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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크리스마스 댄스를

크리스마스는 덴마크에서 -마지막 이야기

by 새벽별

지난여름, 덴마크의 오래된 도시 '리베(Ribe)'를 방문했을 때였다. 덴마크의 유명한 화가 비고 요한센(Viggi Johansen)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 들른 미술관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보고 싶던 그의 작품 한 점을 마주했다.


비고 요한센 <고요한 밤> 1891

그림의 제목은 <행복한 크리스마스(Glade jul)>, 영어로 <고요한 밤 (Silent Night)>으로도 알려져 있다. 1891년에 그려진 이 작품에는 화가의 가족이 등장한다.


어두운 거실, 촛불이 켜진 크리스마스트리를 둘러싸고 요한센의 아내와 하녀, 그리고 여섯 명의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돌면서 캐럴을 부르고 있다. 화가 자신은 트리 뒤쪽에서 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듯하다. 익살스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얼굴이 정겹다. 어둠 속 촛불은 다정한 가족의 모습을 더욱 찬란하게 비춘다.


그런데 그림 속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숨어 있다. 왼쪽 구석, 거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이를 바라보는 노부인의 표정은 즐겁다기보다는 어딘가 지친 듯하다. 근처에 사는 아내의 이모가 아이들 양육을 도왔다고 하니, 아마 그 분일 것이다. 힘들었던 이모의 마음이 화가에게도 전해졌던 걸까. 나라가 달라도 비슷한 정서가 느껴져 더욱 정감이 간다.


덴마크의 크리스마스 댄스는 시댁에서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저녁 만찬 후, 아몬드 게임이 끝나면 자리를 정리하고 크리스마스트리에 성냥으로 조심스레 촛불을 켠다. 덴마크의 가정집에는 한국처럼 천장을 환히 밝히는 조명이 없다. 대신 소파 옆 스탠드나, 식탁 위의 조명만이 은은히 불을 비춘다. 물론 평소 저녁에는 곳곳에 촛불을 켜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어두운 거실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캄캄한 밤하늘 속 별처럼 빛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라, 어른 여섯이 손을 잡고 트리를 돌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꼭 작은 강강술래 같았다. 과식을 한 뒤 몸을 움직이기에 이만한 전통도 없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타냐만 신이 나 있었다. 남자들과 나는 머뭇거리며 서 있었지만, 시어머니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처럼 잔잔한 캐럴을 부르면서 천천히 돌았다. 덴마크어를 모르는 나는 한국어로 노래를 불렀다. 나름 괜찮았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하얀색 저고리에 빨간색 한복 치마를 입고 강강술래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원을 그리며 점점 고요하고 거룩한 분위기에 빠져들자, 그 밤이 얼마나 경건하고도 아름다운지 새삼 느껴졌다.


<1983년도 산 크리스마스 접시>

몇 곡 더 조용한 노래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빠른 리듬의 곡으로 바뀌었다. 모두들 '헉헉'거리며 왼쪽으로 돌다 오른쪽으로 바꾸더니 점프까지 했다. '고요한 밤'이 어느새 '소란한 밤'이 되었다. 노래가 끝나자, 시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더 먹을 수 있어!"


남은 음식이 걱정되었던 걸까?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 전통은 너무도 유명해, 매년 크리스마스 때 제작되는 장식용 접시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한국의 강강술래가 한가위 보름달 아래 여성들이 손을 맞잡고 풍요를 기원하는 풍속이라면, 덴마크의 크리스마스 댄스는 가족이 함께 웃고 노래하며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춤을 추는 그 순간은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배달 요정이 된 딸>

춤이 끝나면, 다들 벽난로 근처의 소파로 가서 잠시 쉰다. 그리고 트리 밑에 산처럼 쌓인 선물의 주인을 서로 찾아주기 시작한다. 아이가 있을 때는 아이가 '배달 요정'이 된다.


한국에서는 산타할아버지가 밤사이 아이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간다고 믿고,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선물을 열어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덴마크에서는 이브날 저녁에 선물을 푼다.


"포장지는 살살 뜯어."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풀어 다음 해에 다시 쓰려는 시어머니의 외침이다. 그때마다 영화 <나 홀로 집에 2>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케빈의 가족이 호텔 거실에서 선물을 뜯을 때, 케빈의 숙모가 큰 소리로 외친다.


"모두들, 포장지 찢지 마! 내년에 다시 써야 해. 리본도! 메리 크리스마스!"


숙모의 절실한 외침은 신난 아이들의 '찌익-찍 ' 포장지 찢는 소리에 묻혀버린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시댁의 풍경과 겹쳐 웃음이 난다. 포장지를 조심스레 뜯는 그 마음에는 검소함 외에도, 선물을 건넨 이에 대한 감사함도 담겨 있는 듯하다.


선물의 대부분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물건들이다. 슬리퍼, 담요, 이불보, 장갑 같은 것들. 영국에서 힘들게 살던 시절, 덴마크 가족이 준 선물 덕에 추운 영국의 겨울을 견딜 수 있었다. 웃음과 감사 인사가 오간 뒤, 트리의 촛불이 하나둘 꺼지면서 아름다운 이브의 밤은 고요히 막을 내린다.


강강술래 같은 덴마크의 크리스마스 댄스는 손끝에서 가족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 전통이다. 화가의 그림처럼 모두가 함께 웃고 노래하던 그 밤의 장면은 여전히 내 마음속 트리의 불빛처럼 잔잔히 흔들린다. 고요한 밤에 울리던 그 캐럴의 여운도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요즘 문득 귓가에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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