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lk-cRaIHcLI
어느 맑게 개인날/저 푸른 바다 위에 떠 오르는 /한 줄기의 연기 바라보게 될 거야.
하얀 빛깔의 배가 항구에 닿고서/예포를 울릴 때
보라!/그이가 오잖아.
그러나 난 /그곳에 가지 않아/난 작은 동산에 올라가서
그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을 거야./그이와 만날 때까지
복잡한 시가지를 한참 떠나/ 한 남자 오는 것을 /멀치감치 바라보리라.
그가 누구인지?/산 언덕 위에 오면/무어라 말할까?
멀리서 버터플라이 하고 부르겠지./난 대답하지 않고 숨어 버릴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나의 극진한 기쁨 때문에 내가 죽을 것 같아.
한참 동안을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내 어린 아내며/오렌지 꽃이라고 늘 부르던 그 이름을 부르리라
(하인 스즈키에게 )
이렇게 되는 날이 꼭 올 거야,/그이의 믿음을 간직하며
나 그이가 돌아오길 믿고 있어.
-쵸쵸상의 아리아 , '어느 개인 날'-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1923-1977)가 부른 " Un bel di, vedremo"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에 나오는 유명한 소프라노 아리아입니다. 이 곡은 오페라 2막 초반에 초초상(나비 부인)이 등장하여 떠나간 남편 핑커톤의 귀환을 상상하며 부르는 곡으로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이 지휘하는 밀라노 라스칼라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과 함께 이 곡을 녹음했습니다. 이 음반은 1954년에 발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Maria Callas Remastered"앨범에도 수록되어 있는 곡입니다. 재생 시간은 4분 37초입니다. 이 곡은 또한 "Maria Callas: Immotral Opera Arias> 앨범과 "La Divina"앨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Madama Butterfly Act2/PBS
Madama Butterfly Act2/Sigledal
< Un bel di, vedremo>는 이탈리아어로 "어느 맑은 날 우리는 보게 될 거예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곡은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가 작곡하고 루이지 일리카(Luigi IIIica, 1857-1919)와 주세페 지아코사(Giuseppe Giacosa, 1847-1906)가 대본을 쓴 1904년 오페라 <나비 부인>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입니다.
Giacomo Puccini with Luigi IIIica(right)and G. Giacosa(middle)/Alamy
오페라 <나비 부인>2막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로, 쵸쵸상(나비 부인)이 등장하여 나타나지 않는 그녀의 연인 핑커톤의 귀환을 상상하며 부르는 곡입니다. 이 아리아는 오페라 <나비 부인>에서 가장 유명하며, 전체 소프라노 레퍼토리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곡 중 하나입니다. 감성적인 멜로디로 관객들에게 호소할 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핵심에 담긴 비극을 담고 있기 때문이죠.
오페라 2막 초반, 미국의 해군 장교 B.F. 핑커톤과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쵸쵸상(나비 부인)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일본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녀의 하녀 스즈키는 핑커톤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비 부인은 낙관적입니다. 나비 부인은 핑커톤의 충성심을 스즈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먼 수평선에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하얀 배가 나가사키 항구에 도착하여 그녀의 오랜 연인을 다시 데려오는 상상 속 장면을 노래합니다. 이 상상 속 장면은 낭만적인 재회로 절정에 이릅니다.
Madama Butterfly /Trafalgar Releasing
Madama Butterfly /Codalario
이 아리아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극적으로 중요한데, 노래에서 표현된 나비 부인의 갈망이 후에 비극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비 부인이 그토록 갈망했던 "어느 맑은 날"은 2막이 끝날 때 핑커톤의 배가 도착하면서 나타나지만, 이는 그녀의 마지막이 됩니다. 나비 부인은 핑커톤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음을 알게 되고, 오페라의 끝에서 나비 부인은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19세기말 일본 목판화가 유럽에 전해지고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부드럽고 서정적인 히로시게의 풍경화는 서양화가들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오늘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와 우타가와 히로시게(본명:안도 시게우에몬, 1797-1858)의 작품을 살펴볼까 합니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1603-1867)에 성행했던 독특한 풍속화 양식입니다. 문자 그대로 '떠 나니는 세상의 그림'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키요'라는 단어는 원래 불교적인 의미에서 '근심 많고 덧없는 세상'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에도시대에 들어서면서 종교적 의미가 희석되고 현재를 즐기며 살아가는 세속적인 삶, 즉 도시의 유흥과 풍속을 나타내는 말로 변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도쿠가와막부 시기 정치적 안정과 상업 경제의 발달로 인해 도시 상인 계층의 부가 축적되면서 이들이 문화의 주요 소비층이자 생산자로 부상했기 때문입니다. 우키요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동하여, 대중들에게 당대의 유행과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대중매체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가 먹색으로만 인쇄하는 스미즈리에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책의 삽화 형태로 제작되었으나, 점차 단독적인 회화 양식으로 자리매김하며 육필화와 목판화의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18세기 중반에 스즈키 하루노부가 다색판화인 니시키에를 창시하면서 우키요에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여러 개의 색판을 겹쳐 인쇄함으로써 훨씬 다채롭고 화려한 표현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목판화 기법은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여, 유복하지 않은 서민들도 국수 한 그릇 값 정도의 저렴한 가격으로 그림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우키요에가 에도 시대의 대중문화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Gi311MQFk
독특한 미학적 특징을 통해 당대 일본의 미의식을 표현하였습니다. 선명한 색채와 채색 기법이지요. 강렬하고 선명한 원색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특히 스즈키 하루노부에 의해 다색 목판화인 니시키에 기법이 발전하면서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채 표현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림에 열 가지 색이 쓰이면 열 장의 목판을 파내 순서대로 찍어내는 방식으로 채색이 이루어졌습니다. 때로는 페르시안 블루(프러시안 블루)와 같은 서양의 인공 안료가 사용되어 더욱 청명하고 풍부한 색감을 구현하기도 했습니다.
우키요에는 대담하고 파격적인 구도를 특징으로 합니다. 선명하고 간결하며 명료한 선조(선묘)를 운용하여 대상의 윤곽을 뚜렷하게 표현합니다.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경우, 여성의 얼굴 윤곽선을 생략하고 색채만으로 형태를 구축하는 혁신적인 기법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인 서양 미술과 달리 그림자가 거의 없으며 , 원근법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때로는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깨뜨려 대상을 과장하여 표현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평면적인 구성은 우키요에만의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창출했고요.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다양한 주제를 담았으며, 특정 소재는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전문화되었습니다.
Kiragawa Utamaro/Ukiyo-e Art Printing shop
미인화입니다. 이상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장르로, 유곽의 기녀나 찻집 여인 등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여성들이 주로 소재가 되었습니다. 기타가와 우타마로는 미인화의 대가로, 여성의 섬세한 표정을 포착하고 상반신이나 얼굴만을 클로즈업하는 오쿠비에 형식을 창안하여 우키요에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도슈사이 샤라쿠/나무위키
가부키 배우 초상화입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부키 배우들의 무대 위 모습이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오늘날의 팝스타 포스터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도슈사이 샤라쿠는 10개월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가부키 배우 초상화 140여 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수수께끼의 화가로 유명합니다.
How Hokusai's Great Wave crashed into Van Gogh's Starry Night/ The Guardian
풍경화입니다. 경제적 안정과 함께 서민들이 여행을 즐기게 되면서 명승지나 풍경을 담은 그림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풍경화의 거장으로, '후가쿠 36경' 시리즈 중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와 '붉은 후지산'등이 특히 유명합니다. 오늘 살펴볼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도카이도 53 역참'시리즈와 '명소 에도 백경'으로 알려진 풍경화의 대가이고요. 나머지 하나는 춘화로, 성적인 주제를 다룬 그림입니다. 당대 성 풍속을 묘사하며 서민들에게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비록 사회적 규제를 받기도 했으나, 우키요에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고요.
19세기 중반, 일본이 서양에 문화를 개방하면서 우키요에는 유럽에 소개되었고, 이는 서양 미술계에 '자포니즘( Japonisme)'이라는 큰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키요에가 유럽에 전해진 경로는 매우 흥미로운데,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등을 통해 일본 공예품이 유럽으로 유입될 당시, 우키요에가 도자기를 보호하는 포장지로 사용되면서 우연히 서양 예술가들의 눈에 띄게 된 것이 그 시작입니다.
유럽의 인상파 및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기존의 서양 미술과는 확연히 다른 우키요에의 독특한 미학적 특징에 매료되었습니다. 특히 우키요에의 선명한 원색과 흑색의 대비, 평면적인 구성, 과감하고 대담한 선의 표현, 그림자 없는 표현 방식, 그리고 고정되지 않은 시점 묘사는 당시 서양에는 없었던 새로운 미술 표현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우키요에의 영향은 서양 미술가들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거나, 새로운 표현 양식을 탐구하는 영감이 되었습니다.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폴 고갱, 귀스타브 클림트,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등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들입니다.
La Japonaise by Claude Monet/wikipedia Portrait of Emil Zola by Edouard Manet/wikipedia
James McNeill Whistler&Pierre Bonnard Gustav Klimt& James Tissot
에도 시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 (1868)이 시작되면서 일본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사진과 기계 인쇄 기술의 발전은 우키요에의 상업적 수요를 감소시키고 점차 쇠토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키요에의 예술적 가치와 문화적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키요에는 현대 일본 대중문화,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기원이자 정신적 뿌리로 평가받습니다.
Portrait of Pere Tanguy, 1887, Musee Rodin , Paris/wikipedia
빈센트 반 고흐의 <탕기 영감의 초상>(1887) 작품입니다. 쥘리앙 탕기( Julien Francois Tanguy: 1825-1894)의 세 점의 초상화 중 마지막 작품입니다. 캔버스에 유화(65cm*51cm) 작품으로, 프랑스 파리 로댕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요.
탕기 영감은 물감 상인이자 미술상으로, 고흐의 그림을 판매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물감값 대신 그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가게는 파리의 인기 있는 미술품 판매점 중 하나였고요. 탕기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음식과 돈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전시하며 아버지 같은 존재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이 작품은 반 고흐 파리 시절 (1886-1888)의 작품으로, 그의 초기작품에서 나타나는 어둡고 우울한 색채에서 벗어나 밝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인상주의, 상징주의, 점묘법, 그리고 일본 미술(자포니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일본의 우키요에 예술가인 히로시게와 후쿠사이의 작품은 반 고흐에게 주제와 그림자 없는 평면적인 색채 표현 방식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배경에는 탕기의 가게에서 팔던 일본 판화들이 가득합니다. 후지산, 가부키 배우, 벚꽃 등이 그려져 있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반 고흐는 이 작품에서 자연의 색을 버리고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 푸른색 등 강렬한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했습니다. 또한 이 그림에서는 점묘법과 네오인상주의 기법이 통합되어 고흐의 진화된 스타일을 엿볼 수 있습니다.
탕기 영감의 얼굴은 차분하고 사색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평온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 후지산 그림이 탕기 영감의 머리 위에 후광처럼 배치되어 있어 인상적이고요. 이 초상화는 탕기 영감이 죽을 때까지 소장하고 있었던 작품입니다. 그의 사망 후 딸이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에게 팔았고, 이후 로댕 미술관에 영구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Portrait of Pere Tanguy, winter 1886/87,47*38.5cm/wikipedia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화를 세 점 그렸습니다. 그의 예술적 스타일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첫 번째 초상화 (1886년 겨울)는 주로 갈색 톤으로 어둡고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탕기 영감이 예술상이라기보다 노동자처럼 보인다는 묘사가 있는 초상화입니다.
The second painting of Pere Tanguy by Vincent van Gogh, 65*51cm/wikipedia
두 번째 초상화 (1887년 겨울)는 일본 판화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더 밝은 색채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탕기 영감의 침착함, 자신감, 금욕주의, 그리고 선량한 성격을 잘 드러냈다는 평가입니다.
The Bridge in the Rain by Vincent van Gogh, 1887/ Van Gogh Studio
고흐는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우키요에를 수집하고 연구했습니다. 우키요에를 접한 후 그의 화풍은 어두운 색채에서 벗어나 점차 긍정적이고 화려한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는 일본을 자본주의 사회에 지친 인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또는 '에덴동산'으로 상상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이상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흐의 작품에는 이러한 우키요에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고흐는 주로 일본 풍경화의 모작을 그리거나, 자신의 그림 속에 우키요에 작품이나 일본풍 소품들을 직접적으로 포함시켰습니다. 고흐의 가장 힘든 시기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어주었지요.
이 작품은 히로시게의 '오하시 다리의 소나기'(Sudden Shower over Shinohashi Bridge and Atake) 목판화를 모작한 작품입니다. 반 고흐는 1885년 처음으로 일본 목판화를 구매했고, 이를 통해 큰 기분 전환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 벽에 일본 목판화를 걸어두고 영감을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일본 미술을 열심히 따라 그리며 흡수하려 했고요. 파리에 거주하면서 일본 미술의 예술적 특성에 깊은 감명을 받기 시작했고, 일본 풍경화, 특히 히로시게의 작품들에 매료되었습니다.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표현하는 일본 판화의 방식에 매력을 느꼈고요. 자신의 그림에 일본 목판화의 밝은 색채와 독특한 구성을 접목해 보기 시작합니다.
고흐는 원작 히로시게의 목판화보다 색채를 더욱 강렬하게 사용하여 대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물의 표현을 더욱 세밀하게 하고, 원작이 한 가지 색조를 사용한 것과 달리 더 넓은 범위의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짚으로 만든 노란색 다리를 건너는 여섯 명의 여행객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리 아래의 물은 얼룩덜룩한 녹색에서 깊은 사파이어 블루로 변하며, 이미지 상단의 짙은 파란색-검은색 구름과 대조를 이룹니다.
고흐는 비를 묘사하기 위해 불규칙하고 강렬한 선들을 사용했습니다. 거칠고 툭툭 끊어지는 붓놀림과 넓은 색상 영역, 흐릿한 효과로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반응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그림 가장자리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어 서체가 테두리로 그려져 있어 작품의 혼돈스러운 특성을 강조합니다. 넘실대는 물결의 에너지가 느껴질 겁니다.
그는 일본 판화가 서양 예술의 표현 방식에 손상되지 않은 순수한 예술적 표현의 모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미술에 대한 경외와 자신만의 회화적 감각이 결합된 독창적인 오마주인 셈이지요. 그는 일본 미술의 "극도의 명료함"을 부러워했습니다. 물론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지요. 그는 일본 미술이 전통적인 회화 규칙을 따르지 않고 지평선을 생략하거나 갑자기 잘라내는 "예외성"에 매료되었습니다.
반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에서 일본 판화에서 본 "맑은 대기의 밝은 색채 효과"를 찾기를 희망했습니다. 이곳에서 히로시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밝은 색채와 흥미로운 평면성을 모방했고요. 그는 히로시게의 목판화에서 비정상적인 색채 조합을 연구하고 모방함으로써, 관객에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The Bridge in the Rain by van Gogh/ Flickr
Hiroshige/DailyArt Magazine Shinohashi Bridge nightview, Tokyo
원작자인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오하시 다리 위에 갑자기 쏟아지 소나기> 작품입니다. 비를 소재로 한 이색적인 풍경화입니다. 이 작품은 히로시게의 가장 잘 알려진 판화 중 하나로, 1857년 9월에 출판된 '에도 명소 100경 One Hudred View of Edo' 시리즈의 52번 또는 58번 작품으로 분류됩니다.
이 판화는 스미다 강 위에 있는 나무 신-오하시 다리 ( New Great bridge)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그림에는 뱃사공 한 명이 후카가와 목재 야드 쪽으로 뗏목을 밀고 가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배경에는 에도(현재, 도쿄)의 아타케라는 지역이 강 건너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는 그곳에 정박했던 정부 선박 아타케마루( Atakemaru)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모자, 우산, 짚 망토 등으로 몸을 가린 두 명의 여성과 네다섯 명의 남성이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히로시게는 빗줄기를 두 방향으로 얇고 어두운 평행선을 사용하여 표현했는데, 이는 목판화조각 기술에서 어려운 기법입니다. 먹 그라데이션 기법( bokashi technique)을 사용하여 표현된 어두운 구름은 판화마다 크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비, 비를 피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지 중앙의 뗏목은 그림에 움직임을 부여합니다.
One Hundred Famous View of Edo/Philadelphia Museum of Art STore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는 에도 시대 말기의 우키요에 화가이자, 일본의 풍경을 서정적이고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1797년에 에도 (현 도쿄)의 아즈마지에서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안도 시게우에몬이며, 안도 히로시게로도 불렸습니다. 그는 13세에 부모를 읽고 가장이 되어, 아버지의 세습 직업인 에도 성 소방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15세 무렵 우키요에 대가인 우타가와 도요히로의 문화에 들어갔습니다.
1812년경 도요히로 문하에 들어간 히로시게는 1818년 첫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약 17년간 가부키 배우와 미인을 소재로 한 판화를 제작하며 수수하고 세련된 스승의 취향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히로시게는 1823년 가업인 소방 감독관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1828년 스승 도요히로가 세상을 떠난 후, 히로시게는 2대 도요히로 자리를 거절하고 2년 뒤인 1830년에 '이치유사이'라는 호로 <동도명소>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풍경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60세에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했으며, 당시 에도에 창궐하던 콜레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히로시게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와 함께 일본 우키요에 풍경화의 양대 산맥을 이룬 거장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5,000점이 넘는 판화를 제작했으며, 일부 목판화는 1만 부 이상 복제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일본 풍경화에 서구의 원근법과 빛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술을 대담하게 적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는 교토, 나라, 에도 전역을 여행하며 직접 관찰하고 사생한 것을 바탕으로 현실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특히 섬세한 필치와 차분하고 조화로운 색상으로 서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습니다.
Hiroshige's 100Famous Views of Edo/The New York Times
'
<명소 에도 100경 One Hundred View of Edo>는 1856년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858년까지 제작된 연작으로 히로시게의 마지막 걸작으로 꼽힙니다. 총 118점의 판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 에도 (현 도쿄) 지역의 유명한 풍경 100여 곳을 담았습니다. 특히 '오하시 다리에 내리는 소나기'와 '가메이도 매화가 있는 찻집'은 빈센트 반 고흐가 우키요에 매료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히로시게는 화면에 계절감을 담은 최초의 우키요에 화가로 불립니다. 다양한 계절의 변화를 화폭에 담아 호쿠사이보다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일본적인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또한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 찍은 사진처럼 특정 기물을 크게 확대해 배치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에도 촬영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눈, 비, 안개, 달밤의 풍경이 시적인 요소로 표현되었으며, 특히 '히로시게 블루'라고 불리는 독특하고 짙은 남색 사용이 특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PqKRAui4_E
https://www.youtube.com/watch?v=1aaR70e37Lw
Flowering Plum Tree (after Hiroshiege), 1887/wikimedia commons
빈센트 반 고흐의 < Flowering Plum Orchard(After Hiroshige)> 작품입니다. 1887년 10월과 11월 사이에 파리에서 제작된 유화 작품입니다. 고흐가 일본 판화가 히로시게의 작품 <가메이도 매화 정원 The Plum Garden in Kameido>을 모사하여 그린 유화입니다. 고흐는 히로시게의 원본 구도를 충실히 따랐지만, 원본의 정확한 색상 대신 자신의 방식으로 훨씬 더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히로시게 작품의 검은색과 회색 나무줄기를 붉은색과 푸른색 톤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림 테두리에 그려진 한자 역시 일본의 예시에서 가져온 것이며, 특별한 의미 없이 주로 장식적인 역할을 합니다. 55.6cm*46.8cm 크기의 캔버스에 유화로 , 작품은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구도와 색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첫 번째 복사본 중 하나이고요. 히로시게의 원본 작품으로 '에도 명소 100경'시리즈 중 30번째 작품입니다. 약 만 부가 인쇄될 정도로 인기 있었고, 많은 서양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던 작품입니다.
The Plum Garden in Kameido, Hiroshige, 1856-58, ukiyo-e/wikipedia
a woodblock print in the ukiyo-e genre by Japanese artist Hiroshige
https://www.youtube.com/watch?v=atXkIddG9Cs
The Rock of Montmajour with Pine trees, 1888/Vincent van Gogh
<소나무가 있는 몽마주르의 바위 The Rock of Mantmajour with Pine Trees>는 1888년에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스케치 작품입니다. 몽마주르 수도원 근체에서 제작된 드로잉 시리즈 중 하나로 , 12세기 수도원의 폐허 인근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Landscape at Montmajour Abbey in Arles by Vincent van Gogh/Meister Drucke Vistal di Arles da Montmajour by Vincent van Gogh/ FeelTheArt
큐레이터들은 이 지역의 지형이 에밀 졸라의 소설 '죄를 지은 무레 신부 The Sin of Abbe Mouret'(1875)에 등장하는 '르 파라두 Le Paradou'라는 버려진 정원을 연상시킨다고 언급했습니다.
The Sin of Abbe Mouret/Book Grover
에밀 졸라의 소설 <죄를 지은 무레 신부 La Faute de l'abbe Mouret>는 1875년에 출판된 작품으로, 그의 20권짜리 대작 시리즈인 <루공-마카르 총서>중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성직자 세르주 무레( Serge Mouret)의 삶을 통해 제2제정 시대의 사회 변화를 다루며, 교회의 영향력 감소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이 가져온 세속적 생활 방식을 보여줍니다. 작품은 세르주가 겪는 내적, 외적 갈등으로 인해 성직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특히 소설에서 언급되는 '파라두( Paradou)'정원의 묘사는 사실주의를 넘어서 현실을 왜곡하거나 파괴하며 시적인 대상을 창조하는 졸라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성 안토니오의 유혹 이야기를 졸라식으로 재해석하여 , 여성-자연의 악마화, 여성의 희생양화, 그리고 사제의 악마화 같은 주제들을 다룹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6VGTyb8RdA
The Langlois Bridge at Arles,1888/wikipedia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 아를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아를의 랑글루아 다>는 유화 4점, 수채화 1점, 드로잉 4점으로 구성된 연작입니다. 이 작품들은 고흐가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1888년 초에 제작되었습니다.
고흐는 원근법을 표현할 때 정확한 선과 각도를 만들기 위해 헤이그에서 직접 제작했던 원근법 틀을 사용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다리 관리인의 이름을 따서 '랑글루아 다리'라고 지어졌습니다. 19세기 전반에 지어진 이 도개교는 지중해까지 운하망을 확장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물과 도로 교통을 관리하기 위한 수문과 다리도 함께 건설되었습니다. 현재는 재건된 랑글루아 다리가 '고흐 다리(point Van-Gogh)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고흐는 일본 목판화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작품에 일본 미술의 기법을 접목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조화롭고 통일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단순화된 색채를 사용했으며, 움직임을 암시하기 위해 윤곽선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파란색과 노란색 같은 보색을 사용하여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를의 밝은 햇살과 대기 또한 일본 그림에서 본 것과 같이 에메랄드색과 풍부한 푸른색을 띤다고 언급했습니다. 고흐는 두껍게 물감을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여 빛의 반사를 표현했습니다. 운하의 도개교라는 주제는 고흐에게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The Langlois Bridge at Arles with Women Washing,1888/wikiart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 연작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 세탁하는 여인들과 함께'입니다. 이 작품은 고흐의 아를 시기 첫 번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운하 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작은 노란색 수레가 다리를 건너고, 수목과 다채로운 모자를 쓴 여인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흐는 이 작품에서 색채 이론과, "동시 대비의 법칙"을 능숙하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풀은 붉은 주황색과 초록색의 교차하는 붓질로 묘사되었고, 다리, 하늘, 강에는 노란색과 파란색의 보색이 사용되어 각 색상의 영향을 강화하여"활기차고 색채적으로 통일된 전체"를 만들어냈습니다.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수채화)>에서는 수채화를 사용하여 다리의 철물, 철 지지대, 버팀대, 체인 도르래와 같은 정교한 세부 묘사를 해냈습니다.
The Langlois Bridge at Arles with Road alongside of the Canal/wikimedia commons The Langlois Bridge /LACMA Collections(drawing)
https://www.youtube.com/watch?v=JTkBHMEsGgU
고흐의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는 여러 대중매체에 등장했습니다.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직접 밀밭을 그리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1797-1858)를 우키요에 화가 중 인기 있는 화가로 만든 <도카이도 53 역참 The Fifty Three Stations of the Tokaido> 작품입니다. 1832년 가을, 교토 여행 중 53개 역참에 묵으며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55점의 풍경 판화를 발표했습니다.
도카이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시대에 건설된 5대 간선도로 중 하나로, 쇼군의 수도인 에도(현재 도쿄)와 당시의 황궁 수도인 교토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 및 운송로였습니다. "도카이도"는 대략 "동쪽 바다 길"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도로는 혼슈 동해안을 따라 514km 길이로 이어졌습니다. 도카이도길을 따라 53개의 역참( shukuba 또는 shuku-eki)이 있었으며, 이 역참들은 여행자에게 마구간, 음식, 숙박을 제공했습니다. 여행은 보통 10일에서 2주가 걸렸으며, 하루에 22-31마일을 이동했습니다. 여성은 혼자 여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남성과 동반해야 했습니다. 도카이도 53 역참은 불교 승려 수다나가 깨달음을 찾아 방문했던 53명의 불교 성인에서 유래했습니다.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 역참> 시리즈는 1833년부터 발행되었으며, 55개의 판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판화들은 출발점인 에도의 니혼바시와 종착점인 교토의 산조 오하시 다리뿐만 아니라, 도카이도 도로의 모든 역참을 묘사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히로시게가 1832년 쇼군이 황궁에 바치는 말을 운반하는 공식 사절단의 일원으로 에도에서 교토까지 도카이도 도로를 여행한 후 제작되었습니다. 여행 중 마주친 풍경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여행 내내 수많은 스케치를 하게 했습니다. 그는 귀국 후 즉시 <도카이도 53 역참>의 첫 판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판화는 당시 새것이 개당 12-16개의 구리 동전, 즉 짚신 한 켤레나 국 한 그릇과 거의 같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히로시게는 이 시리즈를 통해 도쿠가와 시대의 가장 저명하고 성공적인 판화가가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성공으로 히로시게는 도카이도를 주제로 30개 이상의 다른 목판화 시리즈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풍경과 일상생활의 다양한 이미지를 결합하여 각 역참에 독특한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히로시게는 비 오는 장면을 의식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묘사하는 등, 이전의 유명한 장소 그림에는 없었던 서정성을 담았습니다. 그는 또한 사실주의를 통해 관람객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루미 역참을 묘사한 판화에는 아리마쓰 염색 직물을 파는 상점이 그려져 있어, 직물을 흥정하는 손님과 가마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시리즈에는 하코네의 산악 지형, 하라 역참의 후지산, 구사쓰의 유바가 모치, 오쓰의 하시리 모치, 마리코의 토로로 수프와 같은 각 역참의 특색 있는 풍경, 음식, 상품이 담겨 있습니다.
세계 예술에 가장 가치 있는 공헌 중 하나
-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
Utagawa Hiroshige<53 Stations of the Tokaido>/Totsuka(Hoeido)
Otsu Teahouse Foutain , in the Fifty-Three Stations of the Tokaido Road(Tokaido Gojusan Tsugi Ten)
wikimedia commons
Uragawa Hiroshige 53 stations of the Tokaido/Japan Objects
Utagawa Hiroshige/Okutsu from the Fitty-Three Stations /Mutual Art
https://www.youtube.com/watch?v=9SrhQbDRkFY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The Courtauld
빈센트 반 고흐의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은 1889년 1월에 그려진 작품으로, 그의 정신적 고통과 삶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고갱과의 갈등 이후 자해한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고흐의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고요.
이 그림은 반 고흐가 폴 고갱과의 다툼 이후 자신의 귀를 자른 직후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그린 두 점의 자화상 중 하나입니다. 고흐는 1888년 10월 프랑스 아를에 '노란 집'을 마련하여 고갱과 60일간 함께 살았습니다. 이 시기는 고흐가 공동체를 꿈꾸며 고갱을 초대했지만, 예술적 견해 차이와 성격 충돌로 인해 심한 갈등을 겼었던 때입니다.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고갱과의 격렬한 말다툼 끝에 자신의 왼쪽 귀 일부를 면도칼로 잘랐습니다. 이 사건 이후 고갱은 파리로 떠났고, 두 사람의 우정은 끝이 났습니다. 고흐는 1889년 1월 7일 병원에서 퇴원한 뒤 귀에 붕대를 감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고흐의 귀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기 때문에 오른쪽 귀가 잘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왼쪽 귀를 자해한 것입니다.
이 자화상은 고흐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 상태가 악화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림 속 고흐의 얼굴과 눈빛은 그의 고통과 혼란, 우울과 절망을 강렬하게 드러내며, 특히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강렬한 두 눈을 그림의 초점이자 영혼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작품의 색채 감각과 붓 터치는 정신 질환 이후에도 반 고흐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여줍니다. 강렬한 색채의 사용과 대비는 일본 우키요에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에서 독특하고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자화상을 넘어 고흐의 정신적 상태와 삶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잘린 귀와 붕대는 그이 자해와 정신적 갈등을 상징하며, 붕대를 감은 귀는 성인이 고통을 드러내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림의 배경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오는 듯한 열린 창문과 이젤 위의 빈 캔버스, 그리고 일본 목판화가 있습니다. 빈 캔버스는 그가 앞으로도 많은 작품을 그릴 것을 암시하며, 일본 목판화'게이샤가 있는 풍경'은 고흐 작품에 자포니즘과 일본 목판화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에서 고흐는 자신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Van Gogh's Self-Portraits from Museums Around the World/ Verus Art
반 고흐는 약 37점의 자화상을 그렸으며, 작품 제작 스타일 변화에 따라 자화상을 그리는 관점과 화풍도 변화했습니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불확실한 현실 세계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심리적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했으며, 자화상을 통해 자아를 찾으려 했습니다. 고흐에게 그림은 삶의 이유이자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kByUoOQ5C0
Long Grass with Butterflies by Vincent van Gogh,1890/National Gallery
풀이 길고 정리되지 않은 채 온갖 종류의 식물들과 섞여 자라고 있다.
-고흐의 편지 내용 중-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Long Grass with Butterflies>는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가 1890년 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가로 31.75인치, 세로 25.25인치 크기의 유화 작품이고요.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린 것으로, 희망을 상징하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 비교적 평온함을 주는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흐는 이 작품에서 다양한 길이의 붓놀림을 사용하여 풀을 묘사했습니다. 이는 풀의 덩어리들을 표현하듯 무리 지어 놓였습니다. 작품 속에는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등 다채로운 색상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정신적으로 가장 안정되어 있을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예리한 시선으로 더욱 선명하고 유연한 느낌을 주고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풀들을 상대로 기품 있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과 침착하게 대면하는 고흐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A closer Look at Vincent van Gogh's Grass and Butterflies/Draw Paint Academy
두 인물이 있는 덤불, 1890,6/123RF
"나의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Nincent van Gogh, 1853-1890)가 1890년 6월에 완성한 <두 인물이 있는 덤불 Undergrowth with Two Figures> 작품입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 즉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sur-Oise)에 머물던 때에 제작된 중요한 유화 작품입니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으며, 크기는 50*100.5cm로 , 현재 미국 신시내티 미술관(Cincinnati Art 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고흐의 후기 예술적 변화와 심리적 고뇌가 집약된 시기적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1890년 5월 생레미( Saint-Remy-de-Provence)의 정신병원을 자진 퇴원한 후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sur-Oise)로 거처를 옮긴 직후에 제작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정신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폴 가셰(Paul Gachet) 박사의 치료를 받으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고흐는 가셰 박사를 자신보다 더 병든 사람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지만, 둘은 서로의 불행을 알아보며 깊은 우정을 다졌습니다.
오베르 체류 기간은 고흐에게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재정적 불안감이 공존하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엄청난 창작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890년 5월 20일부터 7월 29일까지 약 두 달 동안 8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하루에 한 점 이상을 그린 경이로운 생산성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고흐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반영하면서도, 그의 예술적 재능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 두 인물이 있는 덤불>은 고흐가 오베르에서 그린 13점의 '더블-스퀘어( double-square)'형식의 대형 캔버스 중 하나로, 이는 그의 후기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짙은 금색과 주황색이 어우러진 일출이 숲을 비추는 불안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묘사합니다. 작품은 비교적 단조롭게 채색된 배경 위에 방향을 지시하는 듯한 강렬한 붓질이 두드러져 있습니다. 이는 작품에 독특한 긴장감과 깊이를 부여합니다.
고흐의 후기 화풍에서 나타나는 '더 많은 색채'와 '전통적인 기법과 새로운 기법의 혼재'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의 붓질은 아를 시기의 두꺼운 임파스토 기법에서 점차 간결하고 얇은 붓질로 변화합니다. 고흐는 일본 목판화(우키요에)에서 영감을 받아 대담한 윤곽선과 평평한 색상을 작품에 적용했는데, 이는 그의 그림을 일본풍으로 급선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이러한 일본풍의 영향이 엿보이며, 파도가 몰아치는 듯한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더 많은 색상을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작품 속 두 인물의 신원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자연 풍경 속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덤불과 나무 등 평범해 보이는 자연물들은 인물들의 감정과 분위기를 반영하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이는 고흐가 전형적인 아름다움보다 소박하고 평범한 자연에 담긴 숭고함과 내면세계를 강조하고자 했던 인간과 자연의 일체감을 보여주려는 예술적 의도로 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JFlpMrY0Nw
https://www.youtube.com/watch?v=p7-v3RvNjWw
https://www.youtube.com/watch?v=u1zly-mfbc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