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결국 편지가 아닌 일기를 썼다
올해 여름 나는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고 이슬아 작가님에게 한창 빠져있었다. 요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합인 윤이나, 황효진 작가님의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를 읽고 있다. 두 책의 공통점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라는 것.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다. 어릴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했던 일인데. 누군가와 편지를, 심지어 짤막한 카드나 쪽지를 주고받은 지 참 오래되었다. 요즘은 주로 결혼을 앞둔 친구의 청첩장 속 짧은 편지나, 회사에서 누군가가 고마움을 표시하며 건넨 작은 포스트잇 정도를 받는 것 같다. 물론 그것도 참 좋다. 하지만 수신자가 있는 긴 글을 쓰고, 또 내가 직접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친구들을 만났을 때 조금 취한 내가 이런 말을 했다. “나… 해보고 싶은 게 있어. 친구들이랑 교환일기 쓰는 거.” 그 자리에 있던 3명의 친구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그게 네 소원이라면, 할게.” 가까스로 한 친구가 말했다.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 소원이라면 할게. 내 친구들은 정말 착하다. 나는 소원까지는 아니라고 말하며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우리는 깔깔 웃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내 소원인지도 모른다. 내가 ‘하자’고 하면 누군가 바로 ‘하자!’고 해주길 기다렸는지도. 내게 그런 친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 그리고 실제로도 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혼자서 일기도 쓴다. 그런데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싶은 걸까. 잘 모르겠다. 그것도 내 편지를 받을 수신인이 없어서일까. 오늘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문장으로 쓰지 못한 편지를 대신하려고 한다.
편지를 써보기로 다시 결심한 건 코로나19의 한복판을 지나는 동안의 일이었습니다. 이전보다 서로 자주 만나지 못했고, 그 어느 때보다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요. 물론 모바일 메신저로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지만 어떤 말은 시간을 두고 긴 글로 옮겨야만 할 수 있다는 걸 아시잖아요. (p.12)
나는 이제 세계를 한국과 그 바깥으로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고요. 이제 내게 세계는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들이 존재하는 곳, 내가 사랑하는 여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며 안과 밖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도 말해주고 싶네요.
(중략)
그래서 지금은, 내가 있는 이곳이 언젠가 닿고 싶었던 어딘가라고 느끼고, 그러니 나 또한 “이제 반쯤은 바다를 건넌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요. (p.28)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p.53)
“네 이야기를 써, 너의 언어로. 무엇에 관한 것이든.” (p.54)
글로써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노력하는 것. 손을 내밀고, 실패하는 것. 훌륭한 것을 쓸 기회를 위해 괜찮게 쓴 글을 기꺼이 망치는 것. 그러니 때로는 실패하고 망치면서, 계속 편지를 써 볼게요. 어쨌거나 저에게는 저의 편지를 받고 읽어줄 수신자가 있으니까요. (p.55)
저는 조 마치를 작가여서가 아니라, 가난한 작가였기 때문에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략) 조는 그런 글을 쓰고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글을 썼기 때문에 베스와 바다에 갈 수 있었고, 그런 글을 썼기 때문에 정말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조는 그 글을 이렇게 표현하죠. “가족이 투닥대고 웃고 하는 이야기”, <작은 아씨들>입니다. 그러니 칭찬도 돈도 의미도 모두 희미한 상태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지금도, 과정이겠지요. (p.65~66)
10평짜리 분리형 원룸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 있을 때 나는 ‘혼자’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는지를 묻게 했죠. 그건 제가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원가족을 제외한 타인과 가족이라고 느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맺어본 일이 없고 필요 또한 느끼지 못하는 것이 내가 독립된 인간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애인, 연인, 파트너 등으로 통칭하는 친밀한 관계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어려움, 고통, 불편, 갈등을 겁내는 마음 때문일까요? (p.119)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