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Number 01. 내 등에 기대(등대) #1
나는 왕따였다
내가 왕따였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기까지는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용기가 필요했고 수없이 많은 밤을 고뇌와 두려움으로 지새웠다. 그러나 더 이상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은 남이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나 걱정으로 멈춰서 있고 싶지 않다. 걱정, 불안, 두려움을 이겨내고 나아가야 한다.
나는 왕따였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나를 붙들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켜주신다며 눈물을 훔치던 엄마를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부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는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웠고 설상가상으로 어린 동생이 아팠다.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말이지만 당시에는 교복을 사는 돈마저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집에 희망이었고 내가 받아온 성적표는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떡볶이 먹는 것이 너무 좋았고 연예인을 좋아하던 평범하디 평범한 학생이었다. 다만 조금 독특한 점이 있었다면 옳은 것 옳다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정도..
그러나 평범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을 째려보았다며 일방적으로 사과를 요구하던 선배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선배의 사과를 거절한 것이 내 학창 시절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일이 될 줄 알았다면 형식적인 사과쯤이야 수백 번도 더 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런 것을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부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말했을 뿐인데..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린 듯했다.
괴롭힘
십여 명이 넘는 다수의 학생이 나 하나를 빙 둘러싸고 모욕적인 말들과 욕과 비난을 퍼부었다. 아무도 그것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선배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려웠던 동급생 친구들은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처럼 나를 쳐다봤고 재미있는 가십거리처럼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급식소에 갈 수도 없었다. 우연한 부딪힘을 가장한 고의적인 충돌로 내 교복에 국물이 쏟아졌고 욕설과 조롱 섞인 비웃음이 날아왔다. 선배들이 사용하던 층에 있던 미술실을 향해 복도를 걸어가는 것은 지옥길처럼 느껴졌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의 바다가 내 앞에 열려 있었다. 내가 20 미터 정도 되는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욕을 해댔고 지우개나 종이비행기 같은 것들을 던졌다. 동급생 친구를 통해서 알았을 내 번호로 문자와 전화를 걸어왔다. 언어폭력. 문자를 읽거나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그것들이 나를 때리고, 밀치고,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가만히 있어도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아픈 동생 때문에 힘들어하던 엄마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참아내고, 감내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친구들이 있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라는 이름하에 만들어진 무리였을 뿐이지만 내게는 친구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그 친구들을 노는 애들로 비쳤지만 내게는 정말 고마운 존재였다. 내게도 친구가 생긴 것이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외면하지 않을 의리 있는 친구들. 나도 그런 친구들을 갖게 됐다. 무리 안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 무리에 남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우리의 관계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포장했다.
고등학교 3학년, 나는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됐고 엄마가 아팠다.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던 엄마. 엄마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그런 엄마가 아팠다. 나는 아픈 엄마를 위해서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괴롭힘도 다 감내하고서라도 공부에 몰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떨어진 성적을 올리는 것, 좋은 대학을 가는 것 그것이 엄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엄마를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엄마를 파는 이기적인 행동이 됐다. 모의고사가 끝나는 날 노래방이 아니라 학원에 가는 것은 의리 없는 것이었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는 대신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친구들에게 있어서 나는 이기적이고 재수 없는 무리의 일원일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사이에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내 차례가 돌아왔다. 애써 외면해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은따였다. 내가 자습 시간에 잠깐이라도 졸고 나서 눈을 뜨면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친구들이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혼자 집에 걸어가야 했다. 내가 밥을 빨리 먹든 천천히 먹든 나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다. 대화에서 소외됐고 함께하는 모든 것에서 제외됐다. 금은 틈이 됐고, 그 틈은 벌어져 갔다. 더 이상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내쳐졌는지 내 발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됐다. 친구라는 믿음에서 털어놓았던 이야기들이 화살이 되어 돌아왔고, 배신자를 처단하는 듯한 괴롭힘이 이어졌다.
고독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담임선생님뿐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아이를 중학교 때부터 보아온 분이셨다. 그 아이가 주도하는 무리에서 한 명이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 그 아이가 내게 어떤 행동을 할지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도움을 갈구하면서도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두려웠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불러서 내 이야기를 하면 더 큰 보복이 되어 돌아올까 두려웠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하루 있다. 지루한 비가 이어지던 장마의 어느 날. 나는 어김없이 혼자 급식소에 갈 용기가 없어 교실에 남아 있었다. 선생님이 다가와 물으셨다. "왜 밥을 먹으러 가지 않았니?" 나는 대답했다. "배가 안 고파서요.." 사실 나는 배가 너무 고팠다. 정말 너무 고팠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급식소에 혼자 가는 것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괴롭힘을 당할까 봐였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한 가지 더 질문을 하셨다. "요즘 무슨 일 있니?"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 정신 좀 차려라. 요즘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니?" "................"나는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아무 대답이 없는 내게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고 교실을 나가셨다. 혹시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랑 다툰 것은 아닌지, 혹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으셨고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습 시간이 돌아왔다.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공간이 너무 무서워서 복도에 있는 신발장 위에 걸터앉아 책을 봤다. 고독했다. 창밖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듯한 비는 운동장의 물웅덩이들을 만들고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몸을 조금 더 기울이면 이 모든 게 끝날까?
자살처럼 무시무시한 생각이 아니었다. 죽음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 고통을 끝내고 싶은 간절함일 뿐이었다. 헛웃음이 났다.
그날 우산을 쓰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비를 맞았다. 얼굴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이 계속 흘렀다. 현관문 앞. 심호흡을 했다.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재빨리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나왔어!" 최대한 쾌활하게 말했다. "비 많이 맞았어! 얼른 씻고 나올게!" "우산 안 가져갔었어? 전화하지.." 등 뒤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나는 교복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세면대 물을 틀고 샤워기도 틀었다. 양쪽에서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울음이 터졌다. 울고 또 울고 토해내듯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지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울었다.
언어폭력
어느 누구도 나를 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이는 내가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였다. 우리가 공유했던, 우리가 친구이기에 말할 수 있었던 것들은 조롱이라는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가슴에 와 박혔다.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문자를 보는 것이 두려울 만큼 무시무시한 말들이 핸드폰 액정을 채웠다. 이름 모를 선배들로부터 날아왔던 무작위의 욕설과는 다른 언어폭력이었다. 엄마를 조롱하고, 가족을 조롱하고, 나의 꿈을 조롱하는.. 철저히 가슴을 후벼 파는 말들로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아이는 항상 다리를 떨었다. 모의고사를 치면 늘 내 대각선에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떨었다. 멈추고 싶었다. 시험 칠 땐 다리를 떨었고, 쉬는 시간이면 그 자리에 무리들을 모아서 나를 욕했다. 들으라는 듯 말했다. "우리 학교는 걱정 없겠네! 친구도 버리고 엄마도 팔아서 공부하는 년이 있는데 서울대는 그냥 가겠지." 뻔히 들리는 조롱에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못 들은 척 책을 봤다. 읽고 있는 어떤 글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내 모습이 수치스러웠다. 시험이 시작되면 내가 들었던 조롱과 욕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귓속에서 계속해서 재생되고 또 재생됐다. 나는 내가 들었던 뾰족하고 아픈 말들을 수백 번, 수천 번 다시 들었다. 시험에도 공부에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수능을 망치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렀고 수능이 다가왔다. 참아내면서 겨우 버텨왔던 내게 수능은 마지막 희망이자 탈출구였다. 나는 시험장에 다리를 떠는 사람이 있을까 봐 너무 두려웠다. 매번 모의고사를 맨 뒷자리에서 치던 나였지만 수능 시험장에서는 앞에서 세 번째 줄이었다. 너무 좋았다. 그러나 시험 날 얼굴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대각선에 앉아서 다리를 떨었다. 그 아이와 전혀 다르지 않은 폼으로. 나는 수능을 치고 있는데.. 마치 모의고사를 치는 듯했다. 귓속에서는 계속 괴롭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선 안될 그런 말들이 끊임없이 울렸다. 울고 싶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뛰쳐나가버리고 싶었다. 나는 이런 핑계 들로 수능을 망쳤다.
천장만 보고 있었는데 날이 샜다. 그런 밤이 이어졌다. 내 탈출구가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엄마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지독하게 괴로운 일이었다. 스스로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포였다. 나는 말을 잃었다. 말이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가 없었다. 학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학교에 가서 날 이렇게 만든, 나를 괴롭힌 애들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의지도 내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청소년 상담전화 1388 전화를 걸었다.
맞다. 살고 싶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두려움과 걱정과 불안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과 희망을 안고 살고 싶었다. 엄마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걷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희망을 잃은 듯 보였다. 나는 재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수능을 다시 치기 위한 재수가 아니라 다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희망, 다시 살기
재수 생활이 시작됐다. 다시 살기 위한 희망의 날들이 시작됐다. 후회 없을 만큼 공부해보고 싶었다. 남을 탓하고 스스로를 탓하는 결과를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엄마와 약속도 했다. 공부는 힘들었고, 시험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적어도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다리를 떠는 사람이 있으면 고통스럽다던가,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으면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 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는 등의 트라우마에 시달렸지만 그 정도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글로 위로를 받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글을 쓰는 습관을 갖게 됐다. 짧은 단어부터 긴 글까지.. 무작정 썼다.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어느 날 문득 글이 나를 위로해주고 있음을 알게 됐다.
글은 내게 치유였고, 위로였고, 희망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위로를 받았다. 나의 글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다. 내가 받은 위로를 나누고 싶었다. 다른 누군가의 상처도 함께 치유하고 싶었다. 나는 글이 갖는 힘을 믿었다. 그래서 재수를 하는 내내 생각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다. 문학이 됐든 수필이 됐든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국어국문과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주말이면 김밥을 사서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운동장을 보면서 혼자 식사를 하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다녔던 곳이었다. 8살, 초등학생의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을까?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고 그런 것들을 글에 담았다. 그곳은 위로의 장소였고, 사색의 공간이었으며, 추억의 장이었다.
수능이 끝났다. 나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새롭게 시작될 생활을 꿈꾸며 들떠있었다. 수시는 모두 국어국문학과를 지원했다. 그러나 결과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정시가 남아있었고 원서를 쓸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당연히 국어국문과를 생각하던 나의 진로를 단숨에 바꿔버릴 뉴스를 보게 됐다.
중학생 자살사건
그해 12월 나와 같이 학교폭력과 따돌림으로 힘들어하던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언론에서는 중학생 자살사건을 연일 보도하며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앞다퉈 문제삼았다.
마음이 아팠다. 아프다기보단 마음이 저렸다. 나는 그 친구와 나를 동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학생이 다녔다던 A중학교. 나는 A고등학교 졸업생이었다. 그 친구 가세상을 떠난 12 월 20일.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나는 살아있어서 생일을 맞이했는데.. 그 친구는 그 날 세상을 떠났다.
뉴스에 A중학교 교감 선생님이 나오셨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으나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수업을 들었던 분이셨다. 교감선생님께서 "자살한 애 영웅 만들 일 있습니까? 다른 애들이 멋있게 보고 뛰어내리면 어떡하려고 책상에 꽃을 놓아둡니까?"라고 하셨다는 기사 역시 봤다. 교감선생님께서는 담임 선생님은 아니셨지만 수업을 들으면서 참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던 분이셨다. 그래서 더 많이 놀랐다.
선생님들께서 그 친구의 집을 방문하셨고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울고 계신 모습을 봤다. 나는 그 모습에서 우리 엄마를 봤다. 내가 만약 일 년 전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우리 엄마가 저렇게 울고 계셨겠지.. 우리 엄마는 딸을 잃었을 텐데.. 우리 엄마는 희망을 잃었을 텐데.. 우리 엄마는 세상을 잃었을 텐데..
마지막으로 탔던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쪼그려 앉아 눈물을 훔치던 그 친구의 사진을 봤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두려웠을까.
눈물이 났다. 나는 그 쓸쓸한 뒷모습에서 나를 봤다. 일 년 전,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가던 내 모습이 겹쳤다.
사명
나는 누구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안다. 내가 그런 선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어 봤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이런 경험을 가진 교육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책으로 읽어서는 느낄 수가 없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공부도 그럭저럭 해봤고, 노는 학생으로 보이기도 해봤고, 따돌림도 당해본 나 같은 사람도 한 명쯤은 교육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적으로 너무 힘이 들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도 하나 정도는 교육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명만이라도 나를 통해서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도울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죽을 듯이 힘들었던 지난날의 순간들을 그저 흘려보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의 경험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런 고통의 순간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서 사명의식을 갖게 됐다.
대입 원서 마감 며칠 전에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사범대에 진학해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평범하게 순탄하게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셨겠지만.. 나는 쉽지 않은 길이라도 그 길을 가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학교폭력으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멘토링, 교육 봉사, 강사 등을 통해서 여러 아이들을 만났다. 이런저런 고민을 가진 각각의 인격체들. 작든 크든 고민을 안 고있지 않은 친구들은 없었다. 교생실습 때는 내게 따돌림을 고백한 아이도 있었다. 옆 반에서 소외당하는 아이도 봤다. 나는 교생 주제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나는 그곳에서 회의를 느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가진 경험을 어떻게 써야 가치 있는 삶의 경험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아이들 한 명이라도 도울 수 있을까?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을지라도 조금의 위로와 조금의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실천을 해야 한다. 그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고민했다.
청소년 심리 지원 사업
이것저것을 고민하다가 상담을 떠올리게 됐다. 괴롭힘으로 힘들었던 학창 시절 내가 가장받고 싶었던 것은 심리상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따돌림에 관해 말하지 못했던 내게 한 번에 몇 만 원이 넘는 상담비용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지난 순간을 떠올리면서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다른 친구들이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상담은 치료이기 이전에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상담을 제공할 수 있는 나름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후원을 해주실 분을 찾게 되면서 구체적인 여러 방안을 생각했다. 전문 상담 사분을 모시고 학생들에게 심리 상담을 제공하는 것을 구상했다. 상담비용은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학생들은 무료로 상담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구상하는 것들을 글로 풀어서 쓰다 보니 사업 계획서라는 것이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