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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jeje 2시간전

인정욕구를 위해 지구는 반란 중

에세이

                      인정욕구를 위해 지구는 반란 중 

 

지난 21일 기후 관측 이래 지구가 가장 뜨거운 날이었다는 소식을 각 뉴스 매체가 전했다. 유럽 연합(EU) 기후 감시 기구인 코페르니쿠스 기후 변화 서비스(C3S)가 1940년 기후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기온이라고 했다. 이 같은 기온의 기록이 10년 만에 깨지고 며칠, 몇 주년 주기로 갈아치우는 현상은 이제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렇게 지구가 열병에 시달리던 날 청계 광장과 각 지역 추모장에서는 지난 수해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날도 전국 하늘에서는 물 폭탄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또 다른 수해 난만들은 아픔을 견디고 있었다. 

본연의 형태가 무너져 가는 지구와 더불어 사람들의 삶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부모가 한 생명에게 세상의 빛을 안겨준다는 것은 한 존재에 대한 인정의 시작이다. 보통 인정욕구 하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경향이 있지만 인정욕구가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 막 도착한 생명에게 돌보는 사람이 안겨주는 인정욕구 충족은 그 생명체에게 안정감은 물론 성장을 돕는 촉진제가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자가 된다. 


그럼에도 과도한 인정욕구는 오히려 자신의 성장을 멈추게 하거나 피폐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나치게 인정욕구가 많은 사람은 만족을 모르고 인정받기 위해 집착한다. 그 결과 타인을 위한 삶을 살거나 아니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세상을 향해 가해한다. 

    

인정욕구에는 ‘칭찬’과 ‘관심’이라는 두 요소가 요구된다. 그중에서도 ‘관심’이 가장 필수적 요소다. 인정욕구는 상대에게 내가 원하기도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임으로써 상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도 한다. 내가 먼저 상대에게 관심을 보일 때 나 자신의 욕구도 채워진다는 것을 열병에 시달리고 있는 지구의 소식을 접하며 생각해 보게 됐다.   

  

난 오지의 어느 섬 주민에게서 바다에서 채취한 것만으로 자식을 키우고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바다에 감사하고 있었고 그래서 바다의 풍랑은 자신들에게 주는 울림이라며 그 소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나 또한 내가 번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는 하지만 나와 가족이 좋아하는 모든 먹거리는 자연이 준 재료들이다. 게다가 인간의 손을 거쳐 정제되긴 했어도, 실생활에서 필요한 물건들 또한 모두 자연을 통해 얻은 것들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감사해야 할 자연이, 경이로운 지구가, 두려움의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변화 속도나 규모 또한 해가 갈수록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기후 변화의 예측할 수 없는 위세는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이런 지구의 반란은 순하게 물러서지 않을 것만 같다.    

  

관심을 받고자 하는 거친 행동 이면에는 인정욕구가 존재한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자신의 심신을 달래고 치유하며 자연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고 찬미한다. 하지만 행동에서는 가해를 저지르는 이중성을 보인다. 그런 인간의 이중성에 지쳐 가는 지구의 인정욕구가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 같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나 심각성을 강조하며 지구를 지키고 자연을 보전하자는 운동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81억 명이라는 지구 인구와 비교할 때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우리는 자연이 주는 혜택을 인정하며 보전하기 위한 실천보다는 지구를 정복해 보려는 이기심으로 지구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별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그나마 지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마저 아주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나 또한 지구를 망가뜨리는 현대적 문화 기류에 편승해 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자연의 순환에서 심혼의 원리를 추구한 심리학자 융은 지구는 곧 인간 심혼의 자기 Self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지구’는 곧 ‘나‘라는 상징적 의미를 품고 있다. 그래서 자기(Self)란 인간이 완벽하게 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온전하게 다다르기 위해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것이 죽음을 삶의 끝에 두고 있는 인간의 목적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거스를 수도 거슬러 서도 안 되는 지구만이 포용할 수 있는 자연이 존재한다. 그러한 지구를 인정하며 관심을 갖고 지키려는 배려는 곧 나를 지키는 나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된다.

       

자연에 대한 공포가 일상에 트라우마가 된 분들을 보며 지구의 안녕에 행동으로 동참할 수 있는, 실생활에서의 나를 점검해 본다.


사진출처 : 동아사이언스

                  JVM - CO11/케티이미지 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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