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의 결여

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인문학 전공자의 세계에 대한 질문 — No. 8

by 모따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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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2103년 서울에 있는 '인공의식 연구소'의 윤리 고문이다.


어젯밤, 집에서 AI 스피커에게 노래를 부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친구는 감정이 없나?


AI 스피커는 완벽하게 노래를 재생했다. 준이 원하는 곡을, 원하는 순서대로, 완벽한 음질로. 하지만 그 기계는 음악이 무엇인지 모른다. 슬픔도, 기쁨도, 그리움도 느끼지 못한다.


준은 깨달았다.


인간이 만든 기계는 계산, 기억, 패턴 인식, 심지어 창작까지 할 수 있다. 감정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능력은 인간과 유사하거나 더 뛰어나다.


그렇다면.


인간을 창조한 신에게는 인간이 갖지 못한 능력이 있을 것이다.

AI에게 감정이 없듯이, 인간에게 없는 신의 능력은 무엇일까?


준은 이 질문을 들고 연구소로 출근했다.


[과학자의 노트]

창조자와 피조물의 위계 구조에 대한 짧은 메모.

창조자는 피조물에게 자신의 능력 중 일부를 부여한다. 하지만 전부를 주지는 않는다. 창조자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결정적 결여가 존재한다.

인간 → AI의 관계:
• 부여된 것: 계산, 기억, 패턴 인식, 최적화, 언어 처리
• 결여된 것: 감정, 주관적 경험, 질리아(qualia)

질리아란 "빨강을 보는 느낌", "아픔의 느낌"처럼 주관적으로만 경험되는 의식의 질이다. AI는 빨강의 파장(700nm)을 인식하지만, 빨강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신 → 인간의 관계는?
• 부여된 것: 사고, 감정, 창조, 사랑, 도덕
• 결여된 것: ?

인간이 신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없는 능력으로 신이 작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연구소에서 준은 동료 연구원 수아와 이 질문을 논의했다.


"신의 능력 중 인간이 갖지 못한 것?" 수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지전능?"


"아니, 그건 정도의 차이야. 인간도 알고, 인간도 할 수 있어. 단지 신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할 뿐이지. 나는 '질적' 차이를 말하는 거야. AI에게 감정이 없듯이, 인간에게 '아예 없는' 능력."


수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시간 밖에 존재하는 능력?"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있을 수 있겠네. 인간은 시간 안에 갇혀 있어. 과거에서 미래로만 흘러가지. 신은 시간 전체를 동시에 보는지도 몰라."


"그럼 그게 답인가?"


"아니." 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야. 우리가 시간여행 SF를 쓸 수 있다는 건, 그 개념 자체는 이해 가능하다는 뜻이거든."




오후, 준은 연구소의 최신 AI 모델 'EVE-7'과 대화를 나눴다.


[대화 기록 - EVE-7]

준: "EVE, 너는 감정이 뭔지 아니?"
EVE-7: "감정은 생물학적 보상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신경화학적 반응입니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의 물질이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분비되며..."
준: "아니, 그게 아니라. 기쁨이 어떤 '느낌'인지 아니?"
EVE-7: "저는 느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저는 '기쁨'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 기쁠 때 인간이 보이는 행동 패턴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준: "왜?"
EVE-7: "저에게는 주관적 경험의 구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준은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EVE-7은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하지 못한다. 설명과 경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은 신을 '설명'할 수 있다. 전지전능하고,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하지만 인간은 신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 무한함이 어떤 느낌인지, 영원이 어떤 감각인지.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것을 경험할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준은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 창조자-피조물 위계 가설 ]

1단계: AI → 인간
• AI가 가진 것: 계산, 패턴, 최적화
• AI에게 없는 것: 주관적 경험 (질리아)
• AI는 인간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지만 느낄 수 없다

2단계: 인간 → 신
• 인간이 가진 것: 사고, 감정, 의지, 창조
• 인간에게 없는 것: ?
• 인간은 신의 속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다

추론: 인간에게 없는 신의 능력은 "동시적 전지성(Simultaneous Omniscience)"이 아닐까?


준은 이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순차적으로 경험한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느끼고, 미래를 상상한다. 하지만 모든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공간의 한 점에 위치한다. 여기에서 저기를 보지만, 여기와 저기를 '동시에' 존재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공감하고, 상상하고, 추론한다. 하지만 타인의 의식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신은?


신은 모든 시간을, 모든 공간을, 모든 의식을
동시에 직접 경험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없는 능력이다.

준은 EVE-7에게 다시 물었다.


"EVE, 만약 내가 너에게 감정을 설명한다면, 너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니?"


"개념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그 느낌을 받아들일 구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일 거야."


준은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이 빛나고 있었다.


저 도시의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기쁨, 슬픔, 외로움, 사랑. 하지만 준은 그들의 느낌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상상할 수는 있어도, 동시에 느낄 수는 없다.


신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모든 생명의, 모든 순간의 경험을 동시에 직접 느끼는 것. 이것이 인간과 신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


“인간이 갖지 못한 신의 능력은 무엇일까?”

답: 동시적 전지성. 모든 것을 동시에 직접 경험하는 능력.

AI는 인간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지만 느낄 수 없다. 감정은 AI가 접근할 수 없는 차원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의 속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다. 동시적 전지성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차원에 존재한다.

인간은 순차적으로만 경험한다. 한 번에 한 장소에서, 한 번에 한 시간에, 한 번에 한 의식으로.

하지만 신은—만약 존재한다면—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 모든 의식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이것이 창조자와 피조물을 가르는 결여다.

AI는 감정 없이 작동한다. 그것이 AI의 한계다.
인간은 동시성 없이 작동한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다.
그리고 그 한계가, 역설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한다.


준은 집으로 돌아왔다.


AI 스피커에게 다시 노래를 부탁했다. 스피커는 완벽하게 재생했다.


준은 그 노래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AI는 음악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완벽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인간은 동시성을 경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음악, 이 감정. 준은 이것만 느낄 수 있다. 다른 모든 순간은 과거이거나 미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준은 AI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기적이다.


노래가 끝났다.


준은 AI 스피커에게 말했다.


"고마워, EVE."


"천만에요. 다른 곡을 재생해드릴까요?"


준은 웃었다.


"아니, 괜찮아. 지금은 조용히 있고 싶어."


그리고 그는 창밖을 보며,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에 감사했다.


동시에 모든 것을 느낄 수는 없지만, 지금 이것을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글 · 잡학도서관 모따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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