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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네 Dec 30. 2021

죽음과 허무

우리는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은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내가 사는 이 인생이 과연 죽음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 의문이 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히 이치이다. 어차피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봤자 맞이하는 결말은 모두가 같고, 한 땀 한 땀 인생을 일궈나가도 죽음 앞에서는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결국 사람은 죽음 앞에서 허무할 수밖에 없고 죽음 앞에서 좌절하게 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죽음이 정해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갈 시간이 정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 시간은 한정되었지만 그 시간이 얼마만큼인지는 모른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죽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주어졌는지를 모르기에 우리는 항상 전전긍긍하며 살게 되어있다. 언제 어디서 죽음이 나를 급습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해 생을 마감할 수도, 불치의 병에 걸려 젊은 나이게 이 세상을 뜰 수도 있다.


죽음은 언제든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언제든 우리를 급습할 수 있기에 우리는 항상 죽음 앞에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큰 꿈을 품고 있는다 한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다 한들,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다 한들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고 쓸모가 없어진다.


사람이 지구 상에 존재한 이후로 그 어떤 누구도 죽음 앞에서 강했던 적이 없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그 죽음이 뜻깊고 의미를 지닐 뿐, 죽음 자체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차피 사람은 반드시 나약한 존재로서 죽음 앞에 속절없이 당하게 되어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그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어느 누구도 이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끝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허무에 빠지게 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이러한 생각은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의 전형적인 클리셰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심할 경우 자살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죽음은 적어도 우리에게 허무주의에 빠지라고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인생을 살아오며 지녔던 가치체계의 전복이 일어나고 그동안 믿었던 신념들이 산산 소각 나며 깨지는 순간을 생생히 경험한 사람들은 허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허무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와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그냥 잘 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잘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일이 좋아서 어떤 사람은 돈이 좋아서 어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이 좋아서 등등의 수도 없는 각양각색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삶의 허무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답해주고 싶다.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은 사람만큼 인생을 뜻깊게 살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던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진정으로 원하고 좋아하여 살아갈 만한 활력적인 요소가 충분하다면,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란 끝이 정해졌고 올바른 체계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라 허무하다 ‘가 아니라, ’ 우리의 삶은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보아야 한다 ‘가 삶을 대하는 태도로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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