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by 황호

두 달간 방학을 했다.

지금은 육지 올라가는 제주공항이다.

반년 만에 가는 육지다.

두 시간 일찍 공항에 왔다.

쓰던 글 마져 쓰기 위해서다.


공항은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이별과 만남이 있기에

특별한 감성과 설렘이 존재한다.

인생을 긴 여행으로 본다면 공항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나에게 제주공항은 깊이 각인된 첫인상이 있다

4년 전 한 달 살기 하러 왔을 때

착륙한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의

"설렘으로 가득한 섬 제주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이 말에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말이 오늘 여기까지 오게 했다.


가끔씩 육지를 그리워한다.

한 반년쯤이 유효기간이다.

육지에선 제주가 일주일이면 그립다.

이렇게 어디서나 그리워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고 복인지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제주가 나에게 베푼 것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이곳이 인생 후반전 시작점이 되었다.

그것도 떠 밀려서가 아니라 완전히

자주적 의지로 말이다.

나는 그렇게 도전적인 위인이 아니다.

또 그럴 나이도 지났다.

지나고 보니 꽤 괜찮은 시작점이

되었다고 자만스러운 자평을 한다.


육지에선 나 스스로는 절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에는 제주의 하늘과 바다와 돌담과

바람이 만들어 주었다고 굳게 믿는다.

그중에도 일등공신은 나를 이곳에 유배시킨

김 여사의 몫이다. 결 고운 배려와 믿음이 없었다면 절대 지금은 없다.

나는 그저 늦게나마 조금씩 깨우쳐가는 가벼워지고 덜어내려는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다행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니 야심 차게 국숫집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언제부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욕심이 화근이다.

덜어내기, 가벼워지기가 내 후반기 삶의 지향점인데 가장 경계했던 욕심이 나를 비집고 들어와 저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돌덩이가 되었다.


그 무엇보다도 이곳 제주가 싫어질까 두려웠다.

힘든 가을을 보냈다.


우선 좀 쉬면서 날 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두 달 휴무 공지를 국숫집

유리창에 붙이고 나오는 심정이 착잡했다.

사실 딱히 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게 나에겐 휴식이었고 힐링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5시간 점심 한 끼 하면서

"손님을 기쁘게, 나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라고 내건 슬로건이 무색해졌다.

팔리는 국수의 그릇 수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이유가 이곳 제주에 머물기 위한 방편이라 했지만 "아침에 설레는 맘으로 출근하며 어제에 감사하고 오늘에 설레면 내일 반드시 성공한다"라는 굳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오는 단골 양반의 끌탕이 기름을 붓는다.

아니 이런 맛, 이런 분위기, 이런 콘셉트로

왜 이리 손님이 없지?

쥔장 문제 있는 거 아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나를 꾸짖던 가장 격한 표현이 "호강에 받쳐서 요강에 ♤싼다"였다.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지금 네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투정 질 하는가 하고 하늘에서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셨다.

다행히 다시 나를 찾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나 사소한 일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던가를 자각했다.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거는
그동안의 이곳에서의 생활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국숫집 두 달 방학을 결심한 건
내려놓기를 실천한 것이고
다시 걷기를 시작한 건 치열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라고 자평한다.
일하기 싫어서도, 이곳 제주가 지겨워서도,
사는 게 무료해서도 아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을 세라" 얻은 것에 만족하면 행복이 채워지고, 잃은 것에 집착하면 불행이 커진다는 공자님 말씀이 새삼스럽다.

어제 다시 제주 올레길 한 바퀴 걷기를 마음먹고
올레 패스포트를 구입하고
그 길로 6코스 10여 킬로를 걸었다.
다시 행복했다.
내 존재의 이유를 가까스로 다시 찾았다.



당연한 것 같은 우리의 평온했던 일상적인 삶이 순식간에, 대책 없이, 턱도 없이,

황당하게 무너질 뻔했다.

일 년 전 그날, 바로 오늘 우리나라에

그런 일이 있었다.

지금 누리는 행복에 당연한 건 없다.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개인도 공동체도 저절로 발전하는 건 없다.

"악은 거침없이 제 갈 길을 가는데

선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딱 지금 우리나라 이야기이다.

가만히 멈춰있다는 건 퇴보와 동의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키 위해 나아가야 한다.


기능이 떨어져 가는 뇌의 하드웨어를 붙잡는 방법은 생각의 걷기를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내 노년의 화두라고 거듭 말한다.




육지 집에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며칠 전까지 무거웠던 심사가

이리도 맑고 밝아짐에 스스로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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