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 수평적 문화는 유행을 좇아서 될게 아니다
우리 회사는 작년 초에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며 자율좌석제를 시도했다.
당시, 회사는 사무공간을 개선할 때가 되었고, 개선의 초점은 자율좌석제에 있었다. 큐빅 모양의 파티션이 쳐있던 부서 간의 벽은 사라지게 만들었고, 모두가 원팀이다 라는 철학으로 자유롭게 섞여서 소통의 문화를 만들고자 하였다. 파티션으로 쳐있던 부서의 공간에 좀 더 넓은 공간의 책상을 차지했던 팀장의 자리는 없어졌고, 팀장도 팀원과 똑같은 한 사람으로서 공평한 좌석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자율좌석제는 시작은 여느 회사 못지않게 거창했다. 어디든 앉아도 상관이 없었고, 심지어 자율좌석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Ground Rule도 있었다.
1. 좌석예약앱은 당일 새벽 6시에 오픈한다.
2. 같은 좌석에 이틀 연속 앉을 수 없다.
3. 같은 층에는 3일 이상 앉을 수 없다.
일부 어떤 이들은 임원이나 팀장과 거리가 먼 자리를 선호했고, 일부 어떤 이들은 본인들의 모니터가 보이지 않는 자리를 선호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아무 데나 앉아도 상관없다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고, 가지각색의 취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누군가가 보기에는 구석자리가 먼저 예약이 되는 모습이나 최대한 윗사람들과 멀리 앉으려는 모습에서 이 제도에 대한 실망을 할 수도 있었다.
한편, 임원들은 적어도 팀장들만이라도 자기 주변에 앉아주길 바랐고, 팀장들은 차마 팀원들에게 근처에 앉으라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제도의 취지에도 맞지 않았고 쿨병을 보이고 싶어 하는 팀장들에게는 짜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 제도의 가장 큰 희생자는 팀장들이다 라는 얘기가 많았다.
2년이 지나가면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기억하기로 팀장들이 가장 많은 불만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나 싶다. 주니어들은 자율좌석제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게 자유는 정말 소중한 것이었테니까 말이다. 완전한 자유는 아니더라도, 팀장과 선배들의 눈치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자율좌석제는 상대적으로 기존 좌석제보다 자유도는 커지긴 했었다.
그러나, 결국 회사는 일하는 곳이고,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함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율좌석제가 과연 업무개선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팀장들과 임원들 그리고 팀원이지만 시니어들조차 자율좌석제가 업무개선 효과가 거의 없다는 의견을 적극 피력하였다. 그 후, 구성원들의 설문조사를 거쳐 결국 자율좌석제는 허울뿐인 제도로 변하게 되었다.
각각의 팀들은 업무효율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다시 모여 앉기 시작했고, 예전의 고정좌석제처럼 자기 자리가 생겨버리면서 자율좌석제의 그라운드룰은 유명무실해졌다. 물론 100프로까지는 아니지만, 20프로 정도의 인원만 그날그날의 업무 특성과 몰입도를 위하여 자율적으로 자리를 찾아서 앉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우리 회사뿐인지 모르겠다. 아마 어떤 회사는 이미 시도한 후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회사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진행 중인 회사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회사는 두 가지로 나뉠 텐데, 1) 정말 정착이 잘 된 회사 2) 불만은 있지만, 어찌 됐던 제도의 취지를 고려하여 애써 유지하고 있는 회사 일 것이다. 정착이 잘 된 회사도 분명 있을 텐데, 왜 우리 회사는 자율좌석제가 효과를 보지 못했을까. 어떤 점이 자율좌석제의 좋은 취지에 발목을 잡았을까.
1. 개인의 창의력이나 업무몰입도가 상당히 중요한 업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발자가 많은 회사이거나, 개인들의 영업이 실적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회사였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개인의 맨파워가 실적을 좌지우지하는 업종이 아니었기에 개개인이 각자가 만들어내는 퍼포먼스의 합이 기존에 보여주던 퍼포먼스의 총량에 미치지 못했다.
2. 개인의 역량이 자율좌석제를 받아들일 만큼 높은 수준이 되지 못했었다.
선배들의 도움 없이는 주니어들이 큰 역량을 보이기가 힘들었고, 선배들은 주니어들의 도움 없이는 효율적으로 일하지 못했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여하튼 서로가 모두 부족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면 가르쳐주거나, 도움을 받는 데에 한계가 명확했고 그 덕분에 일에서의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고, 성장할 수도 없었다.
3. 더 솔직히 말하면, 우리 모두 자율좌석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마인드가 성숙하지 못했다. 그게 가장 정확한 얘기일 것이다.
마인드가 성숙하기를 기다리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회사가 지속성장해야만 우리의 직장생활이 안정적일 것이라는 생각들이 깔려 있는데, 업무개선효과가 매우 떨어지는 자율좌석제를 계속해나가기에는 불안한 마음이 곳곳에서 나왔다.
아마 5년을 그렇게 기다릴 수 있는 회사라면, 아주 장기적으로는 자율좌석제가 더욱 효과적인 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당장 올해 또는 늦어도 내년까지는 크고 작은 성과를 지속해서 만들어야 하는 임원/팀장/시니어들은 그렇게 긴 호흡으로 기다려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 회사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다른 회사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인가.
먼저 시작했던 다른 회사들도 아마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때 자율을 계속 유지할지, 과거로 돌아갈지에 대한 선택 중 어떤 결정을 할지는 경영진의 철학이나 구성원들의 인내심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우리 회사와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든다.
왜냐하면 자율좌석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이,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또는 이렇게 해야 수평적 문화로 보일 수 있으니까 우리도..라는 배경에서 결정된 회사가 많을 것으로 추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보고 싶다.
자율좌석제가 정말 창의적 퍼포먼스를 가져오는 제도인가. 자율좌석제뿐 아니라 서로 간에 직급을 붙이지 않고 영어이름으로 부르기, 모두를 단일직급으로 호칭하기 등의 제도는 진정 우리에게 어울리는 제도인가. 우리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제도인가. 아니, 우리나라에서 통할 수 있는 제도인가.
예전에 주 6일 근무가 주 5일 근무로 바뀌는 것도 결국 잘 정착이 되지 않았느냐. 그리고 유연근무시간제도도 문제없이 실행되고 있지 않느냐. 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걱정을 안고 시작했던 과거의 제도들 중에 이제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는 것들을 보면, 자율좌석제나 영어이름 부르기나 단일직급 호칭하기 또한 잘 정착이 될 수 있지 않겠냐. 왜 그리 성급하게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이냐 라는 불만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아직 아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서로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려해 주는 것은 결이 좀 다르다. 그것에는 수평적 문화 라는 포인트가 덜 들어간다. 그러나, 만나면 나이부터 물어보고 몇 학번인지 체크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대한민국에서는 수평적 문화가 쉽게 뿌리내리기 어렵다. 그게 되려면, 마치 필드에서만큼은 이름을 부르게 했다는 히딩크의 방식처럼, 회사라는 특수한 공간에서만큼은 그래도 된다 라는 완벽한 컨센서스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히딩크가 사라지고, 히딩크의 방식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에서는 회사라고 하더라도 수평적 문화가 힘들 것이다.
좀 거창하게, 좀 오글거리게 얘기하면..
우리나라 교육의 컨셉이 바뀌지 않는 한 창의적 마인드가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어렸을 때부터 교육적인 접근이 송두리째 변하지 않는 이상 힘들지 않을까. 미국의 잘 나가는 기업들을 보니까, 호칭을 통일하고 자율좌석제를 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네? 오, 그럼 우리도 그렇게 따라 하면 미국의 잘 나가는 기업들 같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진짜 그렇게 알고 제도를 시행하려 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결정이다. 에이, 그런다고 그렇게 시도하면 안 되지 라는 생각은 사실 시니어도 주니어도 같을 것이다.
엄청 많은 시간을 거쳐서 형성된 그들의 문화가, 내면에 스며들어서 그저 자연스러운 그들의 생각을 우리가 비슷하게 만들어내려면 어렸을 때부터의 교육이 정말 천지개벽하듯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40대가 자라던 때의 교육과 지금의 교육이 체벌을 빼고는 뭐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우리의 교육이 쉽사리 바뀌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생각이 든다.
갑자기 교육을 바꾸고 갑자기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우리의 교육이나 시스템이 따라갈 수 없는 미국의 교육과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편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베이스로 해서, 시행착오를 당연하게 여기며 우리만의 문화를 조금씩 가다듬어 구성원들이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가야 한다.
그래.. 말이 쉽지, 이상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얘기이긴 한데 그렇게라도 우리는 변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우리는 회사생활을 더 좋게 만들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표지 : '자유로운 회사 오피스 모습을 그려줘'에 반응한 AI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