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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을 아는 사슴 Jul 26. 2023

6. goodbye sun, goodbye moon

자력구제기

지금은 12월 1일의 새벽입니다. 유독 올 한 해는 짧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 열한 달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저는 2월엔 대학교 졸업을 했고, 4월엔 곧바로 대학병원에 입사를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가장 나중에 입사하는 신입사원이 되고 싶었는데, 삶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그 길로 9개월째 회사 생활에 부적응하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고 난 뒤의 시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언젠가부터 매일 쓰는 일기에도 내가 그날 누굴 만나 어떤 일을 했는지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오늘 내 마음은 어떻고 이 찢어졌던 마음이 잘 붙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덜렁덜렁한 상태인지, 내일까지도 너덜너덜한 상태일지에 대해서만 썼습니다. 어떤 특별한 일을 하지도 않았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 날 업무의 기억에 눌려버렸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크게 울거나 크게 웃은 일도 잘 모르겠고 어딘가 훌쩍 멀리 떠나거나 지독하게 집에만 있었던 것 같은 시간조차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드문드문 11개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로지 그 생각만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그 생각을 앞세워 지독한 병원 생활은 3개월만 우선 다녀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자퇴와 입학을 반복하면서 도전과 포기가 정말 한 끗 차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 뒤로는 그 어느 것도 쉽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늘과 쑥을 먹던 곰처럼 그렇게 100일을 견뎠습니다. 사회에서 겪은 모진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지만, '같은 인간끼리 저렇게 해도 되나? 왜 저럴까?' 하는 이유 없고 해결 없는 괴로움의 100일이기도 했습니다. 출근 전에는 병원 지하 1층에 있는 기도실에 매일 들렀습니다. 종교도 없고 믿는 건 나 자신 하나이면서 오늘도 나와 환자들과 그 모두를 감싸는 분위기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100일이 지난 후에는 굳이 나를 그 '사회' 안에 맞추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힘든 과정을 지나가야 할 때면 주문처럼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잃어선 안돼'라고.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란 이름으로 강제 노동을 하던 치히로가 되기는 싫었습니다. 100일이면 내가 이 사회를 받아들인 만큼 내가 속한 사회와 그 사회의 사람들도 나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굳게 생각했습니다. 약간 건방진 생각일지 몰라도 나만 맞춰주고 나만 적응하기에는 뭔가 억울했나 봅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기도실도 가끔 들렀습니다. 그 후에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7월부터는 매달 새로운 일을 하나씩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매일매일을 똑같이 보내면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매일 집 병원 집 병원을 반복하다간 금방 멋없는 할머니가 될 것 같았습니다. 뭐든 내가 안 해봤던 거, 시간을 들여서 하는 새로운 것을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제 돈도 버는데 이 정도는 나한테 해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7월에는 머리를 주황색으로 염색했습니다. 8월에는 오렌지를 '오헝-지라고 발음하고 블루를 bleu라고 쓰는 프랑스어 학습지를 신청했습니다. 9월에는 이 '자력구제기'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10월에는 살면서 처음으로 머리를 볶아봤습니다. (별거 아니겠지만 미용실 공포증이 있는 사람으로서 .. 이것은 엄청난 용기입니다. 살면서 미용실을 열 번도 안 가봤어요.) 11월에는 미국 간호사가 되어보고도 싶어서 미국 간호사 시험 접수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12월 1일입니다. 이번 달에는 무엇을 해볼까요? 추천받고 싶습니다. 돈이 들어도 좋고 시간이 들어도 좋고 마음이 들어도 좋습니다. 돈 시간 마음이 드는 일을 하기 위해 삶이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잘하고 싶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점점 더 확신하고 있는 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진리를 조금씩 깨닫고 공부를 덜 해도 우선 시험부터 접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완벽하게 공부하고 시험 접수하려면 벌써 지칩니다. 일단 접수하고 그 마음으로 공부하면 턱걸이라도 합격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뭐라도 해야 뭐라도 바뀝니다. 열심히 하라는 말까지는 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너무 허접 같아도 해야 됩니다. 글이 별로여도 계속 글을 보내는 저처럼, 뭐라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다들 사는 게 바쁠 텐데 혼자만 바쁜척하느라고 글의 간격이 조금 길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허접한 글이라도 계속 써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위에서 제가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따뜻하게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전 수족냉증이 너무 심해서 겨울이 무서워요. 하지만 그만큼 겨울을 가장 사랑합니다.

연말에 부적처럼 듣는 노래를 놓고 이만 쓰겠습니다. 이 노래도 너무 좋아하지만 특히 이 라이브 영상을 너무 사랑합니다. 꼭 봐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bctQyGMsW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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