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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이월 Sep 08. 2022

미국 스타벅스에서 이름 말하기

뉴욕에서는 누구든 될 수 있다.

워싱턴의 한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자 직원이 이름을 물었다. ‘영’이라고 말해주고는 Y,O,U,N,G 철자를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나는 오랜만에 ‘영’이 되었다.




이름에서 처음 ‘은’을 뺀 것은 호주에서 살 때였다. 외국인은 ‘은’을 발음하기 어려워한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그들을 위한 배려로 일시적으로 ‘영’으로 살았다. 여태껏 ‘은영’으로 살았지, ‘영’으로는 살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이름은 낯설고 거리감이 있었다. ‘영’이라고 불릴 때마다 내 이름으로 인식하지 못해 잠깐의 정적 후에야 대답을 하곤 했다.


발음하기 쉽게 ‘영’이라고 부르라고 했으나 나는 가끔은 ‘용’이 되기도 하고, ‘연’이 되기도 했다. 어차피 모두 나의 진짜 이름이 아니니 ‘영’은 ‘용’이나 ‘연’이나 마찬가지였고, ‘영’으로 불려야만 하는 마땅한 이유가 없어서 오래지 않아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일 년은 ‘레이’로 살았고, 이 년은 ‘조이’로 살았다. 호주를 떠난 뒤에 나는 다시 온전히 ‘은영’이 되었다.


워싱턴행 비행기에서 김사과 작가의 『설탕의 맛』을 읽었다. 대학 시절 김사과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나도 과일 이름을 넣어 필명을 지어볼까 고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최초의 이름이기에 특별히 좋아하는 과일을 넣어 성(姓)에 붙여보았다.


고파인애플

고수박

고딸기

고바나나

고단감


하나도 어울리지가 않았다. 어쩌지. 아, 우리집은 농사를 지으니까 농작물 이름을 붙여볼까.


고무

고양배추

고마늘

고보리

고보리…… 보리, 고보리. 어감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고’ 대신에 평소 예뻐하던 ‘윤’을 붙여보니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윤보리. 언젠가는 그 이름을 갖겠다고 몇 년 전에 선언한 적이 있다. 여행 비용을 모으려고 잠시 일했던 공장에서 만난 중국 언니는 자신의 SNS에다가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윤보리 작가 파이팅!’이라고 쓰기도 했다.


이름이 예쁘다는 것과 그 이름이 나의 정체성을 담아내고 있느냐는 다른 관점의 문제다. 시간이 흐르고 정말로 필명을 지어야 할 때가 왔을 때, 나는 ‘윤보리’가 아닌 다 이름을 택했다. 그래서 ‘윤보리’라는 이름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남은 이름이 되었다.


최근 나는 필명으로 책을 냈고, 막냇동생은 개명을 했다. 둘 다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막내가 개명에 대해 오랫동안 고심하는 걸 지켜보았다.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어주었고, 그 사랑을 여실히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막내는 우리 자매와 사촌들 중에서 혼자만 돌림자가 없는 자신의 이름에서 외로움을 발견했다. 막내는 몇 이름을 두고 무엇으로 정할지 가족과 친구, 동료, 예비 남편과 대화를 나눈 뒤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아주 좋은 이름인데 꼭 바꿔야만 하니…….”


엄마는 막내의 본래 이름은 아주 좋은 이름이라며 새삼 그 이름에 담긴 뜻을 설명했다. 끝내 당신이 고른 새 이름도 막내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탈락하자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개명을 할지 말지 몇 년간 지지부진하게 고민했을 때와는 달리, 막내는 망설임 없이 다음 과정을 밟았다. 새 이름이 적힌 신분증과 면허증을 받기 위해 갖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바뀐 이름을 부지런히 알렸다.


스스로에게 새 이름을 부여할 때는 강한 의지가 수반된다. 새 이름은 어떻게 살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온 흔적이다. 그러니 삼십 년간 자신을 담아냈던 이름과의 작별이 구차하게 늘어져서는 안 된다. 새로운 출발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하기에 막내의 새 이름이 아직은 너무도 낯설고 어색하지만 열심히 불러주고 있다. 더는 외롭지 않은 인생을 살겠다는 막내의 결단을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막내의 개명이 확정된 날, 막내에게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엄마가 모처럼 전화를 걸었다. 일하고 있던 막내는 엄마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늦게야 무슨 일로 전화를 했냐고 묻는 막내에게 엄마가 말했다.


“새 이름으로 불러주려고 전화했지.”


소중한 막내딸을 위해 지은 이름을 빼앗긴 엄마는, 그래도 막내의 남은 삶을 담을 새 이름을 가장 먼저 불러주려 했다. 아직 자취가 없는 빳빳한 새 이름에 전 이름에 담겨있던 사랑이 쏟아졌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소리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생(生)을 부르는 것이다. 이름은 독자적으로 서 있지 못한다. ‘영’과 ‘조이’, ‘레이’가 나와 끝까지 거리를 좁히지 못했던 것은 그 이름 어디에도 내 삶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뉴욕의 스타벅스. 이름이 뭐냐고 묻는 직원에게 이번에는 ‘은영’이라고 대답했다. 철자도 말해주었으나 컵에는 내 영문과는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뉴욕의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는 스타벅스만 대략 일곱 개이다. 앞으로 뉴욕에 머무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스타벅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지친 다리가 잠시 쉬어갈 만한 공간으로 스타벅스를 대신할 곳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니 목을 축일 커피 한 잔을 주문할 때마다 이름을 말해줘야 한다.


아차. 그러고 보니 나는 여행자다. 물론 내 삶에서 여행만 따로 떼어놓고 ‘나’와 ‘여행자’ 두 존재로 완벽하게 분리하기는 불가능하지만, 한 달만 뉴욕에 머물고 떠날 여행자로서 삶에 대한 무거운 고민 없이 여러 이름을 가질 기회가 있는 것이다.


뉴욕에서는 누구든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다음에 스타벅스에 가게 되면, 그땐 오랜만에 ‘윤보리’를 소리내 볼까 한다.        


             

+ 가고자 했던 카페의 좌석이 만석인 관계로 이 글은 맨해튼 2nd Ave와 E 80st가 인접한 스타벅스에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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