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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세동 Jul 03. 2023

경찰서 아이들 III

차세동 외전

청소년과 성인.

나에게 그 차이를 묻는다면, 나는 그들 삶에 채워진 선택의 비중을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어떤 집안, 어떤 배경,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는가에 따라 많이 다르겠으나,

절대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난 그 둘의 차이를 각자의 삶에 채워진 자의적인 선택의 비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많은 것이 결정된 채 태어난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부모.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경제력.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지역에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주변인들을 마주한다.

청소년 시기까지의 우리들은, 우리가 선택한 무엇인가 보다는.

태어나보니 결정되어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천천히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성인이 되기 전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업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독 청소년들에게 무조건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순간들 때문에 잘못된 선택에 빠져버리는 그들에게,

순전히 그들만을 탓할 수가 없다.


범죄소년들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무조건적인 비판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나는.

그들과의 3일을 준비하며 많은 고민과 걱정,

나의 감수성의 뿌리를 멀리 더 멀리 뻗어내며 많은 것을 헤아리고자 노력했다.




3일간 참 많은 이야기들이 나에게 닿았다.

당당한 모습 뒤에 숨겨진, 나를 만날 정도로 멀리 와버렸다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세상이 전부라는 믿음.
고개만 돌리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사실에 그들 스스로도 놀라곤 했다.
다른 누구보다 치열하게 스스로의 미래를 고민하는 모습.
세상 물정 모르는 공상처럼 상상하는 미래. 어느 철없는 소년의 생각과 닮았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다는 후회.
스스로도 감당되지 않는 현재와 미래.
다시 한번 쥐기에는 용기도 동기도 잃어버린 스스로의 시간.
불가항력적으로 펼쳐진 환경 속에 세상에 대한 분노의 뒷면.
부모님의 억압 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커다랗게 외치는 처절함.
반성하지 않았던 스스로의 모습에서 반성하는 스스로를 조우하는 반전.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미래를 풀어보려는 치열함.


'범법청소년들, 알고 보면 이래요!'와 같은 일반화된 견해를 내놓고 싶지 않다.

10명이 있다면 10가지 이야기가.

100명이 있다면 100가지 이야기가.

1000명이 있다면 1000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때로는 매체를 통해서, 때로는 실제로도.

'정말 못됐다' 싶은 청소년들을 만나기도 한다.


하나 바람은,

한 두 가지 사건이. 이들 모두를 대표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예방도 중요하고, 합당한 처벌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때로는 어른들의 잘못까지.

그들에게 책임 물어서야 되겠는가.


미성년자.

책임능력이 없는 사람들.

하지만 책임능력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행동에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영향을 끼친다.

때문에 미성년자의 행동일지라도 누군가는 그 행동에 책임을 지녀야 할 것이다.

책임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행동까지 모든 책임이 말소되어서는 아니 된다.

누군가는 그 책임을 나누어 가져가야 한다.

부모든. 사회의 책임 구성원이든.

하다못해, 미성년 본인도 온전히 모든 책임은 아니더라도.

미성년자로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만큼은 적정한 책임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책임범위를 넓혀가며 성인이 되는 것일 테지.


3일간의 시간, 나에게 닿은 이야기들은 그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같은 형태의 범죄라도, 그들 각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에 따라 많은 서사가 바뀌었다.

특히, 청소년인 이들에게 각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자신이 만들어갈 기회조차 없이 타인이 만들어버린 환경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자신을 방치하는 부모 아래에서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청소년'과

'유복한 환경 속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즐기고자 빵을 훔친 청소년'

빵을 훔쳤다는 이유로 같은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 정의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소년을 저지경까지 방치한 부모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학교폭력을 당해온 친구가 학교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행한 폭력'과

'학교폭력을 주도해 온 친구가 학교폭력의 연장선으로 행한 폭력'

같은 행위로 같은 처벌을 받는 것이 정의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학교폭력이 발생하여 곪는 동안, 주변의 어른들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범죄의 맥락이, 청소년들은 타의로 만들어진 맥락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여럿 신중하게 고려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

물론,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끝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꼭 해야 하는 작업이지 않는가.


특히, 그들이 그들의 맥락을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고,

사회적으로 그 제도와 분위기 또한 상당히 미비한 현실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본인에게 주어진 재앙과 같은 맥락을 바꾸려 힘쓴 위 주인공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씁쓸함은 깊이를 더한다.


고민을 더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결국 본질은 미성년자든, 미성년자가 아니든.

범죄에 대한 '정의로운 처벌'에 초점을 두게 된다.


소년범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살펴보면,

사실 그들의 나이가 문제라기보다.

그들의 파괴적이고 흉악한 행위들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커다란 기폭제인 듯하다.

오히려 '요즘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영악해', '요즘 14살이 옛날 14살이 아니야'와 같은 표시들은,

그들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질러서' 충격인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그들의 행동의 영향력을 인지하고서도 범죄를 저질러서' 충격인 듯하다.


즉 본질은,

'나이 어린 범법자'에 대한 분노라기보다,

'범법자'에 대한 분노에 있고.

유독 행동의 책임이 말소되는 '나이 어린 범법자'에게

그 분노가 형태를 달리하며 증오가 되어가는 꼴이다. 


그들이 촉법소년이든, 촉법소년이 아니든.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이라면, 그 사건이 피해자 중심으로 고려되기를 바란다.

애초에, 그들의 행위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촉법소년사건이든, 촉법소년사건이 아니든 일반이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은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촉법소년의 나이가, 촉법소년 사건이 뜨거운 감자인 이유는,

그들에게 이루어지는 행동의 결과가. 일반의 사건도 납득하기 어려운데,

특히나 더욱 지나치게 책임말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3일 동안의 나는.

그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에 함께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에 그들이 책임을 진다는 것.

그들의 존재자체가 잘못되었다 보다는,

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 행동에 피해자가 발생했다면, 누군가는 그 행동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온전히 지어야 한다고 일렀다.

그들의 맥락은 그들의 맥락일 뿐, 그들의 행동을 감싸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의 맥락은 이제 그들이 만들 것.

타인이 그들의 맥락을 지휘하게 두어

본인의 행동에 억울한 책임을 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들의 맥락을 그들이 만들어가는 경험은,

그들이 그들의 삶을 되찾는 과정일 것이며,

그것은 곧 내일을 기대하는 이유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재범을 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될 테지.


그다음의 이야기부터는,

소년들을 마주하는 내가 아닌,

범죄와 법을 마주하는 누군가가 현명하게 나서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3일이었다.


소년들의 범죄에 대해.

소년들의 맥락을 조금 더 고려하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만큼은 일반과 다르지 않은 무게의 책임이,

정녕 책임을 지녀야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소년들이 더 멀리 가기 전에,

우리 어른들이 찾아내야 하는 몫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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