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가기로 마음먹자마자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코로나로 여행은 뚝 끊겼어도 뉴욕에 사는 한인들이 많아 최신 정보를 얻는 건 문제없었다. 인터넷 카페에서는 물가가 폭등했으니 음식을 한국에서 가져오는 걸 권한다는 글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환율이 치솟은 시기에 의무적으로 팁을 지급해야 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니 식비를 절감하기 위해 먹거리를 두둑이 챙겨가야 하느냐 마느냐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워싱턴에 이틀 머물렀다가 뉴욕으로 가는 일정이라 캐리어 무게가 25kg를 넘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추가 요금을 내면 괜찮지만, 그럴 거면 비용을 아끼려고 애써 음식을 싸갈 필요가 없고. 뭘 얼마나 챙겨가야 좋을지 계산하며 끙끙 앓다가 무게가 가볍고 가격이 매우 저렴하지만 든든한 한 끼가 되어줄 고체 된장국 블럭을 여럿 챙기기로 했다. 칼칼한 시래기 된장국에 달걀프라이만 있어도 밥 한 공기 뚝딱일 테니. 그렇게 된장국으로 식비를 아끼는 대신 뉴욕에서 이 음식을 꼭 먹으리라 다짐했다.
그건 바로바로바로바로…… 스테이크와 햄버거.
음.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괜찮은 스테이크를 파는 레스토랑이나 햄버거집이 널려 있는데, 뉴욕에 가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이 스테이크와 햄버거라니. 뉴욕까지 가서? 그래도 그럴 만한 이유가 나름 존재한다.
여행할 때 음식은 내게 큰 고려 사항은 아니다. 나는 인스턴트와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사람이라 고급재료의 맛을 알아보지 못하며 낯선 음식을 어쩐지 두려워하고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은 억지로 먹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지 음식을 먹는 행위가 내 여행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뉴욕에서 못 먹는다 해도 크게 아쉬울 게 없는 그 음식을 그래도 꼭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건 일말의 기대감이었다.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가 좋고, 소고기패티버거보다는 치킨패티 버거가 좋은 내 선호도를 바꿀 만한 음식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 기대감을 갖고 나는 두 군데의 스테이크집과 세 군데의 버거집을 방문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게에서 맛본 스테이크과 버거는 맛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간 가게들보다 더 맛있는 레스토랑과 버거집이 뉴욕에 많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곳을 찾아갔다면 어쩌면 내 입맛이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만한 열정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나는 뉴욕의 비싼 물가에 매일 매일 깜짝 놀라는 중이었고, 뒤늦게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팁 때문에 헷갈려서 당일에 쓴 비용을 정확히 기록하는 걸 그만둔 상태였다. 계좌에서 줄줄 새어 나가는 돈을 보고 있으면 내 입맛이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위해 맛있는 스테이크집과 버거집을 찾아봐야겠다는 열정이 샘솟을 리 만무. 생각해 보니 돼지고기와 치킨패티버거를 좋아하는 내 입맛을 굳이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숙소 앞의 피자집과 5분 남짓 거리의 베이글 가게에서 맛보는 내 손보다 더 커다란 조각 피자와 대파 크림치즈 베이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얼마나 다행인가. 저렴한 음식에 커다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도 가난한 여행자에겐 엄청난 복임을 알았다. 걷는 걸 좋아하는 것도!
나는 걸어서 목적지까지 1시간 이내라면 대중교통을 타지 않고 일부러 걷곤 했다. 뉴욕에서는 이어폰도 거의 끼지 않았다. 그 어떤 멜로디도 뉴욕 길거리의 소음보다 나를 들뜨게 하지 못했으니까.
거센 비만 아니라면 비 오는 날도 걷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더 모건 라이브러리&뮤지엄에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뉴욕에서 한 달을 지내다 보면 몇 번씩 반복해서 만나는 길이 생긴다. 걸었던 길을 또 걷는 것도 좋았지만, 아직 걸어보지 못한 거리들도 여전히 많았기에 그날은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도로를 택했다.
명품숍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며, 어쩐지 이 도로의 건물들은 더 고풍스럽게 느껴지는데 착각인가 아닌가 갸웃거리며, 비가 와도 운치 있는 뉴욕의 거리가 한 달이 다 되어가도 질리지 않아서 한국에 돌아갔는데 뉴욕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면 어쩌지 미리 걱정도 하면서 걷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사람들이 멈춰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쓱 보고 그대로 지나쳤다가 다시 뒤돌아 걸어서 트럭에 적힌 글자를 확인했다.
아니, 그 버거 트럭이잖아! 햄버거 맛이 거기서 거기고, 사람마다 입맛이 조금씩 다르니 어느 가게가 최고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한국의 유명한 백 사업가님이 추천했으니 한번 먹어는 봐야지 하고 생각했었던 그 버거 트럭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쩌지. 날이 화창했으면 버거를 포장해 근처의 센트럴파크에 가서 먹으면 되는데, 하필 비가 오는 날이었다. 잠시 멎긴 했으나 앉아서 버거를 먹을 만한 곳은 다 젖어 있었다. 볼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거를 사고 가는 건 동선 상 어려울 듯했고, 그렇다고 이 버거를 안 먹고 가긴 아쉬운 기분이 들 것 같고. 어쩌지 어쩌지.
태연히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발을 동동 구리며 고민하다가 결국 버거를 시켰다. 그리고 포장된 버거를 들고 센트럴파크로 향했다. 평소라면 사람들이 앉아 쉬거나 책을 읽거나 음식을 먹거나 했을 벤치들은 죄다 텅 비어있었다.
나는 푹 젖은 벤치를 물끄러미 보다가 가방을 열어서 티슈를 꺼냈다. 보부상처럼 가방을 무겁게 다니는 보람이 있었다. 벤치의 물기를 조금 없애고는 자리에 앉았다. 검은 옷을 입었으니 엉덩이가 젖어도 티가 덜 나 괜찮을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야외에서 먹는 햄버거라니. 젖은 벤치에 앉아 먹는 햄버거라니. 한국에서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엉덩이쯤은 젖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비가 오는 날이지만 밖에서 햄버거를 먹고 싶은 기분. 그래도 기분이 좋을 거 같은 기분. 그러고 싶은 기분.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여행이 왜 좋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많이 받지만 이렇게 대답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날로 인해 나만의 대답이 생겼다.
비 오는 날 젖은 벤치에 앉아 햄버거 먹고 싶은 기분을 느끼려고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걸, 일상의 장소에서는 해볼 마음이 들지 않는 걸 하고 싶어지는 기분을 느끼는 게 여행이었다. 뉴욕에서는, 새로운 경험 이전에 어떤 기분을 먼저 느끼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뉴욕에서는 일상에서는 한 번도 못 느낀 기분들을(느끼고 싶다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많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뉴욕에 더 머물고 싶어졌다. 뉴욕에 있는데도 뉴욕을 벌써부터 그리워하며 아쉬워하며 작별을 안타까워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 한국에서는 여전히 치킨패티버거만 시킨다. 미국에서 치킨패티버거는 버거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데, 내게는 치킨버거든 치킨샌드위치든 어쨌든 치킨패티가 최고다. 그래도 가끔 이날 먹은 버거가 떠오르곤 한다. 어떤 맛이었는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 벤치에 앉은 엉덩이가 젖어들던 감촉은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