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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레핀의 사회적 반응& 수틴의 감정적 반응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 & 카임 수틴

 


"인내와 시간만큼 더 강한 전사는 없다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중>-



1812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위반한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습니다. 뚝심과 인내심을 지닌 덕장으로 묘사된 러시아 측 쿠트조프 장군의 전략적 후퇴와 초토화 전술로  프랑스군의 발이 묶였습니다. 속도전이 생명력이었던 나폴레옹 군대는 혹독한 기후와 보급 문제로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 시간을 참고 일생을 산다고 하잖아요."

"벌레는 양배추를 갉아먹는 것 같지만 벌레가 먼저 죽잖아요."

 "나를 돌멩이처럼 눕히시고, 빵처럼 일어나게 하소서."

 "물방울이 더 차지하려고 더 퍼져 나가다 사라진다."


-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중 -



위의 대화 내용은 전쟁 중 포로로 잡힌 베조프 백작가문의 피에르가 함께 포로생활 중인  50대 농노의 위로와 지혜를 들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때 들었던 문장입니다. 



한때 피에르는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숭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침략자의 가면을 쓰고 다시 쳐들어 온 프랑스 군의 잡혀 포로가 됩니다. 포로 생활 중에 만난 러시아 민중으로부터의  위로, 그들의 지혜에 놀라워하며, 똘똘 뭉친  애국심에 감동합니다. 지금껏 러시아를 지켜낸 것은 귀족의 화려함이나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소박하고 진실한 러시아 민중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러시아 출신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깊이 수직으로 파고드는 소설이라면,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의 <전쟁과 평화>는 카메라로 한 발 떨어져  파노라마 같은 수평선 위로 점점 확장되어 가는 소설입니다. 역사, 문화, 인물을 담아낸 러시아 백과사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눈치 빠른 분들은 아셨겠죠. 오늘은 톨스토이를 좋아해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 던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IIyaRepin, 1844-1930)과  유대계 출신 러시아 작가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작품을 보러 갑니다.

 








러시아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특히 인물과 인물 사이 감정선을 예민하게 표현한 예술가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고요. 특히 그는 모든 그림이 잘 짜인 소설 같은 밀도를 갖고 있습니다. 민중의 삶과 꿈을 호소력 있게 전달한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IIya Repin, 1944-1930)을 소개합니다.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19세기말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 1819-1877)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던 작품 스타일과 결이 같습니다.




1844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츄구예프에서 한 하급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크라이나? 분명  '러시아' 작가라고 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물음표 말풍선이 잠깐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KBS뉴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을 선언합니다. 구체적으로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가 독립선언법을 채택합니다.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가결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 선언 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국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흑해 함대와 세바스코 폴 해군 기지의 사용권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1997년, 양국은 흑해 함대를 분할하고 러시아가 일부 세바스톨 폴 해군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Vladimirovich Putin, 1952- )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같은 민족으로 보며, 독립된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Viktor Fedorovich Yanukovych , 재임기간 2010-2014) 대통령이 축출된 이후,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가  크게 악화됩니다.  2014년 이후, 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반군을 지원하며, 돈바스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갑니다.




2022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대규모로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관계를 최악으로 끌고 갔습니다. 러시아의 우세를 점치며, 쉬이 끝날 것 같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주변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고, 양측의 소모전이 지속되며 러-우 전쟁은 장기전으로 전환되고 있는 중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maP_rqR4Zc




볼가강/위키백과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작품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1870-1873)입니다. 이 작품은 레핀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며, 사후에도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림1.Barge Haulers on the Volga,1870-1873,wikipedia/그림2. The Little Pastry Chef,1922-23,오랑주리 미술관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재학 시절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강변에 들렀다가 한 무리의 노동자들과 맞닥뜨리게 됩니니다. 남루한 노동자들이 가슴에 빳빳한 밧줄을 두르고 커다란 배를 힘겹게 끄는 모습이 레핀의 시야에 들어옵니다. 1870년대 러시아의 가난한 항구 노동자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레핀의 영원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그의 작품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레핀은 1870년대  러시아 회화의 대표적인 이 작품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1870-1873)를 통해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습니다.





<그림 1>. 먼저 작품 크기(131.5츠*281cm)에 압도당합니다. 감상자의 눈높이로 시선이 맞추어져 있어 항구 노동자들의 땀냄새가 '훅'하고 코 끝에 먼저 와닿을 것 같습니다. 멀리서도 그들의 피로도가 금방 전달이 되는 듯하고요. 오늘날 같으면 기계가 대신할 자리를 사람이 한 무리의 동물처럼 인격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는 힘껏  배를 끌고 있는 모습입니다.



Burlak Women,1900s/wikipedia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굴비처럼 엮여 노예처럼 부려지는 듯한 그녀들의 모습이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루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하층민 노동자들에게 어쩌면 이런 일도 고맙다고 굽신굽신 해야 할 처지로구나! 싶었습니다. 이 무리에조차  끼지 못한 누군가는 또 굶어야 했을 테니까요.





소금 한 움큼 월급으로 받기 위해 짠내 나게 쥐어짜 던 고대 로마 병사들의 삶처럼 부둣가 인부들의 '소금인형'같은 삶이 충격과 함께 생채기를 냅니다.  피로로  얼룩진 얼굴 표정에 과연  '희망'이란 있는 것인지, 있다면 언제쯤인지  물음표가 먼저 떠오릅니다. 반복된 노동이 만들었을 강인한 인부들의 육체와 몸동작까지 열한 명 뱃사람의 독특한 개성이 레핀의 손끝 감각을 통해 모두 드러납니다.





러시아 '이동파'의 대가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이 그린 이 작품은 한 마디로 그들의 고통, 분노, 열정, 그리고 희망이 함축된 작품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이동파(Peredvizhnik)는 19세기말 러시아에서 활동한 사실주의 미술 운동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을 펼친 유파입니다.




파리의 작가들이 캔버스의 화구를 들고 햇빛 찬란한 야외로 나가 인상주의자가 되었을 때 러시아 작가들은 캔버스의 화구를 들고 민중들의 삶으로 들어가 이동파가 된 것이죠. 정신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그들을 위해 화가들이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를 한 겁니다. 민중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여러 도시로 옮겨 다니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동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요.





화가들은 당시의 아카데미즘의 권위에 대항하여  사실주의적 접근 방식을 통해 사회적 문제와 민중의 삶을 그려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움 자체보다는 도덕적, 사회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의 농노제의 유물과 자본주의의 악덕을 적발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동파 운동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이콘화(성상화)의 전통을 깬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킨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17세기말 표트로 대제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근대화, 서구화, 귀족화된 서유럽 미술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1923년까지 존속한 러시아의 이동 파는 세계 미술운동사에 유례없는 실험이자 성과였습니다. 철두철미하게 반체제 성격을 지닌 미술 운동이었지요.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태가 됐습니다.



이콘화: 이콘의 역사적 배경은  비잔틴 제국에서 시작됩니다. 이콘은 그리스어로 "형상"이나 "모상"을 의미합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성경 인물과 교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종교적 상징물로, 신앙의 대상과 교리, 성경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콘은 그림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형화된 구도와 신학적인 인체비례를 사용하여 제작되고요. 중세 러시아에서는 사제나 수도자들이 이콘을 그렸습니다. 이는 믿음과 영성 수양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러시아의 표트르 1세, 1672-1725년까지 재위했습니다. 러시아의 근대화와 서구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능력주의 기반의 관료제 도입, 러시아 군대의 근대화(해군 창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1703),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 승리(발트연안 획득),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설립하고 서구식 교육 도입했습니다.




"One of the Sketches for ' Burlaki' ", 1870,wikipedia/ "Burlaki on the Volga, Variant sketch"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은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항구 노동자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치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그들과 먼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대와의 거리감을 좁혀야 작가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가능성이 높잖아요. 그러나 그림은 쉽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레핀은 볼가강 뱃사람들을 소재로 수많은 드로잉과 유화를 밑그림으로 그렸습니다.





1900s photograph of burlaks on the Volga River/wikipedia
Barge Haulers on the Volga/wikimedia commons & Erch2014






무거운 시대에 짓눌려 고통받는 노동자의 모습,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면서 내적인 견고함을 갖게 된 강한 민중상의 모습, 사회 모순에 억눌려 배반적인 삶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이글거리는 분노에 찬 모습,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그리며 변혁을 꿈꾸는 어린 노동자의 모습,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다른 인부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절망하는 노동자의 슬픈 현실의 모습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진정성을 높였습니다. 특히 러시아 민중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흔적을 캔버스에 옮겨 저마다의 성격과 심리, 자세와 동작을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게 살려냈습니다. 역동적인 구성과 분명한 캐릭터로 관람객들에게 진심을 다해 다가갔습니다.






그림 전반에 흐르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완감한 긴장미입니다. 그리고 순순히 강가로 끌려오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배와 실랑이를 벌이는 노동자들 간의 팽팽한 대립구도는 이 작품의 주제를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마치 배가 기득권 체제를 공고히 하는 거대한 사회구조물 같습니다. 배를 끄는 노동자들은 사회모순에 허덕이며 끝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는  러시아 민중의 현실 같고요.




여럿이 배를 끄는 이들 민중의 삶은 그 자체로 노동이고, 투쟁이며, 아름다운 연대의 실천 인 셈이죠. 지나 온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압니다. 역사의 주체는 어떤 한 명의 위대한 왕이나 영웅 혹은 혁명지도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선한 의지를 보탠 민중이라는 것을요.  깨알 같은 까만 점으로 표현되기 일쑤인  뒤통수의 그와 그녀가 아니라  다양한 얼굴의 표정이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작품 대부분은 이렇듯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과 성격까지 읽을 수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생생한 눈빛과 표정, 몸짓, 주변배경 등의 묘사가 뛰어나거든요. 그의 인간에 대한 폭넓은 성찰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작품들인 셈이죠.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대단히 묘사적인 붓놀림으로 표현된 그림이 있습니다. 러시아 출신 화가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실물보다 멋진 초상화를 상상하셨다면 실망하실 겁니다. 아름다운 꽃과 먹음직스러운 과일 정물화를 기대하셨다면 더 어긋나 있을 겁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 껍질 벗겨진 토끼, 벽에 걸린 죽은 가오리... 등 그로데스키(Grotteschi)한 새로운 미학적 시도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다소 괴기하고 부자연스러운 것들이라 강렬하게 다가올 겁니다.



"그로데스키(Grotteschi)"는 이탈리아어로, "그로데스크"를 의미합니다. 예술에서 기괴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스타일을 말합니다. 이 용어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벽화나 장식에 사용된 복잡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인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종종 환상적인 생물, 식물, 그리고 인간의 형태를 결합하여 독특하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그림 2>.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가 특징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왜곡된 형태는 색채와 브러시 효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수틴은 감정과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왜곡된 형태와 함께 작품에 생동감과 불안정한 분위기를 더합니다. 그는 현실을 과장하거나 감정적인 해석을 반영하기 위해 색채를 이용합니다. 다양한 붓놀림을 통해 인물과 환경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깊은 감정선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대표작  <작은 페이스트리 요리사 The Little Pastry Chef>(1922-23)입니다. 요리사의 손에 가려진 붉은 손수건이 보이시나요? 관람자의 시선이 아래쪽 붉은 손수건 방향으로 뚝 떨어집니다. 수틴의 표현주의적 스타일입니다.  수틴은 주제를 표현하면서 내면의 감정을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불안과 깊은 감정 말입니다.




카임 수틴(Chaim Soutne , 1893-1943)의 작품에서 왜곡된 형태는 감정적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수틴은 물체나 대상, 공간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현실과 다른 관점을 만들어냅니다.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왜곡의 형태로 표현한 거지요.  때로는 불안과 고통 같은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제격입니다.  이렇듯 1920년대는 수틴에게 예술가로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 수틴은 유명 수집가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수틴의 고된 삶의 이유 중 하나였던 가난을 벗어나 재정적 안정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복 받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수틴은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무작위로 만나게 된 지역 마을 사람들과 요리사, 가정부, 구두 닦는 사람과 같은 노동자의 초상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른 1920년대 프랑스의 호텔과 레스토랑의 요리사와 호텔 직원들의 유니폼의 강렬한 색상에 매료되어 십여 년간 그들을 그린 초상화작가로서 명성을 쌓아갑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파리에서 선구적인 위치에 들어서며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후계자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The Bellhop,1927/ARTART



The Page Boy,1927, Baffalo AKG Museum





중앙일보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러시아 제국 산하에 있던 나라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의 한 소도시 스밀로비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모든 나라에서 이방인이어야 했던 유대인들의 숙명을 타고난 아이입니다.  그림과 회화를 터부시 하는 가장 보수적인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시디즘 공동체는 18세기 동유럽에서 시작된 초정통파 유대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종교적 내면성과 신비주의를 강조하죠. 공동체는 폐쇄적이고, 구성원들은 독특한 복장과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현대 문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언어인 이디시어를 사용하고요.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제한하여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뉴욕 브루클린 등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맨 아래  유튜브 영상 참고하세요.)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주변의 비난과 멸시로부터 떨어져 나갈 결심을 하고 프랑스 파리로 향합니다.





le Batrau-Lavoir,1910, Montmartre,Paris/wikipedia





피카소를 비롯한 후대의 유명한 작가들은 몽마르트르의 바토 라브와르(Le Bateau-Lavoir)라는 작업실에서 작품하고 놀고 했습니다. 일명"세탁선"이라 불리던 곳이었죠. 그 건물은 온방시설과 수돗물이 없었던 건물입니다.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 배와 비슷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30여 개의 아틀리에, 수도꼭지와 화장실은 2층에 단 하나뿐이었다고 해요. 달동네 수준이라 물가, 집세가 가장 싸서 , 화구 하나 들고 예술가를 꿈꾸며 파리로 온 이방인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상을 함께 나눌 동료들이 가까이 있으니 많은 예술가들이 일부러라도 들어왔겠죠.






20세기 가장 뛰어난 작품들의 산실입니다. 삼류 가수, 댄스, 창녀, 약장수, 건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무질서한 환경이 오히려 예술가들에게 자유와 새로운 예술의 창조력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지요. 문제는 이곳이 점점 더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물가와 집값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좀 더 싼 곳을 원한 가난한 예술가들은 이곳을 떠났습니다.




Montparnasse/Pin Page




https://www.youtube.com/watch?v=P6Lnp4rZK_4








피카소는 1912년 센 강을 건너 몽마르트르의 반대쪽인 몽파르나스(Montparnasse)로 이사합니다. 몽마르트르로 오는 많은 관광객들을 피해서 몽파르나스에 다른 예술인들이 그때쯤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1913년 불어 한마디도 못하는 검은 피부의 검정머리 이방인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 역시 이곳에 정착하죠.






로마노프 러시아 왕정을 피해온 러시아 및 동유럽 예술가 특히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몽파르나스에 등장한 예술가들은 몽마르트파를 비롯해 수틴 , 모딜리아니, 샤갈 등등. 이들은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서 다시 한번 현대미술이 전화점을 맞이합니다.  다양성이 피워낸 결과물인 거죠.









https://www.youtube.com/watch?v=E-rasmuFas4







그림1.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1883, wikipedia/그림2.Chartres Cathedral,1933/PubHis






그림A. Religious Procession in an Oak forest. Appearance of the icon 1878 by IIya Repin / Artchive




그림B.Religious Precession in Kursk Province, 1883, Tretyakov Gallery /wikipedia






'민중'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리야 레핀(IIya Repin, 1844-1930)의 작품 <쿠르크스 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1883)입니다. 이 그림은 평범한 시골을 배경으로 합니다. 러시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 행렬로, 교회 안에 있는 이콘(성상화)이나 성물을 들고 행진을 하는 행사입니다.








그림 8. Auguste Renoir,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Dance at Le Moulin de la Galette, 1876/wikipedia






레핀은 원래 십자가 행렬을 위해 숲을 지나는 배경을 선택했다고 합니다(그림 A). 르느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에서 표현된 일렁이는 햇빛의 효과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핀은 참나무 숲 속의 햇빛 효과를 포기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인상을 포기하고 화창한 하늘 아래, 뽀얀 먼지 일어나는 흙길을 선택합니다(그림 B).  그래서 레핀이 얻은 효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은 그림자 하나 없는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행렬에 참가하는 마음과 표정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계급까지 표정에 담고 있는 듯합니다. 인물의 표정 안에 개개인의 역사를 담아내는 것, 바로 레핀의 탁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꼽추 소년입니다. 소년은 레핀이 가장 공을 들인 인물입니다. 그는 절름발이 꼽추 소년을 위해 여러 장의 습작을 남겼습니다. 다양한 표정을 연구한 흔적도 보이고요. 그중에서 그는 슬픈 표정이 아니라 무표정한 듯 앞으로 열심히 나가는 소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소년의 얼굴에는 행렬에 낀 사람들의 오만함이나 지루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앞으로 묵묵히  나아갈 뿐입니다.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민중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르느아르가 군중의 모습으로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레핀에게 인물은 군중이 아니라 민중이었습니다. 그들의 궁핍하고 황폐해진 삶은 행렬 뒤쪽의 민둥산이 증명해 줍니다. 나무와 숲이 사라진 민둥산과 뽀얀 흙먼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건조한 민중들. 그들은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신의 은총 역시 모든 사람 앞에서 평등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럼에도 민중은 포기하지 않고 행렬 언저리에서 열심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불만을 표현하지도 않고 지루해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림 8>. 피에르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의 1876년 작품입니다. 야외에서 빛을 포착하고, 밝은 색상을 사용하여 일상의 순간을 표현한 인상주의적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파리 몽마르트르 지역의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일요일 오후에 열리는 무도회를 묘사했습니다. 이 장소는 19세기말 노동자 계급의 파리 사람들이 저녁까지 춤추고, 마시고, 갈레트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던 인기 있는 엔터테인먼트 장소였습니다. 그림 속 등장하는  사람들은 르누아르의 친구들입니다. 루누아르는 햇빛과 인공조명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군중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은 밝고 다채로운 붓놀림으로 처리되어 있고요.





이 그림은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이후 1879년부터 1894년까지 귀스타브 카유 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가 소장했습니다. 그의 사망 이후 1894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되었다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Khan Academy(출처)

1.Shrine carried in procession Krestny Khod(Religious Procession)in Kursk Gubernia, 1880-83

                  2. Pious women carrying empty box Kresthy Khod(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ubernia, 1880-83




3. Landowner's wife holding shimmering gaudy icon, IIya Repin, Kresthy Khod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ubernia, 1880-83



4. Priest ingold vestments,

5. Hunchbacked boy at the front of the impoverished in procession, Krestny Khod(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ubernia, 1880-83

6. Hunchback, 1881, Tretyakov Gallery, Moscow







7.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overnorate repin images: PICRYL-Public Domain Media        Search  Engine Public Domain Search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을 자세히 한번 볼까요? 이콘을 들고 걷는 귀부인은 자부심이 커 보입니다(그림 3). 화려한 복장의 성직자는 조금 지루한 것처럼 보이고요(그림 4). 두 명의 여인은 조심스레 성물 상자를 들고 걷고 있습니다(그림 2).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치안 담당자는 말을 타고 군기 잔뜩 들어간 다소 거만한 모습이고요.(그림 7). 저런, 민중들을 거칠게 다루는 모습도 보이네요.(그림 1). 흰 옷 입은 장교의 행동에 누군가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인데요.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오면 그들 역시 행진하는 민중들과 같을 텐데 말입니다. 제복아래 숨어있던 그들의 폭력성을 보게 됩니다.  한편, 이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림의 왼쪽 하단,  감상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그들입니다(그림 5).







https://www.youtube.com/watch?v=Fj6WrS3-FSU











<그림 2> 샤르트르 대성당(Chartres Cathedral)은 프랑스에 위치한 대표적인 프랑스 고딕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원래 1145년에서 1155년 사이에 건설되었습니다.  큰 화재가 있었고요. 그 이후 1194년부터 1220년까지 재건됩니다. 성당은 중세 시대부터 보존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로 유명합니다. 건축적 특징으로는 플라잉 버트레스와 두 개의 대조적인 첨탑이 있는데, 하나는 단순하고 다른 하나는 화려합니다. 성당이 가진 유물 덕분에 중요한 순례지로 여겨지고 있지요. 종교적 방문객과 일반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 있는 장소입니다. 수틴의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통해 대성당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실제 내부 모습과 함께 보시면 더 생생하게 느끼실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k3VsinLgvc&t=3s











일리야 레핀( IIya Repin, 1844-1930)은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화 톨스토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오 톨스토이 초상 Portrait of Leo Tolstoy, 1887, wikipedia





출처:월간조선


https://www.youtube.com/watch?v=ABnQgZdwudo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의 초상화입니다. 레핀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고요. 레핀은 1887년 톨스토이의 저택인 야스나야 폴리아나를 방문하여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시기 톨스토이는 이미 유명한 작가로, 사회적 및 철학적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톨스토이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옷차림까지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단순히 톨스토이의 외모를 그린 것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과 당시 사회적 배경도 함께 담아낸 작품입니다. 그는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사상도 기질도 비슷한 면이 많았다고 합니다. 평생 존경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톨스토이의 일상을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점의 작품으로 남깁니다.  







Tolstoy reading under a tree in the forest,1891,  Tretyakov Gallery Moscow/wikipedia




문학은 톨스토이,
그림은 일리야 레핀








Leo Tolstoy through the eyes of IIya Repin(PICS)/ Russia Beyond



https://www.youtube.com/watch?v=37cAlZAKPAo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은 모딜리아니와 샤갈 등과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의 일원이었습니다. 일명 '파리파'라고 불립니다. '에콜 드 파리 '는 20세기 초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국제적인 예술가 그룹을 일컫습니다. 이 그룹은 특정한 양식이나 주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지요. 모딜리아니(이탈리아), 카임 수틴 (리투아니아), 샤갈(러시아), 키슬린(폴란드), 파스킨(불가리아), 후지타(일본), 반 동겐(네덜란드) 등이 속해 있었습니다.  '에콜 드 파리'의 중요한 예술가는 거의 전부가 이방인이었다는 거죠. 이들 중 사틴, 샤갈, 모딜리아니, 그리고 키슬링은 유태계 화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고독감과 향수, 불안 등을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파리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기여했던 그룹입니다. 특히 외국인 예술가들인 그들이 프랑스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이 그룹은 해체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xVZfXsFV-g






당시 예술계의 추상화를 향한 시대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수틴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재, 인식 가능한 주제에 대한 예술관을 유지하며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수틴은 자신의 예술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하기보다는 자신의 표현법을 더욱 개발시키는 데 집중합니다. 수틴은 자신의 작품 안에서 불안한 아름다움을 주는 여러 가지 곡선과 자유롭고 거칠게 표현되는 붓터치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림1.Portrait of Moise Kisling, 1919-20, PubHist/그림2.Amedeo Modigliani ,1916, Ocean's Bridge
3.Self-Portrait with a pipe, 1918/paintings,museums and artists





세 그림 모두 친구이자 유대인 화가인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1891-1953)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카임 수틴(그림1), 아마데오 모딜리아니(그림2).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린 모이즈 키슬링(그림3)의 자화상 작품입니다.




 파리에서 활동한 '에콜 드 파리'라는 예술가 그룹의 일원으로서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길게 늘어진 얼굴과 목, 부드러운 색채 사용, 그리고 간결한 형태가 특징입니다(그림 2). 모이즈 키슬링은 여성의 형태를 초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죠. 풍경화는 마르크 샤갈과 비슷하고요.





카임 수틴(Chaim Soutine,1893-1943)은 이탈리아계 유대인 모딜리아니(AmedeoModiglian, 1884-1920)와 폴란드계 유대인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1891-1953)과 서로 화가를 꿈꾸며 유대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유난히 서로 친했습니다. 주머니 가벼운 그들은 서로의 작품에 모델이 되어 주었지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의 독특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화가들입니다.








알버트 C. 반즈박사 Doctor Albert Coombs Barnes, 1872-1951/wikipedia


Philadelphia/ShutterStock

 




알버트 쿰스 반스 (Albert Coombs Barnes, 1872-1951)는 미국의 화학자, 사업가, 미술 수집가, 작가, 그리고 교육자였습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반스 재단(Barnes Foundation)을 설립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재단은 1922년 앨버트 C. 반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및 현대 미술 작품을 포함하여 4,000개 이상의 방대한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미술 딜러 Paul Guillaume 을 통해 수틴을 처음 알게 된 알버트 박사는 그의 작품을 대량으로 구매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틴은 몽파르나스에서 꽤 유명해졌지요. 그는 수틴의 독특한 표현주의 스타일과 감정적 깊이에 놀랍니다.  수틴의 왜곡된 인물과 혼란스러운 풍경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요. 수틴의 작품을 당시 대세였던  마티스나 피카소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작품을 대량 구매해 자신의 컬렉션에 포함시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jgUkrpoXE











https://www.youtube.com/watch?v=2vyMwDx9rF0







그림1.They Did Not Expect Him, 1884-1888, Tretyakov Gallery, Moscow,wikipedia

                       그림 2. View of Ceret, 1920-1921/WikiArt.org







Maid and Cook/ Boy and girl
Mother and wife of the exile






남루한 옷차림의 한 남성이 등장합니다.  몇  평 안 되는 방안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습니다. 하녀인듯한 그녀와 도움이 모양새의 이웃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혹여 싶은 마음에 문고리를 놓지 못하고 숨을 죽입니다. 너무 놀란듯한, 아니 경계하는 표정의  딸아이, 유일하게 반가운 제스처를 보이는 아들, 그리고 너무 놀라 몸을 일으킨 여인, 그러나 선뜻 달려가 반가움을 표시하지 못합니다.  행색은 남루하나 남자의 살아있는 눈빛이 마음에 걸리나 봅니다.


'당신이 살아있을 줄 몰랐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던 사내 역시,


 '이건 내가 그리던 가족의 모습이 아닌데..,

 내가 감옥에서 오매불망 그리던 그 가족들 맞아.'


뭐 이런 모습으로 남자는 가족의 눈망울에 맺힌 불안을 읽어냅니다. 제목처럼 정말 아무도 이 사내가 집에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않았나 봅니다.





 이 가족들이 겪었던 과거의 시간으로 빠르게 돌아가 봅니다. 1879년 결성된 '러시아 제국의 '인민의 의지당'은 농민 봉기를 끌어내 보수적인 차르 전제정을 무너뜨리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급진적이었던 선전과 부채질은 외려 대다수 농민과 노동자에게 거부감만 살뿐이었습니다. 결국 '인민의 의지당'은 노선을 다시 짜야했습니다. 그것은 적은 지지층으로도 할 수 있는 암살과 테러였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1881/ 위키백과






 '인민의 의지당'계열단체들은 그해 11월 중순부터 당시 차르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1881)에 대한 암살을 세 차례 이상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일정을 잘못 파악해서, 폭탄이 하필 불량품이라서, 혹은 수행원들이 탄 기차가 폭발하는 식으로 실패했습니다. '인민의 의지당'은 1881년 3월 1일에 다시 기회를 잡아 실행을 해 성공합니다. 이들은 먼저 알렉산드르 2세가 탄 마차를 부수고, 그가 콜록대며 밖으로 나오자 그대로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팔다리가 찢어진 채 비명을 질렀고, 고통에 허우적대다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혁명이 터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이들의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민초들은  되려 '인민의 의지당'에 반감을 표합니다. 역풍이 불었고, 수사 당국은 여론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피의 숙청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관계자들이 줄줄이 붙잡혔습니다. 이들 모두 모진 고문을 받았고, 숨통은  붙어있으나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시베리아 유배지로 내몰렸습니다.  





그의 가문은 농민 내지 노동자 집안이 아닙니다. 화려한 벽지와 고급스러운 가구가 깔린 그림 속 거실 풍경으로 보아 오히려 차르 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아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가족들은 암살과 테러에 깊이 관여한  그의 행동에 애가 탔습니다. 나가기만 하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내는 끝내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이며 과업을 마쳤지만, 얼마 안돼 비밀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연기처럼 영영 사라져 버렸습니다.






감감무소식에 가족들은 그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복 같은 검은 옷을 입는 것으로 애도를 표했지요. 그리고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빠르게 일상을 되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거지꼴을 하고 눈빛은 여전한 채  살아서 가족 앞에 나타난 겁니다. <They Did Not Expect Him> 제목과 그림 속 상황이 이해가 가시죠.





절친한 동료 화가인 모딜리아니 부부를 잃고 남프랑스에서 지내던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세르( Ceret ) 시절 풍경화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iBfoAfsanE




Ceret/Abour-France.com



 <그림 2> 카임 수틴의 풍경화는 소용돌이치는 나무들의 붓놀림과 들쭉날쭉하고 기울어진 수평선이 특징입니다. 뒤틀린 마을의 건물들을 통해 카임 수틴이 느꼈던 내면의 불안과 어둠을 직관적으로 전달합니다. 또한 이러한 독특한 스타일이 담긴 왜곡 표현과 생생한 색채, 강렬한 브러시의 움직임을 통해 카임 수틴만의 야성적 화풍과 깊은 내면심리를 전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PH3yUZzt0k











그림 1. portrait of NicholasII, The Last Russian Emperor, 1896, WikiArt

그림 2. Carcass of Beef,1924/WikiArt.org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폴란드의 차르, 핀란드의 대공이었던 니콜라이 2세(1868-1918). 그가 재위한 기간은 1894년부터 1917년까지입니다.  로마노프 왕조의 14번째 군주로 1917년 2월 혁명으로 퇴위하게 됩니다.



  화려한 타이틀을 벗으면 초상화 자체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자상하고 온순함입니다.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텐데, 한 나라를 이끌어야 할 짜르의  우유부단함은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혈우병을 앓고 있던 막내아들 치유차 소개받은  '라수푸틴'을 황후가 궁에 들이게 되면서 짜르부부는 '라스푸틴'의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맙니다. 황후의 신임을 등에 업고 폭정과 착취를 일삼았던 '라수푸틴'을 강력하게 제지하지 못하며 군주로서 리더십적인 자질을 의심받게 됩니다. 

라수푸틴의 손에 놀아나는 차르를 풍자한 그림/ 나무위키




니콜라이 2세는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보여  1891년 인도, 중국,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동아시아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러일 전쟁(1904-1905)에서 패배했고, 사할린 섬 남부를 일본에 양도해야 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는 협상국의 일원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 싸웠습니다. 전쟁 초기 러시아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지만, 탄넨베르크 전투에서의 패배와 지휘관들의 무능함으로 큰 소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에 시달렸고, 이는 1917년 혁명으로 이어져 결국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소련의 탄생으로 이어지고요.





 아내: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딸: 올가 니콜라예브나 ,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아나스타시아 니콜라예브나, 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나무위키







Demonstration 17 October 1905 by IIya Pepin, Russian Museum, St.Petersburg/wikipedia




1905년 혁명입니다. 러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 러시아는 1905년 혁명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시위대가 차르의 궁전 앞에서 무차별적으로 사살되는 사건입니다. 신처럼 떠받들여졌던 황제에 대한 민중의 무조건적 사랑이 혁명으로 돌아서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의 인기가 급락합니다. 이 혁명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의회인 두마(Duma)를 창설하고 헌법적 체제를 약속하지만 지켜지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CJTcw4n_R7I




1918년 7월 유대인 출신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적군:노동자들 지지))일행에 의해 예카테린 부르크 이 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되고, 가족모두 총살당하며 불태워졌습니다. 시신은 1991년에 발굴되었고 DNA검사로 2008년 10월 1일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집니다.  (러시아 역사가 궁금하신 분들, 아래 영상 참고하세요, 2시간 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rBxo6mbaS8








Carcass of Beef, Buffalo AKG Museum, 1925





2006년 2월. 이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의 아이콘 그림인 '고깃덩어리 시리즈 series Le Boeuf Ecorche,1924>'가 경매로 나왔습니다. 이름도, 성도 몰랐던 생소한 작가의 작품에 경매장이 웅성웅성합니다. 어느 익명의 바이어가 170만 영국 파운드($13.8 million)를 써넣어 최고 낙찰가로 구입하면서 소더비 경매시장에 일대 파란을 일으킵니다.  무명의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이 경매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쪽방동네 푸줏간에서 잠시 빌려와 그린 고깃 덩어리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쇠고기가 되던 날이기도 합니다. 






그림1. "Figure with Meat" by Francis Bacon,1954/Tumblr/그림2. Rembrandt,"Slaughtered OX",1655






카임 수틴(Chaim Soutine)은 1920년부터  1929년 사이 렘브란트의 '<살육된 황소 Slaughtered OX, 1655)'(그림 2)에서 영감을 받은 동물 시체 연작을 10여 점 그렸습니다. 왜 수틴은 동물 시체에  이렇게 집착했을까요? 





  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프랑스 파리로 떠난 카임 수틴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물론 힘든 와중에도 수틴은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요. 일이 없을 때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작품을 연구했습니다. 다른 일을 통해 모은 돈으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도축된 동물을 구입해 정물화를 그려냈습니다. 특히 <가죽을 벗긴 소>는 수틴이 존경하던 렘브란트에 대한 헌정 표시로도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17세기 네덜란드 정물은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에서 동물의 사체는 인간의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해체된 소를 통해 '메멘토 모리', '인간의 죽음과 삶의 덧없음을 암시했습니다. 렘브란트를 존경하던 카임 수틴은 이러한 영향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게 되었고요. 





1954년. 후배 화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이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1606-1669)와 카임 수틴'의 화집들을  참고로 도살장에 매달린 소의 모습을 그만의 방식으로 그려냅니다.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라는 말을 남기죠. 베이컨은 살을 가지고 태어난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살의 또 다른 이름은 고기라고 생각한 거죠. 언제든지 정육점에서 내걸린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이 세상에서 육체를 지니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비참함을 견디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Still Life with Rayfisth/Chaim Soutine(1924) VS Jean-Simeon Chardin(1725-26/Reddit




chicken , hagnging on front of brick wall, 1924/Arthive






 당시 젊은 화가 수틴은 유대인 이민자이자 모더니스트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정물은 수틴이 컬러, 구도 붓질을 실험하고 테크닉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장르였죠. 인간의 먹거리인 소, 생선, 가금류 등의 그림은 강렬한 표현주의 색채로 음식으로서 먹음직스러움보다는 죽음의 잔인한 상태를 강조합니다. 동물과 인간, 아름다움과 고통, 생명과 죽음이라는 화두를 함께 던져줍니다.  수틴의 내면에 어릴 적 고향에서 목도했던 유대인을 타깃으로 한 무시나 폭력도 한 몫했겠지요. 










1. Returning from School,1939, Wikimedia Commons/2. Children playing at Champigny,1942-43/PubHist
오세르의 바람 부는 날 Winy Day Auxerre,1939/The Phillips Collection





들판과 나무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주로 그리던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의 말년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해였습니다. 그는 미술작업을 하면서 평생에 변변한 개인 작품 전시회 한번 열지 못했습니다. 수틴의 첫 번째 전시회는 1935년 시카고에서 열렸습니다. 전쟁 중이던 1937년에는 파리에서 국제 독립미술가전이 열려서 그를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곧 프랑스 파리가 독일에 함락되고 유대인 예술가였던 그는 독일의 비밀경찰 (Gestapo)에 체포령이 내려 파리의 야외에서나 수풀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 작품들이 그의 말년 작품들입니다. 그가 숨어 지내며 보았던 은신처 주변의 시골길, 아이들, 그리고  주변의 산과 들판의 모습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파리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갑니다. 카임 수틴과 같은 유대인 예술가들은 다시 이방인들이 됐습니다. 샤갈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수틴은 몇 번 파리의 미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서류 부족으로 계속 거부당했습니다.







그는 수풀이나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고 끼니를 거르며 몇 작품을 그렸습니다. 이 도피 기간 중에 얻은 위궤양으로 점점 고통받기 시작합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큼 심각한 위궤양으로 결국 파리 외곽의 은신처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천공성 궤양으로 더 이상 생명을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1943년 8월 9일 숨을 거두고, 집도 절도 가족도 없었던 그는 근처 몽파르나스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불우한 가운데 절망과 빈곤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의 나이 쉬흔 살이었습니다.






국민화 가라 불릴 정도로 러시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일리야 레핀의 그림과 불안한 아름다움을 주는 카임 수틴의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를 맛보았습니다. 어떠신가요? 작가님들이나 저나 두 작가사이의 어디쯤을 왕복하고 있겠죠.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생존이 아니라 , 품위 있게 살기 위해서다. "

-(톨스토이 6촌형 볼콘스키 공작)-


<전쟁과 평화>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그의 말을 빌어 마칠까 합니다. 



제목: 가스탕 부인의 초상 Portrait de Madeleine Castaing, 1929/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wikipedia





 


유대인들의 삶이 더 알고 싶은 분 참고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wQ5ZlBSMTkg




러시아 역사를 자세히 알고 싶은 분 참고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qxHmi8MRm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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