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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B Jul 13. 2020

나는 내가 좋은 상사가 될 줄 알았어

상사열전 下



이직을 하고, 첫 출근날이었다. 팀장 C를 처음 만났다. 그는 첫 출근한 나를 부르더니 일을 하면서 배우는게 제일 빠르다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섯개 정도를 줬다. 이직하고 한달 노는게 국룰아니냐고.. 난 그것만 믿고 세부-제주도라는 말도 안되는 일정을 출근 전날 끝내고 왔는데. 여기서부터 이미 망했던 것이다. 이직 첫날은 집에 가는거라고 하면서 아주 자비롭게 칼퇴를 명령한 그는 다음날부터 시작된 야근은 모른 척 했다. 회사에서 제일 먼저 알게된 것이 야근 택시비를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여튼간에 이직 첫주에 주 7일 근무를 경험하게 된 나는 여기에 온게 맞는걸까? 고민에 빠졌다. 약간 애매했지만 그래도 일이 많은거니까... 매출 못채워서 거지인 것 보다야 낫겠지. 바쁘면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조직을 지배하는 룰이고.. 그 때까지도 난 너무나도 안일했다.


팀장 C에 대해 이새끼...? 라는 의문이 든 첫 사건은 학벌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함께 미팅을 나가는 날, 택시 안에서 팀장 C는 내가 운이 좋아서 입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회사는 원래 업계 내에서 유난스럽게 학벌을 신경쓰는 회사로 유명했다. 그래서 니 학벌로 이 회사를 들어온 것은 운이 좋았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대학을 어떤 기준이든 간에 줄을 세우면 10위권 안에는 들어가는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봤자 스카이 미만 잡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잡대 출신인건 맞았다. 그리고 난 그에 대해 별 컴플렉스나 불만이 없는 사람이었다. 태어나서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이 없는데 내가 굳이 니 학벌 구리다는 말에 에너지를 쓰겠어. 것도 열심히 해서 학교에 애정 있는 사람이나 빡치는 말이지. 여튼간에, 그래서 난 그의 말에 말에 깔깔 웃었다. 머 학벌 본다는거 유명한데 운이 좋으니까 왔겠져 ㅎㅎ 내 말에 팀장 C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나의 학벌에 대해 팀장 C는 그 후로 한 세네번 정도 더 말을 꺼냈다.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니 학벌로 운이 좋아서 들어왔다고. 처음에는 웃으면서 넘겼는데 세네번 들으니까 약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팀장 C는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서울대 나온 사람한테 이런 소리를 네번 들으면 '하 싀발새끼 그럼 서울대 출신이나 뽑던가' 하고 궁시렁대면 끝인데 같은 학교 출신의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니 '뭐지 이새끼는?' 생각이 절로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 때 깨달았어야 했다. 이 사람은 99%의 자격지심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는걸. 난 그걸 몰라서 그 앞에서 너무나도 깝쳤고, 그래서 인생이 피곤해졌다.





팀장 C를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정의해야 할 것은 '디바병'이다. 디바병은 어떤 무리에서든 중심에 있어야 하고 주목을 받아야 하고 본인이 모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타인이 인정해줘야 하며, 이것이 안될 경우 삐지는 증상을 보이는 질환이다. 개인적으로는 '자기객관화 시스템의 불능'이 선행 질병으로 붙는다고 진단을 내리고 있다. 여튼간에 나의 코워커들은 그의 디바병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 가급적이면 함께 모이는 자리를 만들지 않았고, 점심 시간에는 가능한 한 입을 열지 않았다. 야근이 끝나면 집에 가기 전 길맥을 함께 하고, 주말에는 함께 여행을 같이 갈 정도의 분위기였던 팀에 있다가 온 나는 이 분위기가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이 업계는 원래 좀 시끄럽고 그랬던 분위기였는데.. 역시 업계 내 대기업은 다른가..


그러고 있던 찰나에 구원자가 왔다. 영원한 대리 L이 우리팀에 합류한 것이다. L은 내가 잠깐 있었던 첫회사에서 알고 지낸 사이었고 어쩌다 보니 같은 시기에 같은 회사, 같은 팀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40대 남성인 팀장 C가 디바병이었다면 30대 남성인 대리 L는 디바였다. 나는 살면서 이정도의 인싸를 본 적이 없었다. 왜 이런 사람이 이 업계에서 본인의 능력을 썩히고 있을까? 그와 1시간만 같이 있으면 누구나 가질 법한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한강물 떠다가 팔라고 해도 떼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이.. 그치만 원래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지팔자 지가 꼰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본다면 뭐 제대로 찾아 온 걸 수도 있다. 여튼 이정도로 쾌활하고 활발한 대리 L이 팀에 오고 내 옆자리에 앉게 되자 팀 분위기가 조금씩 바꼈다. 원래 있던 애들도 조용한 애들은 아니었던거. 그냥 전략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인데 사람이 많아지자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이다.


팀장 C가 어쩌다가 대리 L을 눈엣가시로 여기게 됐는지는 모르면서도 알 것 같았다. 대리 L은 팀장 C의 지향점이었다.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리고 능력이 있었다. 제일 문제는 이것이었다. 일을 못하고 해맑기나 했으면 팀장 C가 느끼는 자괴감이 덜했을 텐데... 회장님 인맥으로 우리 회사하고만 일을 하는 개꿀 클라이언트 하나를 물려받은 팔자만 믿고 영업은 1도 안(못)하는 팀장 C와 달리 대리 L은 대리주제에 이직하면서 약 2억 정도의 말도 안되는 클라이언트를 끌고 왔다. 보통이라면 이런 사람은 업고 다녔을텐데 대리 L이 만난게 디바병 말기 팀장 C였다. 지옥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나와 대리 L은 비슷한 커리어를 쌓아 왔고, 쓰레기장 같은 첫 회사에서 쌓은 전우애가 아주 조금 있었으며, 둘 다 담배를 폈다. 그리고 둘 다 할 말을 딱히 가리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둘 다 팀장 C가 싫어하기 딱 좋은 스펙이었지만 나보다는 대리 L이 좀 더 잘났으며, 심지어 남성이었기 때문에 첫 타겟은 대리 L이었다. 대리 L은 하다못해 회사 전 사원이 함께 간 워크샵에서 본부를 통솔하는 (잡)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덕분에 모든 사람 앞에서 상무님께 칭찬까지 받아 버렸다. 거기서 칭찬을 받으면 안됐는데 능력이 있다고 해야 하는건지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하는건지 아리송한 상황이었지만 하여튼 팀장 C가 질투로 돌아버릴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팀장 C는 대리 L을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고, 그 때마다 대리 L 역시 참지 않았다. 그래봤자 대리는 대리고 팀장은 팀장이었다. 팀장 C는 가장 치졸하고도 효과가 높은 방법으로 대리 L에게 복수했다. 연 매출 목표가 20억인 팀에서 2억을 가지고 온 대리 L의 승진을 누락시킨 것이다. 팀장 C는 승진 발표가 나는 날 갑자기 휴가를 썼고 대리 L은 본인의 이름이 없는 승진자 리스트를 쳐다보다가 나와 함께 담배를 피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사실 난 대리 L이 승진을 못할거라는걸 감으로 알고 있었지만, 진짜 돈을 가지고 온 사람을 승진을 안시킬거라고는 상상 하지 못해서 같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후 팀장 C는 대리 L에게 제대로 된 일을 주지 않는 등 각종 방법을 통해 대리 L을 괴롭혔고, 대리 L은 당연히 능력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업계를 벗어나 이직에 성공했다. 타이밍 좋게 대리 L이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날은 팀장 C가 팀원에게 공지하지 않은 (정확히 말하면 대리 L은 팀장 C가 장기 휴가를 간다는 것을 팀장 C에게 전달받지 않았다) 휴가를 떠난 상태였고 대리 L은 그 덕분에 메일로 퇴사 통보를 하는 복수에 성공했다. 홈런까지는 아니고, 1루타 정도를 치는데는 성공한 것이다.


대리 L의 퇴사는 빠르게 진행됐고 대리 L은 퇴사를 준비하던 와중에, 팀장 C가 다른 팀 팀장에게 '대리 L이 저렇게 버릇이 없는데 승진을 시키겠냐' 라고 말한 것을 전달받게 된다. 대리 L은 이 모든 이야기를 모아서 인사팀과 진행한 퇴사 전 면담에 폭탄을 던지고 나왔지만 뭐 그래봤자 변하는건 없고 그렇게 탈출에 성공했다. 대리 L이 탈출을 한 순간, 이제 남은 것은 나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팀장 C와 맞지 않겠지만, 나는 정말 팀장 C와 맞지 않았다. 맞지 않는게 문제가 아니고 난 견디는 방법을 몰랐고 그리고 눈치가 좀 없었다. 학벌 사건에서 그가 내게 바랬던 것은 '어이고 팀장님, 학벌도 부족한 저를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ㅠ' 라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랬다. 여튼간에 나는 눈치가 없는 인간인건 틀림 없다. 이걸 이제서야 깨닫다니..


단계적으로 삐그덕대던 팀장 C와 내가 엇나가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약 반년동안 진행된 대규모 프로젝트덕분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진행된 그 프로젝트에서 팀장 C는 '본인이 다 하겠다'는 최초의 다짐을 싹지워버린 채, '내가 몰라서 보고서를 못쓰겠네' 라는 말을 남긴 채 발을 쏙 뺐다. 삼주동안 끝나면 튄다는 생각으로 이를 갈면서 보고서를 쓰고, 그 와중에 보고서 제출 직후 아이슬란드를 가는 티켓을 예매했다. 끝나면 쉬라는 팀장 C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휴가는 통보였지만 그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양심이 거기까지는 말렸던 모양이었다. 보고서가 클라이언트에게 전송되고, 나는 아이슬란드로 떠났으며, 그 동안 그 보고서의 PT가 진행됐다. 아주 좋은 클라이언트였다. 팀장 C는 보지 않았던 반년 동안의 내 개고생을 모두 본 사람들이었고, PT가 잘 끝난 후 '뫄뫄 과장님이 이 프로젝트 잘 해주셨는데 함께하지 못해서 아쉽다' 라는 감상을 남겨줄 만큼 좋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팀장 C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는게 문제가 됐다. 앞에서 말한 디바병의 증세가 악화되기 딱 좋은 상황인 것이다.


약 열흘동안의 여행을 끝나고 출근한 첫날, 팀장 C는 잘 갔다 왔냐는 말도 안하고 나를 부르더니만 '프로젝트 진행 실적이 심각하다'는 첫마디를 꺼냈다. 밤에 길가다가 쌀가마로 뒷통수를 맞아도 이것보다는 덜 놀랄 것이다. 나는 팀장 C 앞에서 개거품을 물었다. 이러면 왜 나한테 큰 프로젝트 시켰냐고. 작은 프로젝트 백개해서 실적 채우면 나도 편한데 내가 그 동안 놀았냐고. 생각보다 더 큰 지랄에 팀장 C는 놀랐는지 나를 잘 달랬다. 그러니까 남은 기간 열심히 해서 실적을 채우자는 말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뭐 이런 씹새끼가 다 있지? 그래도 그 때는 팀에 대리 L이 있었다. 팀장 C가 나에게 아무리 지랄해도 나보다 더 고통받고 있는 대리 L이 있었고, 같이 담배 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십새끼 지랄이네, 하고 넘겼다.




팀장 C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대리L이 나간 후 진행된 A 프로젝트였다. 그 와중에 나는 팀장 C에게 메신저로 팀장 야근 밥 먹냐? 야근 왜하냐? 는 메시지를 보내버리는 엄청난 실수까지 해버렸으니(더도말고 덜도말고 정말 딱 저 내용이다!) 괴롭혀도 뭐 그러려니 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팀장 C는 치졸함에 바닥이 없는 사람이었다.


'제안서'를 내보내는데 클라이언트가 이 프로젝트가 어떤 프로젝트인지 알 수 있도록 '예상되는 결과'로 '풀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요구를 팀장 C가 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 그 어떤 누구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왜 '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냐고 항변했지만 걔가 팀장이었고, 못견디면 나가야 하는 것은 나였다. 이 회사에 온 이상 업계 내에서 이직할 곳은 마땅치 않았고, 당연히 이직할 곳을 못찾은 나는 일단 일을 했다. 팀장 C는 내가 가지고 온 결과물에 대해 정말 우스운 시비를 털기 시작했다. '예상되는 결과'인데 말이다.


그와 내가 30분동안 싸운 것은 다음과 같았다. '마이크로소프트' 라는 회사를 이야기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냐는 말에 나는 '빌게이츠', '윈도우' 라고 작성했고, 그에 대해 그는 '혁신적인' 이라고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난 납득을 못했다. 길가는 사람 열명 붙잡고 MS 물어보면 다 비슷한 이야기 나올걸요? 내 말에 팀장 C는 그런 대답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고, 너는 클라이언트 이해도가 떨어지고 클라이언트 로열티가 없다는 맹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MS의 연상에 윈도우 / 빌게이츠가 나오는게 클라이언트 로열티가 떨어지는건가? 이해를 못했고 넋이 나가고 있는 나에게 팀장 C는 엄청난 주문을 했다.


너 앞으로는 애플 쓰지마.

눼?

너 이 프로젝트 안할거야? 클라이언트 이해 해야지. 클라이언트가 매스 대상으로 장사하는데 알아야 할거 아냐. 앞으로는 애플 쓰지말고 MS 써.
(※ 여기 나온 회사들은 실제로 업무를 진행한 회사가 아님. 적절한 케이스를 찾아서 든 예시임)


그 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자격지심의 근원이 라이프스타일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라이프 스테이지 상 트렌드를 가장 잘 따라갈 수 밖에 없는 30대 미혼 여성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향하는 자칭 영포티 40대 남성(낼모레 50대)에게 30대 미혼 여성인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무관하게 그에게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팀에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대리 L이 본인의 타고난 능력으로 팀장 C의 자존심을 긁어놨다면 나는 그냥 나의 생각 없는 소비와 나의 나이가 팀장 C의 자존심을 긁어 놓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프로젝트 이후 나와 팀장 C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팀장 C는 대리 L도 나갔겠다, 남은건 나 하나 뿐이었고 대리 L이 겪은 모든 일이 나에게도 반복됐다. 그 동안 팀장 C는 나에게 '본인의 클라이언트는 매우 감성적인 사람들이라 너랑은 잘 맞지 않는다'는 말로 넌지시 팀 트랜스퍼를 권유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리 L이 퇴사할 때 던진 폭탄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전에도 대리 L과 같은 취급을 받고 퇴사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며, 대리 L이 워낙 큰 폭탄을 던져놓은 덕분에 나까지 퇴사를 하면 팀장 C가 정말로 곤란해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팀장 C는 내가 퇴사할까봐 그 대신 팀 트랜스퍼를 종용했고, 안타깝게도 그 의도만큼은 정확하게 파악해버리는 나는 팀장 C에게 팀 트랜스퍼 할 생각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얼굴이 굳은채로 알겠다고 한 팀장 C는 나에게 일을 주는 대신 일손이 부족하다는 본부 팀 여기저기에 나를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나는 졸지에 새벽마다 인력시장을 서성거리는 일용직의 마음을 알게 됐지만 그래봤자 정규직이니까. 그냥 남의 팀 일을 열심히 했다. 사실 놀아도 돈이 나오는게 회사라서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아직은 일을 해야 할 시기였다.




다른 팀 프로젝트를 하는 와중에 나는 회사로 제안 요청이 들어온 프로젝트 B의 제안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팀장  C는 나를 불러서 '너도 이제 니 클라이언트를 만들어야 한다'며 제안서를 던졌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제안서를 열심히 썼다. 우리와 일을 하지 않은지 10년이 넘은 클라이언트였고, 금액이 꽤 컸다. 팀장 C가 이걸 무조건 따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 프로젝트였고, 당연히 나에게 클라이언트를 만들어줄 생각이 없던 그는 제안서를 보낸 이후 진행되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나에게 맡겼다.


그렇게 살아가던 와중에, 팀장 C가 나를 잠깐 팔았던 팀에서 팀을 옮기라는 제의를 받았다. 우리 팀 바로 옆 팀이었으며 사내 팀장 C의 유일한 친구인 팀장이 있는 팀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같이 일해보니까 니가 쓸만한 인간인 것 같아서 (+너랑 팀장 C랑 사이 안좋은건 온회사 사람들이 다안다) 와달라는 팀장님의 말씀에 주저없이 오케이를 외쳤다. 알고보니 으르신들 사이에서 모든 이야기가 다 끝났고, 나의 최종 결정만 남은 상황이었다. 나는 빠르게 팀장 C의 팀에서 했던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막판에는 한것도 얼마 없어서 정리할 것도 없었지만, 직전에 제안서를 작성한 프로젝트 B가 문제가 됐다.


프로젝트 B의 발주업체는 계속해서 간을 보더니만, 어느날 아침에 킥오프 하자는 메일을 보냈다. 이거는 일을 한다는 말이었다. 출근길 택시안에서 메일을 보고 올ㅋ 하고 있었던 나는 3초 후에 택시 안에서 경박하게 쌍욕을 내뱉게 된다. 팀장 C가 메일로 '앞으로 이 커뮤니케이션은 본인이 담당할테니 너는 빠져라' 라는 통보를 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팀 트랜스퍼도 결정 됐겠다, 눈에 뵈는게 없는 나는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또 난리를 부렸다.


나 : 이거 일 어떻게 하는거냐. 팀 옮기면 나랑 이쪽이랑 같이 하는거냐.

C : 아니다 이 팀에서 새 사람 꾸려서 진행할거다

나 : ?? 뭔소리? 니가 나한테 내 클라이언트 만들라고 하면서 제안서 주지 않았냐. 아니 이럴거면 나한테 왜 제안서 쓰라고 했냐? 다른 애들 시켜야지

C : 제안서를 쓸 때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 회사 룰이 원래 팀 트랜스퍼 할 때는 하던 프로젝트를 다 놓고 가는거다.

나 : 니 클라이언트도 아니고 회사로 들어온 제안서를 내가 썼는데 이게 무슨 하던 프로젝트냐?

C : 상무님께 물어보겠다.


그리고 결론은 상무님께 불려가 그 프로젝트는 내가 가져가게 됐다. 사실 그 프로젝트 B는 대충봐도 고생길이 훤하게 보이는 프로젝트여서 가지고 올 생각이 없었는데, 안될거라고 생각해서 일 시켜 놓고서는 되고 나니까 홀라당 가져가려고 하는게 얼탱이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인생 최악의 팀장 C와 헤어지게 된다.


그래서 팀을 옮기고, 그리고 나서 이제 나는 드디어 이상한 상사에서 해방된 대신에 이상한 부하직원을 만났다. 팀장의 이상함과 부하직원의 이상함은 결이 달랐다. 그래도 옮긴 팀에도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건 참 다행이었다. 여기서도 내가 미친사람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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