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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Oct 14. 2024

단편소설, 오류(五柳)선생 표류기(4)

학교를 버린 아이

 그는 정해진이 자신을 노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과목 답지에 그런 장난을 쳤다면 아마 벌써 말이 돌고도 남았으리라. 그런 판단이 서자 그는 주먹을 부르쥐었다.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더군다나 놈은 건방지게도 교직이란 말을 입에 올려가며 생계 유지 수단이니 뭐니를 운운하면서 그의 속생각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정해진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해 오고 있었다. 교사로서의 자세를 다잡을 수 있는 연수 프로그램이나 감성 조절 강좌 등 초심을 되찾는 일에도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쉰이 넘도록 그저 시간에 쫓겨 가면서 입시 지도에만 혈안이 되었던 자신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법을 지도하다가 국내 모 대학 석좌교수를 하고 있다는 원격 연수 강사는 여기저기 그의 아픈 곳을 잘도 찔러댔다.

 ‘학생에게 영향을 받는 교사는 이미 교사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교사는 모름지기 학생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선생이 학생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바로 학생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이니 이것은 교사로서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니다. 착실하게 본보기를 보이고 감동과 감화를 받게 함으로써 학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참 교사가 할 일이다. 교사는 학생과 한편이 되어야 한다. 학생이 스스로 교사가 자기편이란 걸 느끼게 되었을 때 학생은 교사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리하여 교사는 학생과 같은 눈높이에서 원만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원격 연수 강사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 아닌가.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정해진에게 최대한 마음을 열기로 작정해 온 터였다. 그러나 정해진은 늘상 그대로였다. 여전히 교과서도 필기구도 없는 빈 책상이었다. 가방엔 달랑 잡서 한 권뿐이었고 학교에 들고 나는 시간은 제멋대로였다. 그렇더라도 약간의 변명에 눈감아 줄 정도의 여지는 언제든 남겨두는 요령이 있었다. 그는 그런 정해진을 먼발치로 바라보기만 했다. 구렁이 속 같은 녀석에게 돌연 살갑게 대하는 것도 뜬금없어 보일 것 같아서 자연스런 조우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뜻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지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 그는 서둘러 교실에 들어갔다. 정답 풀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해괴한 답안을 꾸민 정해진을 징치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는 정해진이 비굴한 모습으로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모두들 시험지를 꺼내놓고 앉아 수군거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시험 문제 정답을 맞춰보도록 합시다. 객관식 스무 문제, 주관식 열 문제 모두 서른 문제였지요? 아. 그보다 먼저 정해진 이리 나와 보세요.”

 정해진은 언제나처럼 책상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있었다. 옆에 앉은 아이가 흔들어 깨우자 무슨 일이냐는 듯 주위를 힐끗 둘러보면서 칠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해진 이리 나오라고!”

정해진이 지척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느릿느릿 걷는 자세가 퍽 불손해 보였다.

 “정해진, 너 주관식 답지에다 뭐라고 썼는지 기억하지?”

그가 낮고 결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정해진의 대답이 의외로 선뜻 튀어나왔다. 그런 정해진의 태도가 그의 속을 슬쩍 뒤집어 놓고 있었다.

 “그게 답이라고 쓴 거냐?”

 “예”

 “예? 예라고? 그게 이 자식아 왜 답이야? 너 나 놀려 먹으려고 작정하고 쓴 거지? 바른 대로 말해 이 나쁜 자식아.”

 “선생님, 있는 그대로 보고 말씀하십쇼. 제가 답란에 어떤 답을 썼든 그게 정답이 아니라면 점수를 주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옳은가 옳지 않은가 그것만 보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정해진의 갑작스런 우격다짐에 그는 거의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분함을 이기지 못한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계속)

                                            청계천, 외다리로 서 있는 왜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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