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는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蹟 (금일아행적) /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 뒤에 오는 누군가에 이정표가 될 것이니.
아는 사람들만 그토록 죽고 못살 정도로 가슴에 담아놓고 애송한다는 한시 <답설(踏雪)>이다.
일찍이 백범 김구선생께서 공주 마곡사에서 출가를 하시면서 <답설>을 접하셨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셨다 해서 세상에 알려지고 더욱 사랑받게 된 한시 라고 하겠다. 이후로 만리타향에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임시정부를 이끌고 싸우시면서까지도 늘 <답설>을 애송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임시정부는 물론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답설>은 하나의 광복헌장처럼 즐겨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답설(踏雪)> 하면 그냥 ‘눈길을 걸으며 주위 풍경을 감상한다’는 뜻인데, 정작 시에서는 어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엄중한 교훈을 새겨들으라 명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한시 <답설(踏雪)>을 백범 선생께서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오도송(悟道頌)에서 처음 배우셨다고 한다.
오도송(悟道頌)이란 고승들이 자신의 수양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순간의 내용과 자신의 감회를 적은 글이며, 자신의 수도를 다잡기 위하여 짓는다고 한다. 하다 보니 김구 선생의 주변에 있었던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늘 선생이 <답설>을 암송하는 모습을 대하게 되었고, 또 암송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답설>의 소개를 ‘서산대사의 오도송’이라 설명하셨기에 현대에까지 <답설>이란 시의 작자는 서산대사로 알려져 내려왔다. 이 순간에도 대부분 사람들은 '<답설(踏雪)>이 서산대사께서 지으셨고, 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을 좌우명으로 삼고 애송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용산구 백범 기념관에 가면 선생의 친필 휘호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 정말로 백범 선생께서 직접 쓰신 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되고 있는 백범 선생의 친필 휘호 ‘답설(踏雪)’에는 실로 엄청났던 가문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운동을 펼쳤던 경주 이씨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중 둘째인 이석영의 증손녀 김용애에게 김구 선생이 써준다고 부연 설명까지 분명하게 적어 놓았다. 주는 사람과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다.
그런 사연을 담고 있어서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어서 인지, 대한민국에서 한시를 좀 안다는 사람이나 글씨를 좀 쓴다는 사람치고 <답설>을 써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훌륭한 서예가들조차 앞다투어 무수히 많은 <답설> 작품을 내어놓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아는 사람만 알고 간직한다는 한시 <답설(踏雪)>이 꾸준히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몇몇 국문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원재훈의 수필집 제목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가 널리 알려지면서, 어딘지 모르게 <답설>의 느낌 내지는 영향력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포클레스의 ‘당신이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Today that you wasted is the tomorrow that a dying person wished to live)에서 나왔음까지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학자들이 <답설>을 문학적으로 살피고 연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사대산의 모든 행적과 모든 서찰과 유품 어디에서도 <답설(踏雪)>에 관한 어떤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서산대사께서 지으셨다는 기록은 아니더라도, 누구하고의 대화던가 누구하고 주고받은 서찰에 언급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어디에도 <답설> 비슷한 이야기조차 없었다.
구두로 읊으신 것을 누군가 곁에서 듣고 기억했다가 다른 문집이나 기록으로 남겼던 것일까? 그런데 그조차 일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 김구 선생이 애초에 작자에 대해 잘못 아셨던 것일까? 따지고 보면 김구 선생이 <답설>을 좌우명으로 삼아 평생동안 애송하셨다고 했지. 선생께서 직접 입으로 이 시가 서산대사 작품이라고 딱 부러지게 설명했다는 기록 또한 없는 상황이 아닌가? 아무리 그렇기는 해도, 결론은 선생께서 잘못 아셨고 누군가에게 이 시를 서산대사가 지으셨다고 비슷한 이야기라도 전하셨기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나가 종국엔 ‘<답설>은 서산대사의 시고 백범이 좌우명으로 삼아 늘 암송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가능한 추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답설>이 서산대사의 작품이 아니라면 누군가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닌가? 국어 교과서에서 흔히 보던 (작자 미상)은 또 아니겠지? 학자들은 더 열의를 가지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 냈다.
학술적 논리상으론 95% 정도가 분명하게 밝혀졌고, 이제는 <답설(踏雪)>이 조선 후기의 문인 이양연(李亮淵)의 작품이라고 학계에서는 100% 확신하고 있다. 이제 <답설(踏雪)>은 서산대사의 작품이 아니라 이양연의 작품임을 우리도 알아야 한다.
‘답설(踏雪)’이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의 본래 제목은 ‘야설(野雪)’이다.
산운(山雲) 이양연(李亮淵, 1771~1856)의 시집인 ‘임연당집(臨淵堂集)’에 실려 있다. 평생 변변찮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는 200여 편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어떤 시인보다 우수한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주로 5언 절구와 5언 고시에 능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거두절미하고 답설(踏雪)이 왜 이양연의 작품인지를 확인하는 절차로 임연당집에 실려 있는 야설(野雪) 전문을 그대로 옮겨와 감상하기로 해야하겠다.
야설(野雪)
穿雪野中去 / 눈 밟고 들 가운데 걸어 갈 적엔
不須胡亂行 /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아라.
今朝我行跡 / 오늘 아침 당신이 간 발자국들이
遂爲後人程 /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雪朝野中行 / 눈 온 아침 들 가운데 걸어가노니
開路自我始 / 나로부터 길을 엶이 시작 되누나.
不敢少逶迤 / 잠시도 구불구불 걷지 않음은
恐誤後來子 / 뒷사람 헛갈릴까 뒷사람 헛갈릴까 염려해서네.
산운 이양연(李亮淵)의 이 두 편의 시는 내용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아울러 이 시는 불승(佛僧)의 시라기보다는, 유자(儒者)의 시에 가까워 보인다. 들판에 눈이 수북하게 내렸다. 아침 일찍 어딘가 가야 하니 그 눈에 처음 발자국을 놓는 셈이다. 그것이 뒤에 오는 사람에겐 이정표(里程標)가 된다. 내가 산 삶이 다음 살 사람에게 지침이나 본보기가 된다. 그렇다면 눈 속에 발자국이 금세 사라진다 해도 함부로 살 수 없는 법이다.
산운이 가는 길은 구름처럼 자취가 없다. 그러나 자취 없음이 의미 없는 방기(放棄)나 태만(怠慢)을 뜻하지는 않는다. 눈에 찍힌 발자국도 한세상 지나면 사라질 구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 자취는 누군가에게 중요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산운의 발자국은 현실과 끊임없는 대치 속에서 이루어진 삶의 궤적이다. 그것은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고독을 노래한다. 그것이 발자국이 된다. 산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말해주지 않는 눈 쌓인 들판에 길을 내듯 낯선 삶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해남 대흥사(海南 大興寺)를 찾아가면서 왜 답설(踏雪) 타령이냐?
그것은 바로 서산대사(西山大師) 때문이라 하겠다. 해남 땅에 들어서서 대흥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서산대사와 관련된 전설과 이야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것들은 자연스레 대흥사와 호국 불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대흥사 하면 그저 남도 여행의 최고 명소 중의 하나로 각광을 받고 사계절 내내 수없이 많은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런 풍경이 일반화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에야 대흥사하면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와 소치 허련의 이야기가 우선 손에 꼽히고, 현판의 글씨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여가게 마련이겠지만, 감히 단언하건데 1993년 영화 <서편제>의 열풍이 불기 전에 대흥사를 알고 있거나, 멀고 먼 해남땅까지 찾아가 대흥사를 방문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글을 쓰는 작가나 사진을 찍는 작가가 아니면 굳이 거기까지 생고생을 해가면서 찾아갈 곳이 절대로 아니었다. <서편제>의 열풍이 청산도와 두륜산 일대의 빼어난 절경과 대흥사에서도 특히 유선관을 여행객들이 기를 쓰고 찾아가게끔 만든 것이 엄연한 팩트였던 셈이다.
내게는 이런 지나간 시절의 팩트에 대해서 절실하게 깨닫고 기억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영화 <서편제>가 열풍으로 변하기 직전에 해남 대흥사와 미황사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앞서 이땅에 살다가신 분들의 발자취를 찾아 방방곡곡을 무던히도 싸돌아(?) 다니던 시절이 내게는 있었다. 가끔은 시인 묵객이 되어보고, 산적도 되어보고, 유배가는 죄인도 되어보고, 도망친 화전민도 되어보았는데, 이상하게 스님이 되어 본 적은 없다. 하긴 돌팔이이기는 하지만 분명 어려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어서 그랬을까?
그러면서 은연중에 시인과 문객들이 이상하리만치 은근하게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절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몰락한 유학자들이 때론 숨어 지내기도 했고, 의적들과 적당히 교통하기도 했고, 숨어다녀야만 했던 의인(義人)들을 자주 숨겨주기도 했다. 암튼 그런 절집들이 곳곳에 있었다. 겉으론 드러난 것은 분명 절집 내지는 절간이었지만, 역사에서 감추고 드러나지 않은 많은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이어졌던곳 또한 절집이며 절간이었다. 그래서 죽어라 그런 곳을 또 찾아갔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장소로 세 곳이 유독 내 마음을 잡아끌었고 그래서 기를쓰고 또 찾아갔었다.
첫째를 꼽으라면 당연시 오대산 상원사(上院寺)가 가히 으뜸이 아니겠는가? 이 첩첩산중 고즈넉한 산사에 숨어들면 공부가 저절로 될것이며, 작품이 저절로 쏟아져 나올것만 같다. 산적질한 장물을 숨기기에도 딱이고, 꽁꽁 숨어지내기에 그야말로 최적지가 이곳이다. 산 아래 월정사 스님과 짝짜꿍만 되면, 순경이 들이닥쳐도 월정사 스님이 먼저 알아채시고는 지름길로 축지법을 쓰고 달려와 기별을 해 준다. ‘토껴’라고 말이다. 임시정부 독립군들의 접선 장소이자 군자금 은신처는 아마도 상원사가 아니었을까?
둘째는 안성 칠장사(七長寺)다. 한양에서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워낙 유명한 안성장터가 인근이다.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시로 접근이 가능하고, 물자가 풍부하고, 교통 요충지를 살려 이동이 자유롭고 정보 수집이 용이하다. 그러다 보니 시인 묵객 보다는, 은밀하게 모종의 거사(?)를 도모하는 베이스 캠프로서 최적지가 아니었겠는가?
셋째가 바로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다. 멀어도 너무나 먼 남도자락 오지인데다가, 깊어도 너무나 깊은 산골짝 분지가 아닌가? 고립무원인 만큼 몰래 숨어서 뭔가 저지르기엔 그야말로 기가 막힐 정도다. 남도 평야라 먹거리 걱정이 없음이요, 유사시엔 언제든 바다를 이용할 수 있다. 거기다가 훗날 아주 유명한 최초의 여관이 되었지만, 언제든 방문객을 맞아줄 숙소까지 훌륭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어디 절간이나 절집에 숨어지내기엔 가히 대둔사가 으뜸이었어라.
이 세곳의 감추어진 이면 역사가 정리되어 드러난다면 아마도 세상은 여러 번 까무러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찾아다녔고, 나의 추론은 상당히 가능성이 더 짙어 보였다. 근자에 있었던 ‘칠장사 화재 사건’만 보더라도 말이다.
상원사 방문에서 어떤 시인이나 묵객 같은 분과 나의 관심사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가 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여기 상원사보다 더 적합한 기가 막힌 장소가 있습니다’라고 한 곳을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또 찾아갔다.
현재 대한민국의 가장 동북쪽 끄트머리 고성 땅에 있는 건봉사(乾鳳寺)를 찾아서 말이다. 정말 은둔을 하거나 뭔가 일을 꾸미기엔 더할나위 없는 최고의 장소라는 느낌이 팍하고 다가왔다.
건봉사(乾鳳寺)는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예전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있다고 해서 '금강산 건봉사'라 불렀다. 과거 역사에선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혔을 만큼 큰 절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북부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31 본산의 하나로 신흥사와 백담사, 낙산사 등을 관할에 두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전소되면서 과거의 위세를 모두 잃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건봉사에서 승병을 모집하였고, 1605년(선조 38)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부처님 치아 사리를 되찾아와서 건봉사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다.
멀리서 힘들게 찾아간 건봉사의 첫 인상은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더미의 흑백사진 같았다. 그게 전부였다.
썰렁하게 혼자 남겨진 일주문은 칠이 심하게 벗겨졌고, 사방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절간 터에 주춧돌만 남았고, 절간 중간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봇도랑 위로 무지개 석재다리만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가장 깊숙한 안쪽 언덕에 유일하게 살아남다시피 한 적멸보궁만이 여기가 그래도 절간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흡사 대중가요 <황성 옛터>의 전형이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썰렁함과 황량함이 여기저기 색이 바래고 지워진 안내판을 볼때마다 더 아련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갔다. 페허더미 건봉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도 했다. 그리고 그후로 여러 번 자주 찾아 갔었다. 1994년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된 (건봉사 중건 불사)가 어느 정도 완공된 장면을 보고 기겁하기전 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는 찾지 않았다.
차차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과도한 중창이나 중건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심각한 거부반응으로 다가왔다. 월정사에서 그랬고, 건봉사에서 그랬다. 그리고 이번에 놀랍게도 내가 그토록 아끼고 숨겨 놓았던 미황사와 대흥사에서도 그랬다.
아마도, 다시 찾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방문에선 제대로 사진도 찍지 않았다. (네이버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서 글을 써내려가야만 하겠다.
<남도 여행의 꽃, 대둔사(大芚寺)>
대흥사(大興寺)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의 두륜산 도립공원 안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本寺)이다. 이런 대흥사의 본래 이름은 대둔사(大芚寺)다.
해남의 본래 이름이 토말(土末)이었던 것처럼, 대흥사 창건때부터 본래 이름은 대둔사(大芚寺)였다.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가 대둔사 이름을 대흥사로 바꾸었다. 현재의 관광 안내소가 있는 주차장에서부터 대둔사의 경내였는데, 절터를 축소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밀어 올리고 나서 대흥사로 이름과 명판을 바꿨다. 여기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여관인 <유선관>이 탄생했다. 본래 대둔사 경내 초입에는 멀고 먼 오지인 대둔사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객사가 초입에 만들어져 있었다. 스님들의 거처인 내부지역의 승방과는 별도로 말이다. 사찰의 경계를 밀어 올리면서 외부로 밀려난 객사를 일제가 여관으로 만들어 별도로 관리한 것이 바로 유선관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는 세력들이 대둔사를 회합의 장소로 사용하고 유사시 은신처나 결사 항전의 요충지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일제 입장에서는 임진왜란에서 승병들이 결사 항쟁하는 역사를 직접 체험하였으며, 그 근원지가 대둔사였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 사찰의 객사를 여관으로 만들어 이곳에 상주하면서 대둔사 스님들의 동태와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장소로 시작되었던 것이 지금,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핫 플레이스 명소중의 한 곳인 <유선관> 한옥 체험관과 카페가 된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1993년 사찰의 공식적 이름을 대둔사로 바꾸었다.
과거 내가 방문했을 때는 <대흥사>가 아닌 <대둔사>였다. 도로의 길 안내 표지판에도 <대둔사> 그리고 땅끝이 아닌 <토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 인가 슬그머니 다시 <대흥사>로 바뀌었다. 글로벌 시대에 이제 굳이 일제 청산을 따질 때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여행객들이 달라진 표지판 때문에 헷갈려서 그랬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서편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대흥사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너무나 멀고 인기 없는 여행지였던 때문이다. <서편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남도 여행 붐이 일었고, 부랴부랴 대흥사로 여행객이 몰려들었는데, 정작 내용을 따져본다면 여기까지 왔으니 절간을 돌아보는 것이고, 입구의 <유선관>이 영화에 등장한 배경이었다는 것에 관심들을 가졌었다. 당연히 ‘유선관 하나 만으론 여행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결국 대흥사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임진왜란시 왜구에 항전했던 승병들의 집결지였으며, 추사와 초의와 소치의 아련한 서사가 더해졌다. 더하여 한국 전통차의 요람이라는 점도 추가되었다. 그런 서사와 변화가 지금의 대흥사를 탄생시켰다고 하겠다.
어느 화창한 늦여름과 초가을의 어정쩡한 딱 중간의 그런 날에 나와 아내는 어디선가 보았던듯한 그 길을 다시 찾았다.
바닷바람과 솔바람이 금방이라도 불어나올 것 같은 대흥사 계곡이 여전히 싱그러운 자태로 그곳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숲길로 늘 최상위에 꼽히는 그 명품 숲길 말이다.
대둔사(大芚寺)? 아니 지금은 그냥 대흥사(大興寺)!
남들 표현이야 다양하지만, 나에게 있어 대흥사는 흡사 깊은 살골짜기로 옮겨 놓은 펀치볼(양구 해안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연꽃잎처럼 두륜산의 험준한 능선이 사방을 병풍처럼 에워싸며 연꽃 모양의 분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참으로 묘한 형세로고.
해탈문 앞에 서서 올려다보면 ‘두륜산 능선에서 누워있는 부처님 형상이 보인다’고 했다. 오른쪽 능선 바위에서 부처님 얼굴에 해당하는 매부리코가 보이고, 아래 배꼽 부분에는 가지런히 마주 잡은 손이 보이고, 왼쪽으로 길게 누워서 뻗은 다리가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오호통재라! 불심이 부족해서인지 아무리 집중해 보려해도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를 않는다.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군 여행에서 바푸욘(Baphuon) 사원 뒷벽의 누워있는 부처상은 단번에 알아보았는데 말이다. 나이 들어 불심이 줄어들었나?
대흥사는‘한국의 산지 승원(僧院)’ 7곳 중 하나(다른 6곳은 통도사·부석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로 꼽힌 명찰이다. 인근의 미황사와 백련사 등 해남·영암·강진 등의 수려한 사찰 40곳 가까이 대흥사의 말사(末寺)로 두고 있다.
대한민국의 불교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곳이 바로 대흥사다.
대흥사의 창건 역사에 대해서는 구구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어왔다.
백제 구이신왕 때인 426년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라는 분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져 왔다. 그러더니 514년(백제 무령왕 1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더해졌다. <만일암고기>라는 기록에 따르면 875년(신라 헌강왕 원년)에 도선국사가 당에서 귀국한 뒤에 전국에 비보사찰(裨補寺刹) 500곳을 건립하라고 지시하였고, 그중에 대흥사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사에서 정관존자라는 분에 대해서는 실존인물이라는 자료가 부족하고,아도화상의 경우에는 고구려 사람으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인물은 맞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쫓겨 다니고 숨어지내다가 죽었다. 거기다가 활동 반경이 경북 김천 일대에 제한적이었다는 점에서 무리가 있고, 그나마 도선국사 이야기가 가능성은 있다 하겠으나, 말씀하신 500곳이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그중에 어디 어디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분명한 사료가 어디에도 없다. 그런 와중에 폭탄 선언이 떨어졌다.
‘대둔사는 대충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된 사찰이다. 이름난 사찰이다고 하면 저마다 앞다투어 도선이니 원효니 의상이니 아도화상이니 정관존자니 하면서 그분께서 만드셨다 하고 가져다 붙이는데 하나같이 죄다 거짓말이다. 스님 한 분이 평생을 사시면서 창건할 수 있는 불사는 하나나 둘밖에 할 수가 없다. 말로써 짓는다면 천 개도 만개도 짓겠지만 말이다. 그저 부처님의 보살핌이 있으셔서 민중들의 불심이 모여 창건한 것이 대부분 이라고 하겠다. 자고로 깊은 산중에 도를 닦기 위해서 절집을 하나 세웠는데,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으니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 처지에 부처는 무슨 부처겠는가. 사람이 찾아오고 시주가 생겨서 허기 면하고 비바람은 피하고 나야 그때 부처고 불심이고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서 끄집어낸 것이, 항간에 널리 알려진 고승들의 전설과 행적인 것이다. 어느 큰 스님께서 도를 깨우친 곳이 여기고, 병자를 고친 기적을 행하신 곳이 저기며, 그분이 어디를 가리키며 장차 큰 복을 약속하신 명당이 바로 여기라고 하니까 비로소 사람들이 바리바리 시주를 싸들고 찾아오더라는 게야. 그게 사방에 널려있는 명승대찰인 것이지. 여기 대흥사? 정관존자도 아니고 아도화상도 아니고 도선국사도 아니고, 누가 지었는지는 나도 몰라. 아무리 찾아보아도 확실하게 누가 지었는지가 안 나와.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누가 지었는지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지금 버젓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처로 삼아 열심히 기도하고, 뭔가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고 있는 절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부처님의 자비가 중요한 것이지 원효 의상 도선 큰스님들이 당장 무엇이든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대둔사는 그냥 여러분들이 힘들고 지치고 부처님의 자비가 필요할 때 편하게 찾아오는 곳이지, 큰스님들이 확실하게 무슨 약속을 해 주는 곳이 절대 아니야. 다만 지금 여기 대둔사가 특별한 것은, 서산대사께서 이곳이 “전쟁을 포함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장차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이라는 사실을 오랜 공부 끝에 찾아내셨고, 실제로 이곳을 승병들의 총본부로 삼아 임진왜란에서 왜구를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우시지 않았던가 라는 사실인 것이다. 성리학의 이념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시대에 배척당하면서도 결코 꺽이지 않는 민중들의 작은 불심을 하나로 모아 호국불교라는 숭고한 업적을 이뤄낸 그것이 정녕 중요한 것이며, 여기 대둔사가 가진 진정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과거의 큰스님들처럼 이름뿐이 아닌, 실제의 살아 있는 교훈과 숭고한 호국의 결의로 국난을 극복하는데 크게 헌신한 장소가 바로 여기 대둔사라는 사실이 진정으로 가치있고 중요한 것이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버겁고 힘들고 지치더라도, 여러분들이 지금 찾아온 여기 이곳 부처님의 보살핌이 가득한 대둔사에서만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편히 쉬실 수 있을 것이요. 그것만은 선산대사께서 하신 약속하심임을 내가 증명하리요. 대둔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민중들의 불심이 하나로 모여져 지어졌소.’
이 양반 정말로 엄청난 파격을 저지르신게 아닐까?
여기 대둔사에서 처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대둔사의 주지까지 되셨으니 그럴만도 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 양반이 요상하시여, 스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논어>와 <주역> 읽기를 즐겨 하였고, 성리학에 대해서도 매우 해박하시기로 강진과 해남 일대에서 일찍부터 아주 유명하셨다고 한다.
하루는 강진의 한 주막에서 그날도 성리학에 한 가닥씩 한다는 양반 나부랭이들과 둘러앉아 세상살이 토론을 벌이던 중에 몹시 지쳐 보이는 남루한 차림의 선비 하나가 들어와 뒷전에 차고앉아 음식을 주문하고는 귀동냥을 하고 있었다.
이미 유학과 성리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스님에게 양반들이 주눅이 들고 있을 즈음인지라, 스님의 언변에 다소 무리가 내비치자 거침없이 남루한 선비의 일침이 날아왔다. 일침에 놀라 잠시 자신을 추스르고 나자, 이제 2차 대전으로 스님과 낯선 선비 사이에 성리학과 유학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논쟁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당황한 스님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승복의 매무새를 갈무리하고 나서 남루한 선비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깨우침이 크신 선비를 몰라 뵙고 서툰 재주를 부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인근 백련사(白蓮寺)에 주지로 있는 혜장(惠藏)이라 합니다. 선비께선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이제 막 강진에 유배를 당해 온 처지로 존함이랄 것 까지 있겠습니까? 여유당(與猶堂)이라는 이름이 있기는 합니다.’
순간 큰 충격을 받은 듯, 혜장 스님은 그냥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감히 다산(茶山) 선생을 알아보지 못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남도에 가면 혜장이라는 스님이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예서 뵙습니다.’
다산 또한 혜장 선사의 앞에 엎드려 맞절로 예를 갖추었다.
이날부터 이 두 양반 사이에 죽고 못 사는 묘한 이야기가 생겨나게 된다. 스승과 제자인것 같아 보이다가도 아닌 것도 같고 교우인 듯 보이다가 때론 형제인 듯 보이는 그런 사이로, 아마도 혜장이 없었다면 다산의 강진 유배 생활은 훨씬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런 대둔사는 풍담 스님부터 초의선사까지 우리나라 불교계의 13대 대종사(大宗師)를 배출했으며 만화부터 범해 스님까지 13대 대강사(大講師)를 낳았다. 하여 누가 뭐라해도 대둔사 이곳이 유명한 것은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이라는 명성 못지않게 호국(護國)의 도량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혜장선사는 우리에게 이젠 너무나 익숙한 초의 선사의 직계 선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강진 초당에 다산 정약용이 유배 와서 교류하고 있었던 인근 백련사의 혜장 스님을 통해 대흥사에 있던 초의선사(1786~1866)에게 다산을 소개했으며, 다도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다고 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불교계의 기린아였던 혜장 선사가 39세(1811년)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는 사실이다.
<유선관>을 지나치노라니 절로 만감이 교차한다. 인생무상(人生無常) 것이 이런 느낌인가 싶어진다.
얼핏 보아도 무엇 때문에 그리도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지 알겠다.
이번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유선관 한옥스테이에 대해서 검색을 해 보고는 ‘와! 무지 비싸다. 전통 한옥 체험이란 게 이렇게 거금을 들여야만 가능한 것인가?’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었다. 아주 예전의 첫 방문 때는 천관산 자연휴양림에 거처를 정해두었던 터라 아쉽게도 이용을 하지 못했었다. 워낙 핫플레이스로 등극하다 보니 이런저런 이용에 대한 불편과 남다름에 대한 불평도 적지 않았던 것이 기억이 나서 카페에도 들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옛길을 올라가며 담장 너머로 잘 정돈된 한옥을 스치듯 지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가다가 스타벅스 있으면 들리자.
옛날엔 한겨울 연탄을 갈고 계신 주인께 양해를 구하고 <유선관>의 이곳저곳을 두루 살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유선관>의 유선(遊仙)은 놀 유(遊), 신선 선(仙)을 썼으니, ‘신선이 놀다 가는 곳’이라는 뜻일 터인데, 이젠 그만 신선도 놀다 가려면 카드나 현금을 가지고 와야만 한다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도 하룻밤에 25만 원에서 36만 원이라면........ 이젠 신선놀음도 돈 없으면 못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일까? 차라리 개축하면서 유선관을 유금관(有金館)으로 바꾸지 그랬을까?
거기다가 해남 두륜산 일대하면 우리나라 전통 차의 중심이라고, 대흥사 근처만 가도 전통차의 은은한 차향이 풍겨나온다고 했는데, 지금 그 객사에 아메리카노 커피와 라떼 향기가 가득하다.
객점 대문 밖에 써 붙였던 도토리묵. 빈대떡, 동동주는 이제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격세지감(隔世之感) 이라고 했던가?
영화 <서편제>의 성공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이곳이 그 유행어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 전 이곳은 가장 한국적인 것들 투성이였는데, 지금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혹 이미 세계적인 유행들에게 이곳마저 점령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선과 개방도 좋겠지만, 최소한의 전통이나 가치관은 따로 수수하게 유지 간수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가진 것은 시간과 배짱뿐이라고 내세우며 다시찾은 대흥사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선인들의 발걸음 흉내를 내보면서 경내에 들어 우측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전에도 똑같이 그랬었다. 왜냐면 왼편의 북원 방향으론 늘 분주한 내방객들의 발걸음이 무성하기 때문이다.
부러 먼 길을 마다않고 두륜산자락 선원(禪院)을 찾았으매, 여기서까지 호들갑 떨며 쫓아다닐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범종소리 울려 예불시간 늦었다고 재촉하는 것도 아닌 처지로 내 오늘은 은퇴하는 노스님의 마지막 발걸음처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느릿느릿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 그런 달리 급할 것 없는 나그네 처지에 푹 젖어보리라.
우측 언덕을 오르면 일단 표충사(表忠祠) 지역이 나온다. 대흥사가 호국불교 도량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여주는 장소이다.
이곳엔 이정표가 있다. 진불암이나 두륜봉을 가려면 우측으로, 가련봉이나 북미륵암이나 일지암을 가려면 왼쪽으로 가라고 알려준다. 마눌님의 지금 컨디션이라면 북미륵암은 고사하고 일지암도 힘들 듯싶어 보인다. 새로 불사를 일으켜 지은 건물이 있다고 했으니 그곳이나 돌아보고 내려가기로 하고 발걸음을 왼편으로 돌려본다.
대흥사는 전통적인 가람배치 구조에 있어서 사뭇 어긋나 보이는 몇가지 의문을 가진 사찰이다.
당장 대흥사가 널리 알려진 종통이 있는 대사찰이었기 망정이지, 어느 심산유곡의 초라한 사찰로 가람배치에 커다란 흠이 있다고 했으면, 아마도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고사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배치가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대흥사의 경우에는 대웅전을 북원지역의 한구석으로 적당히 밀어붙여 형식만은 어느 정도 갖추려 한 듯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너른 남원지역의 높은 핵심지역에 의당 대웅전이 있어야만 했을 것으로 누구나 생각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 새로운 불사가 대대적으로 있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호국대전은 776㎡ 규모의 단일 전각으론 국내 최대 호국대전으로 대흥사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아 나라와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호국의승과 순국선열 및 이름 없는 영웅들의 넋을 추모하는 공간이라는 명분으로 2024년에 탄생했다.
실로 어마무시한 전각(殿堂闔閣)이 엄청난 위용을 뿜뿜 뿜어내며 마침내 시야 가득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으로 여겨져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해 보이는 육중한 나무기둥 사이로 호국대전(護國大殿)이란, 역시나 그 크기 또한 어마무시한 현판이 걸려있었다.
‘아니 덕수궁 궁궐 복원현장에 있어야 할 건물이 왜 여기에 서있다는 말인가? 여긴 절간이란 말이야. 너가 왜 여기서 나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이건 아무래도 누군가가 ‘호국불교 성전’을 핑계로 ‘불교왕국’을 넘본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이건 미친짓이야?’
‘이제 표충사는 유명무실해 졌고, 서산대사와 제자인 사명대사와 뇌묵당 처영을 비롯한 수많은 호국영령들이 머물곳을 잃고 떠도는 영혼들이 되고 말았다. 표충사로도 충분했거늘, 영령들이 언제 낙원이나 리조트를 지어달라고 했냐?’
'호국불교의 정신은 표충사를 통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때 그게 진정한 호국불교였던거야. 이 바보들아. '
'호국불교가 뭔지 알아?'
민초(민중)들의 자발적인 생각과 의지가 국난을 당한 나라를 구하고자 분기탱천해 일어났을 때, 거기에 불심이 가세했을 때가 바로 호국불교(護國佛敎)인 것이야. 군왕이 호국불교를 내세웠을 때는, 백성을 환란과 도탄에서 구제하기 이전에 빼앗길지도 모르는 자신의 왕권을 먼저 되찾고 확고히 하자는 목적이 전제가 되었던 것이다. 왕권을 되찾고 확고히 하고 나면 다시 이전처럼 세금을 걷고 부역을 시키고 저잣거리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게 되어 있더란 말이야. 몇몇 선택된 승려들에게 직첩을 내리고 사대부 못지않은 삶을 영위하게 만들어 주면 불교는 언제나 군왕을 위해 호국불교 운동을 언제든 또 벌일 준비를 항상 하고 대기했던 것이야. 정권이 호국불교 타령을 한다. 왜? 천년만년 권력을 누릴 완정시대의 군왕도 아닌 처지에 말이다. 호국불교를 앞세워 패거리를 만들어 정권을 차지하고 유지의 방편으로 삼겠다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교엔 호국불사를 벌이고, 기독교엔 호국 기도회를 벌이고 말이다. 권력과 종교의 유착을 생활화 하면서 종교를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키겠단 생각일 뿐인 것이지.
그러다 보니 어느 시대고 승정(僧政)을 담당한 극히 일부의 승려들은 언제나 왕권을 옹호하고 정권을 비호하기 마련이었다.
‘호국의 목적은 호법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호국은 반야를 실천하는 것’ 이어야 했음에도, 권승들이 앞장서서 권력에 편승하며 종교적 교리의 전통을 왜곡시키고 호도하여 왔던 것이다. ‘국가’와 ‘정권’은 당연히 다른 것이어야 하는데, 이들에겐 정권이 바뀌던 말던 항상 현재 집권자의 편에 서서 표정 관리를 해가며 ‘호국타령’만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몇몇 권승들이 정권의 지원을 받아내고, 불교계 안에서 더 많은 권력과 이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범계와 비리를 은폐하거나 보호받으려고 현재의 정권을 지지하고 충성을 바쳤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서 누구든지 항상 호국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말이다.
‘칠장사 화재 사건’과 관련된 자승 스님의 그간 행적이 바로 그런 모든 증거라고 나(필자)는 확신한다.
지금 다시 대흥사를 찾아 온 것이 순간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는 대흥사를 찾아올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대가 알던 대흥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아래 두륜산을 올려다 보았으나, 호국대전 전각의 지붕이 너무나 크고 높아서 그만........ 산봉우리의 누워계신 부처님 형상이 가려 보이지 않고 말았다.
아뿔싸.
불심이 되살아나 이쯤에선 부처님 형상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만, 호국불교가 부처님을 가리는구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 대사는 어명을 받아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란 직책을 맡고, 전국 승방에 격문을 띄워 의승군(義僧軍)을 창설하였다.
스승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가 고성 건봉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갔으니, 이것이 조선에서 호국불교(護國佛敎)가 탄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큰 국란이 있을 때마다 승군을 일으켜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며, 이를 통해 조선을 지키는 데 놀랄 만한 공적들을 세웠다. 특히 임진왜란 동안 자발적으로 승군을 조직하여 직접 전장에 참가했던 서산 대사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사명 대사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의 불교가 개인의 깨달음만을 중시한 개인 위주의 종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한국불교의 성격을 규정할 때 ‘호국’이라는 수식어가 차차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호국이라는 개념은 천재지변이나 외침 등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으로,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살인의 행위까지도 포함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결국 호국불교라는 역사적 평가에는 불교의 종교적 이상과 이와 상반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문제의 제기에 적지 않은 모순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모순에서 생기는 의문들은 꾸준히 불교학자들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살생까지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호국의 개념을 불교라는 교리 내에서 바라보기보다는 호국이라는 역사적 특성이 어떻게 불교에 접합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즉 호국이라는 특성을 불교 교리 내에서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한국 불교 역사에서 호국이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된 단초를 조심스레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조선 초 정치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으로 인해 시작된 숭유배불 정책은 불교계에 큰 위기의식과 함께 현실적 대안이라는 절망적인 숙제를 안겨 주었다. 유학의 윤리·도덕들을 불교의 교리들을 폄하시키고 쓸모가 없는 공염불로 부각 시켰고 여기에 대항해 보우는 성리학의 이론적 개념들을 불교의 이론과 합치시키며 불교의 사회적 비판에 대응해 갔다. 이러한 배경과 과정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해 불교는 승군을 조직하여 국난에 앞장서서 활약하는 실천적이고 헌신하는 종교적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모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호국을 실천하였고 저술을 통해 이론적으로 다른 사상과 회통시키고자 했던 서산 대사를 호국불교의 가능성으로서 지목할 수 있다. 이때 서산 대사에게서 주목해 볼 것은 그의 유학적 소양과 유학에 대한 회통사상이다. 호국이라는 특성은 불교사상에 근접하기보다는 당시 조선의 정치이념이었던 성리학에 맞닿아 있다. 성리학은 현실 정치를 우선시 하면서 살생에 대해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산대사도 이 거부할 수 없는 모순적 현실에 대해 매우 고통스러워 하셨다는 것을 남기신 저작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 이론 내에서 살생까지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호국의 개념을 찾기보다는 이렇게까지 해야만했던 서산 대사의 삶과 그의 회통사상을 통해 호국이라는 한국 불교의 성격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치권력이 앞서 나서서 칭송해 마지않는 호국불교나, 몇몇 권승들이 사사로운 욕심을 숨기고 내세우는 호국불교에는 언제나 각을 세우고 경계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는 어느때고 그냥 종교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종교가 정치의 영역에 발을 담구거나 권력에 맛을 들이면 세상은 언제든 아비규환 지옥으로 변하게 마련이기에 말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서산 대사는 다시 묘향산에 돌아와 산내의 대중들에게 설법을 이어 나갔다. 하루는 자신의 초상화를 들고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 후인 지금은 내가 그로구나.”라는 원적송(圓寂頌)을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가부좌로 입적하였다. 세수는 85세(1604년), 법랍은 67년이었다. 우리나라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휴정(休靜) 스님의 입적으로 1604년의 일이었다.
휴정 스님은 입적에 앞서 이미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겨 놓으셨다.
“내가 죽으면 의발(가사와 공양그릇)은 반드시 해남으로 보내라. 그 고을의 두륜산에 대둔사(대흥사)가 있는데, 남쪽에는 달마산(해남)이, 북쪽에는 월출산(영암)이 보이고 동쪽에는 천관산(장흥)이 있으며 서쪽으론 선은산(해남)이 있어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곳이다.”
이 유언으로 인해서 대흥사는 전통 가람배치에 따르지 않는 특이한 절이 되었다. 동서남북에 네 개의 산이 지키고 있다고 해서 따로 사천왕상을 두지 않은 특이한 절이 됐다.
전통 가람 배치에 따르자면, 일단 사찰을 찾아가면 가장 먼저 산문인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난다. 여기부터는 사찰의 경내이니, 그런 만큼 경건한 마음가짐을 갖추라’는 안내문인 것이다. 안쪽으로 다시 나타나는 산문이 바로 불이문(不二門)이다. ‘이곳이 부처님의 세계인 것은 맞으나, 그러나 세상과 동떨어진 곳은 결코 아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토세계와 사바세계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베풀고 나누고 배려하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그다음이 바로 사천왕문(四天王門) 이다.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무서운 천왕들이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마음가짐을 잘 다스리고 추스르라는 가르침을 준다.
대흥사의 지형이 이토록 빼어나서 사천왕문을 빼놓고도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는 길지라고 휴정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일찍이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라 하셨는지 충분히 느껴질 만하다고 하겠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대흥사가 지금까지 이리도 큰 사랑을 받는 큰 가람이 된 까닭에서 가장 으뜸은 이런, 서산대사께서 이곳을 길지라고 택하신 이야기와 대사의 의발이 이곳에 보관되기를 염원하셨다는 이야기가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누구인들 그런 곳에 기대어 쉬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가에겐 그곳이야말로 어디에도 없을 정토(淨土)가 아니겠는가?
비록 호국대전에 가려 두룬산 봉우리의 부처님 형상을 오늘 나는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구중궁궐 같은 호국대전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청허대사를 비롯한 호국영령들을 모셨다고 해서 그분들이 그곳에 머무실까 궁금해진다. 시골 초가삼간에서 겨우 비바람 피하면서 산나물에 겨우 보리밥으로 연명하며 왜구와 대척해 싸우시던 분들에게 표충사(表忠祠)는 그런대로 아늑한 안식처가 되어드리지 않았을까? 추모자들의 꾸준한 발걸음도 이어졌으니 말이다.
이제 다시 호국불교의 필요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 의해서 구중궁궐 같은 호국대전이 완공되었다고 해서, 그분들의 영령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셨을까?
내 생각엔 아니지 싶다. 숭고함을 아는 진정한 사람들의 손 때가 묻어있는 표충사에 그대로 머물고 계실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는 휴정 스님은 그런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삶을 사셨는지 엿볼만한 시를 두 편 골라 읽어보기로 한다.
이런 분에게 구중궁궐을 지어드린다고 과연 그곳에 거하실까?
오도시(悟道詩)
髮白非心白 / 머리는 희었지만 마음은 늙지 않는다.
古人曾漏洩 / 옛 사람이 일찍이 말했네.
今聽一聲鷄 / 닭 우는 소리 듣는 순간
丈夫能事畢 / 장부의 할 일 다 마치었네.
도통시(道通詩)
忽得自家底 / 문득 깨달음을 얻어 내 집에 이르니
頭頭只此爾 / 온 세상의 사물들이 그대로 진리의 세계로다.
萬千金寶藏 / 깨달은 자에게는 팔만대장경도
元是一空紙 / 원래는 하나의 빈 종이로구나.
표충사를 보고 호국대전을 보았음인데 대흥사를 다 둘러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왜일까?
나머지 장소들은 그냥 예전에 보았던 추억으로 대신하고 벗어나고 싶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마음에 담고 있던 대흥사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좀 질려버렸다고 할까? 식상했다고 할까?
지난 여행에서 아쉬움으로 남았던 궁금함들을 더 찾아보고 알아보고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수그러들고 말았다.
‘아래쪽에 기념품 점과 찻집을 같이하는 곳이 새로 생겼던데, 차라도 한잔 하면서 잠시 쉬어보는 게 어때?’
40년을 넘게 살다보니 이젠 굳이 표정까지 아니더라도 말투나 걸음걸이만 보아도 평상시와 다른 것을 단박에 알아채나 보다.
이사람이 내 마누란가? 짱구 엄마인가? 겡구 시어머니인가? 태리 세리 할머니인가? 아님 구미호가 맞는가? 아니지. 마녀여 마녀.
‘절에서 커피도 팔까?’
‘초의선사가 살던 한국 전통차의 근원지가 여기라며? 그런곳에 와서까지 커피 타령이니? 진짜 전통 차를 마셔야지?’
‘난 풀냄새밖에 못 느낀다니까? 가마솥에 소여물 쑤다가 한방울 입술에 툭 튀어온것에서 느껴지는 맛.'
‘그 풀냄새가 전통 차맛이라니까? 여기선 무조건 차를 마셔. 한 번 제대로 마셔 보라고?’
‘딴 차를 마시면 안돼?’
‘주글래? 마시라면 마셔.’
--- 그래. 차 한잔 마셔보면서 그쪽 세상은 또 어떤지 한번 알아보자. 내가 마누라님을 어떻게 이겨? 차를 한 잔 마시고 심신을 추스린 후에, 다시 남들 다 하는 방식으로라도 (대흥사 여행)을 이끌어 나가 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