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월 Aug 04. 2017

택시 운전사

#진실을 향해 달렸던 택시

스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1980년 5월, 서울 택시운전사. “광주? 돈 워리, 돈 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은 외국 손님을 태우고 광주에 갔다 통금 전에 돌아오면 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는 거금 10만 원을 준다는 말에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영문도 모른 채 길을 나선다.   

 

어떻게든 택시비를 받아야 하는 만섭의 기지로 검문을 뚫고 겨우 들어선 광주. 위험하니 서울로 돌아가자는 만섭의 만류에도 피터는 대학생 재식(류준열)과 황 기사(유해진)의 도움 속에 촬영을 시작한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만섭은 집에 혼자 있을 딸 걱정에 점점 초조해진다. 다음날 날이 밝자 즉시 서울로 향하던 만섭은 고민 끝에 차를 돌린다. 광주로 돌아간 그는 참혹한 진실을 마주한다. 재식을 비롯한 수많은 희생자들의 모습을 본 그는 피터에게 꼭 진실을 알려주길 부탁하며 황 기사와 많은 광주 시민들의 도움으로 피터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광주를 취재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태운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김사복의 택시는 진실을 향해 광주로 달렸다.


진실, 그리고 역사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미군의 지휘를 받은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계엄군에 의해 진압당한 이후 5·18 민주화운동은 한때‘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하기도 했으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1996년에는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에는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 묘지가 국립 5·18 묘지로 승격되어 그 명예를 온전히 회복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동력이 되어 민주주의 쟁취와 인권 회복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시대’ 18년의 종말과 민주주의의 여명

김재규 현장검증(박정희시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사 제공

1961년 5월 16일, 군부가 무력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권을 찬탈한 군부의 중심엔 일제 강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 군소위로 임관한 경력을 지닌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 값싼 노동력과 농어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수출 중심의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으로 개발독재가 이뤄졌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분야의 수많은 불균형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국민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폭압 성을 더해가던 군사독재는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쳤다. 결국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에 의해 죽게 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박정희의 사망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여명으로 받아들였다.


민주주의의 여명을 짓밟은 ‘12·12 군사정변’과 ‘5·17’ 계엄 확대


그러나 박정희가 사망한 후,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반하여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 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80년의 봄’이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하였고, 거리시위를 계획했다. 이런 시위의 조짐을 감지한 전두환 중앙 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다.

5월 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5월 15일 서울역 앞 집회는 그 정점을 이뤘고, 그날 밤 신현확 국무총리는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에 반발한 시위대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고,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시위는 서울뿐만이 아닌 광주에서도 전개되었다.

5월 14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촉발된 5·18 민주화운동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는 많은 이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신군부는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의 중심세력이라 여겨 연금하고 구금했다. 또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이때, 전북대학교에 주둔한 계엄군에 의해 이세종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다.


계엄군의 증파와 민주화운동의 본격화

경찰병력이 시위군중에 밀리기 시작하자 금남로에재투입된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5월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 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19일 오후 4시 30분경,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도 19일에 사망했다.


20일 오전 8시경,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오후 6시 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 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 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시민군의 등장, 철수하는 계엄군

5월 21일 오전 2시, 이윽고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되었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고,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말미암은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전 8시경, 계엄군 사이에서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하여 군인 다수가 사망하기도 했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계엄군은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신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점차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되었고 이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다.

결국, 오후 5시 30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전남도청을 지켰던 사람들과 계엄군의 재진입

그러나 5월 26일,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다.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했고, 간신히 하루를 버텨냈다.  항쟁 당시 광주는 무정부 상태였지만 시민들이 구성한 수습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내고자 했다.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 도청을 사수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있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시신으로 남겨졌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백 29구의 장례식

‘폭도’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통제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평범한 시민

낡은 택시 한 대가 전 재산인 택시운전사 김만섭은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는 택시비를 벌기 위해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 채 외국 손님을 태워 광주로 향한다. 그가 광주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평범한 시민이었다. 가장이자 아빠인 소시민 택시운전사 황 기사와 평범한 광주 대학생 재식.


이 평범한 시민들은 양심과 상식, 인간의 도리 면에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비장한 사명감이나 신념 이전에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맞서서 사람으로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광주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쏟아져 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다. 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룬 광주시내 각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광주시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헌혈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데 평범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됐다. 평범한 이들의 희생을 폭도로 규정한 것에 대하 내가 분노를 표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시민들의 희생.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쉽게 용납될 수 없는 문제다. 

감독, 장훈
"당시 위르겐 힌츠페터는 일본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의 상황을 듣고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광주에 취재를 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한국의 광주까지 오게 했을까? 그리고 우연히 그 길에 동행한 평범한 택시운전사는 그곳을 함께 다니며 무엇을 보고 겪었을까? 너무도 평범한 서울의 택시기사 만섭의 눈에 비친 시대의 모습과 작은 한 소시민의 마음속의 격랑을 따라가면서, 역사는 위인들로 인해 이뤄지는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선택과 용기가 모여서 이뤄져 가는, 멀리서 조망한 벽화가 아닌, 가까이서 들여다본 세밀화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들이 만섭의 택시에 함께 타고 가면서,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은 계기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훈- 

나는 관객으로서 감독의 바람대로 영화를 본 것 같다. 낯선 외국인 특파원의 시각을 따라가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역사적 진실을 마주한다. 평범한 이들의 희생과 그들의 열망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1980년 5월의 광주를 보고 있자니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우리 옆에 있는 누군가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내가 만약 저 시대를 살아갔고 그와 비슷한 일을 겪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 역시 내 가족, 내 이웃,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함께 싸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어떤 이념적인 논쟁도 정치적인 계산도 아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연출에 감탄했던 부분이 있었다. "언론은 진실을 말하라."는 현수막이 문득문득 스크린에 등장한다. 영화에 집중하다가도 그 문구가 눈에 보이면 뜨끔하곤 했다. 나는 이것 역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진실과 사실을 보도해야 할 언론.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 사실이고 진실일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론 언론이 진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만섭이 서울로 돌아가려다 국숫집에 들러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 여자는 광주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며 계엄군이 시민들을 고립시켰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른 손님들이 뉴스에서 이르기를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며 뉴스가 진실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주인 여자는 그저 그렇구나 하며 수긍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만섭의 표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진실에서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위르겐 힌츠페터

“내 눈으로 진실을 보고 전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용감한 한국인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와 헌신적으로 도와준 광주의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택시운전사>의 모티브는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3년 제 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은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수상 소감이 담긴 신문 기사 한 줄이었다.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대한민국’으로 계엄 하의 삼엄한 언론 통제를 뚫고, 유일하게 광주를 취재해 전 세계에 5.18의 실상을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그는 한 택시 운전사의 도움으로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를 보면서 올바른 기자란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하는 가를 살펴볼 수 있었다.                    

한겨레신문, 2003.12.5 ‘광주’보도로 제2회 송건호 언론상 받은 위르겐 힌츠페터

감춰지고 왜곡될 뻔했던 역사와 진실을 고스란히 담아냈던 그의 카메라에 감사를 표한다.   


진실을 외면하려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신파도 감성팔이도 없다. 그래서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영화였다. 진실을 향해 달렸던 <택시운전사>를 적극 추천한다. 


출처 : 

구글 이미지

네이버 영화(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6469)

http://www.518mf.org/sub.php?PID=0101

위르겐 힌츠페터 : 네이버 이미지 검색  



매거진의 이전글 판도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