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당신의 품격이 배설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곳
by
아까그놈
Mar 10. 2026
나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척할 때조차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이 집안의 가장 낮은 관찰자다.
문을 걸어 잠근 좁은 칸 안에서 당신은 비로소 ‘사회적 인간’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벗어 던진다. 밖에서는 고결한 인격과 우아한 미소로 무장하지만, 내 앞에 선 당신은 그저 비워내지 않으면 터져버릴 듯한 본능에 충실한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다.
나의 지독한 이중성은
‘당신의 오물을 받아내며 당신의 비밀을 공유한다’
는 데 있다. 당신은 밖에서 삼킨 모욕과 참아낸 울분을 내 위에서 몰래 뱉어낸다.
상사에게 보낼 굴욕적인 메시지를 검토하고, 남몰래 타인을 시기하며 익명의 댓글을 다는 손가락의 떨림을 나는 고스란히 지켜본다. 당신의 입은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정의를 논하지만, 내게 쏟아내는 것은 결국 당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내면의 독소와 비루한 진실들이다.
결국 나는 당신에게 '해방'이라는 착각을 주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가장 추악한 단면을 수집하는
‘도기 재판소’
다.
레버를 누르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안도하지 마라. 당신의 배설물은 씻겨 내려갔을지 몰라도, 그것을 비워내기 위해 지었던 그 비겁하고도 절박한 표정은 여전히 나의 차가운 표면에 박제되어 있다.
[오늘의 의미]
문을 닫고 혼자 남겨진 공간에서의 모습이 당신의 진짜 품격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향수를 뿌려대도, 내면의 악취까지 가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레버를 내리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면 기억하세요. 당신이 방금 씻어내린 것이 단지 생리적인 배설물인지, 아니면 하루 종일 억눌러온 당신의
'진짜 얼굴'
이었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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