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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Oct 24. 2024

그녀의 만세

그녀의 글자 만들기

 그녀는 오늘도 베란다에 나와 새소리를 들었다. 가야금 줄을 튕기듯 새 한 마리가 퉁 하고 날아올랐다. 동생이 탄 자전거는 담 모퉁이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동생하고는 열여덟 살 차이였다. 어머니는 아들 셋을 잃고 나서 마흔이 되어서야 귀한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거의 그녀가 업어 키우다시피 했으니 자식 같은 동생이었다.

 넉 달은 족히 걸렸을까. 이젠 컴퓨터 자판이 낯설지 않았다.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딸아이들에게 몇 번인가 얘기했지만 시큰둥했다. 눈치가 보여 더 이상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동생이 컴퓨터를 사들고 왔다. 고맙고 반가웠다. 그러면서 놀라웠다. 

 ‘내가 이 나이에 컴퓨터를 만지게 되다니…….’ 

 동생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그녀에게 컴퓨터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들으면 잊어버리고 다시 익히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녀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1940년생,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숱한 고생을 겪었다. 그나마 늘그막에 18평짜리 아파트 하나를 장만할 수 있었다.

 남편 복이 없어 이른 나이에 헤어지고 어린 딸 둘을 목숨처럼 키웠다. 그러나 여자 혼자 힘으로 딸 둘을 키우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아원 보모, 버스 세차, 아파트 청소 등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곤궁한 삶에 어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랴만 생활 속에서 우러난 소회를 이따금씩 글로 써 놓곤 했다. 보잘것없는 조각글들이었지만 장롱 서랍 속에 통장처럼 숨겨 두었다. 컴퓨터 자판을 익힌 후에는 때때로 일기를 썼다. 동생은 그 조각글들과 아버지가 남기신 문장들을 모아 조그만 책으로 만들었다.

 지금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글자를 쓰는 게 아니라 만들고 있다. 글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참 동안 자판을 겨냥해야 한다. 떨리는 손가락이 원하는 소리를 찍어낼 때까지 무던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며칠 전, 자신의 책을 받아보고 나서 그녀는 만세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마치 깨진 사금파리 조각들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손안에 감기는 책의 감촉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황홀했다. 책의 적당한 두께에서 느껴지는 뿌듯함,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낱장들의 경쾌함, 흩어졌던 삶의 편린들이 ‘A5 148*210mm 크기’로 앙증맞게 모인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언뜻 그녀는 자신이 예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타고 간 자전거의 잔영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렸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아파트 정원에 오후 햇살이 가득했다. 잔바람에 몸을 맡긴 채 호사스럽게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그녀는 혼자 말했다.

 ‘아. 참 예쁘다.’     


<그녀의 시>     


   얼음이 풀릴 때     


얼음이 풀리고

설 때 입으셨던 때 묻은 옷가지

시어른 명주 백의

곱게 다듬질하여

밤에는 등잔불 밑 화로에 인두 꽂아

때 묻을세라 정성 들여 깁노라면

고개 내민 경칩 개구리들 모여

시집살이 시름 잊으라고

부드럽고 고운 목소리로

졸음 참는 며느리 잠을 깨운다.          



     희미한 사진첩     


아스라이 기억 속에 사진첩이 있네.

먼 옛날 내 조부 조모님 생존하셨던 시절

대문 안에는 안마당

바깥마당 건너에는 보리를 심고

콩 심은 넓은 밭 늦은 가을

쓸쓸한 바람 스며들면

초가의 겨울, 무명 솜 넣은 옷 입은 식구들

소나무 삭정이 불 쇠죽 끓이면

아궁이 속에 타는 불

화로에 가득 담아 둘러앉아

긴긴 밤 이야기 무르익고

초가지붕 처마엔 고드름

동지 지나 얼마 후 봄기운이 감돌 때

초가집 툇마루에 석양 비치면

우리 어머니 절구에 저녁거리 찧으시고

할머니는 키에 까불려 뉘 고르실 때

콧물 훌쩍이시며 이리저리 뒤적여

덜 찧어진 쌀 고르실 때

얼굴에 앉은 겨 먼지 뿌옇고

볏섬 들여다보시고

이제 반밖에 없으니 어쩌나 하셨지.

마음씨 고운 우리 할머니          



         도선사     


노스님 법의 치렁치렁

부드러운 옷자락 바람에 스치고

운무는 봉우리 위로 사라지는데

삭발 은빛 안경 넘어

중후한 자태

신선이 저 모습이었을까.

맑은 약수로 목을 축이고

삼층 법당엔 설법하는 목탁소리

유월 어느 날

맑은 바람, 법당 그림자 감돌아 나갈 때

세상살이 망각한 채

극락이 이럴까

산 저 너머엔 희미한 아파트

기쁨과 슬픔이 얼룩져 있는 곳

도선사 처마 끝에 풍경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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