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산책)
“신문이 사라졌다.”
생활 쓰레기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베란다에 나서보니 그새 언제 저렇게 쌓였나 싶다. 현대인들의 생활이란 게 그저 쓰레기 생산과 배출이 전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쌓이는 쓰레기들을 쳐다보면 ‘저 많은 걸 도대체 누가 내놓은 거야’라고 푸념을 해 보지만 누구긴 누구겠어? 달랑 두 식구 살아가는 처지에 매번 뭐가 저렇게 나오는지 원.
더 궁시렁거리다 들키면 나만 손해일 것이 뻔해 서둘러 양손에 쓰레기 봉투를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저녁에 삼겹살 구워 먹으려면 바닦에 깔게 신문지 있나 찾아보고 와.’
아파트 단지 내 쓰레기 분리 수거장에 가서 착실하게 분리수거 임무에 충실하게 임한다. 분리수거를 마치고 옆 동의 폐지 분리수거장으로 향한다.
폐지 분리수거장으로 갈 때는 항상 은근한 기대감과 함께 어떤 설명하기 힘든 묘한 설렘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시간의 흔적이 얼룩처럼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신문이나 잡지를 오늘은 혹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아주아주 어쩌다 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신문과 잡지가 사라졌다.
딱히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거의 완전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아직도 신문 보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 혹시 핸디폰도 없는 도심의 자연인이야?’
이게 엄연한 현실이다. 예전에 신문이란 반듯이 신문을 꼭 찾아봐야 하는 이유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지금 사방을 둘러보라. 어디에서도 신문을 찾아볼 수 없지만, 어느 하나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이 없고 불편한 것이 없다. ‘신문? 그거 어디에 쓰는 거야?’
신문을 어디에 쓰느냐고? 아파트 거실에서 삼겹살 구워먹을 때 쓴다니까? 기름 튀면 청소하기 힘드니까? 그것도 몰라?
그런데 당장 마주친 현실적인 문제는 어디에도 폐신문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수거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택배용 포장박스뿐이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비닐류나 스치로폴이나 종이류는 거의 전부가 택배에서 배출되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는 폐지 수거장에서 눈을 씻고 찾아야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새롭게 깨달아낸 것도 있다.
누군가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오는 날은 별로 기대를 할 수 없겠지만, 이삿짐이 빠지는 날은 간혹 폐지 수거장에 낡고 오래된 서책이나 신문과 잡지가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아파트에 처음 분양 입주했던 기억이 머지않아 40년에 이를 것이고, 우리처럼 처음 입주했거나 초장기에 이사한 사람들이 아직도 제법 있기 때문이다.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연세가 지긋하고, 또 우리 세대들은 아낀다고 뭐든 무조건 모아두는 습관이 있었던 터라, 부득불 이사 정도에 처해야만 비로소 이것저것 짐을 정리해 내놓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내 서재를 가득 채운 온갖 잡동사니들이 하나뿐인 우리 아들 입장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일 테니 말이다. 너무나 뻔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미래다.
그제 아침에 이사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신문지가 보이질 않는다. 젊은 가족이 이사를 했나 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수거장 맨 안쪽의 빈 박스 더미를 어느 정도 헤집어 보았다. 그랬더니 서책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국어 백과사전이며 분재 도감이며 붓글씨 교본들이 주로 나온다. 내놓은 사람의 품성과 취미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내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처지라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다른 쪽 박스더미 아래서 잡지 꾸러미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한참 헤집어 오래전의 여성 월간지와 주간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랫쪽으로 오래된 신문 더미도 보인다. 간만에 횡재했다. 복권이라도 당첨된 기분으로 사다리를 내려온다.
‘뭐라도 건졌어요?’
나랑 연배가 비슷한 경비아저씨가 물어온다. 이런 경우가 늘 있었기에 가끔 뭔가 나오면 사전 정보까지 알려주는 고마운 분이다. ‘그걸 가지고 뭐 하시는데요?’라고 물어 온 경우가 있었다. ‘심심할 때 읽어보려고요. 치매 예방 공부에 좋을 것 같아서요.’라고 답해 주었다.
그럼 도대체 이 짓(?)을 왜 하는 것이냐?
그 대답을 내가 자주 경험하는 한 예로써 대신할까 한다.
직업적인 이유로 아주 깡 시골이나 오지에 가까운 곳의 옛날 시골집을 수리나 개축을 위해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면 정작 집주인과 만나 벌어질 공사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방치되다시피 한, 있는 그대로의 주변 환경 구경 내지는 탐색에 더 열중하기가 일쑤다. 내가 쓰윽 한 번 스캔하고 돌아 나오면 이후로 공사하는 동안에 이 집안의 기물에 대해서 집주인보다 더 잘 아는 경우가 파다하다. 늘 그곳에 사는 사람은 분명 어딘가 두었는데 시간이 지나 가물가물할 수 있지만,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집중해서 샅샅이 살피면서 관찰해본 내가 상황에 따라 더 잘 알고 찾아내기 때문이다. 부엌. 창고. 뒤란. 다락. 문간방이나 비닐하우스에 이르기까지 한 번 스캔을하고 나면, 살펴본 거의 모든것을 머릿속 메모리 카드에 저장해 버리는 재주(?)가 내겐 있다. 심지어는 주변 풍경을 보러 찾아 올라간 산등성이 묘지 비석에 얹어놓은 호미까지도 챙길 정도이다.
하지만,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은 따로 있다.
시골집의 광이나 문간방이나 부엌의 다락을 살피다 보면, 가끔 아주아주 오래된 신문으로 벽지를 대신해 도배한 곳이 있다. 그럴 때면 그곳은 더 이상 방치되었던 광이나 문간방이나 다락방이 아니다. 순간 그곳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되고 역사박물관이 된다. 시간과 추억의 갤러리로 변모한다.
선동렬과 최동원의 세기의 대결이 나오고, 간첩 사건이 나오고, 광주 민주화 항쟁과 서울 올림픽이 나온다. 황영조가 몬주익 언덕을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나오고, 사라진 개구리 소년 이야기가 나오고,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나온다. 고바우 영감 만화와 성룡이 나오는 영화 광고가 나온다.
거기에서 풍겨나온 것은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아니다. 더이상 은은한 인쇄 과정의 잉크오일 냄새가 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선 분명 아는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그런 은근하고 묘한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난 그런 냄새가 좋다. 켜켜히 쌓이고 찌든, 그러나 결코 오염되지 않은 가장 진실한 그 시절의 한숨에서 풍겨오는 향기라고 할까?
디지털 기술의 진보와 영향력 가속화 덕분에 밤새 인쇄를 마치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을 가르며 배송되던 아날로그 방식의 종이신문 시대가 저물고, 온라인. 앱 중심의 시대로 대회전을 이미 마친 상황이 바로 지금이다.
사건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해서 허겁지겁 신문사로 달려갔다. 기사를 써서 올리면 편집회의에서 결정을 하고, 그런 사건들을 재편집해 인쇄소로 보내고, 촌각을 다투며 윤전기를 돌린다. 운송 수단인 트럭과 기차와 비행기와 고속버스를 이용해 밤길을 달리고 또 달려 지방 곳곳의 배달사무소로 옮겨진다. 수작업을 통해 마침내 구독자의 아침 시간에 맞춰 겨우 도착을 했다. 투잡 쓰리잡을 뛰는 저소득층 가장과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청소년들의 애환이 서려지는 순간이다. 그런가 하면 그런 배달부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신문 사절’의 방법과 구구한 사연들 또한 어떤 상처로 묻어나고 있던 아스라한 장면들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언제 어디서던 사건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핸디폰을 손에 들고 지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혼재해 있다. 좀 커다란 사건이다 싶으면 신문사 기자보다 일부 유명 유투버들이 개미떼처럼 이미 바글바글 모여드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건이 벌어지면 실시간으로 고성능의 핸디폰을 통해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으로 찍혀 (숏츠) 프로그램으로 온 세상에 전송된다. 기사화나 편집이나 인쇄와 배송의 시간과 절차가 생략되어 버렸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숏츠)를 연결시키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전체 사건의 내용이 즉시 재구성이 된다. 그것에 대한 이해와 반응과 여론 조성은 어디까지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구독자의 몫이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기존 핸디폰 사용 조건에 따른, 새롭고 다양한 뉴스에의 접근은 무제한이며 완전 공짜다.
방송사가 주도하는 뉴스의 초점에 끌려갈 이유가 사라졌다. 어떤 제재나 사전 의도 없이 선택적으로 화제나 사건을 실시간으로 본질 자체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구독자의 가치관과 성향에 따른 자의적 해석과 관점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자신이 취재 기자가 되고 해석과 주관을 담아 신문사나 방송국을 대신하고, 나아가서 그런 생각과 주관을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일찍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미래학자 로스 도슨이 예측하기를, 2017년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신문이 사라지고, 한국은 2026년 정도, 그리고 2040년이면 전 세계의 종이신문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세상이 도래하고 말았다.
독자가 신문을 떠나고, 수익성을 상실한 신문과 방송사가 사라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그 변화된 미디어 환경이 우리의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까지 모조리 바꿔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는 자의던 타의던 그런 변화된 미디어 환경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지 않은가 말이다. 핸디폰 없이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우리 세대까지는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겠지만, 다음 세대는 일단 핸디폰을 손에서 빼앗아 버리면 멍텅구리 이전에 어떤 히스테리 증상이 먼저 발동할지도 모르겠다. 밧데리 떨어진 장난감처럼 될 터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새벽에 길을 나서게 되면 버스터미널이나 버스 정류장의 신문 가판대가 떠오른다.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새벽 골목길을 달려가던 신문 배달 청소년의 뒷모습이며, 빗속을 자전거로 달려가던 우체부 아저씨의 갈색 가방에 삐져나온 비닐봉지에 싸인 농민신문이 떠오른다. 시장 붕괴로 폐업안내 표지판이 길게 늘어선 시장통의 점포마다 앞에 수북이 쌓여있던 둘둘말린 신문더미와 고지서 독촉장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것이 내가 폐지 수거장을 기웃거리는 이유라고나 할까?
‘지현 카페’에 앉아서 따사로운 볕의 온기를 모처럼 맘껏 향유하면서 두 번째 머그 커피잔을 마주하고 있다. 지현 카페는 우리 아파트 베란다의 화분을 모두 정리하고 대신 캠핑 장비를 펼쳐 카페 야외 테라스 흉내를 낸 미니 커피숖이다. 우리가 함께 꿈꾸고 있는 ‘베벡의 벅스처럼’의 미니 버전이라고 할까?
미니 테이블 옆에 건져온 잡지와 신문 더미를 하나씩 집어서 심심풀이 땅콩식의 호사 아닌 호사를 누려보는데, 오늘따라 유독 많이 눈에 띄는 내용이 영화와 책에 대한 리뷰 기사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나의 시선과 호기심을 강렬하게 잡아 끄는 대목이 기사 중간에 있었다.
네덜란드 브뤼셀에 살고있던 미술학자 린 H. 니콜라스의 신간 도서 출판 인터뷰 기사였다.
‘십 년 전에 우연히 신문 부고란에서 나치로부터 6 만점의 미술품을 구한 프랑스 여성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여성의 지나온 삶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10년을 오로지 거기에 매달렸습니다. <유로파의 강탈>은 그런 10년의 기록입니다.’
신문 부고란에 난 어떤 여성의 기사를 보고 나서 작가가 거기에 10년을 매달렸다? 벌써 나의 호기심을 잡아끌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로즈 발랑(Rose Valland, 1898~1980)’이 도대체 어떤 여성이고 또 어떤 일을 했기에 그랬다는 이야기일까?
얼핏, 니콜라스가 신문 부고란에서 로즈 발랑의 기사를 보고 느꼈을 감정이 지금 니콜라스가 쓴 <유로파의 강탈> 신간 도서 기사를 보고 있는 나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주인공 로즈 발랑이 1980년에 사망했으니까, <유로파의 강탈>은 90년을 조금 넘어서 책으로 발간이 되었을 것이다. 니콜라스가 이 책으로 미국에서 전국 도서 비평가 협회 논픽션 부분 상을 수상한 것이 1994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유로파의 강탈>은 알게 모르게 학계와 문화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인류 문명사)에 아주 날카로운 일침을 날렸던 것이다. (전 인류)에게 혹독한 자아 성찰과 뼈저린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핵심은 인류 역사속에서 벌어진 강대국들의 힘에 의한 약탈이 부도덕하며, 반환과 배상을 통한 완전 복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문화재의 약탈은 비도덕을 넘어 정의의 심판 대상이며 인간 존엄에 대한 배반’이라는 주장이다.
‘강대국의 힘 = 정의’라는 역사적 불문율에 과감하게 쐐기를 박고 나선 것이다. 그 모든 예를 히틀러의 나치가 벌인 문화재 약탈 사건을 소재로 해서 재조명을 시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로파의 강탈>이다.
그러자 다큐멘터리 작사인 리처드 버지와 니콜 뉴넘과 보니 코엔이 달려들어, <유로파의 강탈>을 소재로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였는데, 역시나 10년 가까이 걸려서 마침내 2006년에 개봉하였다.
그러자 또 한 번 <유로파의 강탈>에 충격을 받은 작가 로베트 에드셀이 미국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에 보관된 실제 사건 관련자들의 개인 문서와 구술 기록, 인터뷰 기사와 미국국방부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직접 열람한 후에, 그것들을 참고로 <유로파의 강탈>을 소재로 한 소설 <더 모뉴먼츠 맨>을 2009년 발표했다.
잊혀질만 하면 또 등장하고, 또 잊혀질만 하면 다시 또 등장하는 <유로파의 강탈 망령>은 ‘당대의 초강대국들에게 고백과 사과와 실질적 복원을 위한 성실한 조치에 나서라’고 거듭거듭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 문화재의 전당포’ 노릇을 하고 있는 (영국의 대영박물관)(프랑스 루브르박물관)(독일 페르가몬박물관)(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에게는 그야말로 사형선고에 동의한다는 싸인을 하라는 꼴이 아니겠는가?
‘대영박물관이 여전히 공짜 관람을 유지하는 이유는?’
‘영국산 전시물이 1% 정도밖에 안 되니까, 99%가 훔치거나 약탈한 문화재들이니까’하는 우스갯소리가 결코 헛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자 여기에다 또 또 한 번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2014년에 멀쑥한 배우 조지 쿨루니(George Clooney)가 느닷없이 가독 데뷔를 선언하며, 첫 작품으로 영화‘모뉴멘츠 맨(The Monuments Men) : 세기의 작전(히틀러의 손에서 인류의 걸작을 구해낸 영웅들)’을 만들어 개봉시킨 것이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노년에 생고생 하지말고 커피광고나 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라고 해더니만 기어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흥행에서는 어느정도 수익을 남긴 성공작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 흥행은 실패라 하겠다. 찬반이 적적히 갈리는 평가이고, 다만 조지 쿨루니의 감독 영향력에 있어선 많이 아쉬운 작품이라 하겠다.
어쨌거나, 프랑스 여성 로즈 발랑(Rose Valland)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어진 것이 틀림없는데,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의 전 과정에 수많은 유명한 미술품이 쏟아지듯 등장하는데, 가장 그 중심에 등장하는 두 작품인 미켈란젤로의 <성모자 조각상>과 반 아이크 형제의 <신비한 어린양>이 모두 내가 지극히 관심을 가지고 아끼는 그림이라는 데 있다.
그날, 신문을 펼쳐들고 로즈 발랑이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더해서 미켈란젤로와 반 아이크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에 이미, 나는 이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먼저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에 마구마구 떠오르는 게 있을 때 써야지, 아무리 메모를 많이 해 놓아도 이때의 풍성한 감성과 기억을 되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날 읽었던 신문들의 기사를 바탕으로 로즈 발랑(Rose Valland)의 이야기속으로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헤이 죠지. 네스페레소 한 잔 부탁해.'
내가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중간에 불쑥 SNS에 올라 온 화제의 글이 있다.(2026.04.12. 06:45)
조지 쿨루니와 트럼프 일당이 한 판 찐하게 붙었다는 기사였다.
더불어 이재명 대통령의 SNS에 올린 글에 대해서 이스라엘 정부가 화가 잔뜩 났다는 기사였다.
그게 뭐 화제까지 될 일인가?
세상 사람들은 진실이 어느것인지 알테니까 말이다.
마침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배경에 바로 그런 치졸하고 불의한 힘(권력)이 도처에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누가 쫄(?)겠는가?
내가 혹시 미국 비자가 필요해질 일이 당장은 없음이며, 트럼프의 몰상식한 정권이 퇴물이 된 다음엔 선처나 배려가 있을지 모르니, 개의치 않고 딱 부러지게 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헤이 트럼프씨. 당신은 히틀러 보다 더 몰상식한 구제불능이야.'
‘요새 귀신은 다 뭐먹고 사니? 트럼프. 네타냐후 안잡아먹고?’
1998.04.08. 20:04(조선일보)
[책] 프랑스미술품 약탈 히틀러의 치밀한 작전 밝혀 '사라진 미술관' 헥토르 펠리치아노 지음
전쟁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영토확장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전쟁의 생리가 있다. 바로 문화재의 약탈이다.
인류 역사상 전쟁을 통한 문화재 약탈이 가장 교묘하고 조직적이며 대대적으로 행해졌다는 2차 세계대전. 피점령국 프랑스의 미술품들을 차지하기 위한 히틀러의 집요한 욕망, 독재자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하수인들이 벌이는 음모와 폭력의 내막, 빼앗기는 자들의 공포와 저항 등을 추적, 전쟁과 문화의 기묘한 역설을 파헤친 다큐멘터리가 번역 출간됐다.
2012-02-25 (매일신문)
[주목 이책!] 모뉴먼츠 맨 / 로버트 M. 에드셀'브렛 위터 지음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예술품을 구하고자 분투한 소규모 부대의 분투를 담은 역사 다큐멘터리다. 저자들은 '뛰어난 미술작품들은 어떻게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 하나를 잡고 수년간 치밀한 조사와 집필 끝에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2017-02-09 01:069(서울신문)
[정준모의 영화속 그림 이야기] ‘인류의 문화적 재화, 전쟁에서 구해라’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배상과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나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약탈당한 문화재와 예술품 반환 문제도 그렇고. 최근 법원 판결로 난감한 지경에 빠진 충남 서산 부석사 불상도 고려시대에 빼앗기고 그것을 다시 훔치는 방식으로 되찾아와 소유권을 두고 일본과 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기사와 이야기 속에 언제나 가장 핵심부에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미술품 두 개가 있다.
반에이크 <신비한 어린 양의 제단화>(1426~1432). 목판에 유화. 461X350㎝. 벨기에 겐트 성바보성당.
미켈란젤로 <성모자상>(1501~1504). 대리석. 높이 200㎝. 벨기에 브루게 성모성당.
이 두 작품 중에 그동안 그렇게 많은 질문을 받았음에도 공개하지 않았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 들어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써서 올리던 중에 급하게 이번 이야기로 전환하여 집중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이미 위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위 두 개의 작품 중에, 하나는 조각상이고 하나는 그림이니 달리 무슨 부연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미켈란젤로의 <성모 조각상>엔 오래 전부터 나름 관심이 있어 자료도 제법 모아둔 것이있다. 가히 소설로 써보고 싶을만큼 매력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이젠 그 이야기를 해볼 때가 된 것 같다.
<겐트의 제단화>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과 할 이야기는 실로 엄청나다고 하겠다. 항상 마음에 두고 아무 때고 하면서 미루고 미뤄왔던 소재였다. 이것도 이젠 그 이야기를 짧게 추려서라도 해볼 때가 된 것 같다.
조물주의 크신 배려로 만약에 내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미술품을 마음대로 골라 가질 수 있다면, 사실 난 <모나리자>엔 관심이 별로 없다. <천지창조>는 그냥 거기에 두고 교황님이나 보시라 하겠다. 하지만 이 그림만은 가지고 와서 우리 동네 인근의 커다란 농협 창고 하나를 빌려서 전시공간 조건을 갖춘 후에 공개하고 싶다. 어른들에겐 약간의 절차를 거치게 하겠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겐 24시간 언제나 무제한 열린 화실로 제공하겠다. 그림이 상당히 크고, 워낙 볼거리가 많고 서사가 길게 많이 있어서 아주 훌륭한 그림 놀이터가 되지 싶다. 내가 우리 고장과 대한민국의 후손들을 생각하며 착안해 낸 열망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그만큼 내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림은 <겐트의 제단화>이고, 건축물은 언제나 오로지 로마의 <판테온>이다. 내가 직접 가이드 해주고 싶은 도시는 <이스탄불>, 언제까지고 나와 아내가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는 <피렌체>, 손녀들과 함께하는 방학 여행은 자나 깨나 무조건 <몰타>라고 하겠다. 오매불망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워낙 역사와 미술과 건축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살다 보니 가끔 주변에서 다양하게 질문을 받는다.
그중에 으뜸이 여행하기 좋은 국가나 도시에 관한 것으로 어디 어디가 왜 좋으냐 하는 질문이다. 다음은 어떤 그림을 좋아하느냐 하는 내 미술적 취향을 물어오는 질문이다. 아마 남들 보기에도 내 미술적 취향이 보편타당한 주류파가 아닌 비주류파로 보였던 듯하다.
그런 질문이 많이 이어진다고 생각되어 언젠가 결국 답변 삼아서 (베벡의 벅스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림 베스트 5’ 뽑아서 소개하는 글을 시작했었다.
(베벡의 벅스처럼)은 아내와 내가 힘든 시절을 극복하면서, 살다가 나이들고 여유가 좀 생기면 어디 변두리에 공터가 너른 낡은 주택을 구해, 우리 손으로 직접 수리해서 소박한 카페를 한번 해보고 싶어 가지게 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우리 부부의 오랜 바램이다. 그때는 카페 안쪽 구석에 들어앉아 노트북을 가지고 얼마든지 글을 쓰면서 살게 해 주겠다는 마님의 약속이 있으셨다. 바로 그 카페에 인테리어를 대신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5 작품을 모조품이든 모사품이든 아니면 직접 복사를 해서라도 내 걸 계획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는 유화까지 제법 그림을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었기에 실제 도전해 볼 생각이다. 문제는 베스트 1인 <겐트의 제단화>만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크기가 상당히 크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그래도 어딘가 벽면 하나를 통 털든가, 아니면 오픈 방식으로라도 어떻게든 들여놓아야 한다고 애초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방문에서 실제로 명화를 복사해 주는 공방을 부러 찾아갔었는데, 정말로 완전 똑같은 복제품이 만들어져 시판되고 있는데, 그런데 가격이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엄청났다. 혹시 알리 익스프레스 같은 데서 그런 짝퉁은 안 팔려나? 다섯 작품은 어떻게든 살 의향이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 다섯 번째’로 고른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작품 <로레토의 성모(Madonna of Loreto)>를 아주 긴 장문의 논문처럼 써서 블로그에 올렸었다. 주변에서 내 그림 취향에 대해서 찬반양론이 거의 비슷하게 나왔다. ‘취향이야 완전 내 맘대로 아닌가?’하면서 말이다.
다음으로 준비한 ‘내가 좋아하는 그림 네 번째’는 티치아노(Tiziano Vecellio)의 작품인 <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로 어느 정도 분량의 글을 써 둔 상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새로운 여행 일정이 촉박하게 생기는 바람에 다녀와선 언제든 제대로 다시 이어가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녀와서는 정작 여행 이야기 먼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았을 때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니 먼저 하고픈 이야기들의 선후가 바뀌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방치를 넘어서 폐기 순서 목록에 들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로즈 발랑(Rose Valland) 여사의 목숨을 건 거룩한 헌신과 희생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서 되살릴 수 있었던 6 만점이나 되는 미술품 목록에 바로 미켈란젤로의 <성모자>와 <겐트의 제단화>가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네 번째. 세 번째. 두 번째 좋아하는 그림을 무작정 일단 뛰어넘어 우선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인 <겐트의 제단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부랴부랴 지금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자료들을 꺼내서 다시 살피고 정리하면서 이번 글을 시작하고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역시나 좀 길어질 것 같다. 가운데의 세 작품은 다음에 다시 기회를 보기로 하면서 말이다.
아참 참 참 참............ 여기에서 말하는 미켈란젤로의 <성모자 조각상>에는 한가지 전제가 꼭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성모자 조각상> 하면 의례히 <피에타>를 떠올린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만든 <성모자 조각상>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그래서 미술계에서는 그 조각상 마다 이름을 영문으로 제각각 부연 설명대신 덧붙인 이름으로 달리해서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미켈란젤로의 성모자 조각상이 오로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Pietà)> 뿐이라고 생각하는 불공평한 편견에서 일단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고 나면 여기에서 살짝 스스로 벗어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론다니니의 피에타(Pieta Rondanini)>를 외치는데,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엎그레이드 된 수준 정도를 인정해 줄 수 있다. BUT....... 그게 또 다가 아니다. 새롭게 제기한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과거에 그 조각상이 로마의 론다니니 궁전 중정에 전시되었던 이유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여 둘 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라고 불렀는데, 하나는 80% 이상의 공정을 거친 약간 미완성 작품으로 현재 피렌체 오페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얼핏 이제 막 뼈대구조의 완성단계를 겨우 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조각상은 현재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에겐 다 같은 <론다니니의 피에타>다.
그럼 여기까지냐?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세상에 나온 미완성 상태의 조각품들이 여기 저기 한참 더 널려있다. 그것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 진품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많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하지만, 온전하고 확실한 미켈란젤로의 ‘성모자 조각상’이 확실한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아닌 한참 떨어진 벨기에에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그림과 건축을 포함하는 모든 작품은 완전하게 모두 이탈리아 영토 안에 있다. 그게 확실한 정설이다. 여기 딱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술가이다. 본업은 조각이었으며 부업으로 회화와 건축에 일부 관여를 했다. 그는 이탈리아인으로 외국을 나가 본 기록이 없을뿐더러, 가히 교회(교황청)에 속한 매우 귀중한 무형의 재산이었는지라 작품 활동뿐만이 아니라 거의 인생 자체가 교황청 소속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데 작품 딱 하나가 외국으로 반출되었다.
이 반출 과정에 수많은 억측이 난무하다. 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래서 그런 내막에 대해 이참에 살짝 언질 해 주고 싶다. 그 정도는 되어야 미켈란젤로나 피에타(성모자 조각상)에 대해 어느 정도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로마 바티칸에 있는 성모자 조각상은 ‘피에타(Pietà)’라고 이름을 붙여 구분하게 했고, 이번에 거론할 성모자 조각상에는 현재 조각상이 놓여있는 지역명을 붙여서 ‘브뤼셀의 성모자 조각상(Madonna of Bruges)’이라고 구분해 부르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탈리아를 벗어나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현재 네덜란드 브뤼셀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이제 그 조각상이 유일하게 이탈리아를 벗어난 이야기를 시작으로 미켈란젤로와 반 아이크 형제와 모뉴먼츠 맨(The Monuments Men)에는 남성뿐이 아니라 여성도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먼 여행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첩(妾)은 다른 년이 첩질(妾)하는 꼴을 절대로 용납 못 해.’
이는 그저 지나가는 항간의 속설이 아니라 역사가 그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엄격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지금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첩은 프랑스이고 첩질하지 않을까 하고 의심되는 다른 첩은 독일이다. 지금 당장 등장하지는 않지만 당연히 있어야 하는 본부인은 그리스나 로마가 되겠다.
당연히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첩질(妾)은 예술과 문화재의 약탈을 가리킨다.
그런 이야기의 관점을 가지고 이제 본격적으로‘프랑스 예술품을 지켜낸 한 여인’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프랑스 불멸의 영웅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에서 출발해 프랑스 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그는 유럽의 경쟁상대국들을 삽시간에 휩쓸어 정복해버렸으며 아프리카 대륙까지 진출했다. 하나 남은 숙적 영국을 정복하기에 앞서 고립시키기 위하여 러시아 정벌을 먼저 감행했다가 그만,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다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지금 패악을 저지르는 미국의 한 꼴통(?)처럼 오로지 ‘퍼스트 프랑스(First France)’를 외치며 미친놈 거시기처럼 전쟁놀이를 즐겼지만, 뒤로는 드농(Dominique Vivant Denon )남작을 앞세워 온 유럽과 이집트의 귀중한 문화재와 예술품을 마구잡이로 약탈해갔다. 이렇게 무자비한 강대국의 총과 칼을 앞세운 약탈은 아마도 로마가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약탈해다가 제국의 번영을 누리고 구가했던 첩질(妾)에서 배워 답습하기 시작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나폴레옹의 파렴치한 약탈의 결과로 바로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을 남긴 것이다. 나폴레옹이 패하자 승전 연합국이 모여서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영토를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배상을 논의했지만, 속으로는 온통 전리품으로 나폴레옹이 첩질(약탈)해 온 문화재들을 어떻게 하나라도 더 첩질해 갈까 하나같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대로 해결될 리가 만무했다. 2백 년이 지난 지금 현재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나폴레옹의 첩질 문제가 산더미처럼 숙제로 남아 쌓여있으니 말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연합군 승전국으로 나선 국가들이 하나 같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첩질(妾)의 도사들’ 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미 ‘내로남불’의 달인들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첩질(妾)을 해 본 년은 절대 다른 년의 첩질(妾)을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 차라리 죽어서 안보면 모르겠지만 절대 그 꼴은 못 봐.’
연합국의 내로남불 난리법석 덕분에 팔자를 고친 것은 패전 당사자인 프랑스였다. 대충 얼버무려 버티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이적지 소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처지에 가장 비싼 입장료를 이번에 또 인상했다.
프랑스가 점차 나폴레옹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았지만, 정작 유럽의 주축 세력들이 연합군 승전국들은 여전히 내로남불 타령을 일삼으며 아주 복잡하고 혼잡한 난세로 접어들었다가 기어코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을 계기로 유럽내전(제1차 세계대전)에 빠져들었고, 이 전쟁은 끝내 추악한 결과를 내고 말았는데 결론은 독일의 독박(?)으로 끝이났다. 나폴레옹 때문에 채무자로 빚 독촉에 시달렸던 프랑스가 이번엔 채권자가 된 것이다. 프랑스가 앞장서서 피해배상금을 몰상식할 정도로 뜯어냈으며, 지체 배상금에 이자를 따블에다 따따따따블로 부과했다. 독일은 결국 파산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대체 배상을 요구하면서, 영토를 빼앗았고 공장을 뜯어갔다. 독일은 그냥 땅을 파먹으면서 연명해야만 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럴수록 프랑스는 풍요의 문화생활을 누렸다.
다들 독일이 회생불능의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곧 달겨들어 난도질을 한 후에 남은 영토를 분할해 차지할 생각들 뿐이었다.
그때, 그 버려진 죄악의 독일 땅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렀다가 낙방한 사내는 그곳에서 유럽 상류사회의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생활 모습을 목격했다. 하루 종일 삽질과 괭이질을 해도 저녁에 모여든 가족들이 삶은 감자 몇 개로 허기를 모면하기 힘든 독일의 비참한 생활 모습과 너무나 확연하게 비교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 사내는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고심을 시작했다.
유난히 정열적이며 강직한 연설을 잘하던 사내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시 예전처럼 강력한 독일(First Germany)을 재건하자고 열창했다.
이 모습은 영락없는 지금 미국의 꼴통(?)과 영판 닮았다. 하긴 그 꼴통의 근본이 독일 이민자 3세이니 아무렴 닮을만 하지 않은가? 하는 짓마다 ‘닮았다 닮았다’ 했더니 정말로 판에 박은 듯 똑같다. 제 핏줄이 독일인 이민자 자손인 처지로 미친놈처럼 ‘이민자 추방’을 외치고 있으니, 언제 원주민 인디언 후손으로 족보를 하나 사서 조작(족보세탁)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 독일 오리지널 꼴통(?)이 사람들을 모아 나치당을 창설했다.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으로 당수에 오르더니 이내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바로 히틀러(Adolf Hitler)가 바로 그 사람이다.
아사 직전의 독일 국민들은 이 희대의 꼴통(?)에게 빨려들었고, 그에게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전 유럽을 향해 ‘전쟁 배상 무효’를 선언했다. 배 째라 전략으로 바뀐 것이다. ‘받아가려면 와서 직접 가져가’라면서 오로지 한 길인 군비증강을 통한 군국주의로의 재무장을 서둘렀다. 돈 받으려고 사람을 파견했던 유럽은 그야말로 경악하고 말았다. 지난 전쟁(1차대전)보다 더 강력해진 독일의 군사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유럽연합은 모여서 고민을 했으나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서 일단은 독일을 어르고 달래는 작전으로 돌입했다. 하지만 이것은 히틀러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히틀러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전 유럽을 주무르는 상황에까지 도달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니꼬우면 한 판 붙어보든가?’
가장 크게 기절초풍한 것은 당연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였다. 그동안 해댄 첩질(妾)이 얼마였던가?
이내 프랑스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죽자사자 연합전선 구축에 열과 성을 쏟았다. 혼자는 상대할 자신이 없었던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함께 맞서 싸우자고 나서는 국가가 없었다. 너도나도 먼저 독일과 평화협정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은 온다. 반듯이 쳐들어 온다. 그동안 프랑스가 했던 첩질에 이자에 이자를 따블을 넘어 따따따따따블을 붙여서 싸그리 빼앗아 갈 것이다.’ 그런 공포는 실제로 수많은 부자와 지식인들이 파리를 떠나 중립 국가로 도망을 치는 당대의 신드롬을 만들어 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이번엔 프랑스에도 한 사내가 나타났다.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을 독일(히틀러)의 첩질(妾)에서 구해낼 은총의 사도라 불릴만한 사내가 이미 파리에 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쯤에서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나선 이번 여정이 ‘프랑스 예술품을 지켜낸 한 여인’의 행적을 따라가 보는 여행이었는데 지금 느닷없이 ‘파리의 남자’를 거론하고 있으니 혹시 착각하여 남녀를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하는 물음말이다.
아니다.
‘프랑스 예술품을 지켜낸 한 여인’의 행적을 따라가는 여행이 분명하고, 그 여인의 이름이 로제 발랑(Rose Valland. 영어 표현 로즈 발란드) 이라고 분명하게 이미 밝혔었다. 다만 그 여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혹은 가장 중요하게 한 남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파리의 남자’라고 내가 이름을 붙여준 사람이라는 말이다.
‘1939년 9월 1일’이라고 마지막 공란을 채움으로써 이제 모든 작업에 비로소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손을 들어 방금 써 내려간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여인은 다른 손에 든 낮에 마지막으로 올라온 보고서 종이와 목록에 적힌 내용이 맞는지를 글자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다시 체크했다. 목록에 적혀있는 문자 하나, 기호 하나, 숫자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녀는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놓인 다른 두세 가지 자료와 확인을 끝낸 여인은 마지막으로 위쪽에 펼쳐 둔 아주 무거워 보이는 두꺼운 책 목록의 같은 제목의 이름 앞에 적힌 숫자와 기호로 된 일련번호를 손으로 짚어가면서 꼼꼼하게 확인했다. 정확하게 모두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 여인은 긴 호흡과 함께 두꺼운 장부 책을 덮었다.
표지에는 위쪽에 커다랗게 ‘루브르 미술품 대피 목록’이라고 적혀있고, 아래쪽으로 ‘감수자 앙리 베른’이라는 이름과 함께 서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고서의 책임자는 앙리 베른이었지만, 그 내용을 하나하나 모두 확인해가며 정리해 기록한 사람은 바로, 지금 다시 새로운 장부 여럿을 기록하고 있는 여인 로즈 발랑(Rose Valland) 이었다. 7년 전에 입사하여 처음 맡겨졌던 업무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같은 목적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따라, 더욱 세밀하고 정교해진 방식으로 여러 개의 새로운 장부를 다시 만들어 왔고, 지금 막 마지막 기록을 마쳤던것이다.
발랑은 손가락으로 방금 마지막으로 적었던 새로 만드는 장부 기록의 잉크가 말랐는지를 확인했다.
기호와 숫자로 된 일련번호가 먼저 적혔고, 미술품의 제목란에는 <사모트라케의 니케(Nike of Samothrace)> 라고 써 있었다. 1863년 그리스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굴되었고,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계단 중간 전시라고 적혔다. 특이 사항란에는 길이는 3.28 미터, 전체 높이는 5.12 미터로 운송이 불가해 받침대를 제거하고 높이 2.75 미터의 입상만 1.025파운드(465kg) 상태로 반출. 복구 작업 이후론 날개 분리 불가능 상태. 이송에 절대 취약한 상태. 극도의 운송 조건 요구라고까지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모든 조건은 부득이 한 상태에서 이송을하게 되었지만, 언제고 다시 본래의 자리에 무사히 돌아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목록의 기록자인 발랑으로 하여금 가장 곤혹스럽게 몇 번이고 다시 확인을하게 만든 것은, 최종기록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받아 든 보고서의 담당 큐레이터와 운송자의 이름 때문이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조각상은 루르르 박물관을 떠나 샹보르 성(Château de Chambord)으로 대피시켜야 하는 마지막 미술품이었다. 그 시간이 바로 오늘이다. 그 미술품 수송단의 관리 책임 큐레이터와 트럭과 운전자는 사전에 이미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쳐 확정 배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수정되어 올라온 보고서엔 큐레이터로 앙드레 데자루아(André Dezarrois.1889-1979,)와 운전기사로 . 가명)가 새롭게 배정되었다고 올라왔던 것이다.
발랑은 크게 놀랐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분들이 갑자기......’라고 생각은 되었지만, 지금 자신들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번거로운 확인 절차를 생략하기로 하고 올라온 보고서대로 익히 잘 알고 함께 지내온 사람들의 이름을 목록에 공손하게 적어 넣었다.
‘이렇게 모두 끝나는 것인가?’
발랑은 네 권의 목록 책을 기름이 발라진 포장지로 싸서 끈으로 단단하게 묶었다. 이것으로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업무를 모두 마친 것이다. 이제 이것을 국립박물관장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창가로 갔다. 커튼을 확 열어 재쳤다.
그녀가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는 쥬 드 폼 박물관(Musée du Jeu de Paume) 사무실 창을 내다보면 온통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이 빼곡하게 창문을 가득 채운다. 그야말로 코 앞이다. 다만, 잘 다듬어져 조성된 가로수 숲으로 인해 광장과 분수대의 모습은 당장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뾰쭉 솟아있는 오벨리스크의 모습이 오늘도 여전히 반가웠다. 가끔은 그 오벨리스크가 자신의 수호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곧 연락이 오면 자신은 미술품 목록으로 만든 장부를 들고 루브르로 국립박물관장을 만나러 가야 한다. 지척에서 늘 함께하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게 된 상황에 내일 다시 이곳에 출근해서 지금처럼 오벨리스크를 또 보게 될지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할 수가 없다. 사무실에 더는 남겨둘 것도 없다. 며칠 전부터 사무실에서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치웠기에 오늘은 포장해 둔 장부만 들고 나가게 되면, 이곳 사무실에 더는 자신의 어떤 흔적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또 철저하게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모든 것은 아주 엄정한 사전 규칙에 따라 비밀리에 진행해 온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아주 오랜 먼 여정이었다. 이제 드디어 모두 끝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절대로 생기지 말았어야만 하는 일이었고, 따지고 보면 이 프로젝트는 불합리한 아주 슬픈 도전이었던 셈이다.
오늘 사무실을 나서면 콩코드 광장에 잠시 멈춰 서서 제대로 광장을 한 번 둘러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벨리스크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동안 고마웠노라 인사라도 전하고 싶어졌다.
똑 똑.
아니나 다를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은 오베르 펠리티에(Aubert Pelletier)였다. 시간에 맞춰 자신이 직접 공원을 가로질러 루브르로 가겠다고 했지만, 그쪽에선 시간에 맞춰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었다. 사무실인 쥬 드 폼에서 루브르까지 거리는 약 1km 정도로 잘 정돈된 공원을 가로질러 다녔던 익숙한 길이지만, 오늘 그녀가 가지고 가야 하는 장부가 대단히 중요한 때문에라도 사람을 보내주겠다는 것이리라. 그런 중요성으로 그녀가 순순히 따라나설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혹 펠리티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오십줄을 넘긴 중년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들어왔다.
몹시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간 발랑이 펠리티에와 라 비즈(La Bise. 프랑스식 볼 뽀뽀)를 했다.
‘이게 얼마만이예요? 펠리티에. 어쩌면 당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어요.’
‘그렇게 되었네요. 한동안 지방 출장이 계속 이어져서 쥬 드 폼에 들릴 짬이 없었습니다. 발랑. 별일 없었지요?’
‘그럼요. 언제나처럼 사무실에 쳐박혀서 오로지 장부 정리에 매달리는 것 말고는 제가 달리 하는 일이 없느니까요.’
‘아니예요. 정말 크고 중요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수고많으셨어요.’
‘사실은...... 낮에 올라온 서류를 보고 정말 많이 놀랐어요. 바로 연락을 취해 확인해보려고도 했었지만...... 상황이 비상시기인지라 부득이한 어떤 사정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데자루아 관장님하고 펠리티에가 함께 떠나게 되나요?’
‘아침에 결정되었습니다. 본래 배정되었던 사람들은 발랑도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운송 담당 큐레이터와 운전기사는 부부예요. 그런데 어제 어머니가 지병으로 갑자기 운명하셨습니다. 남겨진 고령의 아버님께선 한쪽 다리를 잃으신 참전 용사이지요. 상황이 그쯤 되고 보니 아버님을 두고 가기도 그렇고 모시고 가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번 임무가 석 달이 걸릴지, 일 년이 거릴지, 10년이 걸릴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실은 큐레이터인 아내도 임신 중이었답니다. 베른 관장께서 다른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하셔서 결국......... 저희가 맡기로 하였습니다.’
‘데자루아도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는 대로 떠난다고 했었는데 정말 이대로 떠나는 것인가요? 그럼 이제부터 여기 쥬 드 폼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건 베른 관장님께 여쭈어 보아야 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젠 출발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가면서 이야기 나누기로 하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역시나 펠리티에 다운 모습이었다. 늘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공과 사가 분명하고 속으로 알고 있어도 드러내기를 지극히 조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아직도 궁금하기로 조자르 부관장과 펠리티에가 어떤 인연을 가진 사이인지가 여전히 궁금했다. ‘언젠가는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가 되돌아오는 대답의 전부였다. 7년 동안이나 말이다. 슬금슬금 또 장난기가 돋아났다.
‘조자르 부관장님은 여전히 바쁘시겠지요?’
발랑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눈초리로 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던 펠리티에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 기다리고 계시니 직접 물어보시지요?’
말을 마친 펠리티에가 발랑에게서 넘겨받은 끈으로 단단히 묶은 장부 뭉치를 품에 안고 복도를 가로질러 나섰다.
주 드 폼 미술관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 콩코드 광장 어귀에 서 있는 낯익은 차량은 바로 프랑스 국립박물관장 전용차였다. 운전석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펠리티에가 직접 운전을 하고 온 모양이다. 펠리티에가 조수석 문을 열어 발랑을 타도록 안내했고 들고 있던 장부 묶음을 그녀에게 넘기고 나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량은 콩코드 광장을 가로질러 세느 강변 도로를 향했다.
고개를 돌려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는 발랑의 표정을 살피더니, 차량의 진행 방향을 바꿔 천천히 콩코드 광장을 크게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발랑의 표정에서 그녀의 오늘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속내를 읽었던 듯 보인다.
딱히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어도, 뭔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감을 보노라면 삼촌이나 이웃집 아저씨 같은 남다른 푸근함이 은근하게 느껴진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제껏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전부가 독일어가 아니었던가? 그랬다. 프랑스 파리의 한복판 쥬 드 폼 박물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지금까지 줄 곳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 대해서는 차차 밝혀지겠지만 말이다.
발랑(Rose Valland)은 쥬 드 폼에서 보낸 7년 동안 온갖 힘든 역경을 거쳐오는 동안에 창밖으로 눈만 돌리면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주고 위로해준 오벨리스크를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수호성인처럼 생각해 왔었다. 어쩌면 이제 작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애써 참고 있었다.
‘발랑. 당신은 남들이 할 수 없는 아주 큰 일을 잘 해내신 거예요. 오랫동안 쥬 드 폼이 당신의 집이었고 콩코드 광장이 쉼터였을 거에요. 앞으로 일에 대해서는 베른 관장님이나 조자르 부관장님과 상의하실 일이겠으나, 지금 발랑의 표정을 보자니 감히 내가 나서서 이 말만은 먼저 해 드리고 싶어요. 당신은 내일 아침에도 쥬 드 폼으로 출근하셔야 해요. 큐레이터로 발랑의 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요. 쥬 드 폼은 여전히 당신을 필요로 해요.’
‘데자루아(André Dezarrois) 관장님도 떠나신다면서요? 그럼 누가 실무 책임을 맡느다는 말이지요?’
‘데자루아는 상이용사예요. 전쟁에서 다친 상처가 재발해서 부득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는 거예요. 저와 함께 샹보르성(Château de Chambord)까지 동행하고 나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큐레이터에게 업무 인수를 하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치료에 전념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고 상처가 다 나으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고요. 차후의 일 처리에 대해서는 베른과 조자르께서 벌써 계획을 세우셨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꼼꼼하고 멀리 내다보는지는 발랑도 잘 알잖아요?’
‘그럼 펠리티에(Aubert Pelletier) 당신은요? 당신까지 훌쩍 떠나버리고 나면 저는 이제 누구한테 독일어를 배우지요?’
‘아하? 발랑은 독일어 공부가 걱정이었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이 평소에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은 당신이 독일어를 하는지 모를 뿐이지, 당신의 독일어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완벽해요. 처음부터 당신에게 남들 모르게 독일어를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던 조자르가 사용하는 독일어보다 당신의 독일어 언어력이 훨씬 높아요. 당신만 모르고 있는 거예요. 궁금하면 오늘 직접 조자르에게 왜 독일어를 공부만 하게 했는지, 남들 앞에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냐고 독일어로 따져 불어 보세요. 놀라서 이젠 이유를 말 해 줄지도 모르니까요.’
‘새로운 큐레이터가 오면 데자루아는 고향으로 가고, 펠리티에는 계속 샹보르에 머무시나요?’
‘새로운 운전 기사도 샹보르에 준비되어 있답니다. 저는 이번 여정만 수행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이제까지와는 사뭇 달라지겠지만, 파리 외곽의 시골에 머물면서 농장일을 시작할 거예요. 필요할 때만 파리에 들어올 것이고, 아마도 앞으로는 발랑이 쥬 드 폼에 계속 머물면서 상부의 베른이나 조자르와 연락하는 업무를 제가 맡게 되지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이 말씀은 앞으로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게 될 것이고, 더 많은 위험이 따르게 되어 조심해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이미 상당히 위험한 지경에 도달해 있는 거예요. 우리끼리 서로 믿고 의지하고 모든 위험과 난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누히 당부를 들어왔고 항상 각오하고 있어요. 전 전혀 두렵지 않아요. 펠리티에가 돌아오신다니 그래도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광장을 한 바퀴 돈 차량은 다시 방향을 틀어 루브르로 향했다.
본래 이 광장은 루이 15세의 거대한 기마 조각상을 설치하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이었다. 하여 1772년에 완공된 애초의 광장 이름은 루이 15세 광장(place Louis XV)이었다. 하지만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92년 8월 11일에는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철거되어 주조공장으로 옮겨진 뒤 분해되었다.
대신 이곳 광장에 단두대가 설치되었고, 1793년 1월 21일에 루이 16세와 10월 16일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물론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부터는 혁명 광장(place de la Révolution)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830년에 벌어진 7월혁명을 기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의 콩코드 광장(프랑스어: Place de la Concorde )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지나간 어두운 역사를 뛰어넘어 평화적인 사회통합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프랑스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광장의 중앙에는 22미터 높이의 콩코드 광장 오벨리스크(Obélisque de la place de la Concorde)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제국주의에 의한 미술품 약탈의 상징처럼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들이 유럽에 퍼져있는 상황에서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조금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여기 콩코드 광장 오벨리스크(Obélisque de la place de la Concorde)의 본 이름은 룩소르 오벨리스크(obélisque de Louxor)로, 이집트 룩소르의 아문 신전에 서 있던 오벨리스크로서 3300년 전 람세스 2세 시대에 축조된 오벨리스크를 프랑스인 장-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 것을 기념하여 이집트가 프랑스에 기증한 것으로 1836년 콩코드 광장에 세워졌다. 그러니까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적 약탈 문화재가 아니라, 감사한 일로 기증한 문화재라는 뜻이다. 하긴 이집트가 그 아무리 많은 위대한 고대 이집트 문화재를 가졌었다 해도 고대의 언어인 상형문자를 해독하지 못하여 유물 발굴일뿐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로제타 스톤을 발견으로 해서 상형문자가 해독됨의 결과로 하여 이집트 문명과 문화재에 대한 연구와 가치가 더욱 크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의 표시로 프랑스에 기증받아 소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여 당연하게 이 오벨리스크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이자 거대한 해시계 바늘 역할도 하고 있다.
오벨리스크의 4면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람세스 2세의 카르투슈도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파라오가 아몬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사실 프랑스가 이집트로부터 기증받은 오벨리스크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룩소르 아문 신전의 오벨리스크 두 개 가운데 오른쪽에 서 있던 것만 프랑스로 운송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프랑스에 소유권을 둔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1981년 9월 26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이집트에 남아 있는 오벨리스크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이집트에 공식 반환하게 되었다. 이유는 전쟁을 통한 강대국들의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던 시점에서, 반환이 아니라 포기함으로써 어느정도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프랑스의 고도 전략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오벨리스크를 가지지 못했다면 절대로 강대국(제국)이라 할 수 없다’는 속설이 항간에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로마제국에서부터 생겨난 미신 같은 불문율이라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오벨리스크는 고대 로마시대에 유독 많이 약탈 반출되었으며, 근대 식민지 시기에까지 거듭 유럽으로 반출되었다.
오벨리스크(ὀβελίσκος, obelisk)는 고대 이집트 왕조에서 태양 신앙을 상징으로 세웠던 거대 기념비로, 주로 파라오의 통치 기념제 때에 신전 문 앞에 한 쌍이 건립되었다.
신격화된 파라오의 비문을 가져다 전시한다는 것, 지상 최고의 강대국(제국)을 상징하는 위대한 행위였던것이다.
로마제국이 약탈해 이탈리아 로마에 설치한 오벨리스크가 13개, 약탈이 아닌 기증의 절차로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 설치된 오벨리스크가 1개, 대영제국 시기에 약탈해 템즈 강변에 세운 영국 런던의 오벨리스크가 1개, 신흥 강대국이 기어코 훔쳐다 세운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의 오벨리스크가 1개, 동로마 제국이 약탈한 터키 이스탄불의 오벨리스크가 1개가 모두 이집트에서 반출된 것들이다. 정작 이제 이집트에는 서너 개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하여 꾸준히 약탈문화재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소유자들 면면을 가만히 살펴보라. 돌려줄 놈(?)이 하나나 있는가?
참고로,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오벨리스크인 미국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 오벨리스크인 기념탑은 진품이 아니라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모방하여 만든 짝퉁이다. 보스턴의 벙커힐 기념탑 역시도 모방 짝퉁이다.
(특급 비밀 공지사항.)
이 짝퉁 사실을 절대로 트럼프가 알게하면 안된다. 언제 모든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짝퉁 두 개를 내줄테니 이집트의 원본과 바꾸자고 떼를 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게 아주 비싼거라거나, 장차 천문학적 가치가 될 것이라고 해 봐라. 또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며 이탈리아가 소장한 오벨리스크의 절반을 당장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른다.
발랑을 태운 자동차는 천천히 세느강변을 따라 올라갔다.
강 건너 우뚝 솟은 에펠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간으로 보아 머지않아 에펠탑 뒤로 붉게 노을이 물들 것이다. 지금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수선한 위급상황이나 국가의 정세와는 상관없이 오늘도 아름답고 낭만적인 또 다른 새로운 노을이 펼쳐질 것이다. 그제도 어제도 또 오늘도 파리는 아름다웠다. 과연 내일의 파리가 어떨지는 당장 장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풍경이 변했다.
세느강(La Seine)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카루젤 다리(Pont du Carrousel)가 지금 한창 막바지 공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 여기저기 철제와 목제 자재들이 산처럼 쌓였고 장비들이 너저분하게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나르고 화물 차량에 싣고 있다. 완성을 거의 목전에 둔 탓에 분주함과 어수선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급격하게 파리로 유동인구가 몰려들었고 차량이 증가하게 되지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1937년 기존의 카루젤 다리를 철거하여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고자 했고, 이제 곧 다가올 1940년 봄이 완공 예정이었다.
독특한 세 개의 아치로 구성된 우아하면서도 고전적인 모습의 새로운 카루젤 다리(Pont du Carrousel)는 배경과 다름없는 루브르 박물관과 썩 잘 어울리는 모습 때문에 차라리 그냥 루브르 다리((Pont du Louvre)라 부를 걸 그랬나 싶을 정도로 원숙한 고전적 다리의 전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통행이 차단되고 있는 카루젤 다리에서 차가 좌회전을 했다.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이 가로막고 서있다. 여기서부터는 루브르 박물관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커다란 타원형의 구멍이 세 개가 놓였고, 양쪽 옆으로 작은 구멍 두 개가 마치 성벽같은 건물더미 아래 뚫려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날을 이 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루브르궁전과 외부세계인 세느강을 연결해 주던 궁전 요새의 출입문 중에 하나였다. 그때마다 발랑은 어쩜 이곳이 루브르궁전 전체를 통 털어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장소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늘 인파로 붐비는 지역이다 보니 주변을 제대로 살펴볼 기회가 없어서일 뿐이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게 된다면 은근하게 푸른 빛과 회색의 오묘한 조화를 감추듯 드러내는 건물 전체의 분위기와 기둥 하나 창문 하나마다 더해진 운치와 정교함과 새겨진 부조들이 뿜어내는 고즈넉한 향취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 늘 생각하고 있었다.
라 트레무아유 파빌리온(Pavillon de la trémoille)의 본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철거하기 전의 카루젤 다리를 산책 나서서 거닐면서 자주 그려보았던 상상이었다.
지금은 라 트레무아유 파빌리온을 니나 루브르 안쪽으로 들어서도 왼편으로 드넓고 환하게 트여 튀릴리 정원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지만, 파리 코뮌 당시 벌어진 방화사건으로 튀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이 불에 타 철거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전부 하나의 아주 커다란 직사각형 성채나 마찬가지였다. 거대하고 웅장한 직사각형 요새로 꾸며진 거대 성채에 드나드는 몇 개의 출입문이 설치되었고, 라 트레무아유 파빌리온(Pavillon de la trémoille)은 그중에 하나로 세느강과 연결되는 아주 중요한 통로였던 것이다. 방화사건으로 튀릴리 궁전은 전소되었고, 루브르궁전의 크기는 대략 1/3 이상이 화마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여기 라 트레무아유 파빌리온의 중요성은 알려진 그 이상이었다.
세느강을 통해 파리를 찾는 루브르궁전에 용무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을 이용하였고, 궁전에 사용되는 모든 외부 반입 물자가 모두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루브르궁전을 지키는 병사들이 출퇴근을 하면서 무기를 지급하고 반납하는 병장기 관리소와 무기고가 이곳이었다. 루브르란 요새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핵심 구역이었던 것이다.
지금 현재는 루브르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입장권을 판매하는 마리니 매표소(남쪽)가 위치해있다. 마르키 드 마리니가 지금의 세 개 터널 형태의 마차길로 통로를 확장 시키고 양쪽 옆으로 사람이 드나드는 작은 문을 만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대쪽 매표소(북쪽) 이름은 생 니콜라스 매표소다. 덜 알려진 지하철과 연결되는 지하 통로에도 매표소가 설치되어 있다. 가장 한가한 장소이자 가장 쉽게 박물관에 입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루브르(Musée du Louvre)는 사흘째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바리케이트가 쳐졌으며 모든 문은 굳게 걸어 잠겼고 보인 인력들에 의해 외부인들의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안쪽의 일부 드농관 출입문 등을 통해서만 철저한 감시와 단속하에 커다란 수송차들만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흡사 철저하게 완전 차단된 고립무원의 요새 같았다.
루브르 전체가 굳게 잠겨 통제된 상태라 바리케이트가 쳐졌고, 정복 차림의 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루브르박물관장 전용차량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 결코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위병 책임자가 다가와 운전석의 펠리티에를 확인했다. 발랑도 안면이 있는 책임자였다. 바리케이트가 치워졌고 길이 열렸다.이제 라 트레무아유 파빌리온을 지나면 차량은 우회전을 해서 루브르 박물관의 행정 업무처이자 박물관장실이 있는 드농관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다. 지난 7년 동안 무수히 드나들었던 아주 익숙한 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어?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펠리티에가 운전하고 있는 루브르박물관장의 전용차는 지금 좌회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일상적이었던 당연한 기대는 한 순간에 모두 어긋나고 있었다.
‘여기는 에콜 뒤 루브르(École du Louvre)인데?’
지금 로즈 발랑의 따가운 눈초리가 뒤통수에 쏠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펠리티에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차를 몰고 앞으로 나아갔고, 곧 루브르 박물관과 길게 회랑으로 연결되어있는 건물의 끝자리에 위치한 출입문 앞에 차를 멈추었다.
하지만 정작 발랑이 더욱 놀란 것은 차가 멈춘 후의 일이었다.
그곳에는 벌써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가 다가와 발랑이 타고있는 차의 문을 열어주었는데, 그 사람이 다름아닌 쥬 드 폼 박물관의 관장이자 수석 큐레이터인 앙드레 데자루아(André Dezarrois)였기 때문이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로즈 발랑의 직속상관인 데자루아였던 것이다.
‘어서와요 발랑. 기다리고 있었어요.’
‘에콜 뒤 루브르에서 데자루아 관장님이 저를 기다리시다니요? 어제와 오늘은 아예 사무실에 나오시지도 않았잖아요? 저는 앙리 베른 관장님을 뵈러 온 것인데 여긴 에콜 학교잖아요? 박물관장실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들어가면서 차차 설명을 할께요. 모처럼 모교를 방문했다고 생각하고 진정부터 하도록 해요. 지금부터 우리는 함께 앙리 베른 관장님을 만나러 갈 거예요. 발랑. 혹시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앙리 베른 관장님은 루브르 박물관 책임자이지만 또한 프랑스 국립박물관장이기도 하면서 여기 에콜 뒤 루브르 미술학교의 교장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이예요. 우린 이제 에콜 미술학교 교장실로 앙리 베른 관장님을 만나러 올라갈 거예요. 그럼 이제 이해가 되지요?’
‘베른 관장님이 지금 교장실에 계시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런데 마당에 웬 차량이 저렇게 많지요? 손님들이 계시나요?’
‘파리 주변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 관장님들과 수석 큐레이터들이 모여 있답니다. 모두가 지금 로즈 발랑양을 기다리고 있지요.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라 혹시 놀라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미리 귀뜸 해 드리는 거예요. 무거울테니 장부 꾸러미는 제가 들도록 하지요. 올라갈까요?’
‘저를 기다린다고요? 왜요?’
대답대신 꾸러미를 넘겨받은 데자루아가 앞장서 계단을 올라갔다.
당혹해 하는 발랑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면서 펠리티에가 숙녀를 에스코트해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쥬 드 폼의 관장인 데자루아의 안내로 로즈 발랑이 에콜 뒤 루브르 미술학교 교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안쪽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던 노신사가 일어서며 장내에 외쳤다.
‘쥬 드 폼의 큐레이터 로즈 발랑양입니다.’
교장실의 실내는 꽤나 넓은편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가득찼다고 해야될 정도였다. 스무 명이 넘는 정장 차림의 신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에 들어서고 있는 로즈 발랑에게 묵례로써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경황 중에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몹시 당황한 발랑이 비틀거리자 데자루아가 슬쩍 부축하면서 앙리 베른 관장의 책상에 다가섰고, 품에 감싸 안고 있던 장부 꾸러미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펠리티에가 의자를 가져와 발랑이 앉게 해주었다.
‘발랑양의 헌신과 노력으로 마침내 이번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목록으로 옮겨 장부를 완성하였습니다. 7년 전의 계획서도 발랑양이 담당하였었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지금 이렇게 부득이한 상황에서 실제 실행으로 옮기게 되는 전 과정을 세세하고 꼼꼼하게 기록함으로써, 언제고 모든 사태가 잠잠해진 후에 다시 원상 복귀되는 과정까지에 필요한 분명한 기준과 보편타당한 정당성을 확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책상 위에 우리가 한마음 한뜻을 모아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할 목록이 마침내 완성되어 놓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그런 역사의 증인이십니다. 자신의 소망과 소신을 담아 서명란에 동참의 의사를 표현해 주십시오. 혹 차후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우려와 불안이 있으신 분은 서명하지 않으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사실만으로도 소중한 뜻만은 소중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앙리 베른 관장의 연설이 끝나자 실내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줄을 서듯 차례로 책상에 다가가 펼쳐져 있는 세 권의 장부 겉표지 너머의 서명란에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쓰고 서명을 남기기 시작했다. 겉표지에는 커다란 기호와 숫자와 암호화된 알파벳 표기가 전부였다. 서명을 위해 줄을 서서 움직이는 사람들 외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장내를 짓누르고 있었다.
파리 시내와 인근의 프랑스 국가가 감독하는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의 관장들이자 수석 큐레이터들이었다. 그런 만큼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술 문화계의 저명인사들이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다.
프랑스란 국가에는 정부가 있고, 그 아래 문화와 예술 분야를 담당하는 문화부 장관이 있다. 여기까지는 행정 관료라 하겠다. 다음으로 실무관리 차원에서 프랑스 국립박물관장이 있다. 지금 현재의 관장은 앙리 베른이다. 더불어 국립박물관장은 루브르박물관장과 룩셈부르크 박물관장과 국립 고대박물관(클뤼니 박물관 포함)과 함께 베르사유 성까지 책임지는 명실상부 프랑스 최고의 대부분 문화 기관들의 수장을 병행해 맡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 산하기관으로 쥬 드 폼을 비롯한 프랑스 전역의 국립 공립 미술관과 박물관들을 지휘 감독할 권한을 가졌다. 사설 미술관이나 개인 소장 중요 미술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지휘 감독 권한을 가진 대단히 중요한 자리라 하겠다. 문화부 장관 자리보다 훨씬 오르기가 더 어렵다는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가 국립박물관장 직책이었는데, 그런 막중한 권한의 국립박물관장이 지금 이곳인 미술학교 에콜 뒤 루브르(École du Louvre)의 학교장을 겸임하도록 되어 있다면, 아마도 거기엔 또 그럴만한 어떤 막중한 사연이 틀림없이 내재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해 보이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앙리 베른은 전임자인 장 콩스탕의 후임으로 1925년에 박물관장에 올랐으니 그간 15년 가까이 프랑스 문화예술계를 이끌어 왔던 것이다. 취임과 동시에 (르 플랜 베른)을 주도하였으며, 그 거대한 계획은 지금도 꾸준히 샐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원대한 그의 꿈이 담긴 계획은 본인의 대에 끝마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기에, 능력 있는 후임자를 맞이하여 지속적으로 실행에 옮겨 최종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자신도 이미 은퇴할 시기가 지났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서명이 거의 마쳐져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늘어선 줄은 없었고, 서너 명이 책상 주위에 몰려 있었다.
‘속보입니다. 라디오에서 지금 긴급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총무실 서기가 거세게 문을 두드리더니 왈칵 열고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는 교장실 책장에 올려져 있던 라디오를 틀었다.
‘긴급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폴란드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오늘 1939년 9월 1일 정오를 기해 독일 정부가 폴란드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긴급 속보입니다. 오늘 독일이 폴란드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기어코 올 것이라 우려했던 일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우리의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장내는 극도로 소란스러워졌다. 이미 오래전부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으나, 그래도 벌어지지 않기를 모두가 간절히 바랬었다. 최근 들어 벌어진 독일의 엄청난 군비증강 소식은 온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은 폴란드에게 전쟁을 선포했지만, 그들의 총 끝이 끝내 어디를 향할지는 프랑스인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아니기를 바랬다. 우려가 우려에서 끝나기를 바랬다. 하지만 현실적 위험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들은 사방으로 도움을 손길을 찾았고, 안전을 보장해줄 동맹을 찾기에 바빴다. 하지만 하나같이 그들도 제 앞에 빠진 코가 석 자이다 보니 동맹은 고사하고 각자 소생의 묘수 찾기에만 혈안이 되고 말았다. 결국엔 어차피 올 재앙이라면 그저 하루라도 늦게 오기를 기도할 뿐이 되고 말았다. 이젠 모두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그들에게 부여된 숙명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릇된 숙명일지라도 세상엔 그 숙명에 항거하고 도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숙명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꼭 있게 마련이다.
바로 지금 에콜 뒤 루브르 미술학교 교장실에 모여있는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부류였던 것이다.
앙리 베른 관장 뒤에서 이제까지 묵묵히 주변 상황을 주시하면서 침묵으로 일관해 오던 한 중년 남자가 책상 앞으로 나서면 손을 들어 좌중을 진정시켰다.
‘안타깝지만 예견했던 일이 방금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기어코 독일은 숨켜왔던 야욕을 마침내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난 사흘의 준비가 예비 되어 있었으니 나름 이 얼마나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앞당겨 사흘 동안 벌어들인 시간만큼은 절대로 독일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허락되었던 사흘의 시간을 더 알차고 확실하게 실행에 옮기고 끝까지 사수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신 베른 관장께서는 이미 7년 전에 이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시고, 방법과 수행 인원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셔서 지금 우리가 사흘의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들어 낸 사흘은 세상의 그 누구도 석 달이 아니라 삼 년이 걸려도 해내기 힘든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도우셔서 우리가 이 시점에서 사흘의 프로젝트를 결행에 옮겼던 것이고, 다행히도 사흘 째 마지막에 기어코 우려했던 독일의 침략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아직 우리에겐 프로젝트의 마무리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남겨진 역할과 책임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남은 서명을 마쳐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서둘러 현장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남은 마지막 짐을 챙겨 실어서 마지막 호송단을 서둘러 출발 시켜야만 합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나머지 마무리에 힘써 주십시오. 신의 가호가 프랑스에, 그리고 여러분들의 앞으로의 여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장내는 무척 심각하고 장중한 분위기였다.
연설을 마친 사내가 뒤로 물러서자 마지막 남은 서명자들이 책상으로 다가왔다.
앙리 베른 관장이 다가와 연설을 마친 중년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중년 사내의 이름은 자크 조자르(jacques-jaujard)로 흔히들 앙리 베른 관장의 복심이라 불리는 조금은 수수께끼 인물 같은 사내였다. 외교부 행정 관료였던 그를 앙리 베른이 직접 선발하여 루브르로 끌어들였으며, 현재의 직책은 루브르 박물관 부관장이었다. 이것은 곧 앙리 베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직책의 다음 지위를 고스란히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아울러 또한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는, 대학과정을 이수하기 위하여 에콜 뒤 루브르 미술학교를 수료한 로즈 발랑을 눈여겨 보았고, 대학원 과정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 대학원을 마치기까지 지켜보았다가 끝내는 쥬 드 폼 미술관 큐레이터로 채용한 사람이 바로 자크 조자르 부교장이었던 것이다. 또 로즈 발랑에게 남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상태에서 펠리티에로 하여금 독일어를 개인교습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내 모든 사람의 서명이 마쳐졌고, 이제 페이지 상단의 책임자 서명란 만이 남아 있었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상념에 젖어있던 앙리 베른 국립박물관장이 주변을 천천히 흩어보면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전임이신 콩스탕 관장님으로부터 자리를 물려받은지 만 15년이 되어 갑니다. 자네가 내 주변에 있다가 내 눈에 띄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셨다고 정말 과분한 칭찬으로 저를 이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아직도 그날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날 그 순간 그 분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떠올려 보았습니다. 아마도 안심 반, 걱정이 반이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 후로 15년을 지내온 이 순간을 그분께서 지켜보신다면 여전히 안심 반 걱정 반이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몇 년 전부터 물러나야 한다고 꾸준히 생각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꾸 벌어지는 상황이 날로 악화만 되어가니, 이게 짐을 벗어 홀가분해지는 것이 아니라, 후임자에게 차마 못 할 짓을 떠넘기는것 이라는 생각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예견했던 최악의 사태는 기어코 오늘 벌어졌고, 참으로 다행스럽게 우리는 사흘이라는 시간을 이미 가졌었습니다. 이제 책임자인 제가 서명을 하고 나서, 마지막 운송단을 떠나보내는 것만이 남았습니다. 화급하고 중요한 이 시간에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하소연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 앞에 털어놓고 싶어졌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이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는 고백을 하는 일입니다. 저의 자리가....... 저의 직책이....... 제가 벌여 놓았던 많은 일들이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는 곧 이젠 정말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미안함을 담아서 다음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이 자리에서 떠 넘기려합니다. 무작정 떠넘기겠다는 부당함을 이 자리에서 여러분 앞에 고백하면서, (프랑스 국유 미술품 구호 프로젝트) 최고 책임자 서명란을 자크 조자르(jacques-jaujard) 부관장에게 위임하고자 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이 익히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이름만 내걸었을 뿐이지 그동안 모든 실질적 업무를 조자르 부관장이 도맡아 해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스페인에서 벌였던 (프라도 미술관 구호 프로젝트) 성공이 이번 우리 프로젝트의 훌륭한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정부에도 이미 통보를 했습니다. 새해 초의 개각 발표 때 조자르 관장이 정식으로 부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명목은 저에게 미루어 두시고, 실질적인 모든 계획과 실행은 여기 조자르 직무대행 관장이 직접 관할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크 조자르 관장의 최종 서명이 있겠습니다. 이 난국에 조자르가 여기 루브르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베른 관장이 펜을 들고 조자르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마침내 조자르가 걸음을 움직였다.
책상으로 다가가 앙리 베른과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펜을 받아들고 잉크를 새로 적신 뒤에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 서명란에 국립박물관장 직무대행 자크 조자르(jacques-jaujard)라고 적었다.
서명을 마친 자크 조자르를 선두로 모든 사람들이 서둘러 드농관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반출 대상인 마지막 미술품이 그곳에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에콜 뒤 루브르 미술학교 교장실엔 앙리 베른과 로즈 발랑 두 사람만 남았다. 베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베른은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창가에서 의자를 하나 가져와 가까이에 놓고 발랑 바로 앞에 다가가 앉았다. 사랑하는 손녀를 남겨두고 먼 여행을 떠나야 하는 안타까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뉴욕타임즈 앙리 베른 추모 기사)
"파리, 1949년 2월 16일— 루브르 박물관 전 관장 앙리 베른이 오늘 6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최근 전쟁 이전에 관장 재임 기간 동안 베른 씨는 루브르 소장품의 완전한 개보수와 재배치를 감독했으며, 그 아래 그리스 조각과 이집트 전시의 야간 전시가 도입되어 조명이 설치되었다. 몇 년 전에는 전시 중 루브르의 귀중한 회화와 기타 예술품들을 철수시킬 준비를 마쳤다. 이 계획은 전쟁 초기에 실행되어 많은 걸작들이 보존되었으며, 이 작품들은 샹보르 성에 보관되었다가 이후 다른 은신처로 옮겨져 나치 점령 기간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루브르 미술품의 철수는 프랑스 국립박물관 관장인 자크 조자르의 직접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모나리자는 1911년 8월 루브르에서 도난당했으며(도둑의 우산에 실려 도난당했다). 2년 후 허름한 피렌체 호텔에서 발견되어 루브르로 돌아왔다. 그 후 15년 동안 이 그림이 정말 다빈치의 원본인지 아니면 후대의 복제인지에 대한 성가신 의심이 일부 사람들 사이에 자라났다. 이 의문은 앙리 베른이 취한 조치로 해결되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그는 조수들과 함께 캔버스를 정부 실험실장인 셀레리 대령에게 가져갔다. 그곳에서 X선과 자외선, 현미경 촬영을 결합한 새로운 사진 기법을 적용했다. 이 과정은 이 그림이 다빈치가 원본을 그릴 당시 16세기에 사용된 안료로 그려졌으며, 그 이후로는 사용되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루브르 박물관의 확장은 베른 씨 정권 하에서 진행되었으며, 그가 수립한 계획에 따라 약 1,200,000달러의 지출이 투입되었다. 주요 변화는 센 강 부두를 따라 위치한 박물관 구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해양 컬렉션을 호텔 데 앵발리드로 이전함으로써 45개의 갤러리를 추가로 마련했다."
--- 장문의 부족한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장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