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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득여사 Jul 16. 2024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님을

# 제습기 물통을 비우다가



사계절이 있었던 우리 민족은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 철마다 긴 옷 짧은 옷, 얇은 이불 두꺼운 이불, 장마대비, 폭설대비, 가뭄 대비 등등. 부지런하고 똑똑한 민족이라는 자타 공인 라벨링이 붙을 만 한다.

상황이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러다 보니 이러한 민족의 후예 답게 집집마다 철마다 꺼냈다 넣었다, 코드를 켰다 껐다 하는 가전제품의 수가 참으로 많다. 열거하자면 너무 많아서 쓰다 지칠 것 같아(독자님들은 읽다 지칠 것 같아) 열거를 하지는 않겠다.


장마철. 특별히 지금 이 시기에 가장 우리의 가정에서 열일 하고 있는 계절용 제품이 바로  에어컨과 제습기이다. 에어컨이야 이리저리 움직일 수 없으니 내내 눈에 띄지만, 제습기는 집안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이 시기가 되면 당당히 집안 중앙을 차지하며 호령을 부린다. 윙윙윙.


밤새 윙윙윙. 아침이면 큰 대용량 제습기 물통이 가득 찬다. 비우고 다시 물통을 끼운다. 출근을 하면 집안의 대부분의 가전제품은 잠시 쉰다(냉장고는 제외하자). 그러나 장마철 제습기는 하루 종일 빈집에서도 한눈 팔지 않고 힘차게 제 일을 한다. 윙윙윙. 퇴근 후, 물통이 다시 가득 찼다. 물통을 또 비운다.


물통을 비우려고 묵직한 물통을 들었다. 무게가 상당하다. 새삼스럽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물통의 물을 싱크대에 부어본다. 물이다. 분명 보이는 존재이다. 이것들의 원형은 같은데 지금 이 물은 불과 몇 시간 전에는 모두 우리의 눈에 안보였다. 우리는 안보이는 것을 수증기, 보이는 것을 물이라 구분한다.



보이는 것에는 긴 설명이 필요없다. 물은 그냥 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는 긴 설명이 붙는다.


수증기는 액체상태의 물이 증발, 기화 하거나 고체 상태의 얼음이 승화하면서 생성되며 기압과 온도가 어쩌구 저쩌구. 과학적 설명은 여기까지!

우리는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능력을 떠나서 일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되고 납득이 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를 인정한다. 물론 시험을 위해서 이해와 납득의 과정을 급하게 뛰어 넘어 무작정 외우며 지식을 습득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답안지 제출과 동시에 대부분의 지식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되어 날아가 버렸던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추상적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자연의 이치와 삼라만상의 조화에 숙연해지기까지 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어느 현자의 격언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여기에 나는 ‘눈에 안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격언도 얹어볼까한다. 물-수증기-물의 과정을 거친 제습기 물통의 물만의 얘기는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의 감정과 그로 인한 현상(행동)에 대한 적용이 가능할까?


감정은 마치 공기 중의 수증기처럼 분명히 존재하지만 일단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의 대기 중에 기쁨, 행복, 슬픔, 분노, 수치심, 불안, 무서움 등의 감정이 무수히 떠다닌다. 그러다가 마음대기 안에 어떤 특정 감정의 밀도가 차기 시작해서 발현 조건이 충족되면( 마치, 수증기가 어떤 기압과 온도의 기준에 도달하면 다시 액체로 변화하여 물이 되듯이) 눈에 보이는 현상(행동)으로 나타난다. 웃음, 눈물, 박수, 소리지름, 공격성, 떨림, 포옹, 춤, 노래 등으로 표현된다. 감정이 눈으로 확인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대기의 수증기는 조건에 따라 비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박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눈으로도 내리도 한다. 우리의 마음대기의 감정들도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자연의 삼라만상은 자연의 조화 속에 맡겨야 하지만, 우리의 마음대기는 우리가 어찌해 볼 수 있다는 주체성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의 마음대기 중에 분노라는 감정의 밀도가 차 오를 때, 우리는 비, 우박, 눈 중에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할지 컨트롤 하는 것이 중요하다.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대기 중의 감정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보이지 않는 그것이 지금 어떻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비, 우박, 눈 중에 어떤 것으로 나타낼지.



꿉꿉한 장마철. 가득 찬 제습기 물통을 비우다 생각의 흐름이 여기까지 와 버렸다. 확실히 제습이 잘 된 공간은 참 쾌적하다. 우리의 마음도 제습이 잘 된 지금 이 공간의 공기처럼 뽀송뽀송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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