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大興寺)에서 떠올리는 다반사(茶飯事)

by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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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 (차 다).

飯 (밥 반).

事 (일 사).

그런즉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은 차(茶) 마시고 밥(飯) 먹는 것처럼 늘상 있는 일(事), 당연한 듯이 자주 일어나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을 이르는 말로, 고사성어 다반지사(茶飯之事)의 줄임말이다.

그런 다반사의 유래에 대해 물으면 우리의 선조들이, 특히 고려시대의 스님들이 차 마시는 일을 밥 먹듯이 자주 즐겨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들 답을 한다.

과연 그랬을까? 그게 맞는 답일까? 우리 조상들이 정말로 요즘 현대인들이 커피 마시듯이 차를 즐겼을까?

차차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하자. 일단은 대흥사 동다당(東茶堂)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생각해 볼 일이다.

사찰 경내를 벗어나 유선 카페에 내려가서 마시고 와도 좋았을 것을........ 마눌님은 녹차를 마시고,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남편으로 산다는 것은....... 때론 선택권을 순순히 내려놓아야만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거실에서 TV를 함께 볼 때 채널 선택권이나, 식당에서 메뉴를 정할 때나 지금 이런 경우처럼 말이다.

동다당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 <대흥사 끽다거(喫茶去)> 라는 붉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아하! (끽다거)라는 말을 이렇게 대면하게 되는구나. 가만, 그렇다면 (다반사)라는 말이 고려의 스님들이 차를 밥 먹듯이 마셨다는 데서 나온 유래가 아니라 여기 (끽다거)에서 나온 유래라는 것이 이렇게 단박에 쉽게 밝혀지는 것이 아닌가?’

사실 (다반사)라는 용어의 해석에 스님들이 어쨌느니 우리 조상님들 생활이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는 모두 허풍이다. 어쩌면 자격지심에서 시작된 민족 정서의 발로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완전 뻥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喫 (먹을 끽)

茶 (차 다)

去 (갈 거)

말씀인 즉,‘끽다거(喫茶去)는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는 말이다. 왔으니 가려거든 아무리 급하기로 잠시 쉬면서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다반사나 끽다거나 다 비슷한 것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다반사)나 (끽다거)나 같은 뜻으로 그 유래도 어쩌면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아주 먼 옛날 중국 당나라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라는 분이 계셨다. 선문답(禪問答)에 능하셨고 차(茶)를 너무도 좋아하셔서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이 남기신 조주어록(趙州語錄)에 수록되어 있다.

하루는 선사를 만나고자 아주 멀리서 찾아온 선비가 있었다. 스님께 예를 갖추는 선비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선사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소?’ ‘아닙니다. 처음이라 이렇게 뵙고자 멀리서 길을 달려왔습니다.’ ‘하릴없는 세상에 그리 화급할 일이 무엇이 있겠소. 차나 한잔(盞) 드시고 쉬었다 천천히 돌아가시오.’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선비가 떠나고 나자 이어서 또 다른 선비가 찾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선사는 이번에도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소?’ ‘스님께서 저를 기억하시지 못하시나 봅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로 찾아와 이렇게 스님을 다시 뵙습니다.’ ‘그랬소? 내 나이가 드니 점점 기억력이 쇠퇴해 가나 보오. 어차피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나 한잔(盞) 드시고 가시오.’ 하고는 또 자리를 떠났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틀림없이 내일도 그럴 것이다.

하여 모시던 젊은 스님이 궁금증을 더는 참지 못하고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어찌하여 그제도 어제도, 찾아오는 사람만 만나면 오셨으니 차나 한잔하고 가시오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그랬더란 말이냐? 그럼 너도 이참에 차나 한잔 마시고 나서 너의 일을 보도록 하려무나.’하고는 또 자리를 비웠다.

조주선사가 시도 때도 없이 늘 하시던 말씀이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라는 말이었고, 이 광경을 수도 없이 목격하는 스님의 처지에서 보기엔 ‘같은 말만 늘 되풀이 한다고 하여 다반사(茶飯事)’라고 표현한 것에서 모두 유래가 되었다.


인생사 다 거기서 거기라, 마지막엔 너나없이 모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거늘 무엇을 얼마나 이룬다고 그리도 서둘러 떠나려 하시는가? 이보시게. 잠시 쉬면서 차나 한잔하고 가시게나.

‘스님, 인생에서 가장 다급한 일이 무엇입니까?’ 함께 길을 가던 젊은 스님이 느닷없이 질문 공세를 펼쳤다.

그러자 조주선사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놈아. 오줌부터 좀 눠야겠다. 이런 사소한 일도 몸소 이 늙은이가 직접 해야만 하니, 시방 이보다 급한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이런 이야기들은 불교의 한 종파라고 할 수 있는 선종(禪宗)의 선문답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참선 수행을 한다는 게 뭐 따로 유별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듯이 일상생활을 참선수행이라 여기고 부단히 노력하면 그것이 곧 선으로 연결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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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국지>를 보면 유비(劉備)가 강남에서 올라오는 배를 기다려 차(茶)를 구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탁현 누상촌의 촌놈이 2년 동안 돗자리를 짜서 팔아서 번 돈으로 귀한 차(茶)를 사서 어머님께 선물하려고 작정하고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여기 이 시작 부분에서부터 벌써 여러 가지 버전이 등장해 독자를 혼돈에 빠트리기 시작한다. 유비의 행색을 보고 감히 귀한 차(茶)를 살 처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거절당하기도 하고, 2년 동안 모은 돈으로도 차(茶)값에 턱없이 모자라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보검으로 값을 지불했다느니, 또는 보검에서 보석만을 빼서 지불했다느니, 아예 보검을 빼버리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모은 돈만큼만 소량의 차(茶)를 구입했다느니 등등 구구절절 다양하게 이어져 나온다.

어쨌든 차를 조금이라도 사기는 샀는데 그만, 집으로 가던 중에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 무리에게 차(茶)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한 장비가 나서서 황건적 무리를 물리치고 유비에게 차를 되찾아 주었다. 유비가 크게 감사하며 가보로 내려온 보검을 장비에게 주었다는 버전이 또 추가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나관중이 쓴 <삼국지 연의>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소설 형식을 빌어 번역되고 재판되면서 새롭게 삽입된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추가된 이야기들을 모두 빼 버린다면 재미없는 <삼국지>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겨우 구해 온 그 귀한 차(茶)를 어머니가 감격하시며 받아주시질 않고 아들의 허리에서 보검이 없어진 사연을 듣고는 차(茶)단지를 그대로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부터 나는 정말로 무척 궁금했다.

‘도대체 그 차(茶)라는 것이 도대체 뭐여?’

‘그게 정말로 그렇게 귀하고 비싼거야? 하나로 마트에서 파는 현미 녹차랑은 다른거야?’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유비가 보검하고 바꿀만 하다고 생각한 그 차(茶)는 도대체 어떤 차(茶)여?’ ‘그게 정말 아파트 한 채 값하고 바꿀 만 한거여?’ 여전히 나는 지금도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어느날 중국 여행을 여러 번 다녀온 친구가 대신 조언을 해주었다.

‘유비가 강남에서 올라 온 배에서 차(茶)를 샀다고 했어도 아마 강남 차(茶)는 아닐거야. 강남에는 좋은 차 산지가 없어. 아마도 항저우 용정 차였을 거야. 최고 품질의 차(茶) 산지이니까, 유비가 살던 그 시대에도 최고 차(茶)는 분명 용정 차(茶)였을거야. 그런데 말야. 오리지널 용정 차(茶)는 정말로 비싸. 비싸도 너무너무 비싸. 실제로 무게를 달아서 금(金) 값보다 비싼게 용정 차(茶)야.’

‘그럼 커피보다 비교가 안 되게 비싼 게 차(茶)라는 말이네? 에디오피아 콜롬비아에서 가져오는 커피보다 가까운 야산에서 나는 녹차가 훨씬 비싸다는 말이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나 이디야 커피나 불루 보틀 브랜드도 용정 차(茶)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정도 밖에 안된다는 말이네? 마트서 파는 현미 녹차랑 뭐가 얼마나 다른데?’

‘그건 유비한테 물어봐야지? 출세하기 전에 그렇게 한이 들렸을테니 황제가 된 후엔 하루 세끼 대신 용정 차(茶)만 마셨을 것 아니야? 유비한테 메일 보내 물어봐?’

‘도대체 뭐가 어땠기에 그렇게 비싼거지?’

‘커피도 마찬가지잖아? 자판기 믹스커피도 싸고 맛있는데, 기를 쓰고 스타벅스 가는 사람들이 줄을 섰잖아? 편의점표 아메리카노하고 자판기표 믹스커피의 차이는 알겠는데, 원두가 어디꺼니 로스팅이 어떠니 무슨 과일 향이 어떠니 하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혼자 속으로 저거 미친 거 아니야 하는 것이나, 너가 지금 녹차면 다 녹차지 현미 녹차와 용청 차(茶)가 뭐가 다르냐고 따지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니야? 너는 내가 차에 쬐끔 미쳤다고 보이겠지만, 나 아직 용정 차를 못 먹어봐서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

‘그런가? 가자 어디 가까운 편의점이라도. 요즘 편의점에서 파는 드립 커피도 맛이 아주 훌륭해. 난 그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아. 커피 마시면서 유비한테 이메일이나 보내보자. 이럴때 미친 김에 제대로 한 번 미쳐보는 거지 뭐.’


이렇게 뜬금없이 차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유비가 왜 나오느냐?

그것은 한 가지를 먼저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한가지는 다름아닌 '차(茶)가 보통사람 누구나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흔한 기호식품이나 음료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어서다. 차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자 귀하고 비싼 특별한 기호식품이었다. 황제가 되기 이전의 유비로서도 감히 가져보기엔 너무나 벅찬 그런 아주 특별한 대상이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차(茶)는 금(金)보다 귀하고 비쌌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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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는 차나무에서 따낸 잎을 달이거나 우려낸 물을 말한다.

찻잎을 따서 살짝 말린 후에 덖거나 찌거나 비비고 하는 등의 건조과정에서 제각각 다른 맛과 향을 가진 차로 둔갑한다. 널리 잘 알려진 녹차는 소엽종 찻잎을 따서 고온에서 찌거나 덖는 과정을 거치며 살청(殺靑)을 하게된다. 여기에서의 살청은 푸른 기운을 제거한다는 뜻인데, 이 과정을 거치면 산화를 중단시키는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나는 산화의 정도 차이에 따라 녹차. 황차. 백차. 청차. 홍차. 흑차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고마운 차(茶)를 제공해주는 차나무는 식물 학명으로 국화군 진달래목 차나무과의 식물이다.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a Sinensis)로 잎의 크기에 따라 대엽종, 중엽종, 소엽종으로 나뉘는데, 전해져 내려온 바에 따르자면 차나무의 기원은 인도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 분포되어 처음 발견되었는데, 잎을 따서 뜨거운 물에 우려내 처음 음용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인이었다. 하여 차(茶) 문화의 시작은 중국이었다고 보고 있다. 중국의 고문서인 <약합전>과 <본초강목>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기원전 대략 2.700년 전에 황허강 유역에서 차를 만들어 음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주로 약용으로 차를 이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쓰촨성과 윈난성과 구이저우성에서 시작되어 점차 미얀마를 거쳐 인도의 아삼 지방으로 이어지는 산악지대에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따듯하고 온화한 지역에서는 대엽종이 주로 잘 자라고, 산악지대 온도차가 있는 지역에서는 소엽종이 잘 자란다. 우리나라는 소엽종 재배 지역에 속한다.

오늘날 차는 주된 재배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남쪽의 산악지역 인근에서 주로 생산되는 (중국차), 인도 북부지역으로 부탄의 인근 아삼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는 차를 (아삼차), 그리고 중국차와 아삼차의 교배품종이 전해져 널리 재배되고 있는 (캄보디아차)로 구분된다. 실론티로 유명해진 (스리랑카차)의 경우는 비교적 현대라 할 수 있는 19세기에 들어서야 등장하게 되었기에, 차의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지금 거론하는 것은 좀 부족해 보이기에 생략한다.


그럼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시작은 어디일까?

아쉽게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몇 가지 가정하에서 추측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차(茶)의 기원과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주 중요한 장소가 바로 쌍계사(雙磎寺)다. 쌍계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이름만 명찰로 그 위치가 지리산 자락에 해당된다.

대한민국 차의 기원을 논할 때, 맨 처음에 등장하는 것이 ‘중국으로부터의 전래설’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828년(흥덕왕 3)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자락에 심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쌍계사 일대다. 시간이 지나 후대에 주지 진감선사가 이곳에 머물며 차 나무를 인근으로 널리 옮겨 심었다. 하여 쌍계사는 이 땅의 차 시배지(처음 차를 심은 곳)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인도 전래설)이다. 인도 전래설은 인도에서 차를 가져온 인물로 김수로왕비(허황옥)를 꼽으며, 그 유입 경로를 전승으로 제시하며, 허왕옥이 천축국에서 신라에 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가락국기>와 <불교통사>의 기록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는 학설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이 (한반도의 차 자생설)이다. 우리나라의 토양이나 기후 조건으로 볼 때, 중국의 차 생산지와 비슷한 환경 조건이 성립되는지라 애초부터 이 땅에 자생하던 차나무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근자에 부쩍 부각되는 학설로 영호남 지리산 인근 지역에서 토종차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실제로 한 다원이 오래된 차나무를 제시하며 천년 된 차나무로 이 땅의 자생설을 입증하는 사례라 주장했는데, 학회의 조사결과 일백 년 조금 넘은 나무로 확인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1천 년을 감안한다 해도,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나무를 가져왔다는 기록에 따른 1.200년 전의 시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마당에 말이다.

현재 학계는 과정이나 시기야 어째되었든 간에, ‘우리나라에서의 차 문화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전래의 주체가 꼭 김대렴이 아닐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은 항상 열어놓고 말이다. 당시에 당나라에 유학하는 신라의 인재들이 많이 있었고, 그중에 다른 누구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비슷한 시기에 다도해를 거점으로 중국은 물론 멀리 동남아까지 해상 무역을 주도한 장보고(張保皐, ?~846년)의 교역물품에 귀한 차(茶)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 장보고가 차(茶)의 가치를 알았을 터인데, 비슷한 환경의 남해안의 어딘가를 골라 차나무를 직접 재배하고 싶어 가져왔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김대렴이 차(茶)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고, 왕명에 의하여 지리산 자락(쌍계사와 화엄사 일대)에 심었다. 점차 그것이 인근으로 퍼져나가 한국의 전통차(茶)가 되었다는 학설이 가장 현실적인 이치에 맞지 않는가 싶다.


인간이 차(茶)를 처음 마시기 시작한 것이 대략 BC 6.000년 경이라 전해진다.

인류의 역사에서 6.000년 전이면 도대체 어떤 시대였던 것일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만큼 차의 역사가 길고도 멀다는 뜻일 것이다.

차(茶)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상나라(商) 시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 관한 이야기에서다. 삼황에는 태호 복희(伏羲)와 염제 신농(神農)과 황제(黃帝) 헌원이 등장하는데, 두 번째 신농(神農)이 태양신이자 농업의 신으로 인간에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자면 신농이 자연을 쏘다니며 온갖 나무와 풀을 직접 먹어보며 약초 연구를 하던 중에, 하루는 커다란 나무 아래서 불을 피워 마실 물을 끓이고 있었다. 나무 잎사귀 몇 개가 물을 끓이는 단지 안에 떨어졌는데 삽시간에 향긋하고 상쾌한 향기가 솟아 나왔다. 신농은 그 물을 한 모금 마셨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청량감을 느꼈다. 하여 그 후로 그 나무의 잎을 따서 끓는 물에 우려먹는 것을 즐기게 되었고 거기에서 차(茶)가 탄생하였다. 그 나무가 바로 차나무였던 것이다.

차(茶)의 기원은 이렇게 신농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차와 중국 차의 기원에 있어서 차이가 드러난다.

신선같은 신농이 깊은 산골짜기를 다니다가 목이 말라 마실물을 찾다보니 물을 끓이다가 차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중국은 도시건 시골이건 산골짜기던 물은 선사시대부터 이미 끓여 먹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마실물이 없어서 끓여먹다 보니 그 과정에서 차(茶)가 발견되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근대에까지 삼천리방방곡곡 어디를 가나 그냥 흐르는 노천의 물을 어디서건 그냥 떠먹어도 좋을만큼 수질이 좋은 나라였다.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일 필요가 전혀 없는 나라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당연히 일반 사람들의 생활 필수 조건이 아니라, 일부 계층만의 기호문화에서 시작되었다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의 차 문화는 차차 광둥(廣東) 지역을 중심으로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사찰로 전파되어 갔다. 참선을 주로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짬을 내어 휴식을 취할 겸, 그리고 물을 대신 마시는 차(茶)를 우려내 마시는 시간이 점점 즐겁고 반듯이 꼭 필요한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선종(禪佛敎)의 확산과 더불어 차(茶) 문화는 더 넓게 퍼져나갔고, 결국 광둥(廣東)과 장시(江西) 지역을 차의 주산지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한반도에 전파된 선종 사상과 함께 당나라에서 들어 온 스님들에 의해 차 문화도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다.

비슷한 이 시기에, 당나라에 유학한 학자와 스님들에 의해서 처음 차가 전파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에 따르자니, 대렴((金大廉)이란 인물이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차의 종자를 들여와서 이를 지리산에 심어 전국에 보급하였다. 하여 이때부터 차는 불교는 물론 스님들의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언제부터인가 불교 의례에서도 차(茶) 공양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한국의 차(茶)를 공부하면서 매번 이 시기에 도달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두 명이 있는데 장보고와 최치원이다. 이들이야말로 한반도 차(茶) 역사의 가장 확실하고도 대표적인 증인이 아닐까?

장보고(張保皐, ?~846년)는 김대렴에 의해 처음 차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다는 828년을 전후해 살다간 사람이다.

중국에 노예로 잡혀갔다가 출세가도를 달려 해상왕(무역왕)이 된 사람이다. 신라의 왕이나 어떤 귀족보다 부자였다. 누구보다 중국 문화에 대해 직접 체험을 통해 정통했다. 그의 해상 교역에서 주요 물품 목록을 따져보자면, 비단. 도자기. 소금 등등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최고 교역품은 차(茶)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보고야말로 당시 최고 품질의 차를 가장 즐겼을 한반도인이 아니었겠는가? 장보고의 차(茶) 생활은 본토라 할 수 있는 중국 당나라의 어느 고위관리나 부자보다 더 적극적이고 더 풍요롭게 즐겼을 것이다. 눈을 뜨면 차(茶)로 하루를 시작하고, 온종일 수시로 교역 상대를 만나면서 고급 차(茶)를 나누면서 부와 권력과 교역업무를 선점하고, 저녁 만찬을 즐기고 종국엔 굿나잇 티를 마심으로 하루를 마감했을 것이다. 신라의 임금도 그렇게는 마시지 못했을 터인데 말이다. 그가 역모로 몰려 멸족된 이유로 그에 대한 기록을 더는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까울뿐이다.

다음 인물인 최치원(崔致遠, 857~908년)을 빼놓고 한국의 차(茶) 문화에 대해 거론할 수 있을까?

해동의 천재로 불리며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출세를 했다. 하지만 그가 머문 곳은 대부분 절간 아니면 관청이 전부였다. 자연스레 선종에 심취했고 스님과 별반 다를 것이없는 생활을 했다. 당연히 중국의 차 문화가 일상이었고 몸에 배었다. 출세한 고위 관료가 되어 당당하게 신라에 돌아왔다. 김대렴에 의해 전래 된 차가 왕명에 의해 지리산 자락에 심어졌고, 선종 사상과 함께 사방으로 많이 퍼져나간 뒤였다. 신라에서 나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차에, 본토에서 익혀 온 다도에 관한 문화 보유자인 최치원 또한 유독 차(茶)를 아끼고 사랑해 왔던 사람이었다.

그런 최치원이 타성에 젖은 회생불능의 신라 조정을 버리고 떠났다. 어디로 떠났고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저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만이 오래오래 전해내려 왔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은퇴 후에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삼아 다니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삼국사기>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가 그릇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한탄하며 세상을 유랑했다고 치며, 최치원(崔致遠)과 김시습(金時習)을 늘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최치원은 가야산자락 깊은 심산유곡 어딘가 오래된 차나무 아래 누워 잠들어 있지 않을까? 차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신선이었으니 말씀이다.




%EC%B5%9C%EC%B9%98%EC%9B%90%EC%B4%88%EC%83%81-side.png?type=w966 차(茶)의 발명자인 염제 신농(神農)씨(위), 차(茶)의 신봉자였던 최치원(崔致遠)의 영정.(아래)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일하면서 짬을 내야하다 보니 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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