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한테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선생님이 책을 쓰면 그 책의 제목은 '말이 다다'일 거야."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나를 통과한 무수한 경험(말)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지금, 나는 말의 영향력을 무작정 한치의 의심 없이믿는다. '말이 다다'라는 말은, 말을 하는 것이 생업인 나를 돌아보기 위한 말이기도 하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 동네에서 한동안 요가를 배웠다. 좋아하던 선생님이 아기를 낳고 돌아오셨는데 아예 학원을 인수하셨다고 해서 그길로 등록하고 기초 클래스만 다녔다. 엄마가 되어 돌아오신 요가 선생님은 공백기가 무색하게 곧 예전 체형을 찾으시고 나날이 달라지는 기량을 뽐내셨다. 그럼에도 수련을 쉬지 않으시고 자신의 몸을 계속 단련하시는 걸 보면서 경외감마저 들던 어느 날, 깨달음이 선물처럼 왔다.
내가 요가 선생님을 보면서 요가를 배우는 것처럼 아이들이 교실에서 바라보는 나도 저런 모습이겠구나.
나는 아이들 앞에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 앞에 설 만한 어른인가.
내가 어른다운 어른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나의 말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영어로 말하려고 하면 단번에 안 나오고 머릿속에서 한번 생각했다가 말해야 하지? 선생님은 한국말을 쓰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 말을 할 거야." 말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다짐을 아이들 앞에서 한다. 이 말은 '너희가 사용하는 말도 가볍게 하지 말라'라는 무언의 압박(?)이고 말을 돌아보는 경험을 통해 같이 성장하자는 약속이기도 하다.
초등학교에서 목격한 학교 폭력은 내 경험에서 보면 99%가 '말'에서 빚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벼운 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말, 쟤는 원래 저렇다는 말, 남을 쉽게 판단하는 말, 뒤에서 하는 말, 남의 말을 전하는 말, 그리고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조차 누군가에게는 상처이고 폭력적으로 될 수 있는 상황을 무수히 목격한다. 학교 폭력 예방 교육은 교실에서 쓰이는 언어 사용만 바로잡아도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단 하루도 중요하지 않은 날이 없다. 아이들이 만나는 장소는 곧 말이 시작되는 장소여서 매일 홀로 안테나를 세운다.(요즘은 직접 만나지 않고 오가는 말들이 더 위험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그렇게 안테나를 세우고 있으면 들리지 않는 말까지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의 표정, 몸짓, 시선, 소리, 동작들도 무언가를 말한다. 이것까지 보려면 교사는 되도록 말수를 줄이고 관찰하는 사람이 된다. 언젠가부터 교실에서 내 말은 줄이고 아이들의 말이 더 많이 들리도록 신경을 쓴다. 앞에 나와서 가르치는 경험도 해 보고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서로 묻고 질문하면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말 속에서 배운다. 가르쳐야 하는 교육과정도 중요하지만 암묵적 교육과정의 힘을 느끼고 있다. 해야 할 말을 하는 것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찾아서 간다. 내가 믿어 주면, 아이들은 믿는 만큼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