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실상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피안재의 여행갤러리(16)

by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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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공지사항>

이번의 기독교 이야기와 빛의 채석장 이야기까지 적어 내려감에 있어서 설명과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여러 이미지를 구글(Google)을 통해 옮겨왔음을 거듭 밝히는 바입니다. 어떤 상업적 목적이 아니고, 오로지 여기 지면에 제한해서 글을 쓰고자 하는 바람뿐입니다. 양해를 구하며, 누군가에게 불편이나 손해를 끼쳤다고 이의제기를 받게 되면, 정식 사과와 함께 이미지를 즉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이해를 바라는 바입니다.



AD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는 곧 기독교 역사에 신기원을 이루는 일대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로마에 의한 오랜 세월 동안의 박해가 비로소 끝났다는 의미이며, 더이상 지하에 숨어다니면서 카타콤에서 숨죽이며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가서 배교를 종용받고, 고문을 당하고, 사형이나 추방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 공인은 어찌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여, 당연히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모든것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전에 미리 예비해 두신, 온 기독교인들을 고난과 역경에서 벗어나 이제 본격적인 구원을 길로 들어서게 되는 신세계의 초입에 세우신 가장 중요한 개선문이자 은총의 기념비라고 해석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당시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믿도록 하나의 사건에 수많은 거룩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여 이후로 수백 년에 걸쳐서 (기독교 공인) 사건을 기적적인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칭송하기에 이르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는 시작에서 부터 실제로 역사속에서 엄연히 존재했다는 정통성 확보를 꾸준히 거듭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해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제(大帝)라는 존칭과 함께 성인(聖人)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다. 바야흐로 기독교 역사는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313년) 이전과 이후’로 전혀 다른 신분과 지위를 가지게 되고 호사를 누리게 된다. 어쩌면 신이 주신 선물이라기 보다는 로마가 제공한 놀라운 기적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억압받고 탄압받던 종교에서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거꾸로 탄압하고 지배하는 종교로 기독교는 서서히 탈바꿈하게 된다. 삼백 년을 탄압 받았다고 해서, 신께서 가엽게 여기셔서 천오백년 이상을 떵떵거리며 온 세상을 호령하는 기상천외한 놀라운 은총(?)이 내려지게 된 것이다. 비록 기독교 전체가 아닌 소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적용되는 한정판 은총(?) 이었지만 말이다. 오늘날에야 대부분이 아니라고 해야 하겠지만, 교황과 교회 최고지도자들은 중세에는 정말로 모든 죄악의 온상으로 타락과 부패와 탐욕이 극심했고, 근 현대사 초입까지도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며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지극히 타당한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신(神)은 언제나 정의롭고 자비로우시며 공평하고 무한정 인류를 아끼고 사랑하신다'를 그들은 자나깨나 목청껏 외친다. 온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한다고는 하지만........ 혹, 그들은 세상이나 미래야 어찌되던 말던 자신들만의 한정판 은총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더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늘나라의 낙원은 홍보용 프로젝트일 뿐이고, 자신들은 천국도 필요없이 여기 지상에서의 기독교 왕국이 세세무궁토록 소수의 자신들만을 위해 지속되었으며, 또 그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을 보면 지옥의 맨 깊은 구렁텅이에 떨어진 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정판 은총을 입은 부류들이 그곳에 몰려있는 것은 또 무슨 은총(?)의 결과란 말인가?

르네상스의 한 인문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백 년도 못사는 것들이 마치 천 년을 살 것처럼 나대는 구나. 이를 얼쩔꼬?'라고 말이다.


그럼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기독교 공인을 왜 느닷없이 콘스탄티누스가 하필 그 시기에 공표했느냐?

그것이 정말로 하느님이 인류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기 위하여 처음부터 사전에 미리 준비하신 일이었다고 신분 세탁에 성공한 로마 가톨릭은 합리화를 거듭 시도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지금 세상에 드러나 있는 사실 대부분은 기독교의 시작부터가 모두 역사속에서 실존했던 진실이라는 정통성 확보를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부풀려지고 꾸며지고 억지로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 결과라고 일부 학자들은 지속적인 주장을 하고 있고, 나 역시도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거룩한 신의 뜻이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새역사를 쓰게 했다가 아니라,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당시의 불확실한 로마제국의 정치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끌어들여 미천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계략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말았다고 보는 시선이 보다 정확한 결론일 것이라는 말이다. 하늘의 거룩한 의도라기 보담은 세속적인 인간의 탐욕이 부른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면......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고 그저 여론몰이에 필요한 가장 하층민 계급의 상당한 머릿수와 입을 가진 사용도구였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고 정치족 목적을 달성하고 자신의 권위가 높아지고 로마제국이 다시 안정되면...... 언제든 다시 거리를 두고 내치면 되는 부류가 바로 기독교 무리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차후의 모든 상황은 자신의 의도대로 되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공인을 발표한 후에 뼈저리게 자신의 행위를 후회했다. 애초에 오로지 단순하게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내린 결정이었으나, 그 결정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결과는 새로운 기독교 집단의 급부상으로 전혀 엉뚱하게 흘러가 버린 것이다. 늑대를 쫓아내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라고나 해야할까? 어느 순간....... 이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황제 권위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세력)으로까지 급부상을 해가는 것을 콘스탄티누스 본인이 직간접으로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는 일생일대의 패착이었다.’

오늘날의 역사적 해석은 가히 모든것이 기독교적(로마 가톨릭)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고 결론 내린 종교적 사건일 뿐이지만, 로마제국의 역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고 전혀 의도치 않은 다른 내용을 담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인 고려는 애초부터 전혀 없었다. 오로지 정치적인 목적만이 고려 대상이었던 것이다.

기독교 공인을 통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인 포섭은 처음에는 나름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진흙탕으로 변해갔다. 아무때고 필요가 없어지면 쉽게 내칠 수 있다고 생각한 기독교가 어느 순간 로마 시민의 상당수로 전파되었는가 하면, 로마의 정치권력인 원로원과 심지어 군대와 황제의 궁전에 함께 기거하는 사람들에게 까지 전파되어 있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어디에나 이미 기독교인들의 눈과 귀와 입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하여 고심 끝에 이 사태를 수습하고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편으로 황제는 제국의 수도 로마를 버리고, 아주 먼 땅끝에 있는 비잔틴으로의 천도를 감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만 로마제국이 유지되어 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기독교 공인이 없었다면 콘스탄티노플 천도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자면 조금은 길고 먼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가야만 한다. 가장 먼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일생을 살펴 보아야만 그의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알 수 있고, 내막을 알아야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AD 310년 전후의 로마로 돌아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대해서 살펴 보아야겠고. 다음으로는 BC 4년 경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부터 시작해서 AD 313년 기독교 공인까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으로 해야 이해가 쉬울것 같아, 그렇게 여행을 떠나기로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 사후에 사도(열두 제자) 시대에는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졌었는지, 아울러 초대교회와 지금 교회와의 모습을 비교해 보려고 한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이다. 더 성스러워졌는지(聖), 아니면 반대로 흘러갔는지(俗) 한 번 부분적으로라도 들여다 보기로 하겠다.

그 이전에 앞에 이야기에서 다루었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이야기를 짧게라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이전 이야기의 마무리가 되지 싶다.

그렇게 보자면 이번 여행 이야기도 아무래도 좀 많이 길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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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떠나고 누군가는 남았다.'


노아의 방주가 긴 여정의 항해 끝에 아라라트 산에 정박을 했고, 배에서 내려 산 아래 평원에 도착한 노아와 가족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니 그곳이 바로 아르메니아다. 그럼으로 당연히 포도주의 발상지는 그리스 신화 속이 아니라 아르메니아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일부 성서학자들이 주장하기를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야벳의 후손이 유럽으로 건너가 백인이 되었고, 셈의 후손이 동쪽으로 나아가 황색인이 되었으며, 함의 후손들이 아프리카 반도로 진출하여 흑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모두 한 핏줄이요, 모두 유대인의 후손들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통성을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쪽으로 무한 확장하려다 보니 나가도 너무 심하게 나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매우 궁금해진다.

유대 민족은 가부장제에 대한 전통이 유독 강한 민족이다. 장자 우선권(상속권)은 거의 불문율에 가깝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겼는지 졌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 씨름의 결과로 야곱이 장자권을 쟁취하였고, 끝내 에서를 장자에서 끌어내려 사막으로 쫓겨나게 했다. 결코 합리적이지 못하고 정의롭지도 않은 결과다.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야곱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유대인의 역사에서 장자권 유린 사건을 다시는 들어보지를 못했다. 그렇다면 분가를 하던, 타향살이를 가던, 이민을 가던, 집(고향)에 남아서 가문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당연히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다. 장자가 떠난다는 것은 가문이 통째로 이동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아르메니아 지역에 정착해 살던 노아의 후손들이 인구가 늘어나자 사는 지역도 협소하게 느껴졌고, 먹을 식량과 농토도 부족해져서 결국엔 부족들의 분가가 시작되었다. 야벳은 서쪽으로 갔고, 셈은 동쪽으로 갔으며, 함은 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모두 떠났지만....... 누군가는 아르메니아에 남았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방주를 만들었고, 살려야 하는 사람과 동식물을 태웠고,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아라라트 산에 도착을 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이끄심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방주가 도착한 아라라트 산과 첫 정착지인 아르메니아 영토는 마땅히 가장 신성한 장소여야만 하는 것이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가나안 개척사 보다 노아의 후손들이 실제로 생활하면 후손들을 많이 낳아 번성한 땅 아르메이나가 곧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노아의 후손들은 어떤 이유로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이 성스러운 지역은 누군가 남아서 반듯이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누가 남아야 하겠는가? 당연히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 남아서 성지와 하나님의 종교를 지켜야만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남다른 선민의식과 자부심을 가진 아르메이아인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이룩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르메니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아주 특별한 나라이다. 첫 기독교 국가의 공적인 사업으로 교회를 세웠으니, 인류문명사 공인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인 에치미아진에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 세워졌으니,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총 본산인 에치미아진 대성당(Etchmiadzin Cathedral)이다. 속된 표현으로 바티칸 (Vaticanæ)이나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 보다 더 중요하면 중요했지 어느 하나 결코 못 하지 않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 중에 으뜸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생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옆구리를 찔렀던 롱기누스의 창이 보관되었었으며, 성 그레고리의 유해 중에 손 부분이 함께 아주 귀중한 성유물로 보관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제자 중에서 다대오와 바돌로매가 예루살렘 박해를 피해서 소아시아 지역을 거쳐 아르메니아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로마에 적발되어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그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아르메이나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발전했다고 여겨 자신들의 신앙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성지 순례로 아르메니아나 예치미아진 대성당을 찾는 사람을 나는 이제껏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처음 아르메니아를 갔을 때는 동양인을 처음 만나본다는 사람들 때문에 호사 아닌 호사와 환대를 누렸었다. 요즘은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동유럽의 유명한 인기 여행지가 된 느낌이다.

코카서스 3국 중에서 아르메니아는 사도교회, 조지아는 조지아 정교회로 기독교 국가이고, 아제르바이젠은 이슬람 국가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오랜 고난의 역사를 비슷하게 겪으며 함께해 왔고, 그들 두 나라에 비한다면 아제르바이젠은 거의 신생국가라 해도 되겠다.

아르메니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거의 모든 부분에 그레고리라는 사람이 반듯이 등장한다. 아르메니아는 그레고리가 모든 것이고, 조지아는 니노 할머니가 전부다. 이 두 분을 빼면 아르메니아도 조지아도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 두 사람 모두 기독교 성인이다. 시대는 조금 그레고리가 앞선다. 삼촌쯤이랄까?

아르메니아의 최고 성인 그레고리와 조지아의 절대 성인 니노에 대해서는, 예전 두 번의 여행기행문에서 아주 소상하게 밝힌 적이 있어서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궁금하시며 한참 앞에 기록해 놓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여행기를 참조하시면 되겠다)




'젓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Canaan)의 등장'


아브라함(Abram)은 성경에 등장하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로,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은 모두 아브라함을 자신들 민족의 선조로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에서는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고, 유대교에서는 믿음의 조상이자 동시에 혈통의 조상이라고 여긴다. 이슬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슬람 신앙의 모태이자 시작이라고 간주한다. 세 개의 종교가 모두 가장 중요하게 조상으로 여기고 받드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이다. 그런 아브라함에 대해서 창세기에는 그의 자손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11장에서부터 50장까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인 이삭, 손자 야곱, 증손자 요셉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의 집인 갈대아(칼데아,kaldu)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된다. 이 시절은 부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부족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이동 중에 타 부족들과의 전쟁으로 인한 부족의 멸족을 가져올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새롭게 이동한 지역에서 농지를 개간해서 새롭게 정착한다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런 어려운 일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따르면서 진행해 나간 것이다.

남부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주변의 늪지대나 호수 지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의 후손인 아브라함이 부족을 이끌고 하란(Harran)으로 이주하였는데, 당시의 하란은 우루 출신의 상인들이 서쪽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세운 상업 전진기지 같은 곳이었다. 하란은 오늘날 터키 남부의 산르우르파(Şanlıurfa)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최상류 지역에 해당한다.

그런데 잠시 발걸음을 되돌려 보자면, 이 지역에는 이미 같은 유대인들의 발걸음이 닿았던 지역인 것이다.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함이 남쪽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분명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한 셈의 후손으로 족보상 나와 있다. 셈은 대홍수 사건 2년 후에 아르박삿(Arphaxad)을 낳았는데, 그의 계보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나는 것이다.

함의 자손들이 이미 소아시아 지역을 거쳐 아프리카로 건너가면서 드넓게 퍼졌을 텐데, 동쪽으로 퍼져나갔던 아브라함의 조상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서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려 우르를 거쳐 하란까지 부족 대이동을 단행했으면서도 아브라함은 선조 내지는 일가친척에 대해서 일절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팔레스타인 지역의 고고학에 따르자면 본래 이곳에는 블레셋인. 페니키아인. 모압인. 암몬인. 테케르인. 게슈르인. 에돔인 들이 모여서 선사시대 이후로 살아왔으며, 이들을 에둘러서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에 이곳에 새로운 부족이 몰려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유대인(히브리족) 부족이었던 것이다. 고고학에서 처음 팔레스타인 지역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은 노아의 손자이자 함의 아들이었던 가나안이었다. 이들이 정착하면서 점차 세력을 넓혀가니 이때부터 이들을 가리켜 (가나안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람 이름이 점차 발전하여 지역 명칭으로 변한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가나안에 정착한 사람들 중에 분명 고대의 유대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당시의 가나안 사람들은 유대인 이었음에도 그곳에 젓과 꿀이 흐르는 성서에 기록된 땅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부족을 이끌고 내려와 정착을 완료한 후에 또 한 무리의 유대인 부족이 팔레스타인에 등장했으니 바로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이 등장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브라함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함의 후손인 가나안의 자손들이 정착해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었고 그들을 가리켜 가나안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아브라함 일행은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혹 아브라함은 가나안이 노아의 손자라는 사실을 몰랐고, 아브라함 자신은 주변에 히브리인이라고 명함을 돌렸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로 이들은 서로 일가친척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혹시, 여기까지 내려오든 동안에 너무 한쪽으로 나아가신 양반들(?) 주장대로, 함의 후손들은 벌써 까만 흑인화에 돌입했고, 셈의 후손들은 황인화에 적응한 후라서 절대로 자기들이 한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인정하기 싫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필자의 추측이 그저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푸념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또 말해준다.

구약성경 여호수아기를 보면 모세의 인도에 의해서 애굽에서 탈출하여,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가나안 사람들은 반듯이 멸해져야 하는 민족 목록에 분명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말로 유대민족은 정말로 가나안 사람들을 절명시키고 나서 가나안에 들어간다. 셈의 후손이 함의 후손들을 죽여서 씨를 말려버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일까? 셈이 함을 죽였다면 노아의 아들들끼리 골육상잔을 벌였다는 이야기이고..... 아브라함은 과연 훗날 팔레스타인에서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니까 거룩한 숨은 뜻이 반듯이 있을 것이라고 그냥 모르는 체 하기로 했던 것일까?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과연 성서에 제대로 쓰여진 것일까?'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 이 순간까지 가나안 땅의 실체는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어 날아다니는 지옥 같은 땅'이 아닌가 말이다.

(성서에 기록된 거룩한 가나안 땅)이 바로 (예루살렘의 가자 지구)라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믿을 수가 있겠는가?



어쨌거나 이런저런 가만히 따져본다면 아브라함이 태어나고 살았던 갈대아와 첫 이주지였던 하란까지가 모두 여전히 노아가 정착한 아르메니아 영역이었다는 것이 입증이 된다. 고대 아르메니아 전성기의 영토가 서쪽 지중해에서부터 동쪽으로 카스피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아르메니아 영역을 벗어나 레반트 지역의 팔레스타인으로 집단 이주를 했던 것이다. 당시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지금의 10배가 넘었을 정도로 광대한 영토를 가진 왕국이었던 것이다.

로마가 등장을 해서 지중해 패권을 쟁취했고, 페르시아 제국 이후에 등장한 파르티아 제국의 사이에 끼어서 점점 영토가 줄어들었다. 그러다 아나톨리아 평원에 오스만 제국(터키)가 등장하면서 비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터키에 숙적은 러시아다. 북진하여 유럽을 차지하려는 오스만제국(터키)에게 치명타를 가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남하정책(부동항 확보)이었던 것이다. 그런 터키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1차 저지선으로 아르메니아를 선택하는 순간에 20세기 현대사에 벌어진 제노사이드(집단학살)와 디아스포라(민족 유랑)이라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터키의 무자비한 아르메니아 침공과 집단학살로 대략 1백 50만 명이 사망했다. 어떤 구실이나 이유나 명분이 없었다. 그냥 쳐들어가서 마구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영토를 빼앗아 차지했다. 이 과장에서 아르메니아의 절대 성지인 아라라트 산(우리나라로 치면 백두산)이 현재의 국경 너머인 터키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어디에서나, 특히 수도인 예레반의 어디에서나 아주 선명하게 민족의 영산인 아라라트 산이 원수 나라에 빼앗겨서 눈 뜨면 올려다 보이는 지척에 두고서도 결코 갈 수 없는 성지가 되고 말았다. 영토의 70% 이상을 터키에게 빼앗겨 버렸다. 아르메니아 영토에는 아주 커다란 세 개의 호수가 있었는데 현재는 세반 호수 하나만 남았고, 터키가 빼앗은 반 호수는 터키 동부의 아주 커다란 중심 도시권이 되어 버렸다. 아르메니아 인구는 1 백만을 넘어섰는데, 1 세기 전에 2 백만의 국민이 터키의 제노사이드에 살아남기 위하여 이교도의 영역인 이란의 국경을 넘었다. 이교도 무슬림 보다도 터키의 침략과 만행이 더 무서웠기 때문에 그들은 이란 국경을 넘어 도망쳤고, 종교적 차이와 문제를 알면서도 살려고 국경을 넘어오는 2 백만 명의 유랑민들을 이란은 차마 내치지 못하였다. 이들 20세기 유랑민족(디아스포라)는 21세기인 지금 이 순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란 북쪽의 국경지대에서 정착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항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들의 고향은 지금 모두 터키인들의 사유재산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고국인 아르메니아는 현재 국민의 두 배나 되는 실향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한다. 이런 처지에, 이들을 차마 어찌하지 못하고 내버려 두고 있는 이란은 지금 미국과 서방 세계의 제재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누가 바리새인이고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인가? 기독교의 사랑과 이슬람의 샬롬(평화)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공염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의 형제 국가인 터키의 최고 지상 목표는 EU(유럽 연합) 가입이다. 묘하게도 터키는 NATO(북대서양 방위조약)에는 가입되었지만, EU 가입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불허되고 있다. 터키는 EU 가입으로 관세 문제와 차관문제와 FTA 문제 해결을 통해 유럽의 선진국들과 대등한 위치에 오르고 싶어 안달이다. 터키의 국방력과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나토 가입은 받아 주었지만, 터키의 과거사 문제를 들어 독일과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터키의 EU 가입을 거부하고 있다. 거기에서의 과거사가 바로 터키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가리킨다. 특히 독일의 경우는 2차 대전 종전과 동시에 과거사 청산을 위해 온 국력을 쏟아왔다. 브란트 수상이 아우슈비츠를 찾아가 무릎 꿇고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하고 반성했으며, 근자에 물러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기회만 있으면 유대인 희생자 묘역을 찾아가 속죄의 기도를 올렸다. 독일 민족정신의 갱생을 이제는 어느 주구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거에는 전범국이었으나 이제는 평화를 숭상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독일이 된 것이다. 여기에 늘 비교되어 폄하 받는 민족이 버젓이 존재하니 바로 일본이다.

그런 독일과 유럽의 서방이 터키의 과거사를 꼬집고 나선 것이다.

터키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과거사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보상에 노력을 한 후에나 가능할 일이라는 입장이다. 과거사를 인정하자니 터키는 20만 명 정도의 사망자를 주장하는데, 학자에 따라 많게는 2백 오십만 명까지 사망자를 추정하기도 하지만, 근거자료에 따른 분석으로 보자면 약 1백 오십만 명이 무차별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지탄이 빗발치겠지만, EU 가입으로 좀 더 잘 살자고 만 한다면 까짓 과거사 인정이나 반성을 내보이기 위한 속죄 이벤트쯤은 혹 언제든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보상과 배상 문제가 남는 것이다. 사망자 1백 오십 만에 그 사태로 도망친 이란 북부의 유량민이 2백 만이나 된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배상할 것인가? 터키 영토의 대충 한 20% 정도를 떼어서 나누어 주거나 돌려줄 수 있을까? 사유재산으로 등록하고 그 영토에서 살고 있는 터키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정도의 영토를 내주는 전제를 한다면 국민들의 반발로 차라리 영원히 EU 가입을 포기하자는 여론이 국론이 될 것이 너무도 뻔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영원한 절대성지인 아라라트 산을 국경 안쪽의 터키 땅으로 만들었는데, 아르메이아의 최우선 요구가 민족의 영산을 돌려달라는 요구이다. 아라라트 산이 터키에서 손꼽히는 최고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금, 그 엄청난 관광 수입과 거기에 연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물리치는 것 조차도 터키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정의로우심이 아닐까?


아르메니아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란 지역에 이슬람화 되고 오스만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지역에 이슬람교가 전파 되었다. 이렇게 발생된 종교 문제로 결국 강대국들에 의해서 아르메니아 영영을 잘라내서 이슬람 국가 아제르바이젠이 탄생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 지역인 코카서스 3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이 소련(구)에게 병합되었다가 1991년 독립하는 시점에서 강대국 소련이 또 치명적인 장난질을 친 것이다. 소련뿐만이 아니라 서구 열강이라는 강대국까지도 모두, 빼앗을 때는 무차별 공격적으로 싹쓸이 해놓고는, 내 줄때는 곳곳에 지뢰(불씨)를 심어 놓기가 일쑤다. 안정과 평화 보다는 분란과 대립과 마찰을 곳곳에 심어서 머지않아 다시 싸움이 시작되면, 그때 혹시나 기회를 틈타 다시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깔아놓는 것이다. 한 지역에 정치적 사상과 종교적 성향과 민족적 바탕이 모두 다르다면 두루두루 고루 살펴서 최대한 다툼과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책이라도 채택해 실행에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대국들의 야욕은 뻔히 알면서도 싸움이 지주 발생하는 쪽으로 최악의 선택을 부러 고른다. 항상 그렇다. 그것이 서구 열강들이, 특히 영국과 프랑스와 미국이 늘 저지르는 방식이다. 그러다보니 소련이나 중국까지 그런 나쁜 습관들이 그저 일상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국가의 영토를 나누면서(위의 중간 지도)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아제르바이젠 영토 안에 고립된 섬(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처럼 일부러 나누어서 할당시켰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아르메니아 건너편에(아제르 지역)있는 영토를 아제르바이젠 영토로 할당 시켰다. 서로 으르렁 거리는 상대편 영토 안에 멍멍이 밥그릇처럼 툭 던져버린 것이다. 이들은 모두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자기들 영토에 오고 갈 수가 없다. 방공만 발동으로 영공마저 가로막는다면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멍멍이 밥그릇처럼 뚝 떨어져 적들에게 둘러싸인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라는 말인가?

‘그러니까 왜 독립을 해? 그냥 말 잘 듣고 소련 치하에 얌전히 있었으면 이런 불상사사 없었을 것 아니야? 다시 돌아올래? 내 밑으로?’하는 게 소련의 심뽀였다.

다들 언제나 그런 식이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그런 짓을 수도 없이 저질렀고, 지금 미국과 중국이 그런 재미에 푹 빠졌다. 거기다가 그런 재주를 아예 가지고 태어난 국가가 있으니 바로 이스라엘이다. 가자지구나 서안지국에서 벌이고 있는 희대의 만행이 어쩜 그렇게 소련의 행태를 감쪽같이 패러디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악랄한 놈들이다. 모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면..... 그래도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적들에게 포위되어 고립 상태로 시간이 지나면....... 내 나라와 땅을 두고도 절대 오갈수가 없다면........ 굶어 죽는 수밖에는 달리 어떤 방법도 없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유대민족을 돌보시듯이 메뚜기 대신 택배로 일용할 음식과 생필품을 조달해 주시고, 태양열로 24시간 조명을 밝혀주시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허겁지겁 국제사회가 발을 벗고 나서서 겨우 숨통만은 트게 해 주었다. 최소한의 오갈 수 있는 통로를 서로 협약 하에 열어주기로 한 것이다. 라친회랑과 잔게주르 회랑(통로)을 열어서 살아가는 방도를 마련키로 한 것이다. 물론 상호간에 관리와 감시를 통해 군사적 이용과 무기 등의 통행은 절대 금지시킨다는 전제가 깔렸다.


2.000년 동안, 왜 기독교가 족적을 남기는 곳에는 항상 어둠과 피의 흔적이 남는 것일까?

입으로는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왜 실상은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든 잔혹한 인간말살의 참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일까?

신의 뜻은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신이 주재하시는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이란 말인가?

하늘나라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승의 삶이 당장 아비규환 속 지옥인 것을 말이다.

(구원의 약속) 이란 것이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

Amen?

may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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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의 유대인 학살. 그것은 인간 존엄의 말살이었으며 실로 엄청난 죄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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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가 저지른 아르메니아 대학살.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혹할 수 있는가? 터키는 이 만행을 만회하기 위하여 한국 전쟁에 군대를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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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대학살. 신(神)은 이런 죄악을 양산시키려고 이스라엘을 아유슈비츠에서 구하셨는가? 아멘!!!!!! 그들은 나찌 보다도 월등했다.






AD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관용을 베풀어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종식 시키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기독교를 공인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놀라운 사건이었겠지만, 사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처음은 아니었다. 1등 같은 2등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실제의 1등은 어디에서도 기억조차 해주지 않고 있다.

(기독교 공인)이란 이제부터는 누가 기독교를 믿던 말던 일체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기독교의 이해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 역사는 공인이 발표된 그 순간부터 바야흐로‘영광스러운 기독교 세상이 펼쳐졌다’라고 확정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내면을 살펴보자면 (기독교 공인)과 (국교로의 승격)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고 그 엄청난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로마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세 번째 기독교 국가라고 공인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국가는 아르메니아(301년)이고, 다음으로 조지아(337년)가 두 번째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로마는 313년 이니까 당연히 두 번째 기독교 국가가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로마는 공인만 했지 로마가 완전하게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한참 지나 서기 380년이 되어서야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국교로 승격되었다. 그나마도 로마의 행정법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다는 법률 제정은 391년에야 실행이 되었던 것이다.

로마의 국교로서의 기독교는 1등이 아니라 흡사 1등 같은 3등이 분명하며, 좀 더 심도 있게 따져본다면 3등의 위치도 그리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다가 313년의 기독교 공인 역시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차지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렇게 따져 본다면 기독교 역사에서 이야기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역할은 엄청나게 부풀려져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며,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공헌한 업적의 상당 부분은 진실 저 너머의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부풀려지고 조작되고 거짓으로 꾸며져 덧붙여진 허구일 수도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아주 많이 있다. 거기에 비록 학자는 아니지만 필자인 나도 끼어 있다고 하겠다.

바티칸 대성당 회랑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세속의 군주 두 명이 말을 타고 위용을 자랑하는 기마상이 있다. 한쪽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이고, 다른 쪽은 사를마뉴 대제이다. 기독교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세속의 군왕들이다. 기독교를 탄탄대로에 올라 서게 만들었고, 기독교(敎權)가 세속의 통치권(皇權) 위에 군림한다는 명분에 공헌했거나, 아니면 속아서 이용당한 세속의 군왕 대표들인 것이다.

순수 역사학과 고고학 관점에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살펴보자. 기독교 공인도 그보다 앞서서 발표한 황제가 있었고, 로마의 기독교 채택도 한참 훗날 다른 황제가 한 것이 분명한 마당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실제로 기독교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가?

이상한 꿈을 꾸었고, 전쟁에 나가 이겨서 황제가 되었고, 숨을 거두기 직전에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거룩한 기증서를 유언으로 남겼다는 것밖에는 한 일이 없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로렌초 빌라(Lorenzo Valla)에 의해서 그 기증서가 위조된 가짜라는 고발이 나왔고 끝내는 교회(교황청)이 이를 시인하는 희대의 사태가 벌어졌다. 로마 가톨릭이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항상 전면에 내세우던 서류가 가짜였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상한 꿈이나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실로 믿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교회역사가 그것에 대해 죽자 살자 매달리며 명분을 세우려는 뜻은 그만큼 교회에 꼭 필요하고 유익한 스토리라는 말이 된다. 이를 뒤집어 보면 유형의 서류마저 위조했다가 들통이 난 마당이지만, 꿈이나 세례식이나 본 사람이 없고 당사자가 죽어 없는 마당에 위조나 날조가 입증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계속 가고 보자는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생뚱맞게도 모든 사건에는 필요와 명분과 그에 따르는 이치가 있고 서로 들어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따시고 생각하고 연구해 보아도...... 황제가 그날 꼭 그런 꿈을 꿀 필요가 없어 보이고, 재위 기간의 이력 전부를 아무리 따져보아도 굳이 죽으면서 세레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황제는 세례를 받을 이유도 없고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흡사...... 늦게 도착하여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이, 허겁지겁 도착하니 아직 아버지가 눈을 껌뻑이고 있었으며, 입술의 떨림을 통해 전 재산을 자신에게 내리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주장한다면...... 임종을 지켜 본 딸과 사위와 이복형제는 귀신이란 말인가? 어쩌면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그만큼 그런 풍경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벌어졌던 것이라고 보는 시선들이 상당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좀 더 과감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을 해 보자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간판을 내건 다국적 기업 바티칸 그룹의 바지사장이었다’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의 기간 내내 이미 자신의 출신인 유대민족으로부터 박대를 받았으며, 끝내는 그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었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런 사건의 배후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민족과 그들의 종교가 아주 오래전부터 심하게 압박과 탄압을 받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예수 사후 30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 종교의 자유가 승인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숨어서 기도를 드리고 신앙을 숨기며 적발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적어도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확실하게 한 가지 밝혀드리고 싶은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 공인에 대한 오해’와, 칙령을 발표한 ‘밀나노란 지명에 대한 오해’ 부분에 관해서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은 쉽게 말해서 ‘이제까지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 불법행위였는데, 이제부터는 합법적이다’ 라는 내용인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여기 이 ‘기독교 공인’이 훗날 로마의 국교로 승격된 이후에 벌어지는 교회의 신분 급상승과 교회 권력의 급부상으로 로마의 지배층이 통치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을 만큼의 사상 초유 사태는 아직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직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맹위를 떨치기까지는 황제들이 여러 번 바뀌어야 하고 시간이 70년 내지는 80년이 더 지나야 벌어지는 것이다.

로마는 다종교 국가였다. 로마는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을 허용했고 자신들은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했다.

다른 영토를 쳐들어가 점령하면 먼저 재화를 약탈하고, 노예를 잡아다가 팔거나 로마인들을 위한 부족한 노동력으로 충당했다. 그러면서 실질적 지배 보다는 식민지로 개척하면서 타민족을 점차 로마인화 시켜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복종하지 않는 식민지는 다시 공격하여 민족의 말살 내지는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정책의 결과로 한정된 적은 수의 백성과 군인을 가지고 로마는 광활하고 드넓은 세계를 정복하고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로마에겐 정치와 경제와 군사적인 부분이 중요했을 뿐, 식민지의 종교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정책을 펼쳤다.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충성하고 로마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식민지라면 더 이상은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괜한 종교 갈등을 부채질 하는 지배정책이야 말로 제국 몰락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정치제도나 군사력에 의한 압제에는 비록 노예의 처지로 전락했다 해도 운명이라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되지만, 종교적 멸시와 탄압은 굴복 시키거나 완전히 빼앗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로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는 모든 국가와 민족들의 종교를 존중했고 허락했다. 단 하나의 종교와 민족만 빼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유대교와 히브리 민족이었다.

다종교 국가 로마는 정복한 세계의 여러 종교들을 위해 로마의 한복판에 판테온(Pantheon)을 아그리파로 하여금 건설하게 했다. 판테온의 다른 이름은 만신전(萬神殿)이다.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인 것이다.

판테온에는 로마와 연관된 모든 국가나 민족의 종교 신들이 모여 있고 그들에 대한 숭배와 종교적 자유가 보장된 해방공간이었다. 마니교나 짜라투스투라교는 물론 힌두교도 있고 고대 그리스 종교와 이집트나 소아시아의 모든 종교가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소아시아 식민지에서 볼 일이 있어서 로마에 찾아온 관리나 군인은 틈을 내서 판테온을 찾아가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제국이 자신들의 종교를 허락하고 받들어 잘 모셔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게 되었고, 판테온이라는 신전의 놀라운 위용에 감복하여 로마라는 제국이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가에 절로 감탄하게 되면서 저절로 로마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로마제국이 택한 치밀하게 사전 계산된 고도의 식민정책이었다.

만약 유대민족이 그러한 로마의 지배정책에 순순히 응하고, 유대 신앙의 모체인 야훼를 판테온 어딘가에 모셨고, 유대인들이 판테온을 찾아 기도하면서 로마의 배려에 감사했다면 그토록 심하게 유대를 탄압하지도, 실질적인 점령과 감시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민족의 신(神)은 다르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신 야훼였던 것이다. 진짜 신은 하나뿐이라 믿었고, 그 거룩한 신을 판테온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세상의 모든 잡신들과 감히 비교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함께 모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불경이었다. 유일한 진짜 신은 스스로 유대민족을 선택하신 야훼(하나님)뿐이었던 것이다. 특별한 신의 존재만큼이나 유대인 자신들도 위대하고 거룩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여, 너무도 당연하게 유대민족은 로마인들에게 눈의 가시였다. 그래서 없애고자 했음에도....... 유대는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져 내가가고 있었다.

이런 오랜 역사를 예리하게 살펴보던 로마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이르러, 그들을 설득하고 로마화 시킬 수만 있다면 제국의 앞날에 큰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고, 그 시책으로 ‘기독교 공인’을 황제의 칙령으로 발표했으니, 그것이 바로 ‘밀라노 칙령’이다. 하지만 공인(종교자유 허락)만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통치 지배계급에 편입되고 제국의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과는 확실하게 구분 지어야 만 한다는 이야기다. 아직은 한참이나 멀었다.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는 (밀라노)라는 지명에 대한 오해이다.

많은 사람들이 밀라노 칙령의 밀라노를 이탈리아 북부의 최고 상업도시이자 패션의 도시로 사랑받는 밀라노(Milan)로 오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축구 명문 클럽 <AC Milan> 이 있는 최대 상업도시인 밀라노(Milan)는 그냥 이탈리아 밀라노이고, ‘밀라노 칙령’의 기독교 도시 밀라노는 멀리 터키 이스탄불과 영역을 맞대고 있는 변두리 고대도시인 니코메디아(그리스어: Νικομήδεια)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과 판교) 아니면 (서울과 구리시) 정도라고 할까? 오늘날 터키에서는 이즈미트(İzmit)라 부르는데, 이렇게만 설명하고 나면 또 개중에는 터키 동부의 고대도시 이즈니크(İznik)와 혼동하시는 경우가 당연하게 발생하겠지만...... ‘밀라노 칙령’의 고대도시는 내코메디아이고, 다른 비슷한 지명인 이즈니크(İznik)는 고대 지명이 니케아(Νίκαια)로 역사의 시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리는 역사도시인 것이다. 이즈미트(니코메니다)와 이즈니크(니케아)는 139km 정도 떨어져 버스로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지역의 전혀 다른 도시다.





trajan.jpg?type=w966 트라야누스(Traianus) 황제. 로마제국 최대 영토를 확보했으며 (군인황제)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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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ng?type=w966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4년 12월 22일 ~ 311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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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oZkz34_nPMtgJE_I5UEH2e34iVmsNCtG1D1V7RgV-O9-hOhELUGcLNM2HHZwJEH4UEKYqrUa_zo.jpg?type=w966 4두정치 시대에 각각으로 나뉘어진 황제들의 영토와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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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2556.jpg?type=w966 콘스탄티누스 1세(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년 2월 27일 - 337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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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로마인이 된 수 있다.(Anyone can be a Roman)


로마인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지상에서 최고의 축복이 아니었을까 하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어중간한 식민지 국가의 귀족이나 부자가 별로 부럽지 않았거나, 그들도 감히 갖지 못하는 어떤 특권을 여러 가지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로마인의 특혜를 어느 누구나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면 당시 사람들의 지상 최고 목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에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렇게 특별하다는 로마인 특권을 아무에게나 주도록 기존의 로마인들이 쉽게 허락한단 말이야? 특별한 사람이나 귀족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식민지의 하층민이거나 노예들이 감히 로마인을 꿈엔들 꾸어볼 수가 있겠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아니다. 하층민이나 노예도 로마인을 뛰어넘어 원로원에 진출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황제에 즉위도 가능했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로마를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공을 세워 로마에 보탬이 되고, 로마의 법률을 따르면서 로마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로마인이 될 수 있고, 로마인은 부자에서 귀족이 되고, 원로원이 되고, 집정관이 되고, 마지막에 황제까지도 오를 수 있었다.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열린 세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로마인의 특권이고, 그렇게 로마인으로서의 특권을 제대로 모두 누린 사람의 본보기가 바로 트라야누스(Traianus) 황제로, 그는 로마제국의 멀고 먼 변방인 스페인의 세비야 인근 농촌에서 출생한 하층민이었음에도, 훗날 로마 제국의 제13대 황제에 등극했다.

채 아직 로마인의 신분을 획득하지 못한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트리야누스를 최고의 롤 모델로 삼아 간절히 닮고 싶어 했을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천부적으로 군인의 기질과 신체와 용맹함을 가지고 타고났으며, 평생동안 오로지 군인으로 성장가도를 달렸고, 끝내는 황제에 올랐으나니, 그의 별명이 ‘군인 황제’였을 만큼 일평생을 전쟁터에서 거의 살았다. 그의 모든 승리와 영광이 고스란히 모두 로마 제국과 로마인들을 위해 아주 커다란 기여를 했을 것이다. 로마 역사상 최대 영토를 트리야누스 황제가 이룩했다. 출신은 스페인 세비야이지만 아무도 그를 스페인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는 로마의 황제이며 진정한 로마인의 표상인 것이다.

로마의 국회라 할 수 있는 원로원은 생전에도 트라야누스 이름 앞에 존칭으로 옵티머스 프린셉스(optimus princeps)라고 붙였으니, ‘다시없을 최고의 통치자’라는 극존칭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살아서 걸어다니는 신(神)이었으며,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여겨졌을 정도였다.

당시까진 로마 출신이 아닌 먼 변방의 타국 출신 황제들도 많이 나왔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로마 제국에 뿌리를 둔 라틴계 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을 상황에서 리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하층민 출신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거기다가 스페인 계통이라면 당연히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편을 들었거나 지지했던 만고불변의 숙적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출신이 아무려면 어떤가? 로마를 위해 누구보다도 헌신하고 영광을 이룩한 위대한 로마의 황제인 것을 말이다.

트리야누스 황제(Traianus)야 말로 ‘로마인 면허(Licenses to the Romans)’의 표본이자 산증인인 것이다.


제임스 본드(James Bond)가 등장하는 007 영화 시리즈는 1962년부터 등장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압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첩보영화로, 그는 모든 첩보원(SPY)들이 염원해 마지않는 ‘살인면허(Licenses to Kill)’를 허가받은 당대 최고의 인간병기다.

그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고대이래로 항상 이런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이어져 내려왔다. 고대의 신탁이나 아더왕의 신검이나 콘스탄티누스의 꿈 등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다.

유대인들은‘천국 면허(Licenses to heaven)’를 가진 아주 특별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했다. 자신들이 신(神)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수 유대민족을 선택하시고 보호해 주시며 이끌어주신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언제고 심판의 날이 오면 하늘에 문이 열리고 유대민족은 모두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천국 면허’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유대인 소유이며 절대로 남(기독교. 이슬람교)과 나누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구원 면허(Licenses to redemptiona)’를 가진 아주 특별한 존재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과 부활을 통해 모두 구원을 약속받았다고 믿고 있다. 유대인들의 입장과 상충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들이 성취한 구원의 약속에 대한 믿음 또한 확고하다.

‘신과 인간 사이의 어떤 거룩한 약속’이겠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전혀 확신이 서지 않는, 혹 어쩌면 그들만의 약속어음 거래 같은 느낌 또한 지워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형이상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유대인의 약속은 수천 년이 흘렀고, 기독교인의 약속은 2천년이 흘렀지만 어느 하나 확인이나 입증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갔다고 돌아 온 사람이 없고, 중간 중간에 아직 계약이 유효하며 천국이나 구원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거나 생활환경이 바뀌어 꾸준히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는 청사진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분명 믿어서 손해를 보았다거나, 안 믿어서 땅을 치며 후회했다는 구체적 증거들 또한 나오지 않았다.

누가 알겠는가? 믿거나 말거나, 죽은 조상 중에 누가 천국에 있고 누가 지옥에 갔는지 모르는 지금에....... 또 어떤 신(神)이 진짜인지 정말 능력과 효험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로마인 면허(Licenses to the Romans)’는 달랐다. 로마인 면허는 막연한 형이상학적도 아니었고, 실생활에서 그리고 실제의 역사 속에서 확실하게 엄청난 효과를 보여 입증을 했던 것이다. 막연한 하늘나라에 대한 특권 보다는 지금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지상에서의 최고 특권을 나(필자)부터 당연히 선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것을 과연 믿음(신앙)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리분별력과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면 ‘로마인 면허’대신 천국과 구원의 막연한 기대를 신앙이라고 우격다짐으로 강조하는 일이야 말로 자유인이 아닌 속인(피지배인) 처지로 교육받고 세뇌되어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인들도 신을 믿었다. 그 신이 유일신 하나님이 아니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구약의 하나님이 애초에 라틴족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히브리족(유대인)을 선택하신 것이 ‘로마인 면허’를 추구하는 사람이나 민족의 잘못만은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는(구약) 유대인만을 선택했다가 후대에(신약) 문호를 개방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특권을 나누어 준 것이라면, 그때까지의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 또한 하나님께서 마땅히 책임 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라시면서, 결과적으로 다르게 일을 벌이셨던 것에서 파생된 문제이니까 말이다.

‘로마인 면허(Licenses to the Romans)’의 효과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도 그대로 여실히 그려져 있다. 아울러 이 사건은 유대 역사서에도 기록되었고 로마의 역사서에도 실제로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로마인 면허의 최고 특혜를 입은 사람은 아마도 바울(Paulus)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바울(Paulus)은 정말로 사도(使徒)가 맞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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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type=w966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카라바조의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회심>. 로마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소장.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고자 하는 예수를 민중 선동죄 죄목을 들어 로마의 법정에 고발했다. 손을 안대고 코를 푸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을 했지만 워낙 민심이 흉포하고 사방에서 폭동의 조짐이 가득했던지라,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유대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저들의 요구대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고 대신 바라바를 풀어주었다.

그런 빌라도가 과연 영원히 씻지 못할 죄악 덩어리란 말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예수는 전지전능하시며 삼위일체이신 성자이다. 온 우주를 통털어 모르시는 것이 없고 못하시는 것이 없는 분이시다.

그는 지상에 내려오실 때부터 이미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죽어서 무엇을 이룩할 것인지에 대해서 모두 잘 알고 계셨던 분이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의 거룩한 업적을 위해서 반듯이 누군가가 해야만 했을 최고 악역을 묵묵히 수행한 훌륭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빌라도의 악한 선택이 없었다면 예수의 구세주 역할은 결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빌라도도 유다도 맡겨진 역할이 그랬을 뿐, 그렇게 악인은 아니라고 나는 대신 변명해 주고 싶다. 예수가 스스로 자해를 통해 죽음을 선택했고, 사흘 만에 부활 승천했다면....... 빌라도나 유다는 죄를 지을 기회조차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당연히 기독교의 시작이 삼류 영화처럼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존재도 아니었기에, 그저 운명에 순응했을 뿐이고, 그들의 운명은 삼위일체이신 그분이 선택하신 것이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가 아니었다든가, 전지전능하지도 않은 분이시라면 십자가 사건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고, 그럴 경우에는 빌라도와 유다의 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이 내(필자) 가슴 속 양심의 선언이다.

어쨌거나....... 구세주께서는 지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도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예수를 죽여 없애버리기는 했지만, 저잣거리에는 아직 그와 함께한 열 두 제자들과 그를 추종하던 수많은 무리가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다시 끈질기게 로마를 부추겼다. 예루살렘 사방에서 벌어지는 반란의 주동자들이 예수의 잔존세력이라고 떠벌렸던 것이다. 로마 제국의 군대가 일제히 기독교인 색출 제거 작전에 돌입했다. 초대 기독교인 대부분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나 지하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아니면 기독교를 버리고 배교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수의 제자(사도)들도 뿔뿔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제 기독교의 중요 거점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의 탄압이 비교적 적은 알렉산드리아. 카파도키아. 안티옥. 에페소. 데살로니카 등지로 분할되어 유지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예루살렘에 기독교인들은 모습을 모두 감추고 말았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지하 교회에는 성지를 버리고 떠날 수 없는, 숨어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이 버젓이 존재했다. 그 중심인물이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였고, 시몬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했다.

시간이 흐르고 로마의 예루살렘 탄압이 극에 달하자 유대인들의 독립전쟁이 사방에서 민란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쯤 되자 유대인과 기독교인(핏줄은 같은 유대인) 사이에 어느 정도 원만한 교류가 시작된다. 로마에 대한 저항과 독립이 같은 민족 안에서의 종교적 갈등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이다. 대충 적당히 타협하고 섞여 살았다는 뜻이다. 민란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로마에 대한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기독교 지도부(야고보 일행) 귀에 놀라운 소식이 한 가지 전해졌다.

누군가가 소아시아 지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다니는데, 그 성과가 놀라워 사방에서 기독교인들이 나날이 무서운 기세로 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하여 그가 누군가를 알아보니 그저 들려오는 소리에 ‘사도 중의 하나’라는 대답뿐이었다.

야고보는 즉시 사방에 파발을 보내 사도들의 정황을 파악했다. 그런데 돌아온 소식에 의하면 지금 소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도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들리는 소문에 소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사도를 현지에서는 ‘열두 번째 사도’라고 부른다는 소식이었다.

야고보가 파악해 보니 지금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야고보 본인과 시몬 베드로와 막내 요한은 분명 여기에 함께 있고, 나머지 아홉 사도의 근황도 분명하게 파악이 되고 있는데 뜬금없이 열두 번째 사도라니? 도대체 누가 열두 번째 사도라는 말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망하는 것을 보고 사도였던 유다 카리옷(Judas)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 예수가 직접 선택한 열두 사도의 중요성(서구 사람들은 12를 가장 완벽한 숫자로 추앙하는 정서를 가졌고, 대신 숫자 13을 기피한다)을 내세우며, 사도들과 꾸준히 함께 활동한 사람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자살한 유다를 대신하는 사도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새로운 사도 마티아스(Matthias)다.

새로운 사도 마티아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별로 없어, 아프리카의 식인종들에게 선교하다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고 쓰러져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에 덧붙여, 다시 거론할 기회가 있겠지만 성녀 헬레나(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유해를 발굴하여 로마로 가져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로마 가톨릭 안에서는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는 부분적 사료들에 따르자면, 마티아스는 예루살렘 박해 후에 아나톨리아 평원을 지나 아르메니아를 거쳐 조지아로 가서 선교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여 진다. 선배 사도인 바르톨로메오와 타대오를 따라 아르메니아로 함께 왔으며, 바르톨로메오와 타대오는 그곳에서 활동하다 순교하였고, 마티아스는 더 깊은 살골짜기를 따라 조지아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다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한다. 훗날 니노 할머니에 의해 재차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져서 조지아가 2번째 기독교 국가로 발전하는 저변에 사도 마티아스의 헌신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렇게 당시의 사정을 야고보가 판단해 보건데...... 마지막 사도 마티아스가 지금 분명 조지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즈음에, 불쑥 소아시아에 등장한 열두 번째 사도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도(apostle)는 어떤 임무 수행을 위하여 누군가를 앞에 미리 보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안에서의 ‘사도’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에수 그리스도가 직접 선택해 함께 생활하면서 가르침을 전해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하기에 로마 가톨릭 안에서의 사도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그분의 행적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아주 특별한 전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와 직접 함께했던 열두 명의 사도돌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전혀 뜬금없이 불쑥 등장한 이 ‘열두 번째 사도’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구세주를 사도란 이름으로 다시 내려 보내시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안에서 해괴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내 내분으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모종의 종교적 권력다툼으로 까지 발전하고야 만다. 비록 어찌 보자면 그것이 초대 교황에 이름을 올리게되는 시몬 베드로의 뜻이 결코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실질적인 리더는 분명 예수의 형제 야고보였다.

훗날, 로마 가톨릭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가게 되면서 모든 주도권은 시몬 베드로에게 옮겨가고 말았다. 아마도 그것은 베드로 본인의 뜻이거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리라 판단되지만 말이다. 나는 베드로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초대 교황이라는 사실이 정당하고 자랑스럽습니까?'

하지만, 인류 문명사는 기독교를 들여다보면서 '만약 예수가 없었다면 당연히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지금의 기독교(로마 가톨릭)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내 생각도 꼭 그것과 같다.

그렇게 보자면, 기독교 절대 성지는 예루살렘이었어야 맞는 것 같다. 예수의 무덤과 베드로의 무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초대 교황은 야고보여야만 했고, 기독교를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 위대한 교황은 당연히 2대 교황에 올랐을 바울이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진짜 정통성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사도 바울의 행적을 좀 더 살펴보면 아마도...... 그런 정통성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기독교 전승’은 성전(聖傳,Tradition) 이라고도 불리며 ‘전해져 내려오는 거룩한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은 기독교의 신학 용어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 개신교의 경우는 삼위일체설이나 부활절, 그리고 주일 성수 등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해당하는 극소수의 전승만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설의 공인 과정에서 벌어진 다툼과 파문과 이단 심판은 수백 년 동안 이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다툼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단이나 파문으로 결코 끝나지 않고 있다. 구세주께서 다시 오셔서 확실하게 교통정리를 해주시기 전까지는 결코 해결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구세주께서 직접 주재하시는 종교회의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증인석에 출두해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개신교는 보편공회의에서 벗어난 대부분의 전승을 모두 거부(신.구약의 성경 내용만 인정)했으나,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 전승 모두를 수용하고 의미를 더 심도 있게 부여하는가 하면, 오히려 (교황무오설)이나 (성모 승천설) 등을 기독교 전승에 추가하기 까지 했다. 앞으로도 필요하게되면 더 보태질 전승이 언제든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은 만고의 진리로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 불변이다. 하지만 전승은 그때 그때 새롭게 해석도 가능하고 보태질 수도 있다. 하지만 거룩한 신성은 동등하게 가진다. 이게 정말로 가능........ 개신교는 대부분의 전승을 일제 거부한다.

개신교는 신약 구약의 성경만으로 존립이 가능하겠으나, 지금의 가톨릭은 신약 구약의 성경과는 별로도 기독교 전승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가톨릭의 존립은 어쩌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단군 신화는 허구이자 우상숭배라면서 기독교 전승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 설계로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니....... 맹신자들이 일단 무조건 저질러보는 대충방식의 허름한 처신에 그저 실소를 금치 못할 뿐이다.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함을 하나님이 역사하시어 부디 저들이 깨닫게 해 주시기를........... 아멘!!!!!!


사도 바울의 등장 사건 역시 어디까지나 기독교 전승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출장을 떠난 로마의 관리(로마인)가 도상에서 어떤 환영을 보고는 놀라 자빠졌다는 전승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나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는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당사자인 로마 관리의 주관적인 이야기가 전부일 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 자빠졌던 사람만 아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결코 쪽팔린 망신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망신이라면 감추거나 숨겼을 테니까 말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환영으로 나타난 사람이 다름 아닌 부활하여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울은 예수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로마인이며 관리인 사울이 환영을 보고 단번에 그가 예수인 것을 알아챘다면....... 예수가 공생의 활동을 하는 기간에 어디선가 만나보았던가, 아니면 십자가 사형장면을 목격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단박에 알아보았단다. 어떤 차림으로 어떤 방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어떤 표정으로 호통을 치셨는지 하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그냥 나타났고 만났다.(잡지도 없고 SNS도 없고 티비도 없던 시절에, 그렇다고 현상범 포스터로 예수의 얼굴이 주막마다 붙어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딱 보니 예수인것을 알겠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로마의 관리 사울은 사라졌고 사도 바울이 등장했다.

모든 것이 보기에 따라서 모두 제각각의 해석이 가능한..... 참 아리송한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전승에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이런 것이 바로 (기독교 전승)이다. 기독교적인 믿음의 시선으로 본다면 거룩하고 성스러운 실재 사건이 되고, 기독교적 시선을 배제하고 이성과 합리적 시선으로 본다면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게만 느껴질 수 있는, 그야말로 웃기는 씨츄에이션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 해서, 로마인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사도 바울로 거듭났다고 하면서 이름이 바뀐 것에 커다란 의미를 두는 사람을 실제로 많이 보았다. 그것에 대해서 나는..... 오랜 시대에 걸쳐 바울의 이야기가 생겨났고 전래 되고 보태지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기록으로 옮겨적는 과정에서 사울과 바울의 착오가 생겨난 것이라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이런 것이 전승의 태생적 한계이자 모순이라고 본다.

'세상 이치와 사리분별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겠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이 전승에 거룩함과 절대신성을 부여해야만 하겠다. 세상이 뭐라하던 우리에게만은 모두 진실이다' 라는 것이 전승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역시나 아멘!!

사울은 이렇게 기독교 역사에 전승으로 등장을 한다. 하지만 이후 전도 여행이나 예루살렘 방문이나 로마로의 이송과 이어지는 2차와 3차 전도 여행은 역사에 기록으로도 남아 있는 실제였던 것이다. 바울의 로마에서의 순교 역시 실제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베드로의 로마방문과 순교는 기록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오로지 로마 가톨릭의 전승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전승이 실제 역사의 정당성을 얻게 된 계기가 바로 한 소설가가 쿼바디스(Quo vadis, domine) 라는 작품을 썼고, 이 소설이 영화화되면서부터 ‘성경보다 더 성경 같은 성서적 진실’인 것처럼 새로운 전승을 또 한 번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쿼바디스) 스토리의 핵심 소재가 바로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을 재창조 시킨 리메이크 판의 완성인 것이다. 소설의 리메이크를 넘어서 신약성경의 한 대목으로 거룩하게 승화시킨것이 바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인 것이다. 거기다가 그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봐라. 베드로가 로마에 있지 않았느냐?'라는 바티칸의 대의명분을 진실이며 사실인양 모든 영화관람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쇠뇌시킨 공적이 더없이 크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로마 기록은 존재하는데 왜 베드로의 로마 체류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더하여 바울의 로마 순교는 역사적 사실로 입증이 되는데, 어떤 사실 입증이나 기록적 근거 없이 시몬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를 했으며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웠으니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이라는 사실을 기독교 전승을 배제시킨 이성과 양심의 시선으로 보자면 과연 어떨것인가?

로마 가톨릭은 AD 326에서 333년 사이에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원으로 최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세웠다. 그때부터 로마 가톨릭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베드로의 무덤 발굴에 대한 교황청의 공식 발표를 거듭거듭 반복해 오고 있다.

왜 그래야 할까? 한 번 확실하게 공표했으면 그만이지 ‘이번에 확인해 보니 보다 확실해 졌다’, ‘새로운 발견이 있었는데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라는 식만 되풀이 하고 있는 형국이다. 세상의 학자들이 샐프 발굴, 샐프 연구, 샐프 발표만 하지 말고, 화끈하게 역사학자. 생물학자. 고고학 학자. 등등을 총 망라하는 연구집단으로 하여금 제대로 베드로 무덤의 진위성에 대하여 발굴 조사를 해서 공증을 받아보자 라고 누누이 청원을 올리지만, 교황청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절대 거절만을 표명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내 방식으로 한 마디 하고 싶은데, ‘전승은 어디까지나 전승일뿐, 그것이 꼭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과 같을 필요는 없다’라고 해주고 싶은데........ 만약, 베드로의 무덤이 그냥 내려오는 꾸며진 이야기라면 로마 가톨릭의 정통성은 애초부터 가짜였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럼 지금의 바티칸은........ 콘클라베를 또 해야 하나?

사도 바울의 이야기나 행적이 애초 전승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끝까지 전승으로 이어져 나간다면 그것은 어쩌면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에서 많이 어긋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적 전승이 아닌 기록에 우선한 역사적 사실의 관점에서 바울과 초대교회의 이야기를 좀 더 속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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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도심의 가장 북쪽에 가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포폴로 광장이 나온다. 광장의 북쪽을 가로막고 서 있는 포폴로 문은 ‘여기서부터가 진짜 로마’라는 표지판이라고 보면 된다. 전해지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격언이 실제로 실현되는 곳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로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의 모든 방문자는 반드시 여기 포폴로 문을 통해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로마의 황제가 살며 로마인들이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사는 진짜 로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는 그 포롤로 문앞에 서서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 광장 너머의 쌍둥이 교회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먼저 찍기에 바쁜 것이 지금의 엄연한 현실이다. 굳이 포폴로 문을 통과할 필요 없이 다른 쪽(테르미니역)에서 얼마든지 로마에 쉽고 편하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광장을 둘러 보았으면 서둘러 인근의 괴테가 머물던 장소를 찾아가던가, 언덕을 통해 보르게세 궁전으로 발걸음을 서두르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이드가 안내를 한다면 포폴로 문 바로 옆에 너무나 유명한 성당을 반드시 방문하게 될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대성당 (Basilica of Santa Maria del Popolo)은 로마 가톨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성당이자만, 그토록 수없이 많은 여행자들이 앞다투어 찾아가는 가장 주된 이유는 바로 20세기 이후로 가장 뜨거운 화가로 급부상한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작품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과 <사도 바울의 회심>이 카라치가 그린 <성모 승천> 양쪽으로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성모 승천> 작품과 <베드로의 순교>나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도 과거에 여행기를 통해 상세하게 다룬 적이 있었기에 그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왜 천년 이상을 훌쩍 뛰어넘은 시점에서 느닷없이 (성모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이 필요해 졌을까?

세라시 채플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기 이 세 작품의 소재가 모두 로마 가톨릭 안에서만 수용되는 (기독교 전승)에 따른 내용이라는 점이다. 세 작품이 모두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기록이 전혀 없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나 허용되고 가능한 이야기들이 소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기록도 없고 몇몇 사람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과 이야기가 가톨릭 안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거룩한 의미를 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털어서 20세기 가장 뜨거운 감자로 추앙받고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가장 쉽고도 편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포폴로 대성당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아주 희귀하게는...... 포폴로 성당을 찾아가서 <성모 승천>까지는 감상을 했음에도 카라바조의 그림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실제로 있다. 걸리기는 나란히 걸렸음인데 찾지를 못했다니....... 가보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게 정말이라고? 인샬라(inshallah)!!!


기독교 전승이 어찌되었거나 ........ 아무튼........

예수라는 청년이 유대교에 대해 신성모독을 저질렀으며 민중을 선동하여 로마에 저항했다는 죄로 십자가 처형을 받았는데, 무덤에서 그의 시신이 사라지는 사건을 두고 온갖 흉흉한 소문들이 생겨났고 사방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헤롯의 유대왕국이나 빌라도의 로마 입장에서도 서둘러 반란을 진압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내 그들은 ‘기독교도 말살’내지는 근원적 제거 작업에 돌입하게 되었다. 예수와 그와 함께하던 사도는 물론 그들을 추종하던 무리까지 모두 체포하기로 한 것이다. 젤롯당(열심당원)이 아니고, 적극적 예수의 추종자가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기독교인이 아니요’라고만 이야기하면 경고조치로 끝날 수 있었지만, 답변을 안 하면 끌고 가서 가두고 고문을 하고 배교를 강요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통해 최고 사형에 이르기까지 엄중한 처벌이 뒤따랐다.

그런 참혹하다 못해 악랄한 조치의 첫 사례가 바로 (성 스데반의 순교)다. 스데반 집사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이름을 올렸다.

기독교인들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다.

유대인 감시자들이나 로마 군인들을 일단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도시의 외곽이나 시장의 언저리에 숨어서 최소한의 사회활동을 아주 조심스레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어둠이 오히려 그나마 그들을 안심시켜 줄 수 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에 숨어서 은밀하고도 조용하게 기독교 집회와 만남과 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언제 어디서부터인지 저자거리에 물고기가 슬며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강이나 바다에서 돌아다니다가 잡혀서 시장 좌판대에 널려진 물고기(fish)가 아니라, 손가락이나 나무 막대기로 자신의 옷깃에나 땅바닥이나 벽에 지극히 간단하게 물고기를 그려서 무언가 당사자만의 은밀한 암시를 주고받는데 사용되는 물고기가 등장한 것이다.

두 개의 곡선을 겹쳐서 그린 물고기 모양을 ‘익투스’라고 부르는데, 이 상징은 기독교가 지독하게 탄압받았던 시대에, 기독교 성도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확인하는 증표로 사용됐다. 예를 들어 시장이나 거리에서 처음 사람들을 만날 때, 서로가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 바닥에 발로 물고기를 살짝 그리면서 믿는 성도임을 나타냈고 확인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비밀스럽게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며 교회와 신앙을 지켜온 그들만의 암호로 쉽고도 간단하게 막대기로 땅에 그려서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기호였는데, 이제는 초대교회를 가리키는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물고기(fish)를 의미하는 익투스(Icthus)를 그리스어 대문자로는 ‘ΙΧΘΥΣ’로 표기한다. 이 물고기를 나타낸 그리스어 알파벳은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ΙΧΘΥΣ :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의 첫 머리글자를 조합하여 만든(頭文字) 것이다. 때문에 물고기를 뜻하는 익투스를 다르게 풀어서 표현해보면‘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시다(Jesus Christ, Son of God, Saviour)’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신앙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것이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리디아 공주가 땅바닥에 물고기를 그리다 지우는 모습을 남자가 몰래 지켜보는 장면으로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미래를 짐작케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초대교회의 혹독한 역경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평범하거나 지극히 낮은 곳의 사람들이 숨어서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그들의 신앙과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을 때, 열두 제자들과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순간부터 십자가 처형과 부활하시기까지의 약 3년 반의 기간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생애(共生涯)’라고 부른다. 성서에 따르자면 예수의 공생애 기간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4번의 유월절을 기준으로 하는데, 네 번의 유월절은 만 3년을 가리키고 여기에 더하여 첫 번째 유월절의 6개월 전 쯤 세례 받으신 것까지 합하여 대략 3년 반을 공생애로 보고 있다.

그럼 부활하신 시점에서 다시 3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초대교회(열두 사도와 추종자들)는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비록 유대의 감시와 로마의 탄압을 피해서 예루살렘에서 도망치기는 하였겠으나, 광야의 어디에선가 목청껏 복음을 전하면서 목숨을 걸고 선교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을까?

특별히 선출되었고 막대한 임무까지 부여받았던 숭고한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읽었다면....... 그들은 그랬어야만 하고, 우리는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But........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그런 기대는 바램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물론 나름으로 무엇인가 교회를 위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의 어떤 노력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고.......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내 개인의 생각과 판단은(학자도 종교가도 전문가도 아니면서)........ 그들은 그 시기에 이미 (사도)라는 지위에 대한 어떤 기득권적인 권력 같은 것을 체득하고 있었고, 그 당시에 이미 사도회의(열두 사도) 안에서 서서히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고 나는 알고있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충분히 나름의 근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이런 배경에는 교회는 당연히 거룩하고 받들어져야 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감추는 것이 많다. 오류도 차고 넘친다. 그것들을 거룩하게 포장하기 위한 허술한 덧붙임이 너무 많다. 연구와 입증 보다 겁박지르기와 신성불가침만을 강조한다. 과연 기독교 시선과 입장만이 진리이고 신성함인가? 진리만이 진리이고, 신성함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고 마구 가져다 쌓는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바탕위에 켜켜이 존경이 쌓여 생겨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공생애 기간 약 3년을 함께 지낸 12 사도와 추종자 무리들은 이미 그 공생애의 기간에서부터 대립과 마찰이 생겨났다. 그 대부분의 이유가 기득권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바램이나 가르침이나 앞으로 그들에게 부여할 지위와 맡겨질 역할과는 전혀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사리사욕에 관한 욕심들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려고 오셨으니, 장차 그분의 최측근으로 선택받은 자신들은 아주 특별한 지위에 올라 영원토록 실로 엄청난 권능과 부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알렉산더 대왕의 측근 장군들이나 로마의 귀족과 대장군들이 누리는 부귀영화가 이제 곧 자신들에게 내려질 축복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하나 같이 그런 기대였다면(비록 꿈만 야무지게 꾼 것이겠지만) 적어도 그런 꿈으로 족했어야만 했다. 곧 다가올 그런 축복을 내심으로 기대하면서도 그들은..... 실제적인 그 안에서도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황금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의 앞자리 대기표를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대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예수는 불안함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왜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를 않는 것일까’라고 어떤 대중가요 가사를 어쩌면 읊조리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일은 그렇게 풀려가고 말았으니 말이다.

(세상의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혼자의 염원이었을 뿐, 12 제자들의 갈망은 예수의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구보다 더 많이 우선 차지하는 것이었다.

Oh, My God!!!!!!!!!!!

할렐루야(Hallelujah)!!!!!!!!

아멘. 아멘(Amen. Amen)!!!!!!!!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예수께서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너희가 오는 길에 무슨 일로 서로 다투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은 잠잠하더라.(당연하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으니) 이는 여기까지 오는 길에서 우리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이라.(마가 9장 33절)

더하여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주님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청하였으니, 쉬운 요즘 말로 (불법 청탁)을 하였고, 나머지 제자들은 그런 두 형제에게 몹시 화를 냈다(막 10:35∼41).

어쩌면 좋단 말인가?

주님께서는 고난과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고심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주님을 이용해서 이 세상 부귀와 권력을 자신이 더 많이 차지하는 데만 정신이 쏠려있었으니 말이다.

신약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부터 이미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제일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으니 제자들의 서열싸움 자리다툼이 치열했었던 것이다.(46절),

참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이 사도였던 것이다.

속된말로 예수께서 너무 배운 것이 없고 근본이 부족한 저자꺼리 속물들을 우선 급한 대로 어떻게 머릿수를 치우시려고 하다 보니 벌어진 해프닝일까? 그 분 원래 전지전능하신 분 아니셨나? 훗날 로마 가톨릭은 그 뜻이 별 볼일 없는 낮은 자를 받들어 귀하게 쓰시려는 뜻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늘어놓지만....... 누가 알아? 실수로 옆으로 삑사리처럼 걷어 찬 공이 상대편 엉덩이 맞고 골로 들어가는 경우처럼 되었는지 말이야?

열심히 가르침을 잘 받았는데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저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석을 달리 하더라 정도면 좋겠는데, 선생님 뒤를 쫄쫄 따라다니면서 뒤에서는 ‘도대체 선생님은 언제 죽는대? 그래야 출퇴근 자전거가 내 꺼가 되는데? 선생님 도시락 가방은 내 꺼 알지? 그때부터 반장은 나다?' 하나같이 이렇게 나댔다는 말이니 말이다.

한마디로 사도들은 무식했다. 성경 이야기라소 고급스러운 언어로 바꾼다면 무지한 종자들이었다. 3년의 시간을 함께 지내고 그분의 말씀을 통한 가르침과 여러 기적을 직접 목격하였음에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전지전능)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다음으로는 모두가 착각의 귀신들이었다. 또 고급스럽게는 제멋대로 오해를 밥 먹듯 하는 종자들 이라고 하겠다.

진짜였건 가식이었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내려 보내신 구세주(메시아)라고 확실하게 믿었는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었다면 3년을 채울 종자들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유대 세계에는 곧 다시 오실 메시아사상이 팽배해 있었는데, 그 메시아의 정체가 질풍노도처럼 광야를 휩쓸면서 수십만 수백만의 적(악마)를 단 칼에 베어버리고 쓸어버리는 알렉산더의 모습이거나 사탄과 용을 쓸어버리는 미카엘 천사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용맹하고 강력한 기사의 모습일 것이라고, 하여 세상의 모든 악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도...... 이 세상 그 누구 하나도...... 그 구세주 (메시아)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고, 버려진 땅 나사렛에서 성장하고, 나이 서른이 넘어서 불쑥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떠들어 대는......... 12 사도의 처지나 모습이랑 결코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로 나타나실 줄을 알아 챈, 아니 알아 챌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대인 족보상 아버지(?)인 목수 요셉 조차 목수 일은 안하고 늘 상념에 잠겨 있거나 광야를 헤매고 다니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속이 답답했겠는가?

마리아에게서 해괴한 수태고지 이야기를 들었고, 백 번 양보해서 혼인 신고를 했고, 어쨌거나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동방박사가 찾아오면서 그야말로 난리 부르스가 생겨나서 처자식을 낙타에 태우고 밤길을 달려 이집트로 도망을 쳤다. 그냥 어찌어찌 어찌 살아야만 했다. 하나님한테 신변 보호 요청을 할 줄도 몰랐을 테니 어디가 되었든 간에 후미진 곳에 숨어서 이름도 출신도 생년월일도 속여가면서 철저하게 위장 신분으로 살았을 것이다. 온 유대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정도의 헤롯이 추적을 멈췄을 리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신분 세탁과 위장 생활에 요셉의 천재적 재능을 발휘한 결과로 성경 어디에서도, 주변의 역사에서도 그 은둔생활의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인류 최고의 이집트 잠입 유대 스파이 가족이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언제 사면을 받았는지, 언제 가나안 복귀 명령을 받았는지, 이집트에서만 살았는지, 인도를 여행했느지, 또한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은근슬쩍 나사렛에 돌아와 둥지를 틀고 살았다. (나사렛 예수)라는 새로운 신분증을 가지고 다시 가나안에 등장한 것이다.

그게 드러난 전부였으니....... 그런 그가 천국의 가르침을 역설하고 다닌다기에 의식주를 해결할 겸해서 쫓아다니기는 했는데, 아무렴........ 선생님이 세상을 평정하시고자 하실 때면, <쾌걸 조로>처럼 어디 먼 동굴 속에 숨겨 두었던 하얀 백마와 눈부신 황금 갑옷과 투구를 쓰고 미카엘 천사의 장창을 꺼내 들고는 알렉산더가 바람처럼 소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온 세상을 단칼에 정벌해 버리시리라. 그러시고 나면 이 너른 세상을 어떵게 다스리실까 염두에 두고 우리 열두 제자들에게 구역을 나누어 왕위에 오르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잘 보여서 좋은 자리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요기까지가 전부 착각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랬으니 그 다음이 무엇이겠는가?

우선 무조건 담그었던 발을 빼고 보자 해서 배신이다.

허접하게 밥 한 끼 나누어 먹은게 전부인 상황에서, 그냥 맥없이 로마군에게 붙잡혀 순순히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어???? 이건 아니잖아? 숨겨놓은 하늘의 군대는 어디 있어? 죄가 없다면서 저렇게 맥없이 끌려가는 메시아가 어디 있어? 우리 선생님이 자기 말대로 메시아가 맞는 거야? 저러다가 만약 아니라면? 아니면 X되는 거네? 싸그리 디지는 거야?'

해서 즉석에서 다음 순서로 등장한 것이 바로 배반이다. 고급스럽게 표현을 바꿔 외면이라고 해 드릴까?

유다가 예수를 은 30냥에 팔았고, 베드로는 예수 일행이 아니라고 세 번 부인을 했고, 나머지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모두 도망쳤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대로 배신하기로 작정한 때문이다.

사흘 후에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그 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했을 때도 그들은 누구 하나 기뻐하거나 믿지 않았다.

오히려 '왜 우리들을 두고 막달라 마리아 너에게만 모습을 나타내셨단 말이냐'고 의구심을 가졌고 따지는 모습이었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서열 다툼의 끝판 왕 다운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훗날 이 장면을 묘사한 복음서들의 표현이 조금씩 다르거나 상반되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복음서 저자들의 바람이, 비록 그런 사실이 분명히 있기는 하였으나 자신을 그 잠시 등 돌림의 수위가 낮았다거나, 속내는 그게 아니었노라고 합리화 시키는 과정에서 파생된 모종의 암시 경쟁의 결과라고 이해하고 있다.

거기에다 하나를 더 보탠다면........ 12 사도의 구성에서부터 이미 막달라 마리아와의 마찰과 다툼이 시작되었고, 이는 다시 사도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 전환되고 19세기까지 멸시와 탄압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심지어는 21세기인 현재에도 교회의 어디에서인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자리 싸움이 벌어졌다. 종교적 기득권 싸움이기도 했고 유대민족에서 뿌리깊게 존재해 내려온 성차별의 결과이기도 했다. 현대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한 일이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면전에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무수히 저질러졌던 것이다. 속된 표현으로...... 유대의 관습 속에서 여성은 사람의 숫자로 치지 않았다. 가축이나 노예와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남성들을 위해 노동력과 생산력을 제공하는 잉여 인력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세상에 여성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가장 지척에서 무리에 앞에 서고, 예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배웠다니........ 다음 장면은 그야말로 파노라마가 아니겠는가? '저거 뭐야?'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는 12사도에게는 그야말로 집단능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새로운 12 번째 사도인 바울이 등장했다.

사울의 등장은 어쩌면 12 사도의 자격 발탈 내지는, 복종해야만 하는 새로운 메시아의 등장으로 여겨졌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나간 그런 정도의 무지와 오해와 등 돌림은 굳이 오래 기억할 이유도 없겠고, 적어도 사도로서 가야할 길들이 있으니 당연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침묵하기로 작정했다.

이제 사도로서의 책무와 맡겨진 사명을 위해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데....... 대략 한 삼년 동안 죽어라 선교활동을 펼쳤음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별로 소득이 없었다.

십자가 사태 때에 비하면 유대교와의 막장 다툼도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고, 서로 적당히 견제하고 소통도 해가면서 억지 공존공생을 하고 있었는데........ 노력과는 다르게 기독교 초대교회의 확장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데 핵심 문제가 있었다.

하느님이 내려 보내신 구세주(메시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모두 이루었다면서 구원의 약속을 공표하시면서 죽었음에도(기독교는 부활까지는 이야기하지만)....... 전혀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작년이나 그제나 어제나 오늘도, 또 내일도 변함없이 예견되기는 로마의 압제는 계속될 것이고 먹고 살기는 매우 뻑뻑할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도대체 그 약속이 무엇이며...... 언제........ 달라지는 조짐조차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 누가 기독교를 믿겠는가?

조악하고 추잡한 사기꾼 집단이었던 것이다. 당장 눈에 띄기라도 하면 돌팔매를 날려야 할 예수 쪼무래기들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열두 번째 사도‘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외지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숫자가 점점 늘어 가는가 싶었더니, 언제부터인가 예루살렘 교우들을 돕기 위한 구호물자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열두 명의 사도가 있는 곳과 상황이 모두 확실한 마당에...... 광야 저 편에서 교인의 수를 늘리고, 이렇게 구호물자까지 보내오고 있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처음에는 그것들이 그저 고맙고, 받아서 힘을 내서 다시 사도 역할에 박차를 가하자 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예루살렘의 초대 기독교인들 입에서 무서운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세주(메시아)께서 광야 저편에 열두 번째 사도 이름으로 다시 내려오신 것은 아닐까? 허울뿐인 사도면 뭐해? 열두 명이나 있으면서 광야의 이름 모를 사도 한 명만도 못하잖아?‘

이 날카로운 지적이 야고보와 베드로의 가슴을 후벼 파기 시작했던 것이다.

’열두 명이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 중의 하나를 빼버리고 사도의 우두머리로 누군가를 새로 보내신 모양이야.‘

그렇다면, 유다가 자살 한 후에 사도회의를 통해 뽑은 마티아를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예수의 수제자, 그러니까 수석 사도가 광야 저편에서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야고보의 위기이지 베드로의 위기였으며, 열두 사도에게 직면한 존폐에 관한 위험이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처음 뿌리를내리기 시작한 곳은 가나안땅 예루살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장소가 그곳이며, 바로 그곳에서 기독교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고 뻗어나간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다. 그런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점령한 로마제국이다. 로마제국은 당시로선 세계의 전부였으며, 제국의 중심 영역이 바로 지금의 유럽(서구사회) 이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피지배계층인 하층민들의 종교를 말씀하신 바처럼 세계(로마)의 종교로 전파한 사람이 예수께서 선교를 위해 직접 택하셨다는 열두 사도가 아니었다라는 아이러니가 분명하게 남는다. 첫 순교자 스테반에게 돌팔매질을 하려고 폭도들이 열받아서 벗어던지는 옷을 받아서 잠시 보관해주던 로마인 사울이 주인공으로, 그 역사적 사건을 직접 목격한 후에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의 환영을 만나고 회심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를 로마제국으로 퍼 나른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바울에 의해서 세계의 종교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으면 바울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라고 누군가는 주장했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열두 사도가 들었다면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고 함께 모여서 어떤 대책을 세웠을까?

아마 어떤 누구라도 그들이과연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라는 해답을 어느 정도는 쉽게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바로 그러했다. 그것이 그릇된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었다. 이천 년 전에 실제로 사도들을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똑 같은 생각을 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대교회 안에서는 벌써 기득권과 파벌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 이유는........ 바로 바울의 등장에 있었다. 바울의 등장이 열두 사도에게는 어떤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느껴지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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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st, Paul)에게는 사도 라이센스(License)가 없었다.

예수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만 사도(Apostle)라는 자격을 주어 복음을 강의할 수 있었는데, 바울은 예수 신학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울의 족집게 속성과외가 놀라운 효과를 발휘해, 일단 그의 강의를 들었다 하면 누구든지 구원 시험에 모두 합격하는 것이 아닌가? 12 사도에게 강의를 들으며 재수와 삼수를 해도 합격이 요원한 마당에 바울의 학원에서는 시험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었다. 거기다 그 족집게 강의가 서울 강남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 지방의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니며 벌이는 무료 순회강연 이었다.

서울 강남의 예수 라이센스를 내세운 열두 개의 학원은 그야말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사인하신 라이센스가 점점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12개 사도 학원이 운영이 어렵다는 소문이 나자 곧바로 바울 학원에서 보낸 구호자금이 도착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 사도학원은 그런 바울학원이 한없기 고맙고 같은 우물을 파는 동료라고 생각했을까? 더 열심히 홍보하고 강의해서 은혜를 갚겠다고 마음먹었을까?

개뿔!!!!!!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웬수지, 웬수? 남의 학원시장을 모조리 빼앗아간 웬수지.......

그럼 어떻게 대처했을까?

우선 신학대학에 자격증 심사 의뢰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예수 신학대학을 바울이 졸업한 사실이 없다고? 그럼 이제까지 모두 무허가 불법 사설강의였네? 그건 엄청난 범죄아녀? 너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

12개의 사도학원 연합회는 시골 촌동네의 바울학원에 공문을 보냈다.

‘바울 보아라. 자격증도 없이 저지르는 불법과외가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모르고 하는 짓이냐? 이제 곧 로마의 교육청 산하 불법과외 단속반에 고발을 할 터이니 이제라도당장 달려와 무릎 끓고 사과하고 얼른 간판 내려라. 네가 편지를 읽을 때 쯤엔 이미 고발조치에 들어간다.’

그런데 하필........ 바울 옆에서 사도 연합회가 보낸 협박성 편지를 같이 읽어보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순회학원 강사인 바나바(Barnabas)였다.

바나바가 즉석에서 대신 사도연합회에 답신을 써서 친전이란 표시까지 보태 긴급배달 우표까지 붙여서 보냈고 무사히 송달되었다.

‘12 사도 친전. 바울에게는 무허가 사설학원 운영에 대한 죄가 없습니다. 순회학원 개설 명의는 이사람 바나바가 개설한 정식학원이었으니 말입니다. 바울의 학식과 덕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남달라 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요청에 의해 강의가 벌어졌던 것이며, 그 강의 내용의 수준이 남달라 실로 어디서도 볼 수 없었을 만큼 효과를 발휘하였기에, 또한 거듭 재강의 요청이 빗발치듯 날아들었기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하오니 바라 건데 이제부터 더 이상은 바울에게 자격증 이야기는 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부득이 12 사도들처럼 예수 신학대학 졸업자격증을 허락해 주실 수 없다면, 저처럼 신학교 졸업 자격이라도 추천하여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그 없이는 순회강연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거듭 바울에게 예수 신학교 자격증이라도 허가해 주시기를 거듭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청 드립니다.’ 라고 적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바나바도 예수 학원 개설 자격증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나바는 12 사도처럼 예수 신학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하지는 못했다. 예수로부터 직접 자격증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12 사도와 함께 똑같이 예수와 동행하였고, 같이 가르침을 듣고 배웠다. 다만 처음 예수께서 직접 선택하신 12명의 직접적인 제자에 들지는 못했지만, 쉽게 말해서 그 다음의 2차 제자쯤은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향하시기 전에 12 사도를 포함하여, 늘 주변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을 함께 불러서, 대략 70인 정도의 사람들에게 더 넓은 세상의 끝까지 구원과 약속의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 하셨다. 이들을 교회 안에서는 ‘70인 사도’라고 부른다.

바나바와 스테반 성인이 바로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어찌 보자면, 비록 12 사도의 등급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사도로 임명되어 사방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지금 그 예수의 가르침과 명령대로 변방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던 중에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의 환영을 만나 회심하고 불타는 열의로 복음을 증거하고 전하는 바울을 바나바가 보자니....... 그는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큰 뜻이 더 있어서 부르신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여, 12 사도의 자격증을 주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신 정도의 신학교 졸업생 정도 자격증을 주면 바울학원이 더욱 번창할 것이며,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더욱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예수와 함께 했거나 십자가 사건 직후로의 바나바의 헌신과 노력에 따른 명망은 누구보다 높았다. 사도회의로서도 그의 직언을 함부로 쉽게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사도회의는 바나바의 요청대로, 바울에게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존경하고 받들어 주기를 당부하면서 그에게 아주 특별히 사도의 자격을 허락했다. 신학대학 졸업 자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학교 졸업의 조금 낮은 단계의 자격증이었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바울은 무허가가 아닌 신학교 졸업 예수 라이센스를 갖춘 정식 사도 바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식 라이센스를 가진 12 사도회의는 바울을 고운 시선으로 마냥 바라보지 만은 않았다.

바나바가 가로막지만 않았다면......... 바울은 진즉에 무허가 사도질을 벌인 죄로 반드시 제거되었어야 할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공히 대부분의 사도들에겐 경계심을 넘어 적개심을 떨쳐낼 수 없는 제거대상 1호가 여전히 바울이었다.


바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안디옥)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바울에게 예루살렘교회의 사도회의에서 소환장이 도착했다. 이 소환장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바울도 이미 질 알고 있었지만 사도회의의 소환을 거부할 이유나 명분이 그에게는 없었다.

바울은 예루살렘 소환에 응했다.

사도 바울이 첫 소환에 응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았을 때, 그곳에는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주교인 사도 야고보만이 교회를 지키고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사도들은 사방으로 선교활동을 떠나고 없었다. 바울의 기록이나 유대의 역사서에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 사후에 첫 예루살렘 교회의 주교로서 사도회의를 이끌었다고 적혀있다. 주교로서 당연히 교회를 지키고 사방으로 나간 선교활동에서 돌아오는 보고서를 받아보아야 하고, 현지의 사정에 대해서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던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보름동안 머물면서 야고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란 것이 그냥 정담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와 선교활동 등 전반에 걸친 토론이자 거친 논쟁으로 발전해나갔던 것이다.

논쟁의 핵심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할례’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러자면 오랜 전통에 따라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듯이 할례를 받고 유대 풍습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를 야고보는 강조했다. 야고보의 주장은 곧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원칙(교리)이며 12 사도가 공히 사전에 모두 합의한 내용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바울의 생각은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신 구원의 복음은 민족과 인종을 뛰어넘는 무한정 열려진, 이제까지 전통이라고 고수해온 유대 풍습이나 종교적 원칙 등을 모두 뛰어넘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할례와 같은 어떤 행위나 종교적 원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들 방식과 생활풍습 속에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의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가면 된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오늘날의 기독교 교회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정의가 여기 바울의 주장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야고보는 줄기차게 유대 전통과 가치관에 따른 기독교를 주장했고, 바울은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기독교인으로 이끌되 거기에 어떤 조건이나 관습적 요구를 하신바가 없다고 따지고 들었다. 야고보와 사도회의의 주장에 따르자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민중을 기독교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기독교 복음을 앞세워 모두 유대인으로 만들려는 전혀 엉뚱한 일임을 거듭 지적했다. 다시 말해 누구나가 기독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전통과 생활풍습을 받아들이는 유대인화 작업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12 사도를 포함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당시로는 중론이었던 것이다. 교리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오로지 바울의 생각만은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와 3년여를 함께 지내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12사도, 거기에다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줄 곳 함께 지냈던 바나바와 스테반을 포함하는 70여명의 초대교회 신자들이 얻은 결론이 그것인데, 예수를 직접 만나본적도 없으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2종 라이센스를 가진 바울의 단독 의견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상태로 격하게 부딪쳤다.

누가 옳으면, 어느 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을까?

하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감히........ 비교 불가가 아니었겠는가?

결국, 바울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허무하게 종결되고 말았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에 의구심과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있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사도회의에 염장을 지른 것이었고 생겨난 불화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났고, 사도들이 돌아와 긴급회의를 한 끝에 사도회의는 안디옥의 바나바에게 몰래 서신을 보냈다.

이때부터 논쟁의 장소가 바뀌었다. 사도회의를 지지하는 바나바와 바울 간에 격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의 결과로 바나바와 바울은 그동안 함께해왔던 선교여행을 끝내고 결국 갈라서고 만다.

이제부터 주도권을 향한 사활을 건 사도회의와 바울간의 원했던 원치 않았던 치열한 경쟁을 넘어서 막장 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12 사도와 예루살렘 교회가 땅을 치고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유대 전통에 입각한 사도들을 포함한 초대교회는 그동안 예수와 함께 해왔던 방식대로 예루살렘의 유대교 회당과 몇 몇 집회 장소를 꾸준히 이용해 왔을 뿐, 예수 사후에 특별한 변화가 전혀 없이 밀어내기 방식의 선교활동만 계속해 내려왔다.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지극히 미미했다. 기독교 복음을 떠들어 대며 관심을 끌어들이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민족과 종교와 생활풍습이 다른 이교도들로 하여금 느닷없이 먼저 유대인이 되라고 하는 장벽에 번번이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느닷없이 안디옥(안티오키아)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이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은....... 새롭게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이교도 출신의 팔레스타인 지방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교회의 수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아마도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세운 최초의 교회였을 것이다.(십자가에 매달리셨던 분의 표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곳 안디옥 교회로부터 흔하게 표현해서 엄청난 선교의 열풍이 일어났다. 그 열기가 소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 북아프리카까지 전해졌으며,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를 불태워 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그 중심에 사도 바울이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었다면....... 예루살렘의 사도회의 심정은 어땠을까?

바울의 승리(?)를 축하해주고, 그의 선교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를 우두머리에 모셔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따랐을까?

결코 아니었다. 거듭 거듭 사도회의 존립에 대한 위기감만을 높여가고 있었다. 존립에 대한 위기의 대처 방법이나 해결책은? 시기와 질투를 넘어 결국엔 음모로 이어져 나갔다.

계속 이어져 들어오는 바울의 선교 보고서와 사방에서 기증받은 헌물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하면 도착할수록 바울에 대한 증오와 음모가 커져만 갔다.

‘기독교는 바울이 대장이야. 사도가 열두 명이나 있으면 무슨 소용이야? 바울 혼자서 다 하는데....... 적어도 사도 명함을 파고 다니려면 바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니야?’ 라는 볼멘 소리가 저자거리에서 흔하게 들렸을 정도라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 아닌가?

<성서의 어디에도, 기독교에 관한 그 누구도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와 로마의 법정 기록과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논문에는 수도 없이 이런 기록이 등장한다. 하여 지극히 내(필자)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에 따라 과감하고도 솔직하게 표현해 보겠다.>

야고보와 사도회의는 바울을 제거하기로 결론 내렸다.

이제부터는 방법을 선택하는 일만 남았다. 서둘러 사도 바울을 제거한다. 어떤 방법, 어떤 비용, 어떤 책임에 대해서도 따지거나 묻지 않겠다. 무조건 죽여서 제거만 한다면 그 사실 전반을 영원히 침묵 속에 묻어 버리겠다고 함께 결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서서 어떤 방법으로 바울을 죽여 제거할 것인가?

야고보와 베드로와 사도회의의 고민과 침묵은 오래 이어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최선의 방책을 찾아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손을 빌어서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그랬던 유대인들의 손을 빌어서 절묘하게 사도 바울을 사형장으로 보낼 묘책을 찾아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 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바울아. 바울아. 너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 유대인들의 손에 너는 죽게 되겠지만, 아무도 그 배후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은 모를 거야. 그건 스승이신 예수님도 결코 눈치 채지 못하실 거야. 나중에 아시게 된들 어쩌시겠어? 벌써 다 지나가 버린 것을.’라고 말이다.


'교회 안에서, 선택받은 12 사도들에 의해서, 사도 바울을 죽여 없애려는 거룩한 프로젝트가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 장문의 글을 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길어져서 다음으로 넘겨야만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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