면, 그는 평생 기쁨만을 누리고자 할 것이고 이는 불행을 스스로 불러오게 된다. 애석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개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환경으로 완벽하게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어떤 환경이 익숙해지는 순간 그 환경에 질려버린다.
어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지속된다면 그 사람은 그 환경이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그러한 환경을 기쁨이나 행복으로 여기기 힘들다. 마치 우리가 숨 쉬며 살아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그것에 무한한 감사와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행복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내가 처해있는 환경은 절대적으로 나의 의지에 달린 일이 아니지만, 나의 생각은 나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보다 부유해진다면 부유해진 대로, 가난해진다면 가난해진 대로, 기쁘면 기쁘니까, 슬프면 슬프니까 더욱더 내 마음은 내가 지켜야 한다.
환경에 끌려다니며 행복이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삶은 비참할 확률이 높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란 대부분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의지가 관여하지 않는 것들에 내 마음을 둔다면 그 마음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내 마음을 가지고 나를 휘두르게 된다.
우리는 기뻐야 하는 상황에 맞춰 기쁘다 여기고 슬프다고 여겨야 하는 상황에 맞춰 슬퍼하고 불행하다고 여겨야 하는 상황에 맞춰 살아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지만 내 생각은 내 의지에 달려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한다면 그건 괴로운 일이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굴복은 구차한 일이지만 극복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니까.
세상이 나를 다루는 대로 이끌리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행복의 주인이 될 것인지는 내 선택에 달렸다. 이성적인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불행에 대한 철저한 통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성을 자극하지 않고 이성으로 행복을 통찰해볼, 그런 생각들도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