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팬덤의 세계에 불시착한 연구자
오늘 소개할 텍스트는 책이 아니다. 한 연구자가 아이돌 팬덤에 대해 조사한 논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이 제시하는 다양한 의문과 관점들이 흥미로워 여기 한번 소개해 본다. 바로 장지현의 '3세대 아이돌 산업의 친밀성 구조-BTS 팬덤을 중심으로'이다. 이 논문은 아이돌 팬덤이 아닌 사람이 아이돌 팬덤을 연구하면 생기는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이돌 팬덤 분석에 대한 논문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내 어린 시절의 한편을 차지했던 추억 때문이다. 때는 고등학교 2학년, 그 시절은 바야흐로 엑소의 ‘으르렁’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때였다.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원래 다른 그룹을 좋아했던 반장마저 그 그룹을 탈덕하고 엑소로 갈아탄 사건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 반 아이들 전체가 엑소를 좋아할 때 나는 저 멀리 영국의 5인조 보이밴드 ‘원디렉션’(One Direction)을 덕질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반 아이들과 ‘엑소와 원디렉션 중에 누가 더 잘생겼냐’라는 주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만큼 내게 누군가를 덕질했던 경험은 소중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너무 소중했던 탓일까. 아이돌 팬 활동 경험이 없는 연구자의 아이돌 팬덤 분석 논문은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러나 경험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날것의 무언가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매우 아쉬웠다. 사실 팬덤 문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그것을 일일이 다 언어화하기에는 지면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장 이 논문의 분량이 백 페이지가 넘는 것만 봐도 저자가 팬덤 문화를 개략적으로라도 다 담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숲을 바라보느라 미처 관찰하지 못한 나무를 찾으려 한다.
저자는 논문의 초반부에서 아이돌 팬덤의 대부분은 10대이기 때문에 10대를 중심으로 참여 관찰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아이돌 팬덤의 세대 구분을 시도한 것인데, 이런 시도는 동의하지만 과연 남자 아이돌 팬덤에서 10대가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지는 재고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자 아이돌의 수익은 대부분 콘서트와 팬미팅 같은 오프라인 행사에서 발생하는데, 이런 오프라인 활동은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20대의 참여 비중이 10대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팬의 대다수는 10대라 할지라도 실제 아이돌의 수익을 책임지는 쪽은 20대고 구매력도 20대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아이돌의 다음 앨범 재킷이나 음악에 대한 방향성에 관해 피드백할 수 있는 권한도 수익을 많이 가져다주는 20대가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팬덤 안에서 막대한 권력을 가지는 20대를 배제하고 10대에 집중한 저자의 선택은 팬덤을 ‘산업구조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했다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저자는 아이돌의 굿즈가 점점 개인화와 일상화되는 이유가 실용성의 반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굿즈의 변화를 설명하기 힘들다. 보통 팬의 입장에서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이것을 마음껏 사용해도 해당 그룹의 팬인 사실을 아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디자인해주기를 바란다. 즉 굿즈를 사용하는 순간 타인에게 아이돌의 팬이라는 사실을 강제로 공개당하지 않는 디자인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아이돌 팬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안전하게 아이돌을 덕질할 권리를 찾는 팬의 요구이다. 저자의 설명에는 이런 사회문화적 이유가 빠져있다.
한편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이돌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공감한다. 저자의 설명에 해당하는 사례가 바로 BTS의 미국 진출 사례이기 때문이다. BTS의 뮤직비디오나 다른 영상에 대한 리액션 비디오에 그들의 십 대 팬과 부모가 동반 출연하는 경우가 빈번한 편인데, 이것은 BTS가 거의 전 연령대에서 호감을 얻는 그룹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실제로 십 대 자녀를 둔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의 K-pop 아이돌 팬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심지어 콘서트에 자녀와 함께 가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그동안 기존 미국 아티스트의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겸손함, 희망적인 메시지, 범죄경력 없음, 멤버 개개인의 인성, 선한 영향력 등)를 통해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더 나아가 아이돌 팬덤은 이 안전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아이돌에게 이러한 이미지(순진함, 착한 성품, 깨끗한 과거, 범죄와 거리두기)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그런 모습에 과몰입과 객관화를 반복한다. 이것은 아이돌이 해외 진출을 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해외 공연의 횟수가 국내 공연보다 더 많으면 국내 팬은 즉각 매니지먼트사에 피드백을 요구한다. ‘한국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이 국민성에 대한 요구라고 주장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이것은 아이돌 산업의 구조적 폐해와 관련이 있다. 남자 아이돌은 여자 아이돌과 다르게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한정된 팬덤에서 최대한 수익을 뽑아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해왔다. 그래서 2017년을 기점으로 남자 아이돌 프로모션에는 두 가지 변화가 생긴다. 하나는 대중성의 포기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 팬덤 중심 공략이다. 이런 요인이 합쳐진 결과는 당연히 국내 팬 등한시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팬들은 과거 2PM이 4년 동안 일본 콘서트를 도느라 국내에서 단 한 번도 컴백하지 않았던 선례를 떠올린다. 이것은 곧 내가 덕질하는 그룹도 이런 전철을 밟을까 두려운 기분을 들게 하고, 회사 앞에서 트럭시위를 하거나 트위터로 총공을 하는 등의 다소 극단적인 행동을 촉발시킨다. 팬이 보이는 일련의 행동은 저자의 국민성 개념이 아니라 아이돌 산업의 역사와 팬덤의 상황적 맥락에서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민성을 비롯한 정체성 요구는 아이돌과 팬덤이 내면화한 도덕주의 에토스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유독 연예인, 그중에서도 아이돌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돌과 팬덤 특유의 친밀한 관계에서 나오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 그러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저자가 언급하지 않았다. 그 실질적인 이유란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아이돌과 팬덤이 받게 되는 실질적인 불이익에 관련된 것이다. 즉, 아이돌의 도덕성이 그룹 멤버들의 사건 사고로 해체되면 당장 해당 아이돌의 직업 생명에도 영향이 가지만 팬에게도 그 아이돌을 소비할 수 없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팬의 입장에서 아이돌을 좋아했던 추억이 통째로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따라서 도덕성에 대한 팬의 요구는 결국 덕질을 계속해야 하는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팬덤 문화 전반을 개략적으로 다루느라 앨범 깡 문화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앨범 깡이란 팬미팅 당첨률을 높이기 위해 랜덤으로 추첨권이 들어있는 앨범을 대량 구매하는 행위로, 게임으로 비유하면 갓챠(확률형 아이템) 같은 속성을 띤다. 이 기이한 문화는 앨범 판매량을 높여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려는 매니지먼트사와 팬미팅에 당첨되어 아이돌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팬들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악습이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앨범 낭비를 초래하고 환경오염의 원인이 된다. 최근에는 이런 지적을 의식해 팬덤 안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기획사도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는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저자는 진정성에 대한 팬덤의 집착과 그것에 음악성으로 응답하는 아이돌의 행위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K-pop 산업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통해 진정성을 표현한 아이돌의 사례는 늘 있어왔다. 그것은 빅뱅의 지디, 블락비의 지코, 위너의 송민호와 아이콘의 바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저자가 조사한 BTS의 슈가와 RM이다. 아무리 팬이 애를 써도 RM의 직업적 페르소나 너머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김남준’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저자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한적인 음악의 형태로는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다. 아이돌 래퍼들이 내놓는 수많은 믹스테이프와 자작곡들에서 우리는 그룹의 일원으로서 보기 힘들었던 멤버의 경직되지 않고 좀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다.
음악으로 진정성을 보이는 행위는 BTS가 연차가 쌓인 아이돌이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다. 애초에 이들의 음악을 감상해줄 규모의 팬덤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슈가의 믹스테이프는 지금과 같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이것은 오히려 남자 아이돌의 대중성 포기와도 연결되어 팬덤과 합의만 된다면 아이돌이 자신의 음악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조건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아이돌 팬덤의 ‘선량한 시민 되기’가 안전한 덕질을 위해 수행된다는 점을 젠더적인 해석으로 결론지었는데, 과연 선량한 시민 되기가 여성 팬만의 특징 일지 의문이 든다. 앞에서 언급한 높은 도덕성 유지와 대외적인 이미지 개선 행위는 팬덤이 여성팬이라서기 보다는 팬 개인의 아주 작은 행동에도 쉽게 평가가 달라지는 팬덤에 대한 인식을 좋은 쪽으로 바꾸는 것이 팬덤이 감내해야 하는 실질적인 손해(아이돌의 직업 생명 단축, 음악방송 참관 배제 등)를 줄이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논문의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위주로 지적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그동안 아이돌 팬덤을 분석하는 병리적 시선과 문제적인 관점에서 그나마 벗어나 가급적 내부자의 관점을 반영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세대와 경제활동 여부에 따른 팬덤의 다양한 속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아이돌 팬 활동을 10대 청소년의 하위문화로만 보려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아이돌 팬덤을 주체적인 대상으로 재해석하려는 의도는 그동안의 팬덤 연구에서 진일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