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7-3. 그 많던 농민은 어디로 갔을까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 장 프랑수아 밀레



덜컹거리는 수레를 타고 눈 덮인 들판을 달리고 싶어 집니다.
당신의 작품은 씁쓸하면서도 달콤합니다.
내 영혼 깊숙한 곳을 꿰뚫는 밝은 슬픔입니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XL 사냥꾼의 수기/예스 24





<사냥꾼의 수기>는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가 1847년 <동시대인 >지에 첫 작품을 발표하며 시작된 연작 단편집입니다. 19세기 농노제 말기의 러시아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요. 1847년부터 1851년까지 총 스물두 편의 단편이 <동시대인>에 차례로 실렸습니다. 이후 1870년대에 세 편이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스물다섯 편의 작품으로 완성되지요. 이 작품은 사냥을 즐기는 귀족 사냥꾼 화자가 러시아의 광활한 자연을 누비며 만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을 수채화처럼 담백하게 그려냅니다. 명확한 줄거리보다는 화자의 관찰과 경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당시 러시아 농촌 사회의 모습을 다채롭게 보여줍니다.





가장 비러시아적인 러시아 작가





오룔주/위키백과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는 1818년 러시아 오룔 시(독수리)에서 부유한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와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838년부터 1841년까지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고대어, 역사를 공부하며 서유럽의 진보적인 사상과 자유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교육이 러시아 밖 유럽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서구주의와 자유주의에 매료되었고요.





XL






작품 <사냥꾼의 수기>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당시 전통적 서사구조에서 벗어나려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요. 톨스토이(1828-1910), 체호프(1860-1904) 등 동시대 및 후대 러시아 작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헤밍웨이(1899-1961)와 헨리 제임스(1843-1916) 등 영미권 작가들에게도 강렬한 영감을 주었고요.





이 작품은 19세기 중엽 러시아 농촌의 비인간적인 현실과 지주들의 착취를 묘사합니다. 농노 제도의 모순과 인간적 고통을 섬세하게 그렸고요. 특히, 알렉산드르 2세(1818-1881)가 이 작품을 읽고 농노 해방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1861년 농노 해방령(농노제 폐지)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문학 작품입니다.





투르게네프(1818-1883)는 문학을 통해 농노 문제에 대한 국민적 의식을 일깨우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작품은 농노제라는 '적'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쓰였다는 작가의 술회처럼, 문학이 사회 변화를 이끄는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농노해방령(1861)/위키백과



Alexander_II_of_Russia%27s_murder_02.jpg 러시아 알렉산더 2세 암살/Historymaps





투르게네프는 <사냥꾼의 수기>에서 농노를 단순한 소유물이나 교화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그려낸 점에서 혁신적인 작품입니다. 당시 다른 작가들이 농민을 주변 인물로 그리거나 교훈적인 목적으로 다루었던 것과 달리, 투르게네프는 농노들을 다양한 인간 본성과 개성을 지닌 주체적인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농노들의 비참한 생활 모습과 순박함, 삶의 지혜를 인간미 넘치고 서정적으로 표현했고요. 농노제도의 폐단을 직접적으로 강조하거나 명시하지 않고, 그들의 삶 자체에 시선을 두어 객관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이러한 "보여주기" 방식을 독자로 하여금 농노제의 부당함과 인간적 존엄성 상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작품 속 다양한 인간 유형들 중 <호리와 칼리니치> 편은 농노들 사이에서도 확연히 다른 두 가지 인간형을 제시합니다. 호리는 뛰어난 현실 감각과 지혜를 지니고 앞날을 개척해 나가는 실용주의자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반면, 칼리니치는 자연을 벗 삼아 온화하고 겸손하며 순박한 삶에 만족하는 이상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이들은 지주나 귀족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습니다. 순박함과 성실함, 진실함에서는 오히려 그들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투르게네프는 농노들이 '농노'라는 단어로 묶어 똑같이 취급할 수 없는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사냥꾼의 수기/예스 24




<산딸기샘> 편은 농노들이 겪는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농노 스툐푸시카는 농노제가 유발한 비인간화의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누구와도 혈연관계가 없고 아무도 그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거도 없는 존재로 묘사되고요. 그에 대해 알려진 유일한 정보는 그가 "다른 사람의 재산"이라는 것뿐입니다. 이는 농노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박탈당하고 소유물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화자는 그의 상황을 그저 "이상하다고 관찰할 뿐, 감상이나 판단 없이 삶의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의 말투가 전혀 농부의 말투가 아니었다.( ...)
그의 말은 사려가 깊었으며 신중했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나는 이제까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크라시바야 메차의 카시안>-






작품 <크라시바야 메차의 카시안> 편에서 투르게네프는 농노들이 무지몽매한 존재가 아니라, 깊은 사유와 철학적 통찰을 지닌 인물일 수 있음을 카시안을 통해 보여줍니다. 카시얀은 종교심이 충만하고 자연 철학자의 모습을 지닌 농노로, 그의 말은 사려 깊고 신중하여 화자를 놀라게 합니다. 농노의 신부을 뛰어넘는 그의 지적 깊이를 인정해 주고요. 이는 하층민의 삶 속에서도 인간적인 깊이와 정신적 풍요로움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오늘은 종교화(이콘화)와 귀족들을 위한 초상화 그리고 아카데믹한 역사화가 대부분이던 러시아에 평범한 농민의 모습과 그들의 일상을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러시아의 농민화가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Alexey Venetsianov, 1780-1847)의 그림을 살펴봅니다. 더불어 바르비종파의 멤버이고 프랑스 농민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낸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그림도 찾아갑니다.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Alexey Venetsianov, 1780-1847)는 러시아의 저명한 화가로, 특히 러시아 농민 생활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 농민을 주제로 한 장르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요. 러시아 미술사에서 농촌 세계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최초의 화가로도 불립니다.




moscow-st-petersburg-map.jpg Moscow & St.Petersburg/ Maps Moscow





귀족 출신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자신의 놀이 친구들을 그리는 것을 즐겼습니다. 1802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측량 기사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18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저명한 초상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 Vladimir Borovikovsky,1757-1825)를 만나 도움을 받았고요.





Portrait of Artist's Daughters Alexandra & Felisata by Alexey Venetsianov, 1830s/Alamy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는 이반 테레베노프와 함께 프랑스인과 귀족들에 대한 캐리커처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1819년에는 공무원 직을 그만두고 아내 마르파 아파나시예브나와 두 딸 알렉산드라, 펠리치타와 함께 트베리 현의 사폰코보 마을로 이주하여 농민 생활을 그리는 데 전념했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일상적인 삶, 그 기쁨과 슬픔 속에 있다.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베네치아노프는 19세기 초 미술 아카데미에서 농노 출신 학생들이 추방당하는 사건에 분노하여, 하층 계급 출신들을 위한 작은 미술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특히 1818년 아버지의 유산으로 트베리 현 사폰코보 마을의 땅을 구입한 후, 그곳에 학생들을 모아 안정적인 교육을 제공합니다. 그는 아카데미와는 달리 주변의 꽃 , 가구, 실내 장식 등을 스케치하며 실제 생활에서 접하는 대상들에 주목하도록 지도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대중 미술 학교의 전신으로 평가받고요.





그의 문하에서 배운 젊은 화가들은 훗날 '베네치아노프 파'로 불리며 러시아 미술사의 중요한 풍속화가 그룹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명칭은 특정 이론이나 양식을 공유하는 학파의 성격을 넘어, 스승과 제자 관계를 통해 형성된 예술적 계보와 주제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합니다. 베네치아노프 파는 러시아 자연과 농촌 생활을 미술의 주요 주제로 부각하며, 풍속화 및 자연 풍경화의 근간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네치아노프 파의 등장은 19세기 전반 러시아의 독특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 농민들은 사실상 지주의 소유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농민의 삶은 대체로 가난하고 무지하며 미적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Alexey Venetsianov,1780-1847)는 이러한 통념에 도전하며 역사화를 강요하는 아카데미즘을 극복하고 농촌과 농민의 일상을 화폭에 담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농민의 삶에도 인간적인 존엄성과 미학적 가치가 있음을 미술을 통해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농민들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가 아닌,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순박하고 정직한 존재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베네치아노프의 평화로운 그림 속 풍경이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투철한 의식까지는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노프 파의 작품은 농민의 삶과 노동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러시아 풍속화 및 사실주의 미술의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가집니다.






1200px-Kramskoy_Portrait_of_a_Woman.jpg 이반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 1883/위키백과




베네치아노프 파의 영향은 이후 '페레드비즈니키(이동전람회파)'와 같은 동시대 및 후대 미술 운동에도 이어졌습니다 '페레드 비즈니키(이동전람회파)'는 베네치아노프 파가 개척한 민중과 현실주의 주제를 계승하며 더욱 사회비판적이고 심리적으로 심층적인 표현을 발전시켰습니다. 1870년경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화가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그림의 주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베네치아노프에 의해 발아된 러시아 리얼리즘 풍속화는 러시아 회화의 유머와 해학 코드인 '풍자적 풍속화'를 거쳐 '비판적 리얼리즘 풍속화'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실리 푸키레프(1832-1890)의 '불평등한 결혼'(1883)/바실리 페로프(1833-1882)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1885)>







1862.-the-unequal-marriage-vasily-vladimirovich-pukirev.jpg 바실리 불라디미로비치 푸키레프(1832-1890), 불평등한 결혼,1862/Byron's Muse-WordPress.com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1885, 바실리 페로프(1833-1882)/ 더 칼럼니스트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바르비종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특히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하며,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 화가로 불립니다.




mini-map-Greville-Hague.jpg Map of France




밀레는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y)의 그레빌 아그( Greville-Hague)에 있는 그 뤼시(Gruchy)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자랐고, 가톨릭 사제였던 삼촌의 도움으로 라틴어와 근대 문학 작가들에 대해 배웠습니다. 1833년, 재능을 인정받아 셰르부르(Cherbourg)로 보내져 초상화가 폴 뒤무셸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835년에는 뤼시앵 테오필 랑글루아에게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았고요. 1837년에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 에콜 데 보자르로 이주하여 폴 들라로슈(1797-1856)에게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cherbourg-paris-1420504.png








1840년, 그의 첫 초상화가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고, 이후 셰르부르(Cherbourg)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활동했습니다. 1843년 파리 살롱에서 작품 전시를 거절당하고 아내 폴린이 폐병으로 사망하자, 다시 셰르부르로 돌아갔습니다. 1845년에는 카트린 르메르(Catherine Lemaire)와 함께 르아브르(Le Havre)로 이사했고, 1853년에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images?q=tbn:ANd9GcSeBFjJEnM5im8oaQnVkVCvFVPqVHJPNhn5c5QzJe2m3NP3OsGBUhSUkXtOyUH-Cvl-OFI&usqp=CAU world map




1840년대 중반 , 밀레는 콩스탕 트루아용( Constant Troyon, 1810-1865), 나르시스 디아즈(Narcisses Diaz, 1807-1876), 그리고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1812-1867)와 같은 화가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바르비종파(Barbizon) 화가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는 또한 명암 기법에 많은 영향을 준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와 후원자가 된 알프레드 상시에( Alfred Sensier, 1812-1867)를 만났습니다. 1847년 파리 살롱에서 < 나무에서 떨어진 오이디푸스>로 처음 성공적인 전시회를 가졌고, 1848년 그려진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 The Winnower>(1847-1848)은 정부에 의해 직접 구입되기도 했습니다.





The Winnower by Jean Francois Millet, 1848/Pinterest





1849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으로 이주했습니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농민 화가로서 전원생활의 정경을 그렸고요. 그는 "인간적인 측면의 예술이 가장 감동을 준다"라고 말하며, 시골 생활과 농업 노동자들을 강렬하고도 엄숙하게 묘사했습니다.





바르비종파 예술가들은 스튜디오 중심의 프랑스 미술의 초점을 시골 풍경과 일상생활에 대한 보다 사실적인 묘사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밀레는 이러한 자연주의를 추구하며 시골 풍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는 작품에서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자연을 바탕으로 작업했습니다. 바르비종파는 자연을 직접 관찰하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leGqKobJfc



Provins-Fontainebleau.jpg Annie and Rich's Travel Adventures







밀레의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초기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클로드 모네(1840-1926)의 노르망디 풍경화와 조르주 쇠라(1859-1891)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고요.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밀레의 <만종>에 매료되어 "밀레의 만종에 숨겨진 비극적인 신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salvador-dali-in-greville-hague-france-on-january-04th-1975.jpg?s=1024x1024&w=gi&k=20&c=meyRP7zHcWIdGFnjGsABKM_u-ocXdeKsWI74iCdYY4Y= Salvador Dali in Gruchy/Getty images




초기에는 초상화와 신화적인 주제를 그렸지만, 1848년 이후에는 농부나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직접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그림은 종종 소박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띠며, 고단한 농민들의 삶을 시적이고 우수에 찬 분위기로 표현했습니다.




밀레는 리얼리스트로 분류되지만, 풍경보다는 농민 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는 점에서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차별점을 가집니다. 그의 작품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찬사를 받았으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정성과 노동 계급에 대한 깊은 공감은 관람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xrUfpoYnq4




민족을 초월한 예술은 없다.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


moscow-location-on-the-russia-map.jpg Moscow.Russia/ontheworldmap.com





In the Ploughed Field,1820/wikipedia





알렉세이 베니치아노프(Alexey Venetsianov, 1780-1847)의 <In tne Ploughed Fields:Spring>(1820) 작품입니다. 사실주의 양식의 유화 작품이고요. 러시아 농민의 삶을 이상화하여 보여주는 대표적인 풍속화입니다. 이 작품은 현재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14번 방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눈이 녹고 푸른 풀이 돋아나는 땅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림 속 여인은 두 마리의 말을 이끌며 밭을 가는 모습이 가볍고 경쾌하게 표현되어 있고요. 특히 여인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미덕을 강조하기 위해 말보다도 더 크게 그려졌습니다. 작업복이 아닌 축제용 의상을 차려입고 있어, 농민의 삶이 의도적으로 이상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in the Fields :Srpring ,detail/wikipedia




이 그림의 매력은 여인의 시선이 들판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아이는 봄 풍경의 핵심 주제로 해석됩니다. 아이에게서 이 밭의 풍요보다 더 큰 풍요를 기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인의 시선은 또한 자신의 땅이 아니더라도 농민들이 토지에 대해 갖는 모성애를 보여줍니다.






In the Ploughed Field:Spring on a postage stamp of the USSR in 1955/wikipedia






밀레가 살았던 1814년부터 1875년까지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과 왕정복고, 혁명, 제정, 그리고 다시 공화정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정치적 변화와 함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다양한 문화 사조가 공존하던 시대입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 중심 사회에서 산업화로 전환되는 시기였고요.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고 과거와 전통에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낭만주의 (1815-1850) 풍조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했고요. 특히 1830년 7월 혁명을 기점으로 낭만주의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문학에서는 우수, 연민, 우울을 주제로 한 시가 유행했습니다. 라마르틴의 '명상시집'(1820)을 통해 낭만주의가 구체화되었고요. 빅토로 위고( Victor-Marie Hugo,1802-1885)는 낭만주의의 대변자로서 정치적 자유와 사회주의를 옹호하며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과 같은 작품으로 보통 시민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연극에서는 자유로운 감성을 반영한 낭만극이 등장했고요. 회화 분야에서는 나폴레옹 몰락 이후 고전주의와 결별하고 형식보다 색채를 중시하며 전설, 이국적 정취, 미적 경관을 소재로 삼는 낭만주의적 사조가 나타났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는 7월 혁명을 주제로 한 '자유의 여신상'을 통해 자유를 위한 투쟁의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고요.






The Stone Breakers by Gustave Courbet, 1849/wikipedia





1830년부터 19세기말까지 프랑스에서는 고전주의가 후퇴하고 낭만주의가 1850년대 이후 쇠퇴하면서 사실주의가 부상했습니다. 사실주의는 '실물'을 의미하며 관념과 상상에 대립하는 경향으로, 쿠르베가 자신의 작품 <돌 깨는 사람들 The Stone Breakers>(1849) 전시회에서 자신을 '사실주의자'라고 칭하며 처음 사용했습니다.





문학에서는 스탕달(Stendhal,1783-1842)의 '적과 흑'이 시대의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 역할을 했고요. 발자크(Honore de Balzac,1799-1850)는 '인간 희극'에서 7월 혁명 이후 부르주아 사회를 노출하는 사실주의 대가로 평가받았습니다. 플로베르( Gustave Flaubert, 1821-1880)는 '보바리 부인'을 통해 소설이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료 조사를 중시하는 정확한 소설 방법론을 제시했고요.





밀레는 1849년 6월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 외곽의 바르비종(Barbizon)으로 이주하여 주위의 가난한 농부들을 소재로 농촌과 농민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바르비종파 화가들(1835-1870)은 아틀리에의 실내 제작을 지양하고 직접 자연으로 나아가 풍경을 그리는 자연주의 양식을 지향했습니다.




밀레는 많은 자연주의 화가들과 달리 전원 풍경의 사실적 묘사를 넘어 땅에 발을 딛고 선 농부들의 생활상과 건강한 노동의 의미를 표현하고 자 했습니다. 당시 비평가들은 농민의 모습만 그리는 밀레를 혁명적 성향의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했지만, 밀레는 자신이 본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The Sowerby Jean Francois Millet, 1850, Museum of fine Arts, Boston/wikipedia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1850) 작품입니다. 농민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실주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은 당시 평단과 대중에게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귀족 취향의 미술계에서는 '거칠고 미학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고요. 노동자 계층과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진정성과 깊이 있는 상징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농촌의 삶을 다룬 여러 작품 중 하나로, 당시 농민 생활을 진지하고 존엄하게 묘사했습니다. 농민들의 고난과 그 속에 담긴 깊은 감정까지 표현하고 있고요. 그는 우아하거나 특별할 것 없는 시골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생명의 원천을 담아냈습니다. 1850년 살롱에 출품된 작품으로, 씨를 뿌리는 남자의 역동적인 자세와 약간 비스듬한 지평선이 불안한 배경을 형성합니다.





이 작품은 산업혁명 이후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19세기 중엽 유럽 미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동의 고귀함과 농촌 생활의 진정성을 강조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고통 속에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고요.




작품의 주인공은 깊은 구름빛 하늘 아래, 황갈색 들판을 가로질러 씨를 뿌리는 남성입니다. 그의 얼굴은 대부분 그림자로 덮여 있어 개별성보다는 '집단적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당당한 걸음걸이와 씨앗 자루를 움켜쥔 모습은 고대 조각상에서 느껴지는 영웅적 긴장감을 띠고 있고요. 밀레는 인물을 캔버스 거의 전면에 배치하고 약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점을 사용하여 관람자가 그를 단순한 농부가 아닌 '땅 위에 생명을 뿌리는 자'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이는 성서 속 '씨 뿌리는 자'의 은유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밀레는 농촌 노동에 종교적인 주제를 대입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거친 색조가 지배적입니다. 황갈색 대지와 붉은빛 상의, 청색 바지, 가죽 부츠의 색채 대비는 노동의 육체성과 땅의 황량함을 드러냅니다. 반면, 뒤편 하늘에서 퍼져 오는 푸른빛은 새로운 생명의 기운, 즉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림의 구도는 인물이 오른손을 들어 씨를 흩뿌리는 장면을 통해 동작의 연속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합니다. 이는 고전주의 회화보다는 근대 사진술이나 인상주의의 순간 포착에 가까운 감각을 보여줍니다.



밀레는 모든 현대 화가의 영혼을 가진 사람
-빈센트 반 고흐-







이 작품은 19세기말 이후 사실주의 회화와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는 이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여러 차례 오마주 작품을 그렸습니다. 고흐의 1888년 작 '씨 뿌리는 사람' 또한 태양 아래 노동하는 인간의 고독과 숭고함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The Sower by Vincent van Gogh/wikimedia Commons





밀레의 그림을 언제나 다시 그려보고 싶었다.
그 농촌풍경과 농부들은 저의 멍든 가슴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the-sower-1888-vincent-van-gogh-1853-1890-dutch-netherlands-post-impressionism-D81KFW.jpg The Sower by van Gogh,1888/Alamy










https://www.youtube.com/watch?v=gkdcNq9VSHU




World-Heritage-locator-Saint-Petersburg-Russia.jpg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Russia/Britannica



Girl in a Kerchief/WikiArt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Alexey Venetsianov, 1780-1847)의 <두건을 쓴 소녀 Girl in a Kerchief>(1830) 작품입니다.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진 유화 초상화이고요. " Kerchief"는 머리나 목에 두르는 천 조각을 의미합니다. "Kerchief"는 고대 프랑스어 'couvre-chef'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머리를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머리의 일부를 덮는 데 사용되는 천 조각이 어린 소녀들의 순수하고 평온한 눈망울과 어우러져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러시아 여성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크기는 27*38cm이며,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국립 박물관( The State Russian 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A Peasant Girl with a Calf 1820s/Ocean's Bridge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Alexey Venetsianov, 1780-1847)의 < 소녀와 송아지 A Peasnat Girl with a Calf 소녀와 송아지>(1820) 작품입니다. 목가적인 러시아 농촌 생활을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고요. 러시아의 평온한 농촌 풍경과 농민의 삶을 사실주의 화풍으로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노프가 1820년대 초에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생활 속의 장르화를 그린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유화 작품이고요. 소녀의 순박한 이미지와 어린 송아지의 맑은 눈이 잘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흑색톤의 따뜻한 색상이 평온한 느낌으로 친밀하게 다가옵니다.








The Goose Girl at Gruchy, National Museum Wales







장 프랑수아 밀레( Jean- Francois Milleet, 1814-1875)의 <그뤼시의 거위 치는 소녀 The Goose Girl at Gruchy>(1854-1856) 작품입니다. 19세기 프랑스 농촌의 일상과 자연의 조화를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Normandy%20map%20296.jpg Normandy/Durham World Heritage Site




이 그림은 세로 방향으로 그려진 초상화( Portrait)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밀레가 1854년 여름에 자신의 고향을 방문했을 때 영감을 받아 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작품 속에서 거위 치는 소녀 뒤편으로는 거위들이 개울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소녀의 아련한 시선은 활기차게 울부짖으며 물속을 헤엄치는 거위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배경에는 그뤼시 마을의 집들이 보입니다. 밀레의 그림은 19세기 후반의 전통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그는 농민들의 삶을 미화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농촌 생활의 어려움과 존엄성을 동시에 보여주려 했습니다.





The End of the Village of Gruchy by Jean-Francois Millet/Alamy









At the Harvest-Summer by Alexey Venetsianov ,1827/Arthive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Alexey Venetsianov, 1780-1847)의 <수확-여름 Harvest-Summr>(1827) 작품입니다. 사실주의 (Realism) 양식으로 제작된 작품이고요. 농노의 이상적인 삶을 묘사하며, 러시아 시골 생활의 고요한 아름다움과 여름 수확의 따뜻함, 활력을 담고 있습니다. 유화작품으로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The Tretyakov Gallery)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농민들의 일상과 노동을 면밀히 관찰한 여러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는 당시 "가난하고 무지하며 그들의 삶에 미적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혁명적인 업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농민 노동의 숭고함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농민들의 삶에도 귀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노랗게 익은 들판을 배경으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수유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대지의 여신이 생명을 가진 모든 만물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것처럼 성스럽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만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요. 평온한 자연, 삶을 이끌어주는 노동, 그리고 사랑하는 어린 생명이라는 요소를 통해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필수 충분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That is, those Fthers Dinner!,1824/wikiArt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캔버스에 유화 작품이고요. < That is, those Father Dinner!>라는 제목으로 직역하면 ' 여기, 아빠의 저녁이 있다!'는 뜻이고요. 텅 빈 곡식통과 이를 바라보는 아이의 걱정스러운 모습. 이런 걱정을 해야할 나이는 아니지만, 당시 농민 생활의 어려움을 체감할 수 있게 하는 장면입니다. 소년의 심각한 모습을 진지하게 읽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도 어린 소년의 마음만큼 무거워 보입니다.






Hay making by Alexey Venetsanov/WikiArt.org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1780-1847)의 < Haymaking> 작품입니다. 그림은 덥고 긴 건초 작업 시간의 분위기를 충실히 전달합니다. 수확기의 자연의 풍요로움도 느껴지고요. 작품 중앙에는 아기를 무릎에 눕혀 젖을 먹이는 농부 여인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쇠스랑과 같은 작업 도구가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기 수유를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습입니다. 앳된 여인의 얼굴에서는 감당해야 할 여러 몫의 역할이 조금은 버거워 보이기도 합니다. 뒤에 높다랗게 쌓아 올려진 건초더미가 오늘의 수고로움과 풍요로움이 하나임을 말해 주는 것 같고요.





Hay making by Jules Bastien-Lepage/wikimedia commons







쥘 바스티앙 르파주 (Jeles Bastien-Lepage, 1848-1884)의 < 건초 만들기 Hay Making>(1877) 작품과 비교해 보세요. 르파주를 파리 화단의 스타로 만든 작품입니다.




밭에서 고된 노동을 마치고 있는 두 명의 농부, 남자와 여자를 묘사합니다. 전경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은 피로로 인해 초췌해 보입니다. 그녀의 지친 표정과 자세는 극도의 피곤함을 나타내고요. 그녀의 눈은 멍하니 고정되어 있고, 입은 벌어져 있습니다. 늘어진 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녀의 피곤함의 강도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녀 옆에는 내 집 안방인냥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잠을 청하는 남자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림의 구성은 매우 사진적입니다. 지평선이 유난히 높게 설정되어 캔버스의 대부분을 건초로 채우고 있습니다. 하늘은 캔버스 상단의 좁은 부분만 보이고요. 이러한 과장된 원근법의 사용, 그리고 인물을 가까이 배치하는 구성은 자연주의 스타일 내에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줍니다.





The Gleaners, 1857/wikipedia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유화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1857)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9세기 농촌 생활을 예술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그림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밀레는 이 그림에서 추수 끝난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세 명의 가난한 농민 여인을 묘사했습니다.






밀레는 쿠르베( Corubet)와 마찬가지로 그림의 주제에 대한 정치적 관점을 명확히 드러내며 상류층을 비판하기 위해 전원적인 풍경과 농부의 노동을 즐겨 그렸습니다. 이 작품 역시 당시의 사회적 ,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강력한 해설이며 농민들의 삶의 고충을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특히 이삭을 줍는 행위는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여겨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농민들의 비천한 삶을 공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로인해 유명세를 탔고요. 사실주의 화풍으로 단순하고 존엄한 구성에 사람과 자연 사이의 친밀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 작품은 1857년 처음 전시되었을 때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주의적"그림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세기말까지 프랑스 생활을 묘사하는 가장 인기 있고 많이 복제된 그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밀레의 평판은 초기 적대적이고 모호했던 평가에서 점차 사회 비판적 그림과 그 예술가를 제도적으로 수용하는 쪽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Etching of the Gleaners,1855/wikipeida




밀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렸다.
- 빈센트 반 고흐-




Harvesters Resting (Ruth and Boaz), 1850-53/wikimedia commons





장 프랑수아 밀레의 < Harvesters Resting (Ruth and Boaz)>(1850-1853)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성경 속 '룻과 보아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밀레가 살던 당시의 농촌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원래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 룻이 추수꾼들이 남긴 곡식을 줍는 장면을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밀레는 1853년 살롱에 이 작품을 출품할 때 제목을 변경하여 동시대적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67.3*119.7cm입니다.




Harvesters Resting (Ruth and Boaz), 1850-1853/Brookly Museum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의 주요 곡창지대인 샤이( Chailly) 평원입니다. 1850년대에는 부자 지주들이 농민들의 복지보다 개인적인 이득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림 속 이삭 줍는 여인의 초라한 묶음은 그녀 뒤에 쌓인 곡식 더미와 대조를 이루며 처량함을 더합니다. 밀레의 '보아즈'는 성경 속 지주가 아니라 부유한 남자의 땅에서 일하도록 고용된 소작농으로 그려집니다.






훌륭해, 이 그림은 시야.
-빈센트 반 고흐-





The Angelus, 1857-1859/wikiepedia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The Angelus>(1857-1859)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들판에서 감자 바구니를 앞에 두고 기도하는 두 농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66*55.5cm입니다. 현재 이 작품은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밀레는 이 작품을 미국의 부유한 상인 아들인 토머스 골드 애플턴의 의뢰로 그렸지만, 애플턴은 결국 이 그림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원래 작품명은 <감자 수확을 위한 기도 Prayer for the Potato Crop>였으나, 의뢰인이 그림을 가져가지 않자 밀레는 교회 첨탑을 추가하고 제목을 '만종 The Angelus'으로 변경했습니다.






<만종>은 농촌에서의 소박한 삶과 인간의 신앙심을 강조한 작품으로, 19세기 중반 농업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림 속 두 농부는 하루 일과를 마치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만종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측 뒤쪽 지평선에는 교회의 모습이 작게 그려져 있고요. 밀레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판에서 일할 때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항상 일을 멈추고 만종 기도를 드리게 했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 만종'(Angelus= 삼종기도)은 가톨릭에서 아침, 정오, 저녁 하루 세 번 교회 종소리에 맞춰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기도의 이름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고 알린 것을 의미하는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 즉"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하니"라는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19세기 프랑스 시골 지역은 종교적이었고, 밀레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이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만종은 기도이자 동시에 일상생활이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 초기에는 이 그림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밀레가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사회주의자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밀레는 강한 종교적 신념에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향수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습니다.





Archeological Reminiscence of Millet's 'Angelus',1933 by Salvador Dali/Salvador Dali Paintings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는 밀레의 <만종>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여러 작품에 이 그림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사용했고요. 달리는 그림 속 경건한 분위기가 실제로는 슬픔에 가깝고, 남녀 농부가 감자 바구니가 아닌 아이의 시신 앞에서 애도하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라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종>의 X선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 발치에서 '길쭉한 기하학적 형태'가 발견되었고요. 달리는 이를 관이라고 주장했지만, X선 이미지만으로는 명확히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X선 검사를 통해 감자 바구니 아래에 밑그림이 존재했으며, 이 그림이 평화로운 순간을 묘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원래 그림은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 들판에서 가난한 농부 부부가 죽은 아기를 묻기 전 마지막 기도를 하는 모습이었고, 친구의 조언으로 밀레가 아기의 관을 지우고 감자 바구니를 그려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논란과 X선 투시 결과는 달리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밀레는 이 작품을 처음 1,000프랑(현재 $1,263.23)에 팔았으나, 30년 후에는 75만 프랑(현재 $947,377.50)이라는 거액에 판매되었습니다. 1889년 루브르 박물관이 이 작품을 매입하려 했을 때 프랑스 전역에서 애국적인 열기가 일었습니다. 미국 미술협회와의 경합 끝에 553,000프랑에 낙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09년에 프랑스 국립 소장품으로 기증되어 1910년 1월 15일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 소장품으로 편입되었습니다. 1986년에 오르세 미술관으로 이전되어 현재까지 소장 중입니다. 밀레의 작품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면서 작가나 그 상속인이 작품 재판매 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추급권 droit de suite)이라는 프랑스 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An Illustrated Guide to Artist Resale Royalties(aka 'Droit de Suite'/Hyperallergic




추급권은 미술 저작자가 원 저작물을 최초 양도한 이후에도 재판매될 때 수익의 일정 비율을 분배받을 권리를 말합니다. 이는 미술 작품 등 예술 작품의 재판매 시, 창작자 또는 그 상속인에게 판매 이익의 일부를 지급하는 권리를 의미하며, Artist's Resale Right(ARR)라고도 불립니다. 이 제도는 예술가의 작품이 두 번 이상 재판매될 경우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예술가나 유족에게 돌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는 밀레의 '만종'그림이 저렴하게 팔렸다가 나중에 막대한 이윤을 남기며 재판매된 사례와 같이, 원작자는 빈곤한 삶을 사는 반면 작품 소유주가 큰 이익을 얻는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도입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KjZ3w5MtBo





https://www.youtube.com/watch?v=DJx5Y5zI2Fk



https://www.youtube.com/watch?v=kkQCW8YSeh8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