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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낌 Dec 17. 2017

9일, 스페인 감자전

Logrono - Ventosa

 20km를 순식간에 걸은 느낌이었다. 6시 반쯤 출발해 12시쯤 마을에 도착하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걷는 일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음을 느꼈던 날. 컨디션이 좋았던 만큼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던 그런 날. 일행의 얼굴에 평소보다 더 많은 웃음이 스쳤던 날.



달걀찜이 먹고 싶어


어제 요리를 잘하는 Y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해준다고 했다.


"음... 여긴 요리하는 환경이 안 좋으니까 어렵지 않은 음식 중에 골라야 할 텐데.... 달걀찜?"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아도 뜻을 품은 사람은 어디서든, 어떻게 해서든지 방법을 찾게 되어있나 보다. 전자레인지에 돌릴 용기를 찾지 못했다. 고민하다가 들척지근한 과일주스를 다 마시고 난 뒤, 가지고 다니던 다용도 도구로 종이로 된 주스 통을 서걱서걱 잘라 전자레인지에 돌릴 용기로 사용했다. 주스의 단맛이 배어 달걀찜 맛 자체는 그저 그랬지만, 약속을 지키는 Y와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J에 대한 고마움이 더해져 달걀찜은 평범한 달걀찜이 아니게 되었다.



알베르게에서 식사를 청해 먹지 않았는데도 그릇을 선선히 빌려주는 모습에 고마우면서도 설거지할 양이 많아지는 게 미안했다. 빌린 접시에 음식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로그로뇨에 도착하자마자 보낸 2kg의 짐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괜히 가뿐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그래 봐야 2kg이면 조금 무거운 노트북 무게인데, 겨우 그거 빠졌다고 허리끈을 조이기 직전의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이 사라졌다. (그냥 2kg가 아니라, 10kg에 더해진 2kg이라서 그런가 보다.)





가끔은 사소함이 필요하다

종이 빨랫비누, 모래를 담으려고 가져왔던 500원짜리 플라스틱 통, 비상용 수저세트(밥을 손으로 퍼먹을까 봐..?), 종이가 구겨지는 게 싫어서 가져온 플라스틱 파일 등 별 거 아닌 것 같은 소소한 것들이 더해져 막중한 무게로 어깨를 짓눌렀다. 순례자의 배낭 무게는 인생의 무게라고 흔히 말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느라 인생이 피곤해지고 지금을 누리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조그만 부분에 신경 쓰고 집착하게 되면 시간을 온통 빼앗기고 해야 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고, 내 여유시간이 없어지니까 피로가 가중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큰 일을 하거나 이룰 때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읽고 쓰는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 생활에서 까칠까칠해졌던 내 표면이 읽고 쓰면서 제주도 몽돌처럼 맨들맨들해지고 예뻐지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나 조금 더 생각을 하고 싶어서 이번 여행을 떠났기에 일기를 쓸 줄노트 두 권과 시집 한 권을 챙겼다. 이 세 개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비록 무게가 가중되었다고 해도, 그 사소한 것들이 없었으면 매 순간 덜 느끼고 흘려보냈을 것 같다. 사소하더라도 꼭 필요한 건 무겁더라도 챙기면 (기대한 것 이상으로) 정신에 도움이 된다. 





멀리서부터 검은 소가 보이기 시작할 때 '오늘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했다. 마냥 멀게만 느껴졌고,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감이 안 왔다. 검은 소가 내게 위협을 되는 것도 아닌데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매일 같은 풍경과 반복되는 길을 걷던 것과는 달라서, 명확한 랜드마크가 되는 검은 소는 마음속의 이정표가 되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지나가면 뭐라도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상 지나가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뭔가 달라졌으면 하는 기대감이 담겼던 것 같다. 



다양한 풍경이 펼쳐졌다. 한쪽 면에는 울창한 나무가, 반대쪽에는 여느 때와 같은 포도밭이 있었다. J와 Y와 나는 사진을 찍었다.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며 포도밭 앞에 서거나 길바닥에 앉아서 사진을 찍고, 물통에 담긴 미적지근해진 물을 마시고, 그렇게 또 길에서 시간을 보냈다.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웠다. 


마을에 들어가선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바닥에 앉아서 쉬었다. J는 몸집보다 훨씬 큰 가방을 메고, 추워서 우비를 입은 내가 꼽추 같아보인다고 놀렸다. 그러자 곧이어 Y도 놀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왜 그런가 싶었는데 사진을 보니까 정말 그렇게 보이더라. 




페이스메이커



둘이 앞서 가서 나 혼자 뒤처질 땐, 내가 내 발로 스스로 걷는 길인데도 자꾸 자포자기하게 되는 심정이 되었다.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인데도, 옆에서 나란히 걷는 사람이 나 대신 걸어줄 수 있을 것처럼 의지하게 되었다. 누가 내 옆에 있건 없건 내가 내 두 발로 걷고, 내가 힘들면 쉬면 되는 길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되뇌었다. 


사람에게는 힘이 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걸 수도 있겠다. 피레네에서 처음 만난 J에게도, 스페인으로 휴가를 온 Y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 대신 이 길을 걸어주는 건 아니지만, 힘이 되어주는 그들이 있어서 혼자 걸어야 하는 이 길이 덜 외롭고, 의지가 되니까. 나도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스페인에서 먹는 감자전


Y와 J에게 감자전이 먹고 싶다고 했다. 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물기를 쫙 빼서 부친 감자전이 어렵다면, 얇게 채를 썬 감자에 치즈를 올려달라고 했다. 칼질도 하나도 못하면서, 감자 껍질 까는데도 한참 걸리면서 요구사항이 많다고 그들이 생각했을 거다. 그들도 먹고 싶어 해서, 한국에서부터 소중하게 가져온 라면과 감자를 사다가 감자전을 만들어 먹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식사를 그들과 함께해서 행복하고 즐거웠다. 


산책을 하고, 그네를 타고 성당을 한 바퀴 돌았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을 마치고 먹는 밥, 여유롭게 걷는 시간은 정말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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