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 "토말로 떠나는 가을여행

피안재의 여행갤러리 32

by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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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항간에 전해 내려오기를 ‘혹여 진도에 가거들랑 절대로 세 가지는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첫째는 글씨요, 둘째는 그림이며, 셋째로는 절대 노래 잘한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자칫 말이라도 잘못 꺼냈다가는 개망신 당하기 십상이라는데서 나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면에는 겸손과 절제를 중시하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하는 자부심 또한 상당한 지역이라고 해야겠다.

진도(珍島)라는 섬 이름에 왜 ‘보배 진’ 자가 붙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일단 고만고만한 섬들이 올망졸망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다도해 풍광을 헤치며 진도를 찾아가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 우리는 진도를 다녀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땅끝 오토캠핑장)에 맞는 아침이 오늘따라 유난히 쾌청하다.

자정을 넘겨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가기는 했지만, 날이 개인 아침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맑고 쾌청한 초가을 날씨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모닝커피에 과일로 아침을 해결하고 늘 해온것처럼 산책을 나간다.

송호 해수욕장 모래사장을 걷다가 해변 소나무 숲에서 비박하는 사람들이 설치한 예쁘고 앙증맞은 텐트 사잇길을 지나간다. 다음에 여기 다시 오게 된다면 우리도 저들처럼 이 언덕에 하얀 이든 텐트를 설치하고 한 이틀쯤 머물고 싶어진다. 여름 성수기엔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겠지만, 어떻게든 이런 멋진 곳에서 옛 향수처럼 다시 한 번 초창기의 미니멀한 초간단 캠핑을 해보고 싶다.

가까운 해변 인근에 취수장. 화장실. 샤워실 등이 나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제외하고는 하루 이틀 썩 괜찮은 캠핑이 될 것 같다. 과연 다시 기회가 있으려나?

해변 끝자락에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도로변 공터에 자가용 차량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다. 차에서 내린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 가고 있다.

‘아! 그곳에 웨이팅이 필수인 맛집이 하나 있었지?’

그제야 땅끝의 맛집이라고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본동 기사식당)이 생각났다.

땅끝 오토 캠핑장에 거점을 마련하고 오늘로 나흘째 남도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 하루에도 서너 번씩 지나다니는 길목에 항상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아주 특별한 장면을 일상처럼 지켜보면서 놀라곤 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 번 먹어보아야 하지 않겠어?’하면서 관심을 가졌는데, 오매불망 식당은 늘 만원이고 기다리려면 다음 끼니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줄을 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에 ‘찬스’를 외치며 달려갔더니 점심 브레이크 타임이란다.

그래서 아예 없던 일로 치부해 버리려 했는데, 지금 이른 아침 식전 댓바람부터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웨이팅 없이 식당 안쪽으로 쏙쏙 골인하는 것이 아닌가? 아침 7시부터 오픈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모닝 커피로 아침을 해결했지만....... 이참에 제대로 아침 식사를 한 번 다시 해볼까? 어때?’

‘일단 들어나 가보자. 빈자리가 있음 먹어 보든지. 된장 찌개야? 갈치 찌개야?’

‘바닷간데 당연히 갈치찌개지. 그게 여기 시그니처 메뉴야.’

그래서 들어갔고, 이른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여기 저기 자리 여유가 있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갈치 찌개 백반을 주문했는데, 하루 장사를 막 시작하는 시간이었음에도 벌써부터 바쁘고 약간 혼란스러워지기 까지 한다.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음식이 나온 후에 자리 이동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다. 밤새 술을 마셨나 본데 식전 댓바람부터 또 술병을 까대는 사람들까지 보인다. 다분히 어수선한 분위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동 기사식당)하면, 일단 현지인들이 매일매일 집에서 해 먹는 음식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남도식 백반이며, 활동량이 많은 택시나 시내버스 기사들이 즐겨 찾았을 정도로 일단 저렴하고 맛있고 정성 가득한 음식을 내어놓는 식당으로 여행자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해진 맛집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느 정도기에 항상 웨이팅 줄이 그렇게 길게 늘어서 있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주문한 갈치 찌개 백반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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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맛은 있어. 남도 특유의 그런 맛깔스러움이 반찬마다 느껴지기는 해. 하지만 먹을 게 별로 없어. 멸치 조림이니 콩자반이니 콩나물이나 메추리 알이나 계란말이를 먹으려고 땅끝까지 오지는 않을거잖아? 반찬 가짓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서너 가지라도 꼭 여기까지 와야만 맛을 볼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없을까? 생굴이나 꼬막이 전복보다 비싼가? 차라리 미역 초무침을 푸짐하게 주던가. 반찬이 샐프로 가져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한두 번 손이 가고 나면 더 먹을 게 없어. 남도 먹거리 인심이 후한 것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여기처럼 박한 것이었나? 갈치 찌개도 그래. 나올 때는 찌개라기도 그렇고, 국이라 하기도 그렇고, 바짝 졸여서 먹으라는데, 졸여서 건질 만한 건더기가 별로 없어. 2인분에 달랑 갈치 두 토막에다 곁다리로 딸려온 꼬리 토막 하나? 그렇게 따진다면 현지인 백반을 파는 기사식당 치고는 너무 비싼거지. 하도 유명하다기에 들어와서 나름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꽤 괜찮다거나 남에게 적극 소개를 한다거나 아무 때고 다시 올 만한 식당이라곤 할 수 없겠어.’

‘작년 여름까지는 1인분에 만원이었다는데, 한 번에 이천원이면 20%가 오른 것이고, 음식값이 20% 올라간다는 것은 파격적 인상인데, 그때가 오히려 반찬에 정성이 많이 담겼다는 후기를 본 적이 있어. 금방 조리를 해서 막 차려 나오는 그런 신선한 음식을 접대받는 느낌이 그래도 예전엔 많이 있었대. 지금은 그냥 뜨내기 여행객만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유명해진 관광식당 느낌이야. 과거엔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로컬 백반집으로 유독 택시 버스 기사분들에게 인기였는데, 웨이팅이 길게 늘어선 지금 현지인이나 기사님들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겠어. 당장 1인분에 만이천원이라고 하면 여행자들이야 싸다고 할지 모르지만, 매일 사서 먹어야 하는 현지인이나 기사님에게는 많이 비싼 한 끼인 거야. 로컬 맛집이 아닌 유명 음식점으로 관광 상품화가 된 것이겠지.’

‘우리동네 고속도로 나가는 길가 주유소 기사식당 두루치기 값이랑 같아. 고기양도 풍족하지 맛있지 여러 가지 야채 다 주지. 기사식당이라면 거기가 진짜 기사식당이지. 안 그래?’

‘두루치기2인분 시켜 먹으면 떠 먹으라고 청국장도 1인분 내주고 그런다?’

‘관아공원 갈치조림집 가면 여기보다 천원이 비싼 1인분에 만삼천원인데, 냄비 크기가 다르고 갈치가 훨씬 더 많이 들어가. 갈치만 건져 먹어도 건더기가 남을 정도로 다른 것도 많이 들어가거든? 맛도 여기보다 좋으면 좋지 못하진 않아. 거긴 대접받고 포만감 느끼며 나오는데....... 여긴 뭔가 아쉽고 허전해. 그냥 하도 유명하다니까 한 번 다녀가는 것으로 족한 여행지 식당. 딱 고만큼 만.’

'차라리 우리동네 보리밥집을 갔으면 고소한 참기름 향에 온갖 야채로 진수성찬 비빔밥을 실컷 먹고 남는 돈으로 카페에 가서 커피까지 마시겠다. 이참에 땅끝 기사아저씨들에게 우리동네 싸고 푸짐한 보리밥집이나 소개 시켜드릴까? 차라리 거기가 제대로 된 기사식당이다.'

‘경험은 했으니 이제 나가자. 텐트에 가서 커피 한 잔 더 마시고 나서 준비해 진도나 다녀오자.’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이 가득 담긴 평가이고 소감이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경험한 (본동 기사식당) 갈치 찌개를 먹어 본 느낌이 그랬다는 이야기다.(오해 없기를)




< 진도(珍島) 가는 길>

다도해에 무수하게 많이 떠 있는 섬 중에서 진도(珍島)에는 왜 ‘보배 진’자를 넣어 불렀을까? 그 이유는 그냥 단순하게 우리가 아주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대충의 어림짐작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더 옛날에는 진도를 다른 이름인 옥도(玉島)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고립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원시적 농경사회의 생활풍경을 떠 올리기가 쉽겠지만, 적어도 진도에서의 실생활 풍경은 크게 달랐다는 뜻이리라. 또 그 안에는 그것을 가능케 한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이 실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80년대 중반까지 진도는 다가가기가 결코 쉽지않은 다도해의 커다란 섬이었다. 조선 시대엔 절해고도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진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멀다. 살면서 한 번 가볼까 말까 할 정도로 유배가 아니라면 엄도도 내기 힘들 정도로 아주 먼 변방의 오지다.’

그러다가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 사이에 1984년 10월 18일 사장교가 준설되면서 진도는 이제 육지에 편입되었다.

그러했음에도 진도(珍島)는 여전히 멀다. 가도 가도 길이 줄어들지 않는 그런 아득한 저 너머에 진도가 있다. 예전 같으면 목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거나, 강진 해남을 빙 돌고 돌아서 울돌목 인근에서 물살이 세찬 바다(현지인들은 여울이라 불렀다)를 건너야만 했다. 그 꼬불꼬불 해안에 방조제를 만든 덕분에 화원반도를 곧장 가로질러 가면 나타나는 진도대교를 통해 과거에 비하자면 아주 수월하게 진도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진도대교가 건설된 이후로 진도는 참 많이 변했다. 드나드는 사람과 물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진도 특유의 맛과 멋과 정취가 알려지면서 이제 진도는 연간 약 260만 명 이상의 여행객이 찾아가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거기에는 2005년에 새롭게 건설된 쌍둥이 다리도 큰 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본래 설치된 사장교에 기대어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모양의 다리 하나를 더 만들어 붙여서 복선 통행 다리를 만들어 지금의 진도대교를 완성했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지금도 쌍둥이 다리라고 부른다.

그런 진도(珍島)가 어느날 불쑥 나에게 기별을 보내왔다.

‘이래도 안 와볼래? 나중에 후회할걸?’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해남을 중심으로 하는 남도 여행으로 계획했고, 그 중심에 진도의 부름에 응답해 보고자 해서 길을 나섰던 것이다.

길을 떠나면서도 ‘진도?’ ‘진도?’를 되네이며 출발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진도?’ ‘진도?’를 읊어댔다. 그런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육지가 되었음에도 진도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 아득히 먼 곳이란 낱말의 뜻을 이제야 알겠다.


진도의 관문이랄 수 있는 진도대교를 건너면서 아래로 울돌목을 내려다 본다. 진도의 랜드마크라 하겠다.

진도대교가 개통되면서, 특히 대교에서 보는 낙조와 야경이 아름답고 다리 아래의 울돌목 물살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환상적인 장관을 연출해낸다는 소문을 여러 번 접한 바가 있다. 일출과 일몰에 목숨 걸지 말자는 우리 방식의 평소 여행지침에 따라 그냥 지나치려는데, 울돌목은 이충무공의 3대 해전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이 벌어진 장소로 너무나 잘 알려진 해남과 진도 간에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인 서해로 나아가는 필수 길목이라 들었지 않았던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무찌른 명량대첩의 전승지가 바로 여기인 것이다. 울돌목이란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의 길목" 이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고 한자어로 명량(鳴梁)이라 한다. 울돌목의 폭은 294m 정도이나 물살이 세고 소용돌이가 쳐서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들 정도라고, 영화를 통해 그 위력을 절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마당에 진도대교의 노을은 포기할 수 있었도 이충무공에 대한 존경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기에 진도대교를 건너 (녹진전망대)에 올라본다. 올망졸망 흩어져 있는 섬들과 그 섬들을 품고 있는 푸른 바다를 보노라니, 얼핏 어제 세연정 연못에서 칠암과 연꽃을 감상하던 느낌마저 되살아난다.

‘이곳이 정말 처절했던 전쟁터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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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993년 발행>에서 미술사학자 유흥준 선생은 강진과 해남을 ‘남도 답사 1번지’라고 적었다. 이후로 연작으로 발표된 도서는 실로 엄청난 선풍을 일으키며 남도 여행 열풍을 몰고왔다. 현재까지 6권이 연작으로 발표되었고, 차기작이 준비 중이라고 한다.

책이 발행된 시점이 섬이었을 때라면 혹여나 진도 사람들의 서운함은 좀 덜했을 것 같다. 1984년에 진도대교가 준공되면서부터 이미 진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육지의 끝자락이었다. 그런데 유흥준 선생은 육지에 해당하는 강진과 해남을 ‘남도 1번지’라고 꼽으셨다. 진도 현지인들 생각에는 당연히 ‘남도 1번지’ 하면 (강진. 진도. 해남) 이어야 한다고 지금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진도가 이제 육지에 편입되어 있는 이상, 어떤 면에 있어서도 강진이나 해남에 못할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넘쳐나는 자부심에 근거한다.

진도에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과 몽골에 대항한 삼별초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뿐만아니라 진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진돗개와 진도 아리랑의 고장이 바로 이곳이다. 조선 시대의 문학과 민족사의 숨결이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 내려오는 보고 또한 여기 진도라 하겠다. 해남과 강진에 가사 문학이나 누정을 통해 성리학 선비정신이 계승되고 있다면, 진도에는 남종화의 거목 소치 허련 선생의 운림산방이 있어 이곳이 진정한 선비의 고장임을 증명해 보인다. 오죽하면 ‘진도에 가서 글씨, 그림, 노래자랑을 하지 마라’는 이야기가 생겨 전해져왔겠는가? 여기 진도야 말로 선비의 정신과 덕목과 생활이 고스란히 담겼기에 하는 말이다.

현대에 들어 벌어진‘세월호 사건’ 뉴스의 중심에 늘 서 있었던 팽목항에 서면 아스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업지만, 이곳을 통해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과 뱃길을 통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남도의 섬문화와 섬생활을 슬쩍 들여다 볼 수 있다.

진도대교가 열리면서 고군면 회동마을의 ‘신비의 바닷길’은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크게 각광을 받는 명승지가 되었다. 소박한 무지개 다리와 아담한 석성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남도 석성에 올라 바라보는 조도군도의 빼어난 절경은 한 폭의 그림임이 틀림없다. 국립 기상청이 선정한 ‘대한민국에서 낙조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뽑힌 ‘세방낙조’ 또한 진도의 빼어놓을 수 없는 명소가되었다.

고립무원의 섬으로 죄를 지은 선비들이 귀양을 떠나던 진도였지만, 막상 진도대교를 지나 섬에 들어서면 그런 느낌과 생각은 순식간에 확 바뀌고 만다. 이제 진도는 섬하면 쉽게 떠오르는 그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과 사뭇 달라져 있다. 여전히 섬으로 불리는 것은 틀림없으나, 가도가도 드넓은 들판이 사방으로 펼쳐져있는 지금 진도는 전혀 협소하거나 궁핍한 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완전 달라진 모습이다.

지금 진도는 풍요의 섬이다. 바다도 육지도 모두 풍요로움으로 차고 넘친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혹한의 겨울을 모르는 섬 진도에는 한겨울에도 대파. 마늘. 봄동배추 등의 최고 산지다. 사계절 다양한 채소를 양산하는 진도는 비옥한 섬으로 ‘한 해 농사지어 3년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고장이다.

과거에 양구 비무장지대 안의 (펀치볼)의 비옥함을 일컬어 ‘한 해 농사도 3년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생활중에 직접 찾아가 보았는데, 무의 크기에 놀라 기절할 뻔 했었다. 무와 고랭지 채소와 옥수수가 엄청나게 재배되던 장면을 잊지 못했는데, 이제 진도 들판에서 그런 광경을 다시 목격하게 되었다. 아마도 비옥한 토양의 전제조건은 남다를 정도의 채소 크기와 싱싱함이 남달라야 하나 보다.

‘유흥준 선생님. 개정판 남도 답사 1번지에서는 진도를 꼭 편입시켜 주세요. 원성이 대단해요.’

‘남도의 진땡이는 당연히 진도(珍島)다. 시(詩)·서(書)·화(畵)·창(唱)·무속의 곡간이 바로 진도이기 때문이다. 진도를 보지 않고는 결코 남도를 보았노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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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를 건너 처음으로 진도 땅을 밟았으니, 일단은 녹진전망대(진도타워)부터 올라가 보아야겠다.

이곳에서 방금 건너 온 진도대교의 풍광을 포함해 진도의 대부분과 사방으로 널리 펼쳐진 다도해의 멋진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다는 사전 정보를 얻어 왔기 때문이다. 더하여 진도대교 아래를 세차게 흘러가는 울돌목의 진풍경을 감상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는 이야기도 이미 들었다. 대교의 건설과 함께 세워진 녹진전망대(진도타워) 내부에 설치된 <명량대첩 승전관>에는 명량대첩에 대한 유물 전시는 물론 진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록관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이곳을 둘러본다는 것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진도 여행 사전 예비고사를 패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기념관이고 뭐고.......... 연실 눈앞에 아른거리듯 오고 가는 케이블카가 영 거슬린다. 여러 여행 잡지나 방송이나 SNS에서 수도 없이 등장했던 바로 그 문제의 케이블카다. 뭐라더라? 바닥이 뚫렸다고? 바닥이 뚫린 채 울돌목 바다를 건너간다고?

그동안 국내와 해외여행을 하면서 웬만큼 유명한 케이블카는 거의 타보았다. 그동안의 체험에 의한 인상적인 케이블카를 하나만 꼽으라 한다면 주저 없이 푸꾸옥 혼똔섬 케이블카를 꼽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리오데자네이로의 예수 십자가상에 오르는 케이블카랑 이탈리아 돌로미티나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알프스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제외하고는 더는 타보고 싶은 케이블카가 없었는데, ‘우리나라 진도잖아. 울돌목 바다를 건너간다잖아.’하는 마눌님 성화에 기어코 표를 끊고 케이블카에 올랐다. 그런데 타자마자 ‘이게 뭐야? 바닥이 투명유리잖아. 무서운데 이걸 꼭 타야 해?’한다. ‘당근이지. 표가 얼마인데? 무서우면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서 짜릿함을 즐긴다고 생각해 봐. 중간에 서서 매달리는 것만 아니면 건너서 내려주겠지.’‘올 때 또 타야 하잖아?’ 하면서 슬그머니 바닥에 주저앉더니 이내 주변 경관에 한껏 취하고 만다.

다큐멘터리에서 울돌목에서 뜰채로 민어를 잡아 올리던 어부의 기사를 보아서 찾아갔더니만, 시즌이 이미 지나서 휴업중이란다. 다들 우리같은 호기심으로 꾸준히 찾아들 오고 계신 데 다들 허탕을 치고 돌아간다. 어부는 물살을 살피면 민어가 헤엄치는 것이 보인다고 했는데........ 아무리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보이도 그냥 세차게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하얀 포말뿐이다. 그 어부의 민어 사냥터 안쪽에 한 젊은 여성 조사가 낚시를 하고 계셨는데 그 던지는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가히 환상적이다.

명량해전에서 사용되던 판옥선의 모형을 실물크기로 재현해 놓았는데, 둘러보니 요즈음 방식으로는 많이 불편하겠지만, 다져보니 상당히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느낌이다. 거기다 무수히 반복된 훈련을 통해 숙련도의 정도에 따라 그 쓰임새와 활용도가 엄청나게 차이가 났으리라.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 한참동안 울독목을 바라보노라니 이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여행에서 돌아가면 없는 짬을 내서라도 <명량>을 제대로 다시 한번 감상해 보아야겠다.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울돌목을 건너 녹진전망대의 <명량대첩 승전관>으로 향했다. 케이블카 이용 티켓에는 기념관 관람이 포함되어 있다.

전망대에 오르니 사면으로 만들어진 통창을 통해서 진도와 주변 다소해의 풍경이 마치 파노라마 영상을 보듯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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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망금산 정상에 위치한다.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등에서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하고 진도군 관광의 랜드 마크로 군민들에게 자긍심을, 진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전망대가 서있는 곳은 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망금산 정상이다.

육지와 가장 가까운 해협 건너의 으뜸 전망대인 만큼 고려 삼별초의 배종손도 조선의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도 이곳에 올라 적정을 살피고 장차 벌어질 전우에 대한 작전을 세웠을 것이다. 명량대첩지 울돌목, 벽파진, 강강술래터, 용장산성이 모두 이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반도 역사에서 전란에는 호국의 요새로, 평시에는 절해고도의 유배지로 주로 쓰였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배척당하고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 시련과 질곡의 한 맺힌 역사가 진도를 삼보(진도개, 구기자, 돌미역)와 삼락(민요, 서화, 홍주)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그중에서 삼락은 진도를 예향의 고장이라는 자긍심으로 주민들 가슴에 깊이 뿌리내렸다.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장군 시리즈> 라고 불러도 될 만큼 <명량> <한산> <노량>을 소재로 대하 역사드라마와도 같은 임진왜란 전쟁사를 통해 우리는 그날의 산 역사를 어느 정도 잘 알게 되었고,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영화 <킹덤 오브 해븐>을 소개하면서도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이지 결코 역사 자체는 아니다’라는 사실은 반듯이 잘 유념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주장했었는데, <명량> <한산> <노량>에 대해서도 더도 덜도 말고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다’라는 말을 꼭 해두고 싶다.

뜬금없이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왜였을까?

내가 초등학교(초등학교) 시절 국가에서 전국의 학교를 순회하면서 거의 의무적으로 관람케 한 김진규 주연 감독 기획의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 펼쳐지는 <명량대첩>은 겨우 열두 척의 판옥선을 이끈 이순신 정군이 삼백삼십 척의 왜군 함대와 싸워 위대한 승리를 쟁취한 해전이었다. 이순신이 쏜 화살에 적장이 맞고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장면에서 강당에 모여든 모든 학생과 수행 교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함성을 질렀다. 그날 이후로 이순신 장군은 <성웅 이순신>이 되었고, 단숨에 김유신. 강감찬. 을지문덕. 계백장군을 추월하여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찾아보니 <난중일기>를 비롯해 <실록> 등 많은 자료들을 검토해 본 결과,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승리는 틀림이 없으나, 당일 참전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판옥선 13척이었으며, 일본 수군의 전함은 133척이었다. 그중에 31척이 수장되거나 회복 불능으로 완파되었다. 조선 수군의 피해는 있었으나 배를 잃지는 않았다.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눈부신 승리는 틀림없지만, ‘일본군 배를 한 이백 척쯤 수장시켰고 살아서 도망친 배의 숫자는 미미했다’라고 기록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133척을 끌고 와서 31척을 잃었다고 일본 수군 전력이 무력화 내지는 소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적군이었던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기록을 보면 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나 주장이 상반되는 역사해석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과 <조선왕조 실록>을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한다.

그 외에도 무수한 자료와 학설이 있지만, 어느 정도의 공신력을 가진 것으로는 위의 세가지를 든다.

여기네 더하여 필자는(나는) <서산대사>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자군들의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임진왜란 이야기를 집대성한 <임진왜란에 대해 일본의 시각으로 보는 역사>를 한동안 심취해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여, 지금은 여러 가지 학설 중에서 어느 한 학설에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는 입장이다. 그저 김한빈 감독의 <이순신 시리즈>를 무척 재미있게 관람한 영화 애호가의 한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가 <명량대첩 전승지>가 아닌가? 내가 속에 담아 놓았던 이런 이야기는 하고 지나가고 싶다.

이젠 기억에서도 아스라한....... 내가 처음으로 터키(튀르키에란 표현 보다는 터키)를 방문했을 때, 이스탄불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건설한 콘스탄티노플 성채가 1천년의 역사동안 외적의 침입을 완벽하게 막아내면서 철벽 요새로의 위용을 역사서에 강렬하게 기록해 넣었다. 인류의 역사에 등장하는 싸움(전쟁) 좀 한다는 민족이나 국가치고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도시가 바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이었던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들도 어떤 왕국의 왕족이나 귀족처럼 먹고 마시며 산다.’는 소문이 온 세상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던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 성채의 절반은 성난 파도가 배를 난파시키는 바위 벼랑 윙 설치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깊은 해자를 만들어 물을 가두고, 그 위에 이중의 튼튼한 성벽을 쌓았는데 여타의 다른 지역 성벽들과는 다르게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성들처럼 까마득한 외성을 겨우 타고 넘으면 너비 20미터 정도의 안쪽에 외성을 훨씬 넘는 높이의 내성이 또 세워져 있었다. 사다리와 밧줄을 타고 외성을 넘었다고 해도 내성이 있어 웅덩이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것이었다. 1천 년의 방어 내공을 가진 난공불락의 요새란 적어도 이런 것이다 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이 성채의 약점이 하나 있는데, 이미 세상 누구나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금각만(골든 혼. 현 보스포러스 대교가 위치한 자리) 안쪽의 비교적 파도가 잔잔한 내해에는 성채에서 바다로 연결되는 중요 통로 역할을 해왔는데, 그만큼 성채의 견고성이 떨어지고 바다가 잔잔하여 해군을 이용해 성을 공격하기에 최선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유일한 약점으로 늘 거론되어 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동로마(비잔티움)는 금각만 건너편에 별도의 아주 튼튼한 요새를 짓고는 정확히 현재의 보스포러스 다리 아래로 쇠사슬(해저 케이블)을 연결하여 외적의 침입을 차단했다.

바로 이 대목이 이순신의 <명량대첩> 전투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쇠사슬을 운용한 전투’의 효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명량대첩>에서 쇠사슬 작전이 쓰여진 날이 기록에 따르자면 1597년 9월 16일이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성채가 쇠사슬 작전을 써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멸망당한 날이 1453년 5월 29일이고 보면 곡 1백 년 앞서서의 일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1453이 되기까지 이미 1천 년 동안 해저에 쇠사슬을 설치하여 실제로 무기로 사용해왔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수십번 수백번을 실제 사용했고, 이순신은 임진왜란 <명량대첩>에서 단 한 번 사용하였는데,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때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앞에서 나는 <명량대첩>을 떠올렸다.

과연 사실일까? 아닐까?

테오도시우스 성채는 성벽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졌고, 오늘날 제지 살상 무기로 명명된 (백린탄)과 같은 (그리스의 불)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의 불(백린탄)은 한 번 불이 붙으면 끝까지 모조리 태우고, 심지어 물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탔다고 수많은 전투 기록에서 증언해 주고 있다. (그리스 불)과 (쇠사슬 무기)가 테오도시우스 성채의 유일한 약점인 금각만의 내해(안쪽 바다)를 지켜 주었다. 금각만 안쪽에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터키의 해군사령부가 있었다. 이곳에 주둔한 비잔티움의 해군이 바다를 지키다가, 강력한 외부의 해군이 쳐들어오면 만의 안쪽으로 피신하고. 쇠사슬을 당겨올려 적함의 진격을 차단하고, 양쪽 돌출부에 설치된 (그리스의 불)을 이용해 적함을 불태우면서 1천 년을 버텨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넘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했다.

알렉산더가 사망한 후에 등장한 성벽이었으니 감히 상상할 수밖에 없겠지만, 알렉산더나 칭기스칸 본인이었다면 이 요새를 과연 함락시킬 수 있었을까? 아마도 당시의 공성력이라면 더 불가능했을 것 같다.

역사가 증명한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인 테오도시우스 성채에 1453년 5월 29일이 도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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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새롭게 떠오르는 영웅이었던 젊은 메메트 2세 술탄은 새로운 시대의 도약을 믿었고 최첨단 신무기 우루반 대포를 거액을 들여 사들였다. 이 정도라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제국의 운명을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내륙의 광활한 지역에서 무서운 위력을 가진 우루반 대포가 성벽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장전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소요되는 탓에 비잔티움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굳건하게 버티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가고 침략군은 보급물자가 부족하기 시작하자 패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게되었다. 대포 공격만으로는 성을 함락시키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메메트 2세는 오스만의 수군을 금각만 안쪽을 공격하여 양동작전을 구사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해저의 쇠사슬과 그리스 불의 공격으로 금각만 안쪽으로 진출이 불가능했다. 술탄이 직접 수군 진지로 달려 갔다. 그리고는 명령했다.

‘금각만의 쇠사슬을 돌파할 수 없다면, 함선을 끌어서 산을 넘어 돌파하면 될 것 아니야? 그걸 못해?’

결국 오스만 대군은 통나무를 바닥에 깔고 주변의 소와 말을 끌어다가 밧줄로 동여매서 기어코 배를 끌고 산을 넘기 시작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고사성어가 결코 헛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사에서 이 장면은 거의 ‘한니발이 알프스 산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는 사건과 맘 먹을 정도다. 메메트 2세는 70여 척의 함선을 산을 타넘어 금각만의 내해로 이동시켰고, 기세를 몰아 양동작전을 펼쳐갔다.

마침내 1453년 5월 29일에 1천 년을 굳건히 버텨오던 콘스탄티노플 성채는 함락되고 말았다.



<명량 해전의 쇠사슬 작전>

“그때(1597년 9월 16일) 왜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수군대장 이순신이 해상에 머물러 쇠사슬로 여울 위를 가로막고 왜 수군을 기다렸다. 왜선이 여울 위에 이르자, 쇠사슬에 걸리어 그 아래로 거꾸로 뒤집히고, 여울 위의 배는 낮은 곳이 보이지 않아 거꾸로 뒤집힌 것을 알지 못하고, 그 여울을 넘어서 흐름에 따라 곧장 내려가는 줄로만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모두 거꾸로 뒤집혔다. 물의 흐름이 돌다리에 가까울수록 더욱더 급하게 배는 빠른 물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돌아 나올 틈이 없어서 오백 채가 한꺼번에 모두 빠져 한 채도 남지 못하였다.”


모든 사단은 바로 이 기록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명량대첩>이 벌어진 울돌목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재방송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현장 생중계처럼 기록을 남겨놓은 것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쩜 그렇게 꼭 들어맞을까?

충주 교현초등학교 강당에서 보았던 <성웅 이순신>의 가장 극적인 하이라이트 장면과 신기할 정도로 꼭 들어맞지 않는가?

‘다들 뭐하고 있어? 기립 박수치고 함성 질러야지?’

그런데 영화에선 삼백 척이 넘는다더니, 위 기록에선 아예 오백척이라고 한다. 그리고 해전사에서는 적선의 대부분을 이순신의 전라수군들이 죽기살기로 싸워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고 하는데, 위 기록에선 쇠사슬을 이용한 것으로만 일본 수군 오백 척을 몰살시켰다고 적었다. 그럼 쇠사슬로 오백 척에다가 이순신의 해전으로 삼백척이면......... 열두 척이던 열세 척이던 소수의 판옥선으로 일본 왜선군단 팔백 척을 모조리 수장시켰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

수군 함선 팔백 척이면 일본 수군은 이제 씨가 완전히 마른 것이네? 원균이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후에 남겨진 것이 열두 세척인데, 일본 수군이 팔백 척이면 로마나 카르타고 해군력보다도 더 세었겠네?

아무리 애국심이 넘쳐난다해도 뻥이 참 지나치다 싶다.

실제의 전투가 끝나자 마자 이순신은 장계를 써서 선조 임금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해서 임금은 실록에 그날의 전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선조실록> 1597년 11월 10일 자에 기록된 사실에 따르자면, ‘적선 133척이 진도 벽파진 앞바다를 거쳐 울돌목으로 몰려왔을 때 이순신은 겨우 13척의 전함밖에 없었지만 세차게 급변하는 물살과 일본군보다 훨씬 우수한 화포를 잘 활용하여 그중 31척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나머지 적선들은 크고 작게 파괴된 채 도주했다’는 장계를 받았다고 적었다.

아무렴, 아무리 쪼잔한(?) 임금이었기로서니 선조가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 질투하여 그 성과까지 축소해 기록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순신의 장계가 근거가 된 <실록>의 기록이라면 적어도 수치에 있어서는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럼 위쪽에 허무맹랑해 보이는 쇠사슬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느냐?

이순신은 전쟁통에도 일상처럼 꾸준히 일기를 써 왔다. 그것이 바로 난중일기(亂中日記)다.

현재 전해진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정월(1월) 1일부터 시작하여,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선조 31년) 11월 17일(양력 1598년 12월 14일)까지 2,539일간 기록한 일기이다. 이순신이 직접 쓴 일기 초고본 8권 중 7권이 현재에 남아서 충남 현충사에 비치되어 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유산인 것이다.

난중일기는 당시의 추세대로 한자 초서로 썼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이 개인 필체로 쓴 만큼(이순신을 명필이라고 평가하는 기록어디에도 없는 것을 치자면) 일반인이 난중일기 원본을 보면 읽는 것에서 시작해 이게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는것이 상당히 힘들다. 또한 너무나 귀중한 자료이다 보니 웬만한 연구자들 입장에서도 그 귀한 원본을 접해볼 기회조차 매우 드물다.

임진왜란 이후로 이순신의 존재나 평가는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묵인된 금기였다. 이유는 당연히 쪼잔한(?) 임금 때문이다. 그러니 <선조실록>에서 조차 별반 새로운 기록이 없다. 동시대의 <징비록>에서 그나마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었다. 이렇게 <실록>과 <난중일기>와 <징비록>을 놓고 당시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낸 다는 것이 그리 녹녹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흘러서 정조의 어명으로 간행된 거의 최초로 이순신을 재조명한 책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 1795년 목판본으로 인쇄된 이 전서에 난중일기 정자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는 편집 기간이 불과 2년에 불과하여 오자나 잘못 정자화한 부분이 상당히 많고 의도적인 내용 누락도 꽤 많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랬음에도 정조는 왜 선대의 임금들이 그냥 지나치거나 외면한 이순신을 재조명하고자 했을까?

그런 다음은 1935년 조선총독부의 산하 기관인 조선사편수회가 간행한 '난중일기초(草)'이다. 정확한 명칭은 조선사료총간 제6집 – <난중일기초> <임진란초>로 조사와 편찬에 총 8년이란 긴 시간을 투자했고 당대의 한학자들이 대거 투입되어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소 이순신의 면밀한 성품 탓에 사소한 사정까지도 자세히 적혀 있어 그 당시의 전황과 시대상,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일제의 시각으로 이순신을 폄하하기 보담은 아마도 일본의 시선으로 전쟁을 낱낱이 분석하여 후대의 실전에 써먹을 목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 연구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여가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임진왜란 전후의 사정을 다룬 역사 사료로서는 조선 조정 움직임이 높은 평가이나 개인 입장이 강조되어 <난중일기>가 <징비록>보다는 높게 평가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실록> 바로 다음가는 위치로 대접받고 있다.

그런 모든 것은 바로 지금의 평가이고, 일제의 연구와 평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사실 이순신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도 없었고 관심을 크게 가지지도 않았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맨 위에 게재한 조선을 구한 슈퍼맨과 같은 이순신을 실제 우리의 선조들이 그저 야사와 전설로만 대하고 있어왔다.

열두척의 배로 오백척의 왜구 전함을 모조리 울돌목 소용돌이 바다속으로 가라앉게 만든 만화 속의 이순신을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맏아들이고 전래동화처럼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세 척의 배로 백삼십일 척의 일본 수군을 맞이하여 서른 한 척을 침몰시키는 위대한 승리 끝에 백 척의 적선이 도망치게 만들었으며, 더더욱 중요한 것은 아군의 피해로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는 실로 위대한 승리였다는 점을 간구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럼 누가 왜 실제의 이순신을 허구속의 영웅으로 만들었을까?

어쩌면 그로서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을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외면하고 금시하는 풍조가 몹시 아니꼬왔던 모양이다.

위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바로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이다.

이중환은 김정호 못지 않게 팔도를 돌아다니며 직접 체험을 통해 한반도의 지리와 풍습과 생활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으로 남긴 인문학자이다. 비록 이순신이 세상을 떠난 후, 한 세기가 지난 후에서야 남도를 답사하면서 숱하게 그날의 증언들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날에 대한 기록들은 찾을 수 없었다. 하여 나름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추스르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이순신에 대한 기록을 후대에 남기고자 적었으리라. 고증은 비록 부족하였으나, 모두가 이순신을 지우던 시기에 그가 있어서 불씨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혹 아닐까?


또 그렇다고 해서 이중환 선생의 기록이 아무런 기록에도 근거하지 않은 환전 허구인 것만도 아니다.

선생이 남도 답사에서 어떤 경우로든 <난중일기>를 잠시거나 일부라도 접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추론적인 이야기는 분명 <난중일기>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1592년 1월 11일자에 따르면, 이날 선생원(여수 율촌 신풍리 소재 관청 숙소)의 부석처(채석장)에 다녀온 이봉수는 이순신에게 "벌써 큰 돌 열일곱 덩어리에 구멍을 뚫었다."라고 보고한다. 여기에'벌써'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미 큰 돌에 구멍을 뚫는 작업이 며칠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 준다.

그런가하면 2월 2일 일기는 더욱 관심을 끈다. 이순신이 쇠사슬을 건너 매는 일에 쓸 크고 작은 돌 80여 개를 실어 온다는 기록이다. 이순신은 '건너 맨다(橫設)'라고 적었다. 9일에는 쇠사슬을 꿸 긴 나무를 베어올 일로 김원룡에게 군사들을 주어 두산도(돌산도)로 보낸다.


조금만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실제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을지 몰라도 혹여 쇠사슬의 활용이 실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이 순간까지도 학계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과거에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서‘보스포러스 해의 쇠사슬’을 지켜보면서 들었던 의문은?

이순신은 울돌목의 세찬 물결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펼쳤다. 그 울돌목의 폭이 직선거리로 294m이다. 일단 삼백 미터의 길이에 쇠사슬을 설치하자면 자체 무게와 떠밀려 내려가는 여분을 생각하고, 어디엔가 둘둘 감아서 댕길 준비를 하자면 일단 아무리 짧아도 길이가 오백m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사장교에 매달린 쇠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아도, 아주 특수한 성분의 철사를 감고 또 감아 수백 개 수천 개의 철선을 연결해 쇠밧줄을 꼬아야만 겨우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럼 당시에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강도를 가진 쇠사슬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거기에다 엄청난 크기와 무게를 가진 왜군함선이 울둘목 급류의 가속도까지 더해져서 쓸려와 부딪쳤다면, 설치만도 버거운 쇠사슬의 강도는 과연 얼마나 강했기에 적함을 침못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단 말일까?

그러자면 가끔 영화에서 보는 항공모함을 고정 시키는데 사용하는 닻에 연결하는 쇠사슬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쇠사슬을 사람과 가축의 힘만으로 오십 미터나 당기는 것이 가능할까?

KBS <역사스페셜> 46회 “명량대첩의 비밀” 편에서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험 결과, ‘울돌목의 쇠사슬을 이용한 전투는 설화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여전히 뜨거움 감자로 남아있다.

당시의 기록에 등장하는 쇠사슬의 한자 표기는 철삭(鐵索)이다. 철삭을 쇠사슬이나 아니면 쇠밧줄이라 해도 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울돌목에 철삭의 설치가 불가능한 설화라고 하자, 어떤 학자가 철삭의 의미가 여기서는 쇠사슬이 아니라 쇠말뚝을 가리킨다고 새로운 학설을 들고 나왔다. 울돌목의 세찬 급류에 잠수를해서 쇠말뚝을 설치할 수 있는 잠수부가 여럿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나 가능한 주장이다. 어떻게 누가 있어서 울돌목 해수면의 바닥에서 적선의 배밑창 거리를 계산하고, 우리 배는 피해다니고 일본 함선만 바닥에 구멍이 뚫리는 작전이 가능했는지....... 그 학자분의 추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해전에 쇠막대가 실전에 쓰인 기록은 분명히 존재한다.

해전에 취약한 몽골이 베트남을 침략했을 때이다. 베트남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바닷가의 밀림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몽골군은 대패를 하고 물러갔다. 하지만 다시 금나라 출신의 수군을 앞세워 바다를 통해 대대적인 전면전을 펼쳐왔다. 몽골의 거대함대 앞에 내몰린 베트남 수군은 물길을 따라 좁은 해협으로 도망쳤다. 몽골해군은 철저하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좁은 해협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밤이 새도록 베트남은 저항했다. 몽골은 이참에 완전 박멸을 목표로 밤새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생사를 건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날이 새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바다의 사정도 변해서 급하게 썰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몽골 해군이 위치한 뻘 바닥엔 베트남군이 서전에 설치해 둔 쇠막대와 나무를 깎아 박아 놓은 쐐기들이 빼곡했다. 썰물이 빠져나가자 몽골 함선들이 자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쇠막대와 나무 쐐기에 박히며 구멍이 뚫리고 물이 들어오며 기울어져 침몰하기 시작했다. 밀림에서 솓아져 나온 베트남 전사들이 고립된 함선에 화공을 퍼부었다. 몽골 함대가 전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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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동인의 누가 진도로 유배를 간다더라, 서인의 누구를 포항에서 진도로 옮긴다더라. 제주도로 귀양 간 누구를 진도로 이감시켰다더라. 벽파의 누가 진도 귀양에서 풀려났다더라. 소론의 누가 진도에서 유배 중에 사망했다더라.’ 등등 ‘진도(珍島)’라고 하면 그저 양반 고위층의 당쟁에서 파생된 귀양에 대해서만 겨우 등장했을 뿐, 심지어는 진도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정말로 거기까지 가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그 섬엔 얼마의 백성들이 어떻게 먹고사는지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그냥 아주 유명한 유배지였을 뿐이었다.

진도는 그저 왕에게 밉보이거나 당쟁에서 패하면 쫓겨가는 절해고도의 외딴섬이었다. 제주도나 흑산도 보다는 조금 덜했겠지만, 해남이나 포항보다는 못 한 죽어도 가기 싫은 귀양지였을 뿐이다.

그런데, 적어도 그 섬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도성의 당파싸움에서 패한 패배자들이라는 공통점이었다. 그들의 절대다수는 정적에 대한 깊은 한을 가지고 있으며 한양 생활에 대한 강한 향수와 언젠가는 돌아가서 빼앗긴 것을 되찾고 말겠다는 집념 내지는 강한 복수심이 있었다.

둘째는 적어도 진도까지 왔다는 것은 틀림없이 조정의 중요인물이었다는 뜻이다.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상당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셋째는 적어도 그런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학문적 경지에 오른 유학자(성리학)였기에 시와 서예와 풍류에 능한 부류였다.

넷째는 적어도 그런 부류들이 유배를 당해 진도까지 왔으나, 정작 진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척 심심해졌다.

이런 공통점은 차차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처지의 쫓겨난 선비들끼리 동병상련의 설음을 토로하고 한양 생활의 향수를 떠올리며 자주 만나서 시를 나누고 타령을 부르며 풍류를 통해 잠시 위로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들어앉아 책이나 읽으면서 세월 죽이기로 일관하는 양반에게 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똑똑한 꼬맹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양의 본가에서 서책이 들어오고 고급 식재료와 음식 잘하는 하인이 건너왔다. 절해고도에 갇힌 한때 잘나가던 양반들이 오직 심심하다는 이유에서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귀양놀이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널리퍼지고 잘 스며든 대표적인 곳이 바로 진도(珍島)다.

그런 이유로 언제부터인가 ‘혹여 진도에 가거들랑 시. 서예. 노래 자랑은 절대 하지 마라.’는 말이 생겨났다.

흔히 진도를 삼보(진도개, 구기자, 돌미역)와 삼락(민요, 서화, 홍주)의 고장이라고들 한다. 삼락(三樂)이야말로 조선 시대의 유배문화가 진도를 예향의 고장으로 만든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하여,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잡고 삼락 가운데 들어있는 ‘서화’에 대해서 물어보니, 대답 대신에 산 너머 저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저기로 가면 저절로 알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현지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쫓아 진도읍내를 지나 삼별초의 한이 서려있는 왕무덤재를 넘으면 멀린 골짜기 안쪽으로 아담한 마을이 나타난다.

점찰산자락 아래 비끼내골이다.

그곳에 가면 ‘진도의 서화’를 상징하는 명소가 있다.

바로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 여기까지 장문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은 <소치 허련>으로 이어지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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