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와 세연정 "토말(土末)로 떠나는 가을여행"

피안재의 여행갤러리(31)

by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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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의 세연정(洗然亭)을 포함하는 <부용동 정원>이나 <다산초당>이나 <소쇄원>이나 <백운동 정원> 등 한국식 전통정원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원림’이니 ‘별서’니 ‘정원’ 이니 ‘정자’니 ‘누각’이니 혹은 ‘별장’ 등의 조금은 생소한 용어를 대하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그것들은 언제부터 왜 생겨났는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필자의 식견으로 우리나라 전통정원을 돌아본다고 하면, 시작은 어쨌거나 소쇄원(瀟灑園)이어야 하겠고, 정점은 세연정(洗然亭)에서 찍어야만 할 것 같다. 거기에 더하여 직접 기거하면서 선비의 삶을 살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백운동 별서(白雲洞 別墅)를 택해 그곳에서 살고 싶다.

어쩌다 보니 모두 남도에서만 고르게 되었다. 빼어난 정자나 정원이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고, 저마다 그 가치와 품격을 높이 사고, 이미 이름난 명소로 이미 널리 알려진 곳도 많겠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지극히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한국적인 정통 정원의 멋과 향취는 이들이 가히 으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별서(別墅)가 무엇이냐?

한 마디로 주로 거주하며 살림을 하는 집(본가) 외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작은 건물을 하나 지어놓고, 수시로 드나들면서 쉬는 휴식처를 가리킨다. 그럼 그게 별장(別莊)이 아니고 무엇이냐?

물론 그렇다. 별서를 별장이라고 정의 내리고 끝까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면 달리 어찌해 볼 도리는 전혀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양반님네 선비들은 죽어도 별장과 별서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별장은 본가 외에 다른 곳에 별채를 지을만한 능력(부)만 있으면 누구나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하나 짓고 수시로 머물면서 본가에서와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장소다. 하지만 별서는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별장과는 다르게, 선비다운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는 품위와 품격이 바탕이 되는 독서실이나 사랑채와 같은 특정한 목적을 갖춘 장소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먹고 자기 위한 보통의 생활공간과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별장은 먹고 자고 살림하는 냄새가 진동하지만, 적어도 별서에서는 책과 차에서 우러나는 학문과 선비의 향기가 나야 별서라는 말이다.

이건 필자의 말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조선 시대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양반 나리들 말씀인 것이다.

하여, 적어도 선비라면, 동네서 어깨에 힘 좀 주는 양반이라면, 사는 고을에서 사대부 노릇을 좀 하려면 이런 별서를 서너 채 정도 가지고,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비들이 수시로 놀러 오고 놀러 가고 해야 제대로 선비다운 양반이라고 처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 고려 시대 기록에서는 별업(別業)이라 적었으며, 다시 촌서(村墅), 향서(鄕墅), 농서(農墅)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누, 정, 원, 당, 헌, 대, 정사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다가 <동국여지승람>에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으로 수록된 후로는 대부분 주로 누정(樓亭) 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식 전통 정원문화를 다루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여전히 주로 별서 아니면 정원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정계의 고위직에 진출하면서부터 전국의 경치나 지세가 좋은 도처에 별서(別墅)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15세기 사림파가 등장하고 네 차례의 사화를 겪은 이후로 별서는 아주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등장한 대표적 한국 전통 정원의 예가 바로 소쇄원(瀟灑園) 이다. 하여 소쇄원의 역사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은 물론 성리학의 발전과 조선의 역사까지 고스란히 담기게 되었던 것이다.

‘출사하여 성공하면 한양 사대문 안에 대궐같은 집을 짓고 살 것이고, 실패하면 낙향하여 별서를 짓고 은거하는 유유자적한 선비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이 땅의 모든 남자들(양반) 로망이 아니었을까?

혹여, 그런 원론적인 입장에서 따져본다면 성리학은 애초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그저 막연한 양반네들의 이상주의 놀음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에 대한 거친 반론을 지금 당장 한없이 부족한 필자의 입장에서 다 감당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 이 물음은 또 어쩌란 말인가? 성리학에서 임금이란 그저 허울좋은 방패막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별서(別墅)가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바에 따르자면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난세에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경주와 영주 등지의 산림 속에 대사(臺舍; 높고 큰 누각이나 정자)를 짓고 당호(堂號)를 붙이고, 그곳에 기거하면서 풍월을 읊었다고 적었다. 그중에 ‘마산에 별서정원을 조성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한반도에 별서가 처음 등장하게 된 기원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37년조 인용 <난랑비(鸞 郞碑)> 서문(序文)을 보면,“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실려있으니, 실로 (풍류는) 유·불·선을 모두 포함하면서 만백성을 하나로 이어준다. 집에 들어와선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곧 공자의 취지이고, 억지로 일을 시키지 않고 말없이 행동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 노자의 가장 뛰어난 부분이며, 악행은 만들지 않고 선행을 높이는 것이 부처의 감화이다.”라는 최치원의 가르침이 요약되어 실려있다.

중국의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당시의 신라 풍습에 맞는 것을 뽑아, 거기에 신라의 전통 가치관과 생활방식에 비전을 제시하고 적절하게 토착화되어 발전하기를 열망하였으니 삼가 최치원 선생의 그 공로가 크다고 하겠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바른 선비 정신인 ‘대쪽 같은 신념과 절개를 가지고 관직에 나가서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쓰고, 가졌던 이상이 벽에 부딪히면 자연으로 돌아가 대의와 명분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그 고결한 선비 정신이 이미 그보다 수백 년 앞서서 최치원에 의해서 이미 펼쳐졌던 것이다.

주자학이 성리학이 다 무엇인가?

최치원이 이미 깨우쳤고 펼치고자 했던 그 이상에다가 약간의 방법론적인 뜻과 의미를 조금 더 부여하고 살을 덧붙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굳이 더 큰 틀에서 하나로 묶고자 한다면 모두가 유학(儒學)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붕괴되어가고 있는 당나라와 쇠락의 길로 접어든 통일신라에서 더 이상 자신의 학문과 뜻이 펼쳐질 수 없다는 좌절을 절감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초야에 묻히는 길을 택했다. 오백 년 이상이 지나서 소위 학식과 덕망과 명망과 부와 권력까지 두루 갖추었다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물러나거나 내몰리는 상황에서 최선으로 택한 것이 바로 ‘최치원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 ‘최치원의 길’이 마지막으로 끝나는 부분이 바로 ‘최치원은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인 것이다.

윤선도는 아마도 부용동의 신선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초부면 여유당의 신선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양산보는 소쇄원의 신선이, 이담로는 백운동의 신선이 되고 싶었을 것이고, 송시열은 화양동의 신선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선비다운 선비라면 누구나 신선이 되고 싶을 수는 있었겠지만, 아무나 다 신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돈도 빽도 없는 인간은 별서도 없음이요 별장도 가질 수 없는 처지이니, 로또가 없던 시절이니 기회를 노려보려면 호시탐탐 난리(역모)나 사화를 기다려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부와 명예를 가진 사대부가 아니면 신선이 되기는 아마도 영 글러보이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와 권력과 아예 담을 쌓고도 신선이 될 수 있는 아주 독특한 방법이 있기는 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분은 부와 권력 대신에 뛰어난 기개와 재치와 해학에다 누구에게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배짱과 학식과 놀라운 식견을 가지셨던 분이다. 임금(王)이 하늘이기는 하지만 임금이 임금 같은 짓을 하고 임금다워야만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호통도 치고, 임금다운 임금에겐 예의를 갖출 정도의 아웃 사이더였다. 좀 불편하고 누추해 보이기는 해도, 아마도 조선을 통털어 가장 많은 별서와 별장을 소유하신 분이 아닐까 싶다. 아무데나 가고 싶으면 가고, 누워 자고 싶으면 잠을 청해도 되었으니, 어쩌면 조선에서 임금 다음으로 가진 것이 많았던 분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그 분을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라고 기억한다. 아마도 금오산의 신선이 되셨을 것이다.

성리학을 하도 들이미니 그렇지......... 지조있고 임금만큼이나 백성의 삶도 제대로 살피고자 한 정통 실용선비의 계보를 다시 쓴다면....... 최치원에서 정도전으로, 세상 꼴이 정 싫어지면 김시습으로, 미워도 다시 한번 해서 조광조로 이어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율곡 이이 선생도 많이 아깝고, 야사나 전설이 너무 많은 정약용도 아깝기는 하지만 큰일을 저지르기에는......


선비가 벼슬에 나가 뜻을 펼치는 것이 성리학의 근본 가르침일진데, 마치 동전의 뒷면처럼 선비의 이상 다른 편엔 항상 산중무사(山居無事)로 시작되는 칠언율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산에 살면 아무런 탈이 없네.’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 삼으려는 도가적인 성향의 선비 정신의 또다른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상하게 이 구절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선비가 칼을 뽑았으면 칡뿌리라도 잘랐어야지, 똥폼만 그럴싸하게 잡다가 은근슬쩍 칼집에 도로 꼽는다.’라는 시늉 같아서 말이다. 전쟁터에 나아가는 출정식에서 벌써 출구 전략을 짜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배우고 익혀서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서면, 뜻을 펼쳐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관료 맹세)나 (성리학 관료 지침)은 모두 공염불이다. 일단 눈치를 잘 살피고 줄을 잘 선후에 아부와 뇌물에 과감해야만 출세한다는 정석에 충실해야 한다. 위험과 일은 타인에게 양보하고, 공훈과 상급은 내 것으로 우선한다. 위험이 감지되면 패거리 뒤에 숨을 것이며, 평상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려 비상시에 대비한다.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최첨단 무기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해야 하며, 눈앞의 적은 미소로 친구처럼 대하고, 마주 앉은 동지는 미래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정적으로 생각하고 사전에 철저하게 대처한다.

어느 정도의 위기가 감지되면 잽싸게 꼬리를 자르고 멀리 물러나........ 낙향해서, 높은 벼슬까지 오른 가진 것은 너른 인맥과 부정 축재한 숨겨 높은 부동산과 금덩이밖에 없는 지역 유지 양반네로 유유자적 별서나 누정에서 풍류를 즐기며 천수를 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리학 교본에는 없는 ‘성리학 필살기 1책’이 아니었을까?

이런 필자의 억지주장에서 정말로 자유로울 수 있는 소위 양반이 얼마나 있었을까?

변학도가 어디 <춘향전>에 나오는 한 명뿐일까?

과거에 급제해 일단 한양도성에 입성한 관료들만을 기준으로(별 볼일 없는 과거 급제자 제외) 최소 80% 정도는 성리학의 이상 실현이 아닌, 부귀영화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변학도 아류가 아니었을까? ‘설마’라는 의구심이 생기면, 다시 한 20% 정도를 본심은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시류에 떠밀린 ‘영혼 없는 관리 집단’으로 빼줄까 싶어진다. 나머지는 과거에 급재해 벼슬길에 나서면 팔자 고친다고 해서 아니었을까?

윤선도나 정약용이나 조광조나 이담로에게 ‘출구전략’이 없었다면, 쫓겨나거나 물러나거나 낙향하여 갈 곳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면......... 더 악착같이 정치가로서 잘할 수는 없었을까? 더 큰 사고를 쳤거나, 정도전처럼 떠나게 되었을까?

유학에서 주자학으로, 다시 성리학으로 가는 전 과정에 이렇게 은근슬쩍 도교의 그림자가 걸쳐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선비의 절개니 지조니 하는 표현들이 잘 믿겨지지가 않는다.

‘난 지조 있는 선비야’하는 이런 양반님들이 수백 년 입에 달고 살아온 ‘성리학의 말장난’이 오랜 세월 속세에서 떠돌다가 결국엔 ‘늙으면 어서 죽어야지 하는 할머니 말씀’‘손해 보며 파는 거라는 시장 아줌마 말씀’과 같은 그저 그렇고 그런 고지뿌롱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지나간다.

‘선비’를 한자 표기로 ‘書生’ 이라고 표기하고 통용되는데, 대부분의 선비님들은 서책을 그냥 눈으로만 흩고 지나간 것 같다.차분히 들어앉아 머리에 새기고 가슴으로 읽었어야 제대로 성리학자가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참 바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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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봄바람에 집 떠난 며느리 년은 이적 깜깜무소식이고,

주식 투자 열풍에 부동산 투기 광풍에 속아 전답 팔아먹고 도망간 아들 놈도 깜깜무소식이고,

춤바람에 남편이 사우디서 송금한 돈 샛서방에게 다 날린 앞집 여편네도 사라지고,

참치잡이 원양어선 탄 뒷집 서방도 돌아올 기미조차 안보이고,

캄보디아 바람에 취업 나간다던 동네 불량배 녀석도 연락불통이고,

재개발 바람에 13평 아파트가 1억이 넘어서고,

노랑머리 깡패가 내 놓으라는 돈이 결국 내가 내야하는 세금이라니 입에서 욕나오고,

뙤놈에게 팔다 팔다 이젠 족보까지 훔쳐다 내다파는 놈들이 지천이고,

움켜 쥔 권력에는 반듯이 유효기간이 설정되어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뛰기만 하고,

세상 물가는 뛰어 오르는데 왜 월급은 맨날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지,

같이 쌈지돈 보태서 로또를 산 년이 보름째 소식이 없는 것은 혹시나.........

좋은 자리는 세습하고, 국가 정보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하고, 부정축재는 해외로 빼돌리고,

사방이 고양이에게 생선가계 맡길 꼴이니 대한민국 자체가 회복불능 복마전이라,

이런 처지에 담배값 올리면 금연이 저절로 될거라던 놈들이 혹시, 소주값까지 올리면 억울해서 죽여 버린다?

바람아! 로또가 안되면 어차피 떨어질 운석을 내 집 마당에 떨구어주면 안되겠니?

몰아치는 이 싸늘한 바람 말고, 운대 좋은 팔자 늘어지는 바람 어떻게 안되겠니?

아! 바람아.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꼬라지는 늘 거기서 거기구나.

북풍한설 몰아치는 파도더미를 넘으려고 바둥대는 저기 저 사람들을 보렴. 해남 땅도 따뜻한데 굳이 제주도라니?


어쩔까나?

어쩔까나?

사방에서 불어오는 모진 바람은 거칠기가 그지없는데 이를 어쩔까나?

엄동설한에 느닷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일엽편주가 난파되기 일보직전이니 그게 문제로다.

그놈의 바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놈의 바람.

심술궂기가 구중궁궐의 그 양반을 빼다 박았구나.

마지못해 북풍한설 맞으며 달려갔더니 벌써 머리를 조아리며 종묘사직을 구걸했다니

그러게, 뭔놈의 바람 때문에 혹해서 호랑이 잔등에 올라타냐고? 그냥 왕실 피붙이로 살라했거늘 말이야.

‘이보시게. 종(倧. 인조 임금의 이름) 아우. 나 떠나보내고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나? 그래 우암 조카는 살갑게 구시던가? 부질없음이야. 다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부디 바람을 잡으려 애쓰지 말게. 바람이란 때가 되면 불고, 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그라지게 되어있는 것이라네. 자네의 임금 자리도 바람이 한 번 훅하고 지나가면 다 그게 그만인 것이야. 임금이야 저 싫으면 그만이라지만, 자네가 흔들어 대는 바람에 지금 내 배가 가라앉기 일보 직전일세. 끝내 아우의 못된 심보가 나를 끝까지 힘들게 만드는구먼. 이 바람을 헤치고 제주도에 당도하면 난 내 방식대로 내 왕국을 만들고 나도 임금 노릇 좀 하며 살려하네. 서인이니 노론 잔당들은 아우나 데리고 사시게. 나는 물과 돌과 대나무와 소나무와 어제 진 달을 다시 불러서 내 왕국에서 내 방식으로 살아가려네. 이보게 종 아우. 난 가네. 난 이 바람을 타고 제주도로 가네.’



섬사람들은 바람을 두려워한다. 섬에 산다는 자체가 어쩌면 바람과의 싸움이랄 수 있기 때문이다.

뱃사람들은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이 불어야 노를 젓는 수고를 덜고 먼 바다까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섬사람 대부분이 바다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런가하면 뱃사람 대부분이 또 섬사람이기도 하다.

바람을 기다린다 해도 어디까지나 순풍을 기다리는 것이지, 역풍이면 도로 나무아미타불 꼴이 되기 십상이다.

쓸만하면 불지를 않고, 필요없다 싶으면 잔뜩 성을 내며 들이닥친다. 춘삼월 계집종 허파에 잔뜩 꿰 들어간 봄바람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하여간 죄 다 그놈의 바람(風)이 문제다.

그런데 이번엔 느닷없이 탐라도 바람이 들어버렸지 무엇인가?

머지않아 꽃피는 봄이 올테니 그때 바다를 건너자고 해남 바닷가 사람들이 그토록 말렸음에도 하여간 지랄같은 성질머리를 가진 양반네는 기어코 토말 포구를 떠나 탐라 뱃길에 나서고 말았다. 그것도 북서쪽에서 모진 광풍이 사납게 불어오는 엄동설한의 겨울 바다에 말이다.

양반은 수시로 북쪽 하늘을 돌아다보며 무엇인가 혼자 중얼거렸다. 마치 북쪽의 무엇인가에 쫒기기라도 하는 표정이었다. 그 쫓김에서 벗어나려면 무조건 이 바다를 건너 먼 탐라에 도달해야만 하는 어떤 절박함 마저 엿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아니나 다를까?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잔뜩 찌프린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리. 이대로 더 이상의 뱃길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자칫 넓은 바다로 나가기도 전에 암초에 부딪혀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탐라까지의 거리가 있는데 이 추운 날씨에 비까지 내리는데 뱃전에서 밤을 지새우며 탐라까지 가기에는 너무나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예서 다시 토말로 돌아갈 수는 없고,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리 멀지않은 곳에 보길도(甫吉島)가 있습니다. 고기잡이 배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대풍기미에 제법 민가도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일단 그곳에 머물다가 바람 사정을 보아가며 다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더는 어쩔 수가 없겠구나. 일단 보길도로 가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보자꾸나.’

그넘의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바람(風) 때문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예정에도 없던 보길도(甫吉島)에 떠밀려 도착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때는 1637년(인조 15년) 중양(仲陽. 음력 2월)으로 고산의 나이 51세였을 적이었다.

모든게 하여간 그넘의 바람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도 참으로 아이러니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탐라로 가던 배가 풍랑을 피해 잠시 정박하고자 한 포구가 보길도의 대풍기미라는 곳인데, 울릉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해안지방의 곳곳에 같은 이름의 포구들이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풍기미란 한 마디로 ‘바람을 기다리며 정박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지금 윤선도 일행은 바람 때문에 급하게 피신한 꼴이 되었으니 이름과 현실이 상반된 지극히 오묘한 운명적 방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대풍기미’의 ‘대’는 ‘기다릴 대(待)’이고, ‘풍’은 그대로 ‘바람 풍(風)’이며, ‘기미’는 ‘산과 산 사이로 굽이쳐 들어간 작은 만이나 골짜기’를 가리키는 고유어이니, 바람을 기다리는 곳에 바람에 쫓겨 떠밀려 온 꼴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런 걸 다른 표현으로 ‘운명’이라고들 한다.

어쨌거나 해남 땅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고하고 도도한 선비 고산 윤선도가 탐라로 가던길에 풍랑을 만나 어쨌거나 보길도에 들르게 되었다.

선생이 보길도에 첫 발을 내렸던 대풍기미가 바로 지금의 황원포 항구다.

황원포에서 윤선도 원림(세연정) 가지의 거리는 겨우 300m에 불과한 지척이다.

바람이 선생을 이곳까지 실어 보냈다.

그로부터 52년이나 지나 윤선도가 세상을 떠나고도 한참 지나서, 1689년(숙종 15년)에 송시열(宋時烈)이 탐라 유배형을 받고 배를 타고 건너던 중에 똑같이 풍랑에 떠밀려 이곳 보길도에 피신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암의 나이 81세 때 일이다. 살아서 동인과 서인의 영수로 죽어라 물어뜯고 싸우던 견원지간(犬猿之間) 사이가 바로 윤선도와 송시열의 관계였다.

하늘도 이들의 물과 기름 같은 사이를 알아차렸음인지 송시열이 떠밀려 도착한 곳은 황원포(대풍기미)의 정 반대쪽 포구였다.

둘의 사이가 어떠했기에 하늘까지 알아서 미리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저만치 벌려놓았단 말인가?

그랬음에도...... 어쨌거나 이 또한 그넘의 바람 때문에 모두 벌어진 사단이 아니었던가?

‘고산 선생님. 어떻게 그곳에서는 우암 선생님과 화해 좀 하셨습니까?’

‘혹, 지금도 마주앉아 성리학 타령으로 다투고 계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다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선비의 길도 성리학의 이상도 모두 한 때의 바람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참에 소제가(필자) 두 분 선비분들을 위해 시를 하나 준비해 보았습니다. 더하여 그 시에 운율장단을 얹어서 노래로 들려 드리려 합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시며 잠시라도 두 분께서 함께 선비의 풍류를 다시금 느껴보시라고 말이다.

‘두 분 선생님. 시를 아주 잘 짓는 분을 한 분 모셔왔습니다. 노래 잘하는 분을 어렵게 모셔왔습니다. 오늘 풍류의 소재는 역시나 바람(風) 이랍니다. 양인자 시인의 시에 조용필 씨가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받아주십시오. ’(a message from the wind)

‘성리학의 이상이 다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속에 그 답을 제가 담아서 보내드립니다. 자고로 선비가 무엇이었습니까? 시에 담긴 마음으로 살아가면 그것이 선비정신이고 도리가 아니었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양반님네들에게는요?’

헐!!!!!!!(어이 없음)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 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다갔느니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 소리라 생각하지 마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 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 지고나면 낙엽의 연기

타 버린 그 재 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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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이름 했다.”

풍랑을 피해 보길도에 떠밀려온 고산이 섬을 한바퀴 돌아본 후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대의 풍수지리학자인 이의신(李懿信)과 교류하며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던 고산은 이곳의 수려한 경관과 이상적인 지형조건에 탄복하고 말았다.

탐라(제주도)까지 가고자 했던 은거에 대한 열망을 한 순간에 접어버리기에도 이미 충분할 정도였다.

보길도에서 가장 높은 격자봉에 올라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고 <보길도지>에 적었으니, 당시 그의 감회가 어느 정도였을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는 그대로 이곳에 머물며 살기로 작정했다.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 시대에 이미 주자학에 뜻을 바쳤던 사대부 출신의 관료들이 불교 정치 이념이 지배적이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한계를 느끼고 하나 둘 자신의 향리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별서(別墅)를 짓고 임천정원(林泉庭園)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말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것이지, 임금을 앞에 두고 벌어지는 온갖 암투와 모략과 정쟁의 한복판에서 물러나 자연에 파묻혀 서책을 읽고 시를 짓고 같은 처지의 선비들끼리 만나 차와 술을 즐기고 노래를 부르며, 따분해지면 숲 밖의 세속에서 벌어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대해 토론도 벌여가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재미 또한 제법 컸었던 것이다. 점차 그 양반(선비)들은 그런 삶에 익숙해 갔고, 점차 새로운 시대적인 열망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세상(임금)이 높은 관직에 다시 불러주면 좋고, 아니면 이대로 한걸음 물러나 임금 부럽지 않으면서도 위험하지 않고도 무척이나 즐거운 전원생활에 재미를 붙여가며 푹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별로 할 일이 없어 심심하던 차에 정자나 누각이나 짓고 별서를 수리하고, 다른 선비의 별서를 찾아 두루 유람이나 하면서 선비들 방식의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생활에 재대로 빠져들자면 풍수(風水)가 대단히 중요해진다.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아는 선비와 모르는 선비는 풍류에 대한 차원이나 노는 물이 다르고, 더하여 학자다운 학식과 품격에서도 차이나 났다. 고려 무신정권의 암울한 현실에서 이규보(李奎報)와 이인로(李仁老)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삶을 살았던 당대의 풍류 이야기는 이미 선비들 사이에는 하나의 전설로 승화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은거를 택하는 선비 정신의 최고 정점에 놓였던 사람이 바로 고산 윤선도였고, 그런 그는 애초 은거 장소로 탐라(제주도)를 택했다가 바람의 심술로 인해 보길도에 떠밀려왔고, 그는 그곳에서 이상세계에나 있을법한 무릉도원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그 낙원에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붙이고 정착을 시작했으니 바로 1637년의 일이다.

풍수지리나 도학에 이미 어느 정도 경지를 이루었는지라 조선 팔도의 내놓으라 하는 명승지나 누정(樓閣亭子)은 이미 어느 정도 돌아보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유배 생활이 18년이나 되는 이력까지 갖춘 마당에 어지간히 사방 돌아다녔지 않겠는가? 낙향한 선비들 사이에 하나의 정설로 전해지는 이담로(李聃老)가 조성한 소쇄원(瀟灑園)도 방문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내린 결론은?

‘소쇄원을 훨씬 능가하는, 임금이 사는 경복궁 경회루(景福宮 慶會樓)까지도 능가하는, 감히 지상 어디에도 없을 그런....... 윤선도만의 무릉도원을 하나 만들자’하지 않았을까? 내심으로 말이다. 분명 속에 쌓인것도 있겠다?

고산 입장에서 따져보면, 임금을 빼면 누구보다 돈이 없어? 빽이 없어? 명성이 없어? 머릿속에 든 것이 없어?

딱 한 가지 험이라면....... 보길도도 엄연히 나랏님 땅이라는데 문제가 있는데, 까짓꺼 구중궁궐에 갖혀 사는 처지로 이 외딴섬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찌 알겠어? 따로 적당히 놀다가 때가 되어 떠나면 그만이지.

‘당신은 그냥 한양에서 쭉 살아가셔. 난 부용동에서 실컷 놀다가 갈테니. 우리 서로 간섭하기 없기로 합시다.’ 하! 순 배짱이다.

보길도에 뿌리를 내리기로 작정한 고산은 다시 격자봉에 올랐고, 사방을 두루 살피다가 이렇게 외쳤다.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내려가 정북 방향으로 혈전(穴田)이 떨어졌는데, 이곳이 부용동의 가장 명당인 혈전 자리다.“

당시 혈전 자리에서 올려다 보이는 격자봉이 울창한 수목에 가려져 잘 보이지를 않자, 길다란 대나무 장대에 깃발을 매달아 여러 사람을 시켜 오르내리게 하며 혈전 터의 높낮이와 방향을 파악했다고 하니, 얼핏 지난날의 토목공사 삼각측량법이 떠오른다. ‘혈전 자리는 최고의 양지바른 터가 될 것이다.’라며 집터를 삼아 그곳에 자신이 평생 거주할 낙서재(樂書齋)를 지었다.

그러니까 고산이 보길도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 바로 낙서재가 되는 것이다.

낙서재를 지어놓고 들어앉아 비바람 걱정을 덜게되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도 무척이나 가슴 뿌듯했던 모양이다.

"바다 가운데에 있어도 부용동에 들면 산 밖에 바다가 있는 줄 모르고, 비구름이 한 달 내내 덮고 있어도 습한 기운이 없고, 산속에는 범이나 뱀에 상처 입을 걱정이 없고, 온 산이 늘 푸르고 산해진수(山海珍羞)를 갖춘 섬"이라고 했다.

어디 그말만 했을까? ‘여기서만은 누가 뭐라해도 내가 최고(?)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다 나도 한마디 보탠다면, ‘한양서 놀 놈들은 거기 난장판에서 실컷 놀아, 나는 여기 도원에서 놀테니. 나는 일상에서도 너희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지만, 너희들이 혹시 알게 되면 아마도 꿈속에서까지 내가 부러울껄? 목숨 부지하고 쫓겨나면 찾아와. 한 해 겨울 정도는 재워주고 먹여는 줄께.’


울긋불긋 단풍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선선해진 바람결이라든가 가을의 티가 나는 그런 어느 정도 운치를 기대하면서 택한 ‘토말의 가을 여행’이었는데, 햇볕이 나고 나니 아직 쨍쨍한 여름날이 아닌가. 원림의 초입에 들어서면서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울창한 한여름의 숲이 뙤약볕에 거칠게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러다 금방 지치지 싶다.

기념관에서부터 이미 세연정에 대한 막역했던 기대감은 팍 무너져 버린 이후였다. 기념관이나 세연정이 시골 동네 한복판이나 마찬가지 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와 실망은 이미 다산초당(茶山草堂) 방문에서 깨져버리고 말았지 않았던가.

다산초당하면 어디 호젓한 숲 언저리 평지에 고즈넉하게 조성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언덕배기 동네를 지나 산기슭에 접어드니 노송 뿌리가 잔뜩 엉겨있는 길이 나오고, 마침내 92개나 되는 요즘 계단의 너비와 높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돌계단이 나타날 줄을 꿈에도 몰랐다. 거기다가 그토록 유명한 다산초당이 무슨 고립무원의 고시원이나 감옥처럼 도저히 딴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 정도의 절해고도 느낌일 줄도 몰랐다. 그래서, 다산초당을 지금 방문하는 세연정이나 소쇄원이나 백운동 정원과 같은 별서나 정원으로 보는 것에 크게 의문을 가져보게 되었다. 낙향한 선비가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는 정원이나 별서와는 다르게, 다산초당은 그냥 유배지다. 가시덤불로 위리안치시킨 것이 아니라 대나무 숲으로 위리안치시킨 감옥인 것이다. 숨듯이 은거한 것이 아니라, 가로막혀 어두운 골방에 갇힌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는 완전히 반대로 세연정이 그야말로 동네안에 담벼락으로 구분되어 위치해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학교와 마을 주택들이 세연정과 등을 맞대고 늘어서 있다. 이 느낌은 세연정을 모두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나왔을 때까지도 적지 않게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다. 달리 방법이 없었을까?

거의 400년 전에 윤선도가 이 섬에 첫발을 내딛고 찾아왔을 때 이곳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낙서재(樂書齋)를 시작으로 세연정(洗然亭)에서 동천석실(同天石室)까지, 근 10여년에 걸쳐 고산은 이곳에 25동의 건물을 짓고 정원을 조성했다. 과연 25동의 건물이 모두 완성되었던 당시의 모습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지인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고, 사람들을 시켜 <어부사시가>를 노래하던 그날의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적어도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가하면 고산이 첫발을 내딛던 당시의 이곳은 그냥 흔하디 흔한 숲이었겠지만, 그가 손길을 더해 정자를 짓고 숲을 다듬고 연못을 만든 후에야 비로소 전혀 다른 선경(仙境)으로 바뀌었으니,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최소한의 인공을 더해서 이상적인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한국식 전통정원의 속뜻인 원림(園林)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세연정 주변의 학교와 민가가 혹시, 고산 살아생전에는 이곳에 배움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숙소(학교 기숙사)였고, 고산 일가나 찾아오는 사람들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주변 하인과 민간인들의 시설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 건물들 조차도 애초엔 필요하다 싶어서 고산이 직접 지었던 25채에 포함되었던 건물일 수도 있었겠다.

400 년의 시간이 흐르는동안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은 점차 훼손되어 모두의 기억에서 조차 모두 사라져 버렸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에서 그나마 원형을 보존하며 남아있는 것은, 세연정의 정자터 정도가 전부였다’는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폐허로 변했다.

페허로 변한 원림의 모습은 흡사, 1637년 제주도로 배를 타고 떠났던 윤선도가 풍랑을 만나 어쩔 수 없이 피난을 해야 만 했던 그 당시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원림(園林)이 원림(原林)으로 되돌아간 것이니 그 또한 순리가 아니겠는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되고, 역사에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점차 그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과로, 마침내 1992년 세연정(洗然亭)이 복원되었다. 이후로 사라졌던 건물이 하나씩 복원이 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기념관까지 생겨난 것이다. 소쇄원도 다산초당도 백운동 정원도, 한반도에 산재해 있는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이 시기를 계기로 복원이 활발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복원 과정에서 필히 생겨나게 되는 고증 문제나 시대 흐름으로 건축 자재나 기술의 사라짐이나 발전으로 파생되는 문제들도 여러 잡음이나 다툼이 끊이질 않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후손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이라고 늘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다.

그랬음에도 세연정의 첫 인상은 지극히 감동적이다.

적어도 이 순간에만은 복원이니 어떠니 하는 문제 제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쩜. 어쩜. 지금 내 옆에 출근하시는 고산 선생의 표정이 딱 내 표정인 것을........’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 우는 소리에 일어나서 후학을 가르치고, 수레를 타고 악공을 거느리며 세연정이나 동천석실에 가서 자연을 벗 삼아 즐겼다”고 기록되었던 윤선도의 추억과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윤선도는 이곳 낙서재에서 눈을 감았다. 윤선도는 51세부터 85세에 작고할 때까지, 나라의 부름도 있었고, 또다시 유배 생활도 있었고, 해남의 본가에 머물기도 하면서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했으면서도, 어쨌거나 자신이 조성한 부용동이란 낙원에서 13년 동안 머물렀고 끝내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고르기를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제 정말로 고산 윤선도 선생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다.

와!!!!!

시선을 연못 쪽으로 돌리니, 부용동팔경(芙蓉洞八景) 가운데 제3경이라는 연정고송(然亭孤松)이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이래서 다들 세연정(洗然亭) 세연정 했던 것이구나.’

그날도 낙서재를 나선 고산이 마차를 타고 저만치서 내려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따라 세연정으로 걸어가셨으리라. 고산의 마음속에 세연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세연정은 두 개의 인공 연못 사이에 올려 앉힌 정자이다.

그 세연정을 한 아름 가득 품어안아서 보호하듯이 초록빛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 연정고송(然亭孤松)이다.

기묘하다고 해야할까? 절묘하다고 해야할까? 그냥 감동이라고 해야할까? 가슴벅찬 이 느낌을 더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세연정을 에워싸고 떠받들고 있는 듯한 세연지(洗然池)를 바라보노라니 도대체 이 수원이 어디에서 흘러온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커다란 연못을 가득 채우기에 길을 따라 흘러드는 작은 개울로는 어림도 없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좀 더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기다 보면 그런 의문은 이내 해소된다. 경내 초입을 가만히 살펴보면 땅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찾아낼 수가 있다. 고산이 이곳에 연못을 조성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가 바로 이곳에 풍부하게 솟아나는 샘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해 듣기로는 낙서재 뒤편의 격자봉 낭음계에서 흘러내리던 계곡물이 땅 틈새로 스며들었다가 세연정 경내에서 다시 솟아오른다는 해설이다. 바위틈새를 헤집으며 골짜기를 휘돌아 흘러가는 계류를 지켜보면서도 자못 신기하기만 한데 땅속으로 흘러가는 수맥이라니...... 수맥을 알고 지기를 알고 천기를 깨우치게 되면....... 다음은 신선인가?

샘물 앞에서 사방을 살피니 세연정의 전체 풍광이 그제야 제대로 한 눈에 들어온다. 이래서 매사에 근원을 찾는 것이 아닐까?

세연정을 감사 안고있는 세연노송 뿐만이 아니라 정자 주변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동백나무다. 동백이란 것이 이렇게까지 클 수도 있는 나무구나 하고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세연지(洗然池) 안에는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느껴질 정도로 집채만한 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놓여있다. 애초부터 저렇게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작은 일부는 의도적으로 옮겨놓은 것인지, 큰 바위는 사람의 힘으로 옮기기 힘들어 보이는데 말이다. 그랬음에도 고산은 이들 바위 하나하나에 제각각 이름을 지어 붙였다. 일곱 개의 바위라 해서 '칠암(七巖)'이라 부른 바위 중에는 귀암, 사투암, 유도암(遊跳巖), 무도암(舞跳巖), 용두암, 비홍교, 그리고 두꺼비가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처럼 잔뜩 웅크린 모습의 혹약암(或躍巖)이 있다. 참 잘도 갖다가 이름을 지어 붙였다. 그렇게 칠암을 품고 있는 세연지는 600여 평이 넘는 제법 너른 연못이다.


세연정(洗然亭)을 보면 딱 떠오르는 생각이 ‘이래서 선비들이 별서(別墅)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별서(別墅)는 살아가는 거주처로서의 살림집을 뜻하는 별장(別莊)과 구분지어, 학문을 논하고 후학에게 가르치는 강연장으로서의 목적을 우선 가지고, 거기에 풍류와 위락의 가치를 더하는 장소적 의미로 해석되었다. 하여 살림하는 집의 편의성 보다는 산수가 수려한 장소에 일단 우선을 두고, 담장(영역)안의 공간적 풍경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담장 밖의 자연에 대한 풍경 또한 대단히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로 여겼다. 더불어 흘러내리는 계류나 연못을 조성하고자 하는 물이 차지하는 공간 또한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하여 별서에 세운 거처는 대개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세웠지만, 별도로 그 안에 세워지는 정자들은 일정한 방향과는 관계없이 빼어난 풍광의 언덕이나 산기슭에 주로 세워졌다. 정자의 규모를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을 기본으로 하여 3×2칸, 4×2칸 등으로 주로 만들어졌고, 겨울이라는 한시적 기거와 강학을 위해 더러는 온돌방을 두었다. 온돌방의 위치는 호남 지역은 건물의 한가운데 두었지만(세연정이 대표적), 영남지방은 한쪽으로 치우치게 두었다. 정원의 수경 요소로 연못을 만들 경우에는 방지(放支)와 중도(中島. 석가산)를 두는데, 여기에는 도교 사상은 물론 신선 사상과 음양 사상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전통과 고증을 바탕에 두고 1992년에 복원된 세연정(洗然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조금은 색다른 형태와 규모로 동쪽으로 아궁이를 내었는데, 사전 지식이 있거나 이 분야의 전문가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하게 설계되었는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불길이 직접 온돌에 닿지 않게씀 만들어졌다. 그런가하면 서쪽으로 난 굴뚝은 기단 아래로 향하게 설계되었으며, 끝 부분을 양쪽으로 갈라지게 설치하여 거꾸로 들어올지도 모를 역풍현상을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세연정의 가장 빼어난 압권은 창문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외부에 설치한 판문(板門)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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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건축에 있어서, 그중에서도 특히 누각과 정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백미는 아마도 들어열개문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는 참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묘한 매력이 넘쳐난다.

현대 건축에서도 창이나 문의 역할을 통해 외부와 단절 또는 연결하는 장치로 큰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들어열개문에는 묘한 운치와 정감 가득한 어떤 정서가 담겨있다. ‘따로’ 또는 ‘같이’라는 한국적인 정서에 고고한 듯, 또는 더할 수 없을 만치 옛스런 정취가 가득 묻어난다. 일단은 누구나가 짐작할 수 있는 문의 역할처럼 열어 재친다. 그 열린 문을 들어서 처마 끝에 매단다. 문만 열어 재친 것이 아니라 벽면까지 통째로 접어서 들어 올린 것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누각이나 정자의 내부와 외부가 완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아예 벽을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처마에 매달린 들어열개문이 또 하나의 새로운 운치를 창조해 낸다. 바람이나 햇빛를 막기 위해 설치했던 들어열개문은 어쩌면 그 본래의 용도보다도 오히려 접어 올려 매달려서 뿜어내는 그 묘한 운치 덕분에 인테리어 소품으로서 역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질 정도이다.

세연정 사면의 들어열개문을 접어 올리면 짙푸른 대자연속의 나무그늘이 되고, 내려서 펼치면 따가운 햇볕과 바람을 피해 서책을 읽고 학문을 토론하는 서당(방)이 되는 것이다. 들어열개문을 올리면 올린 대로, 내리면 내린 대로 대청마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사계절의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야말로 멋진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윤선도가 처음 발걸음을 내딛었을 당시의 세연정 주변 풍경도 가히 일품이었기에 기꺼이 이곳을 택했을 것이다.

거기에 당대 조선 최고의 조경사 반열에 올랐던 윤선도의 세세한 손길이 더해진 후에 이곳은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풍광으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의 인공, 정성 가득한 사람의 손길이 더해져 자연을 더 자연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 표현이 과연 제대로 말이 되기는 하는 것일까?

그렇게 자연에 손질을 더해 놓고는 거기에다가 세연(洗然)이라고,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고 이름 붙여 자신이 손을 댄 ‘인공’의 부분적 의미를 슬쩍 씻어내고자(?) 까지 했으니, 그 심오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 주변의 풍경들이 한눈에 가득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세연노송과 정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안해진다. 윤선도도 나처럼 이곳에서 주변의 풍경을 음미하면서 어지럽고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온 자신의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았을 것이고, 들려오는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대나무 나부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인생무상이라는 다 부질없음에 잠시 치를 떨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에서 오우가(五友歌)를 지었으리라. 임금께서는 한양 도성에서 세속의 영원한 무질서와 다툼에 매달리다 경회루에서 술 한잔하시면서 노고를 달래시고, 버림받은 고산은 멀고 먼 남해 고도에서 정원이나 꾸미고 지인들과 풍류를 즐기면서 잘 살다가 가겠노라는 속내를 하늘에 대고 털어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멋진 세연정을 제대로 감상하자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연정만의 아주 독특한 윤선도표 특허 상품이 있으니 바로 석조보이다. 석조보라는 것이 작거나 웬만한 크기의 물길을 가로막고자 하여 돌로 만든 보(洑)를 가리키니 아주 작은 미니 댐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윤선도가 세연정에 만들어 설치한 보에는 판석보(板石洑)라는 엄연한 별도의 이름이 따로 붙어 있는 특허 발명품인 것이다. 세연정이 유명해지고 수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명소가 되면서 각종 여행 잡지나 방송이나 안내 가이드들의 세세한 설명 덕분에 이제는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버렸기에 짧게 설명하고 그냥 지나가야겠다.

윤선도는 이곳에 솟아나는 우물과 흘러드는 여울의 물을 가두어 정원(세연정)을 만들기 위해 보를 설치해 물길을 막았다. 그 보를 돌로 만들었는데, 그냥 돌덩이를 가져다 석축처럼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길게 기단을 쌓은 후에 그 위로 판석(널판지처럼 깎고 다듬어 만든 돌판)을 이어 붙여서 앞뒤로 벽체를 만들고, 그 위를 지붕처럼 또 돌판으로 덮는 방식을 통해 만든 판석보(板石洑)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보의 안쪽은 통 비어있게 되었기에 일명 굴뚝다리 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통 때는 물을 가두는 역할에 그치지만, 비가 많이 내려 연못이 차고 넘치게 되면 판석보를 넘어 흘러내려 가는 물소리가 보의 텅 빈 내부공간의 공명 효과에 힘입어 마치 폭포 쏟아지는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이곳 세연지에 없는 폭포를 이따금 장마철에는 체험할 수 있게 창조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판석보로 우리나라에서는 이곳만이 유일하다.

이런 기발한 착상과 주변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로움으로 인하여 이곳을 대한민국 최고 최대의 별서 조경 유적이라 부르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필자 역시도,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의 정원 혹은 정자를 꼽으라 하면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이곳 세연정(洗然亭)을 꼽겠다. 거기에는 혹시나 최고, 최대라고 하면 따라붙을 수도 있는 다른 평가순위에 대한 주관적 견해들을 염두에 두는 차원에서 으뜸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필자의 생각과 판단에 ‘대한민국의 으뜸 정원은 세연정(洗然亭)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세연정답게 동서남북 각 방향에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보통의 정자들은 하나이거나 둘 정도의 현판을 거는 경우가 보통인데 말이다. 중앙인 북쪽에는 세연정(洗然亭), 남쪽에는 낙기란(樂飢欄), 서쪽에는 동하각(同何閣), 동쪽에는 호광루(呼光樓)라는 편액이다. 칠암이 있는 서쪽에는 칠암헌(七岩軒)을 따로 걸었단다. 그 하나하나의 현판마다 심오한 뜻이 담겼겠으나 여기서는 그만 생략하고 지나가야만 하겠다.

그런 세연정에 오르기 위해서는 엎드린 거북 모양의 바위 다리인 '비홍교(飛虹橋)'를 건너야 한다.

세연정 앞은 계담이고 뒤는 '회수담(回水潭)'이다. 윤선도는 연못을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둘로 나누어 조성했다. 상지인 계담은 애초 이곳에 있었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동적인 경관을 살리고, 자신이 손수 인공적으로 조성한 하지인 회수담은 물의 속도를 최대한 떨어뜨려 안정적인 수위를 보존하는 정적인 공간으로 연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물소리는 잦아들고 수면은 고르게 잠잠하여지며 회수담은 고요와 적막이 감도는 곳이 된다. 윤선도의 풍부한 경험에 의한 탁월한 공간 감각과 과학적인 사고, 거기에 더한 예술적 안목을 엿볼 수 있다. 세연정은 이 빼어난 물의 공간인 두 연못 가운데 섬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계담과 회수담을 합하여 '세연지(洗然池)'라고 부른다.

세연정에서 물길을 건너면 돌로 단을 쌓은 동대와 서대가 있다.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이다. 정원 안에 음악과 더불어 무희들이 춤을 추는 무대를 조성한 이 공간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공간이다. 회수담의 물은 서대와 동대 뒤의 작은 개울을 거쳐 하류로 흘러간다. 이 낮은 개울가에는 토성처럼 둑을 쌓고 대나무와 상록수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무대에 올려졌다. 윤선도 작사 작곡 연출인 한 편의 뮤지컬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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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은 일단 세연정에 올라 정자 일대를 둘러보고 그대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조금 열의에 넘치는 사람이라면 판석보를 건너 계담을 한 바퀴 돌아보며 건너편에서 보는 세연정 일대의 풍경을 감상하고는 서둘러 돌아간다. 하지만 세연정에 왔다면 옥소대(玉簫臺)를 오르지 않고서는 세연정을 제대로 보았다 할 수 없다. 판석보를 건너면 산 쪽으로 겨우 작은 오솔길이 보인다.

오솔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느닷없이 거대한 석문이 나타나 다소 원시적인 풍경을 자아내는데 이내 옥소대에 오를 수 있다. 수십 명이 둘러앉을 정도로 널찍한 옥소대에 오르면 황원포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하고 발아래로 세연정이 내려다보인다. 그제야 옥소대에서 춤을 추면 연못에 그림자가 거꾸로 보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바로 윤선도가 그토록 사랑했던 풍경이 아니겠는가?

잠시 머물며 땀을 식히고 나서 옥소대를 내려와 축대를 쌓은 둔덕에 서면 다시 건너편 세연정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세연정 풍경은 압권이다. 물 위에 떠있는듯한 정자도 그러하거니와 물속에 투영되어 펼쳐지는 똑같은 진경에 놀라게 된다. 바닥이 암반이라 맑디맑은 물속에 투영된 세연정은 그 자체로 이미 한 폭의 그림이다.

조선 시대의 별서건축과 별서정원을 정의함에 있어 항상 따라붙는 것이 사화와 당쟁의 심화로 인해 세상을 피하려는 은둔의 풍조, 유교와 도교 사상에 따른 선비들의 풍류적 자연관 등의 배경을 통해 조성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랬다. 틀림없는 이야기다.

윤선도는 1637년에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에 세연정과 낙서재와 동천석실을 지으면서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런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온 절대적인 이유 또한 사화와 당쟁의 결과였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당쟁에서 밀려나지 않았으면 보길도 근처에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이나 (소쇄원)이나 (백운동 정원)이나 (다산초당)은 물론 <어부사시사>와 <목민심서>와 <자산어보>를 포함한 수많은 <유배문학>과 <유배 건축>과 <유배 생활문화>의 대부분이 참혹했던 사화와 당쟁의 결과라는 사실에 다소 착찹해질 뿐이다. 성리학이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일까? 당쟁이 치열했고 참혹한 사화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정약용도 윤선도도 송시열도 조광조도 그냥 도성에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고 잘 노느라 정신없어서 저런 결과물들을 만들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그뿐인가?

윤선도가 저렇게 원대한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이 된 해남윤씨 집안의 막대한 부의 배경에 해남인근과 보길도와 노화도와 진도의 원주민들 애환과 눈물이 가득 서려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구중궁궐에 갇혀있는 임금의 책임이지, 성리학의 세상을 펼치려다 밀려난 양반(선비)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의미조차도 없었다는 태도이자 결과물이 또한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일각에 전해지기로는....... 윤선도가 우리나라 최초의 간척사업을 시작한 건설업자로 해안 뻘밭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어 실로 엄청난 부를 일구어 들였다고 하는데, 왜 그 간척사업에 피와 땀을 쏟아부은 현지인들은 ‘피땀을 흘려 땅을 개간하여 쌀을 생산해 바쳤는데.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보리쌀을 돌려받았다’라고 원성이 자자했다고 기록되었을까? 그 쌀로 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서 같은 양반들을 부르고, 아랫사람을 시켜 옥소대에서 <어부사시사>를 노래하고 춤을추게하며 풍류를 즐기는데만 썼다면........ 그 책임을 임금에게 물어야 할까? 아니면 성리학에게 물어야 할까?

왜 윤선도는 해남땅에 고산서원(孤山書院)을 지어 교육사업에 헌신함으로써 훌륭한 성리학 인재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퇴계 이황이나 남명 조식 선생의 실례에서 보듯이 기품과 지조가 있는 성리학자로서의 최고 덕목에는 쓸만한 인재를 가르쳐 길러내 세상에 뜻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결과로 한없는 존경을 받게 되고 마침내 성현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것이 아니었던가? 학문이 부족하고 돈이 부족하고 명망이 부족하여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겠는데, 조선 최고의 시조 문학가에다가, 호남 최고의 부자 가문에다가, 남인의 영수까지 지낸 마당에 서원 건립과 후학양성에 매진하지 않았음은........ 혹, 이미 가진 게 너무나 많고, 명망도 얻을만큼 얻었고, 나름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기고 싶은 것도 많은 처지에, 서원이나 교육에 얽매이기 싫어서 적당한 즈음에서 선을 긋고 물러나기로 작정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해남에서 떵떵거리며 살려고 드니 남의 이목과 눈총이 있는지라 아예 제주도로 건너가 제대로 놀아보려고 하다가 우연히 보길도를 알게 되어 ‘이쯤이면 되겠다’ 싶어서 자리를 깔고 눌러앉은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자신의 왕국을 꾸미고 살았다. 할 것 다하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임금 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다가 성리학자로서의 본분에 대한 남의 이목을 우려하여 세연정을 통해 멀리서 찾아오는 젊은 후학들에게 허락되는 정도의 교육을 베풀면서 학자로서의 명분과 명망을 이어나갔다고 보인다.

성리학자로서의 부끄럽지 않은 체면을 유지시켜 주고, 또 ‘내가 솔직히 이 정도는 된다’는 자부심을 은근히 내보여주는 장소로서 세연정이 큰 몫을 했고, 그곳에 많은 방문객들이 머물 수 있도록 시설을 추가로 조성하기도 했으나, 기념관 안쪽에서 시작하하는 낙서재(樂書齋)나 곡수당(曲水堂)이나 동천석실(同天石室)은 자신과 가족들만을 위한 왕국이었으리라.

윤선도는 이곳 성리학적 이상향(낙원)에서 머물면서 신선같은 생활을 하면서 귀한 손님이 찾아오거나 후학들에게 학문 강연을 할 때가 되면 신선처럼 사륜거에 올라 세연정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강의를 하고 뮤지컬 공연을 하고 풍류를 실컷 즐기고 나면 다시 고고한 신선이 되어 사륜거를 타고 낙서재로 올라가버렸던 것이다.

그게 좋았고, 그게 낙이었고 무척이나 행복했던 모양이다.

그러면 되었지, 무슨 <민족사관학교>나 <만주독립군사관학교>나 <당쟁 사관학교>를 세워 원장 노릇을 하면서 쌍코피를 쏟으며 매달릴 필요가 있었겠는가? 혹시라도 임금이 눈치채고 압수해 버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솔직히 그런면에 있어서는 남인의 영수까지 하면서 성리학에 목숨을 걸었던 선비 정신과 뜻을 펼침에 있어서 충분히 비판 받을만 하다고 생각된다. 속된 표현으로 ‘적당히 치고 빠지는데 선수였다’라 해 주고 싶을 정도다.

이는 학문적 이해가 극히 낮은 필자의 입장일뿐만이 아니라, <오우가>에서 이미 피력했던 바처럼 고산 윤선도가 생각한 자연은 엄격한 유교의 세계관에 입각해 자연과 자연이 대립한다던지, 인간과 자연이 서로 대립하고 저항하는 등의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보여지는 생동감이나 적나라한 결과와 잔해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현실에 한 발만 적당히 담그고 물러선 채로 관망하는 태도를 즐겨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산이 치열한 서원이 아니라 은둔 형태의 별서정원 조성을 택한 이유를 필자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솔직히는, 자연이나 현실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실질적으로 덜 체험하고 반쯤 비켜선 상태로 조상이 물려준 넘쳐나는 유산을 토대로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삶을 추구하고 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올곧은 선비 정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율배반이 아니었을까?

비교적 약세인 남인의 영수로 뜻을 세상에 펼치려 노력한 선비로서의 명성은 이미 얻어놓았겠다, 시조 문학의 대가로 학문적 명성은 이미 극한에 이르렀으며, 호남 최대 거부로 불렸을 만큼 가진 것이 많았으니........ 이제 노후에까지 당쟁이나 사화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임금과 세상의 이목에서 탈출하여 먼 모처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이루며 유유자적한 노후 생활을 맘껏 즐기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세상이나 역사에서 지워지고 싶지는 않아 적당히 외부와의 연결통로만은 열어두고 적당한 사회활동으로서의 후학양성과 교류를 통하여 명망을 이어가고 싶었다고 짐작된다.

다분히 성리학자로서의 도리나 가치관에서는 많이 어긋나는 처사가 아니었을까?

하긴, 모든 것을 다 가진 마당에 굳이 늙어서까지 저잣거리에 나가 시시비비에 휘말릴 이유가 없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부용동 안에서는 임금이 부럽지 않은 신선의 경지에 올랐으니 말이다.

고산은 51세에 보길도에 들어와 정착하였고, 자신이 이룩한 낙원인 낙서재에서 85세에 사망했다.

대략 34년의 기간 중 이곳 부용동에서 이십 년 정도를 머물렀고, 나머지는 해남과 양주(楊州)의 고산촌(孤山村)에 머물렀으며, 나머지 기간은 또 당쟁에 휘말려 거듭 유배를 다녀야만 했다. 한 번 발을 뺏으면 완전히 뺏어야 하는데 그넘의 정치와 권력이라는게 호랑이 등에 타는 것과 같아서 탈 때는 내 마음대로이지만 내리는 것은 죽는 것 만큼이나 힘든 것이었다.

젊어서 성균관에 들어가자마자 유생들을 포섭해 ‘당대 최고 권력자 이이첨을 비판’하던 그 결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윤선도는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이야기는 차차..........

그럼 이제........ 윤선도가 이룩하고 그토록 사랑한 그의 낙원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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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고산(孤山)을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가 혹은 조경사(landscaper)로 기억하고 있다. 과연 그랬다. 사계절 아무 때라고 세연정(洗然亭) 경내를 한 번쯤 거닐어 보고 나면 그런 기록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절감할 수 있다.

그랬음에도 세연정을 벗어나면서 문득 가슴속에서 불현 듯 떠오르는 하나의 의구심은 어찌할 수가 없다.

어쩌면 세연정(洗然亭)은 선비로서 속세를 떠나 은둔을 택했다는 고산의 감추고 싶은 속내였고, 끊어낼 수 없는 미련때문에 조성한 세속과의 연결 고리였으니, ‘친절한 고산 안내소’‘세상 접견실’‘고산 대변인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세연정은 고산의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보길도까지 찾아 온 사람들(양반)을 위해 만든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성리학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한 선비가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낙향하여 은둔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온통 고립무원의 임금과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서, 성리학자로서의 근본을 되새기면서도 세상의 미래를 염려하여 안부를 묻고 후배 학자들을 가르침으로써 성리학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가기를 염원하였다.”고 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조선 최고의 학문과 덕망을 갖춘 고고한 선비로서의 고산의 명망이 오래오래 후대에까지 전해지기를 학수고대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곳 세연정(洗然亭)은 고산이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곳을 통해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고 더하여는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지금 필자의 마음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세연정은 고산이 세상에 내어준 일종의 선물이다. 최고 선비가 세상에 내어준 다분히 자기 과시용 금박입힌 최고급 명함일지도 모른다. 더할 수 없이 멋진 경관과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풍치가 바로 고산이 스스로 제작한 명함이었던 것이다.

‘임금이 내치고, 정적들이 그를 조롱하지만, 한 번 세연정을 찾아가 봐. 그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지상낙원을 만들어 놓고 시를 쓰고 풍악을 울리며 노래를 부르고 신선의 삶을 살고 있단 말이야. 구중궁궐의 삶이 결코 보길도의 고산이 사는 삶보다 좋은 것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야. 그를 추종하고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젊은 후학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보길도로 몰려들고 있다고 하네. 우암처럼 사는 것이 바람직할까? 고산처럼 사는 것이 바람직할까? 우암은 그 나이에 떠 귀양을 떠나게 생겼는데, 고산은 낙원에서 신선처럼 살며 천수를 누리고 있다고 하네. 성리학의 마지막 이상이 그런 것이 아닐까?’

고산은 보길도에 원림을 조성하고 그 안에서 노년을 보냈다.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우는 닭울음 소리에 깨고, 수레를 타고 세연정에 내려가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가리치고, 시를 쓰고 음율을 붙인 후에는 악공을 거느리고 세연정이나 동천석실에 올라가 자연을 벗 삼으면서 풍류를 즐겼다.’라고 기록에 전한다.

고산이 처음 보길도에 발을 들여놓던 51세(1637)에서 85세에 작고(1671)할 때까지의 노년 생활 중 대략 13년 동안을 보길도에서 그런 신선의 삶을 영위했다.

고산을 찾아 온 사람들과 후학들이 주로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이 바로 세연정인 것이다. 거기까지가 외부인에게 허락하여 공개된 장소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기별이 전해진 후에야 수레를 타고 나타나는 고산을 접견할 수 있었다. 세연정 기념관 안쪽의 경내(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는 고산의 가족이나 하인이나, 특별한 경우 특별히 허락된 사람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별도의 아주 특별한 공간(고산만의 왕국이나 낙원)이었던 것이다.

이 왕국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인력(현지인)들은 세연정 밖 인근에 터를 일구고 몰려 살았을 것이다. 찾아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민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고산이 조성한 수십 채의 건물 중 상당수가 세연정 주변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수용하기 위함이나 장기간 학업에 필요한 공간들이었을 것이다. 그중 한 건물이 지금의 학교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따지자면 고산은 솔직히 낙향하여 은둔에 들어간 산림처사(山林處士)가 아니었다. 뒷끝 작렬이 보통이 아닌 쫓겨난 억울한 성리학자였던 것이다. 하여 말로는 낙향 은둔을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임금도 누리지 못할 신선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억울해서 세상을 향해 ‘나 이렇게 산다’고 행동으로 옮겨 사방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관심과 판단하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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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눈이 내리는 세연정의 풍광이 거의 미칠지경이었을 정도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겨울을 떠올릴 염치가 없었기에, 차라리 목우가 쏟아지는 세연정 마루에 엎드려 연못을 바라보는 정취도 겨울 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위안의 삼기도 했다.

그런데 낙서재와 곡수당을 돌아 나오면서....... 저만치 건너편 산중턱의 동천석실을 올려다 보면서....... 실없이 쓴 읏음을 짓고 말았다.

무릎 수술을 받은 사람을 산책을 겸하는 요양 여행을 하자며 여기까지 먼 길을 달려왔는데....... 다산초상도 한없이 미안했던 마당에 이번엔 동천석실이라고?

패스.

다음 보길도 여행을 기약할 수는 없는 처지이겠으나, 그곳이 정말로 지상낙원이라 해도 마눌님을 두고 나 혼자 올라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는....... 아니지. 나는 동천석실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길 옆으로 유난히 푸르른 황칠나무 숲이 은간한 바람결로 그런 나를 위로해주는 아주 고마운 순간이었다.



병자호란(1637년) 때, 인조가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성리학의 이상과 날개가 꺾이었다고 판단하여 세속과 인연을 끊고 은둔생활에 들어가고자 탐라(제주도) 행을 결정했다.

당시에 보길도와 제주도는 교통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다. 보길도는 제법 험준한 바닷길일 수 있겠지만, 제주도는 목숨을 걸고 건너다니는 지옥과 같은 멀고 먼 뱃길이었다.

만약에 고산이 그 바다를 건너 제주도(탐라)에 갔고, 그곳에서 정착해 은둔생활에 들어갔다고 치자면, 정말로 그는 그곳에서 고립무원의 은둔생활에 들어갔을까?

‘내버(never)’ 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그냥 ‘아니다’가 아니라 ‘절대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윤선도는 자신이 세상을 등지고 물러날 수는 있겠으나, 세상이 그를 밀어내고 잊어버리게 둘 사람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보길도에서의 신선 못지않은 고산의 생활이 소문이 나서 널리 퍼져나갔고, 성리학을 배우겠다는 후학들이 몰려든다는 이야기가 마침내 정적들뿐만이 아니라 임금의 귀에까지 도달하자, 고산은 마지 못한 듯 다시 한양 땅에 발을 내딛는다. 은둔한 성리학자다운 처사가 결코 아니다. 고산이 임금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아직 몰랐을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아직 버젓이 건재한대도 말이다. 조선의 정치판이 저잣거리 불량배들만도 못하다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절감했기에 제주도로까지 떠나려 했던 처지였음에도 굳이 한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성리학자로서의 시대와 백성들에 대한 책무? 임금의 간절한 호소? 설음 받고 있는 남인 동지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아픔?

고산 윤선도는 우리나라 역사 최고의 시조 문학가 반열에 오른 것은 사실이나, 정치가로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 답이 있다.

은둔했던 처지의 정치가 윤선도가 다시 도성의 정치세계에 돌아간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거나 이룰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랬음에도 결국 돌아갔고, 또 당쟁에 휘말리고 징계를 받고 유배를 다닌다. 팔순의 노년에 신선질?)이나 할 것이지 미쳤다고 시궁창으로 되돌아가느냔 말이다. 성리학 선비의 얼굴 이면에 감추어진 도 다른 얼굴이 바로 이러한 윤선도의 속마음이 아니었을까?

그의 지난 이력을 통해서 어느것이 진실인지를 한 번 슬쩍 들여다 보자.

고산의 나이 51세(1637)년 제주도를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우연히 이곳 보길도에 들리게 되었다.

이곳의 빼어난 풍광과 지세에 반한 고산은 그길로 보길도에 터전을 일구고 들어앉아 버렸다. 스스로 말하길 ‘부용동의 은둔한 선비’가 되겠다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날로 산세를 살피고 지세를 골라 낙서재(樂書齋)를 짓기 시작했다.

낙서재(樂書齋)는 서실(書室)을 갖춘 살림집으로 북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낭음계(朗吟溪)라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어, 낭음계 양편에 곡수당(曲水堂)과 무민당(無憫堂)의 건물 두 채를 지었다. 이 두 건물의 곁에는 넓고 네모진 연못을 만들었다.

낙서재를 북향으로 지은 뜻은 아마도 그 너머에 임금이 사는 구중궁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성리학으로 똘똘 뭉쳐진 대학자인 처지로 아침마다 북쪽을 향해 아침 문안을 드리며 마음에 충(忠)을 되새겼으며, 우측으로 고개를 놀려 곡수당을 내려다보면서는 효(孝)를 마음으로 당부했을 것이다. 그곳에 아들이 기거하면서 자신을 돌보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속내 한쪽으로는 늘 ‘전하. 소신을 그새 잊으셨습니까? 잊으시면 아니 되시옵니다.’라고 수백 번 수천 번을 더 외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간절함 덕분에 임금이 다시 불렀고 한걸음에 달려가지 않았던가 말이다.

북쪽 하늘에서 슬쩍 비켜 난 산자락 중턱에 무심한 임금을 원망하면서 전각을 하나 더 지었다. 동천석실(同天石室)은 천하의 명산경승으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가리키는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가져다 지은 이름으로, 휴식과 독서를 위한 장소로 고산이 조성한 원림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부용동을 내려다보는 고산에게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자신의 왕국이 아니었겠는가? 그는 슬쩍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 텅 비어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푸념을 늘어 놓았을 것이다. ‘임금께서 나를 잊으셨다면....... 그냥 이곳에서 이렇게 신선으로 살아가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했을 것이다.

하면서 임금이 사는 한양의 구중궁궐 못지않은 자신의 왕국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낙향하여 은둔에 들어간 고산이 여기 보길도에 눌러앉아 원림만 조성한 것이 결코 아니었으니 말이다.

부용동에 정착한 고산은 자신의 왕국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51세에(1627) 시작하여 불과 2년 만에 낙서재(樂書齋)를 지었고, 외부와 소통하는 창구로 세연정(洗然亭)을 지었으며, 이어서 아들이 머물며 공부할 곡수당(曲水堂)과 무민당(無憫堂)을 지었다.

그러던 그가 3년 차인 1639년(53세) 느닷없이 다시 바다를 건너 해남 본가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본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문소동을, 계곡에 수정동을 지었으며, 산등성이에 금쇄동(金鎖洞)을 지어놓고 이 세 건물을 일컬어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불렀다. 한 동네에 세 개의 명소를 만들어 세속을 벗어난 해남 땅 본가에도 또 하나의 부용동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후로 고산은 본가의 일동삼승과 보길도의 부용동을 오가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산 넘고 물 건너서 한양 땅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자 병자호란의 말미에 한양까지 올라왔으면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지 않고 제 멋대로 돌아갔다는 황당한 죄목으로 정적들에게 탄핵을 받아 기어코 경상북도 영덕(盈德)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풀려나자마자 곧장 낙향하여 보길도와 본가 주변에 정원 조성 사업에 매진했다.

영덕으로 귀양을 다녀 온 내용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기가 찰 노릇이었으니, 도성에 들어앉아 그런 음모나 구미고 해악질을 일삼는 정치판에 환멸이 느껴져 정말로 인연을 끊을 만도 하였겠으나, 역시나 고산의 선택은 그렇지 않았다. ‘내 줄 것 다 내주고, 치를 것 다 치루었으니, 이쯤이면 혹 그분(?)께서 다시 나를 불러주시지 않을까?’하면서 연실 밖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 도성의 정세를 살폈다.

이렇듯, 고산의 은둔이 아닌 은거, 자숙하는 선비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한껏 뽐내는 듯한 태도는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는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벼슬이 높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아흔 아홉칸의 대궐 같은 집에 산다고 해도, 인근의 경관이 빼어난 명소에 세 개씩이나 되는 명승지를 만들어 소유하기에는 상당히 벅찼을 것이다.

하여 오늘날에 ‘일동삼승(一洞三勝)’ 이라는 용어를 검색해 보면, ‘한 동네에 인접한 세 개의 명승지를 뜻하는 용어로, 전남 담양군 지곡리 일대에 조성된 소쇄원. 석영정. 환벽당을 일컷는다’라는 대답이 나온다. 그렇게 용어가 정착이 되었을 정도였으니, 애초 고산이 일동삼승을 만들었던 시기에 세상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을지가 감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그런 벅찬 일을 고산은 너끈하게 해냈다. 본가 주변에 일동삼승의 명승지를 만들어 소유했을 뿐만이 아니라, 보길도에 자신의 왕국을 조성해 놓고 왔다 갔다 하면서도, 선비로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표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보태자면 임금보다도 더 즐겁게 부자 양반의 신선놀음을 누리면서, 입으로나 대외적으로는 ‘청빈한 생활을 추구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참된 선비의 도리를 지켜나가고자 한다고’고 자신을 포장한 것이다.

고산은 철저하리만큼 그가 창조한 세상에서 신선놀음을 한껏 즐겼다. 그에게는 그만큼 명성과 어느 정도의 권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차고 넘쳐났을 정도의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에 조성한 건물만 해도, 외빈 접견실과 강연장으로서의 목적을 염두에 둔 세연정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거처인 낙서재 외에도, 자녀들의 공부하는 거처인 곡수당과 무민당을 비롯해 동천석실과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을 원림 안에 지었다. 도성의 구중궁궐 대신에 보길도에 자연궁궐을 짓고 머물며 풍류를 즐긴 것이다. 솔직히 그 생활에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없었다. 보길도와 노화도와 진도 주민의 일부가 바로 성리학으로 중무장한 선비가 돌보아야 할 세상이자 뜻이었다.

그런 무늬뿐인 선비의 생활과 처신에는 안빈낙도가 차지할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

참된 선비의 자세와 성리학의 이상은 과연 무엇일까?

보길도에 주로 머물면서 본가 녹우당을 오가면서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삶을 살아가던 고산은 기어코 71세(1657. 새로운 임금 효종 8년)에 기어코 다시 정치판으로 돌아갔다. 미련일까? 남은 복수심이었을까? 아니면 노망이 들었음일까?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역시나....... 우암 송시열(宋時烈)에게 맞서다가 또 다시 판정패하여 관직에서 쫓겨났다. 효종임금이 승하하자 예론문제(禮論問題)를 들어 또 다시 송시열의 서인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역시 패하여 변방중의 변방인 압록강 유역의 삼수로 유배를 떠나고 말았다. 또 임금이 바뀌어 현종 8년(1667)에서야 유배에서 풀려나 보길도 부용동으로 돌아가 지내다가 4년 뒤에 낙서재에서 8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81세의 나이까지 먼 북방 압록강 가의 삼수에서 홀로 유배 생활을 겪었던 것이다.

유언에 따라 본가(녹우당)가 있는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아래 문소동(해남군 현산면 문소동과 해남군 삼산면의 경계 지점)에 안장되었다.

미련이었을까? 송시열과 서인들에 대한 증오심때문 이었을까? 아니면 노망이었을까?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살벌한 당쟁의 시대에 비교적 열세인 남인의 가문에 때어났다는 이유로, 집권 세력인 서인에 맞서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한결같이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일찍부터 정적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버렸다. 그 결론은 20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낙향 은둔생활로 점철되고 말았다.

남다른 금수저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막대한 유산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덕분에 화려하고 풍요로운 은거 생활을 마음것 누릴 수 있었으며, 시조에 대한 천부적으로 타고난 문학적 역량은 이런 질곡의 인생속에서도 그의 명성을 찬란하게 빛나게 만들었다. 자연을 문학의 소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중에서 대한민국 역사를 통털어 가장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시인이자 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반면에,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마주치거나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벌인다든지 하는 생동감이나 역동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그에게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부를 이용하여 풍족한 삶만을 거의 누렸기 때문이라 평가받기도 한다. 벼슬길에 나가서 당쟁의 결과로 유배를 당하는 등의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은 선비의 도리로서 어디에 떠벌릴만한 내용이 아닐뿐더러, 결국 패자였던 처지로 자신의 패배를 자인하는 꼴은 차마 보이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리라.


못다한 고산의 이야기는 <녹우당 여행기>에서 마저 다룰 것이기에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여정으로 발걸음을 옮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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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에게 두 명의 라이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학적인 경쟁자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을 꼽았고, 정치적 상대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이름을 올렸다.

흔히 말하기를 ‘시의 최고는 정철이요, 시조의 으뜸은 윤선도다’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문학사의 최고에 오른 시인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장르적으로는 시와 시조라는 조금은 다른 분야의 평가를 받고 있는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시와 시조가 조금 다른 분야이듯이 윤선도와 정철이 살아서 만난 적이 없을뿐더러, 아니지 이름뿐만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조차도 전혀 모르는 시차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이였다고 치자면, 이들이 라이벌로 만난것은 오로지 현대에 이르러 역사와 문학계의 학자들에 의해서였으리라.

정철이 당쟁으로 인해 강화도에 유배를 가서 홧병과 술병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사망했을 때, 윤선도의 나이가 고작 7살이었으니 그들이 서로에 대해서 알 방도가 없지 않았겠는가?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발판으로 서인의 영수에 오른 정철이 시 문학의 대가였으니, 머지않아 같은 대문학가의 반열에 오르는 윤선도가 정철의 문학을 존경하고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기는 하나, 정철이 권력을 잡고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이 기축옥사 이후거나 덕분이라고 볼 때, 정철이 주도한 일이 당쟁을 통해 동인 세력을 혁파하고 남인 세력을 탄압하는 것이었으니, 태생적으로 남인의 집안에 태어난 윤선도의 처지나 입장으로는 어떤 면이나 방식에 있어서도 결코 정철에게 호의를 가질 수 없었다. 정철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곧 남인이라는 조직에 대한 배신이요 경계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비록 세력은 별 볼일 없을만큼 미미한 남인의 영수자리에 윤선도가 올랐음인데, 정철이 세어놓은 무시무시한 서인의 세력의 영수에 오르게 되는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가혹한 시련은 모두 여기에서부터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여 그들은 평생의 라이벌을 넘어, 솔직히 말하자면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가 되었다. 속된 표현으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 한다.

송시열이 20살이나 어린 처지임에도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이름을 많이 올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성리학 대가였다면, 송시열의 서인 세력 반대편에 서서 늘 세력이 열세임에도 사사건건 마주 보고 싸우다가 터져야 하는 남인의 영수가 윤선도였다는 사실을 감수하면, 실록에 이름을 올리는 횟수는 적을지 몰라도 윤선도의 입장 또한 파란만장했음을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윤선도가 20년을 유배 생활을 했다면, 그 유배의 배경 대부분은 송시열이 가진 권력의 힘에 눌렸거나 싸움에서 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압록강 인근 삼수갑산에서 인생 마지막 유배를 마치고 보길도로 돌아온 것이 80세에 즈음해서였고 수년 후에 84세로 사망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먼 곳에 계시는 그 조물주라는 양반은 참으로 짖굿은 심술꾸러기인가 보다.

두 사람이 평생을 사우다 하나가 먼저 떠났으며 이제 세상 좀 조용하게 그냥 좀 내버려두시지 않고.......

윤선도가 사망해서 당에 뭍힌지 조금 지나서 또........ 이번에도 제주도로 가던 배 한 척이 풍랑에 떠밀려 다니다 좌초되어 엄한 보길도로 떠내려 왔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팔십이 넘은 나이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호송선이었다. 다도해 앞바다에 여기저기 무수히 넘쳐나는 게 섬인데 하필 보길도라니........ 송시열이 알았더라면 ‘죽어도 거기는 안내린다’고 버티지 않았을까?

도성에서 쫓아냈더니 보길도에 낙원을 차려놓고 신선놀음 하면서 잘먹고 잘산다는 소식을 수도없이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슬쩍 꼬득여 불러냈다가 내친김에 북쪽 변방의 갑산으로 내쫓으면 거기서 늙어 죽을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 살아 돌아와서 보길도에서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는 소식을 분명히 들었었는데, 하필 자신이 또 유배를 당해 끌려가는 마당에 들리게 되는 곳이 보길도라면 참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았을까? ‘이게 모두 시방 고산이 죽어서까지 나한테 복수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임금 옆에 붙어서 그동안 벌인 죄를 충분히 잘 알고 있으렷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보길도에 좌초되어 머무는 동안에 해안가 커다란 바위벼랑(글씨바위)에 처량해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새겨놓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전부이다. 보길도 동쪽 끝자락 백도리 해안 절벽에 송시열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시 한 수가 새겨진 (송시열 글씨바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그곳에 다녀오던 동백나무 숲길에서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성리학의 대가라더니 송시열 선생도 보기보단 엄청 쪼잔한 쫌팽이 같은 허접한 양반 나무랭이 아니여?’

‘윤선도 선생은 뭐가 좀 달라? 쪼잔한 쫌팽이는 똑같지. 그냥 적당히 양반노릇이나 하면서 살지 거창하게 성리학은 무슨 얼어죽을?’

‘그래?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치셨으니 저승에서 살림살이가 좀 넉넉해 지셨습니까? 저승에서까지 지지고 볶고 파당질이나 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쪼잔한 양반님네들 무탈하십니까?’


풍랑에 배가 좌초되었으면 일단 풍랑이 잠잠해 져야 했을 것이고, 또 어쨌거나 부서진 배를 수리했어야 했을 것이고, 그런 짬이 길어지니 송시열은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커다란 바위벼랑을 발견했을 것이고, 이제나저제나 바다 건너 먼 북쪽 하늘을 몇날이고 쳐다만 보다 보니 저절로 억한 심정이 들어 붓을 들고 시를 한 수 지었다. 처음부터 바위에 써서 새겼는지, 한지에 쓴 것을 배가 떠난 뒤에 누군가가 바위에 새겼는지는 기록에 없다.

어쨌거나 송시열을 태운 배는 제주로 떠났고, 그가 남긴 시는 바위에 새겨졌다. 윤선도가 세상을 떠난 지 18년이 지난 1689년의 일이었다.


八十三歲翁 /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赤云窮

北極空瞻日/南溟但信風

貂裘舊恩在/感激泣孤哀

여든셋 늙은 몸이 / 멀고 찬 바다 한가운데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 / 세 번이나 쫓겨나니 역시 궁하다

북녘의 상감님을 우러르며 / 남녘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이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에 /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 우네


송시열이 이곳에서 남겼다는 짧은 시 속에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한 선비의 고독이 진하게 담겨 있다.

송시열은 세 번의 유배 끝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회한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의 신념과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성리학의 시상에 대한 신념은 여전히 그를 지탱했지만, 현실 속에서 노년의 생기를 읽은 신체와 상처받은 마음은 이제 외로움과 체념으로 남았다. "이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 우네" 마지막 구절에서 송시열은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어쩌면 그 순간의 짙은 속내는 앞서 떠난 윤선도와 별반 다를것이 없어 보인다.

윤선도도 자주 그의 시조 속에서 ‘자신은 세상을 위해 뜻을 바치려 하지만 세상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거부하고 내친다’는 푸념 어린 자조를 자주 해왔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윤선도가 끝까지 자신의 길이 옳다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상대를 가혹하게 비판하고, 비판을 넘어 능멸하려 했었으나, 결국 막바지에 이르러 성리학 이상의 끝자락에선 똑같이 어떤 허상을 깨닫게 되고 허무함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다만 종국에 달라진 것이라면, 윤선도는 속세와 거리를 두고 사람을 상대하기 보나는 자연(오우가 소재처럼)을 상대하면서 어느 정도 심적 정서적 안정을 찾아갔던 반면에, 송시열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리학의 이상에 심취한 오만한 선비가 갖는 권력과 명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마도 송시열은 권력욕과 명예욕의 화신이 아니었을까?

한 시대를 풍미한 유학자요 서인의 영수로 천하를 호령하던 궁궐밖의 최고 실세였던 송시열 선생 정도라면, 어찌되었던 간에 보길도에 오게 되었다면, 윤선도가 사망한 지 18년쯤 지났으며, 보길도가 윤선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춘분히 들어왔을 것이고 그가 여기 보길도 낙서재에서 운명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들어서 알고 있었을 정도면.......... 문상은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무덤은 본가인 해남에 있다고 해도, 마지막 살다가 죽은 낙서재며 세연정이며 동천석실에 대해서도 충분히 들어 알고 있었을 터인데....... 아무리 정적이었다 해도 떠난 지 18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찾아가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의 기본 도리는 다해야 진짜 선비다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고사에도 정적들끼리 마지막 이별은 멋지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말이다.

송시열은 결국 유배지 제주도로 떠났는데, 그가 떠나기 전에 낙서재를 찾아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술 한 잔 올렸다는 기록 한 줄 남겨진 것이 없다.

혹, ‘내 진즉부터 그럴줄 알았어. 나에게 온갖 못된짓을 다 해놓고 너는 말년이 좋을줄 알았냐? 참으로 꼴 좋다.’라고 망자의 소리라도 들려올까봐 쫄았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그렇게로 거기까지 왔으면서 멀지도 않은데 찾아가 술 한 잔 권하는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그렇게 쪼잔한 심뽀로 성리학의 이상은 무슨? 선비타령은 무슨? 그게 지조야?’

하긴 몇 백년이 지난 오늘 당장에도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행태들을 바라보자니....... 변하거나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지금은 (성리학의 이상) 대신에 (민주주의 수호)를 입에 달고 산다는 것만 다를 뿐이지, 끝까지 자신(패거리)의 신념만이 옳다고 믿은 길을 한결같이 지키려고만 한다.

윤선도의 무덤에 술 한 잔 권하지 못하는 송시열의 쫌팽이 심뽀같은 짓만을 매일매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게 그렇게 어렵나? 이념과 신념이 다른 집단이 서로를 부정하며 공존의 길을 잃는 풍경, 그 구조는 시대만 바뀌었을 뿐 지금의 정치판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당파의 논리보다 공공의 가치를 앞세우는 길은 그저 입으로만 하는 공염불이고, 좀 더 솔직히는 당파의 논리도 내 이익을 우선한 다음에나 따져볼 요량으로 잔머리 굴리기에만 혈안이다. ‘민주주의는 무슨......... 내가 먼저(금빼지) 있고 나서 다음이 정당이니 민주주의니 어쩌니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까불지 마.’

이건 정말 개선이 안 되나?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고들 말한다. ‘그런 마당에 입으로만 먹고사는 여의도의 그 인간들이 변할 것 같니?’ 라는 물음에 대답대신 저절고 고개가 끄덕여지고 만다.

그 오래된 과제가 여전히 우리 앞엔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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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책봉문제로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송시열을 오랜 당쟁 끝에 겨우 정권을 차지한 남인 세력이 잊었을 리가 없었고 기어코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윤선도를 비롯한 남인뿐만이 아니라 동인에서 시작해 심지어 임금에까지 그 폐해가 너무나 심했던 때문이다. 송시열이 살아있는 한 서인의 맥은 이어질 것이며, 세상일이 또 어떻게 돌아갈지 아무도 모르기에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일단 송시열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인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대신들은 연일 송시열을 엄하게 문책해 사형시켜야 한다고 임금을 졸라댔다. 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 대신을 지낸 사람을 역모 사건이 아닌 이유로 사형까지 내몬 경우는 어디에도 없었다. 역모가 아닌 성리학의 도리를 내세워 임금을 귀찮게 괴롭힌 죄로 지금 팔순을 넘긴 나이로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처지로 그간의 공이 결코 작지않은 신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여기서 쉽게 물러날 남인 세력이 아니었다. 혹 그가 살아서 돌아오게라도 된다면 앞날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송시열이라면 자주 흔들리는 숙종의 성정을 언제든 쥐고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연일 송시열을 탄핵하는 상소가 들이닥쳤다. 남인은 추가 탄핵을 강력히 요청하면서 거듭거듭 사형을 요청했다.

결국, 그를 제주도에서 다시 데려와 추가로 제기된 죄상을 밝힌 후에 결정하겠노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송시열은 제주도를 떠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한편 도성은 도성대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아직 죄인의 몸이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송시열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임금이 친국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학문에 있어서나 말빨(?)에 있어서나 대중 선동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올라있는 송시열이 돌아와 임금 앞에서 성리학의 대의명분을 앞세워 정적들을 꾸짖고 자신의 탄핵이 부당함을 역설하며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한다면, 감히 그 누구도 그 사태의 끝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인세력은 송시열을 결단코 한양 땅에 다시 발을 들이게 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임금 숙종까지도 송시열을 다시 대하고 변명이나 꾸지람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할 만큼 싫었다. 하여 그들은 마침내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

송시열이 정읍에 도착했을 때, 임금이 보낸 사약이 도착했던 것이다.

결국 송시열은 83세의 나이로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道)를 깨닫고 저녁에 죽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앞으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는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위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孝宗)의 대의(大義)를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갔다. 고고한 선비로서의 신념과 자신의 일생을 당당하게 변명하는 뜻이 은근히 담겼다.

그런가하면 이런 송시열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야기 또한 전해져오고 있다.

거기에는 일제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서 조선 정치의 근본이 성리학과, 성리학의 최고봉이었던 송시열을 폄하함으로써 조선을 우매한 왕조로 만들고자 했던 결과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하여 우암 송시열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전제로 지금도 꾸준히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튼, 다른 기록에 따르자면 송시열은 제주도를 떠나면서 석방과 재기에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자신의 죄가 크지 않으며, 임금에게 자신의 역량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달았기에 다시 불렀을 것이라 생각했다. 조정에 돌아가 하나하나 풀어가야 할 일에 대해서 세세하게 계획까지 세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읍에 이르러 그의 생각과 바람과는 다르게 사약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착오가 있었다’고 거듭거듭 재확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금부도사가 왕명을 전달하고 사형집행을 하려고 하자 임금을 비난하고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면서 극하게 저항했다 전한다. 선왕의 예를 들며 고래고래 현왕의 잘못을 꾸짖었다. 그야말로 저잣거리 난장판에 전쟁터를 방불했다. 금부도사의 명으로 사형이 집행되어 아궁이에 뜨겁게 불을 지핀 후에, 군사들이 극렬하게 저항하는 송시열을 강제로 질질끌고 들어가 사지를 포박하다시피 한 후에, 강제로 사약을 입에 들이부었다. 사약을 모조리 뱉어내는 마당에 예리로 가져간 사약을 들이마시게 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결국 송시열은 심하게 일그러진 추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선비다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충과 효를 앞세워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코자 했던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고고한 선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일제의 폄하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내용은 공영방송인 KBS의 역사프로그램에서도 버젓이 방송된 적이 있는 것을 보면 무조건 허구로 일제의 폄하를 위한 조작이라고 보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혹, 적어도 송시열 정도의 위치에 오르게되면 임금의 어리석음도 낱낱이 들여다 보여, 아랫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이 손보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윤선도를 보면서도 필자가 이미 표현하지 않았던가.

미련이었을까?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감이었을까? 아니면 노망이었을까?

백도리 ‘송시열 글씨바위’를 나와 노화도 항구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땅끝으로 돌아온다.

오늘 여행은 이쯤에서 접고 좀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우리에게 휴식이란?

일단 하나로마트엘 다녀와야 준비가 된다.

땅끝 야영장에서 가장 가까운 하나로마트는 6,5km 거리에 있다고 내비에 뜬다.

십오리?

아니, 땅끝이 유명한 관광지고 지금 당장 이렇게 찾아오는 여행객이 많은데 하날마트 하나쯤 있어야 하는 것 아니지?

하긴, 그래야 작은 슈퍼나 편의점들도 먹고살겠지 라고 한다면 더 할말은 없는데 말이다.


모닥불 피우거든 윤형(?) 한번 내려 오슈.

송형(?)도 내 핑계대고 못이기는 척 내려오슈.

사람 바탕은 절대로 안 변한다지만 그래도 세상은 늘 끊임없이 변합디다.

변한 세상이 오늘만은 당신들 각자 편을 나름 들어들일테니 부담없이 같이 앉아서 소주한잔 나눕시다.

이 멋진 자연속에서 풍진 세상일일랑 잠시 접어두고 ...... 혹시, 장작불에 삼겹살 구워먹는 방법은 아슈? 양반이시니 소주는 드셔보셨겠지 만 소맥은 모르실거유. 5 : 5 폭탄주 한 잔 받아 보실래유?

아참, 특별 이벤트도 준비했다우.

유 튜브로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난장판 이벤트 보실라우? 24시간 연속해서 볼 수 있다우. 엄청 재미있다다우. 조금 보다보면 남인도 나오고 서인도 나오고 동인도 나온다우. 그 형은 금방 누가 자신을 빼다 박았는지 요즘 핫한 후배를 금방 찾아낼 수 있을거유. 사람이 안 변하는 것인지 정치판 생리가 못 변하는 것인지 유치 찬란한 시츄에이션들이 매일매일 새롭게 등장한다우.

생중계는 모르시쥬?

하긴, 생중계가 있었다면 그렇게 처신들 당시에 못하셨겠지. 그런데 요새 애들은 생중계라면 더 기를 쓰며 사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우. 반짝 스타라는 게 있는데.......

그걸 다 당신들에게서 배웠다고들 합디다.

헐!!!






-- 다음 이야기는 <진도 운림산방>을 찾아간 이야기로 이어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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