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한 번째 편지

고맙습니다

by 박원진


오늘은 초반부터 몇 가지 문제가 있었어.
우선 새벽에 지진이 났었어! 같은 방을 쓴 프랑스인과 난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로비에서 자고 있던 주인은 우리를 유난스럽게 쳐다보며 여기선 지진이 흔하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근데 이게 신경을 안 쓸 강도가 아니야. 테이블 위에 물건이 떨어질 정도였거든. 그렇게 밤사이에 3번의 지진이 더 났고 그때마다 우린 잠에서 깼어. 또 다른 문제는 프랑스인인데, 우린 어제 카약을 같이 예약했거든. 근데 이 친구가 너무 게으른 거야. 지진 때문에 잠을 못 잔 건 이해하지만 내가 아침 산책을 하고 온 뒤에도 자고 있고, 겨우 깨워서 옷을 입혀 놨더니 이번엔 아침을 먹고 가겠다는 거야. 자긴 아침을 꼭 챙겨 먹는다고. 결국 아침 호수 풍경은 찍지 못하고 그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 그렇게 10시쯤 선착장에 도착했더니 눈앞에 1인용 배 두 척이 딱 있는 거야! 난 당연히 인레 호수처럼 큰 보트를 같이 타는 줄 알았는데 카약은 1인용 배였던 거지. 프랑스인과 난 물 위에 뜬 뒤 1분도 안 돼서 헤어졌고 그렇게 혼자 배를 타게 됐어.


처음엔 정말 좋았어. 지금 이 순간이 이번 미얀마 여행에 하이라이트구나 싶을 만큼. 넓은 호수에 나 혼자뿐이었고, 어느 정도 앞으로 나가자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이게 됐어. 눈에 익숙한 건물이나 사람, 도로나 길, 논밭, 자동차, 의자 무엇이 됐건 난 늘 무언가를 보면서 살았는데, 그 모든 것 대신 호수의 물결만 보였고, 마치 커다란 파란 종이 위에 나 혼자 그려져 있는 느낌이었어.
근데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노를 저으니 슬슬 힘이 빠지더라. 네가 카약을 타봤는지 모르겠지만 노를 젓는 건 엄청 요령이 필요해. 힘으로만 저으면 금방 지치고 또 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질 않아. 또 카약은 구조상 내 몸 하나 딱 들어가는 사이즈라 한 번 앉으면 육지에 배를 댈 때까지 일어날 수가 없어. 내가 준비해 간 물과 간식은 모두 뒤쪽 방수 칸에 들어 있어서 꺼낼 수가 없었고, 당연하지만 호수 위엔 그늘이 없으니 점점 몸이 익어가는 게 느껴졌어. 분명히 절까지 두 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절은 없고 끝없는 호수만 펼쳐졌어. 설상가상으로 소변까지 마렵기 시작하자 이건 다른 의미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 같더라. 난 그 상태로 다시 두 시간을 더 간 뒤에야 절에 도착했어.


사실 절에 대해 기억은 거의 없어. 화장실만 들렸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제일 가까운 육지로 이동했고, 식당 몇 군데 중 인부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 있길래 저기가 맛 집이겠구나 싶어서 들어갔어. 식당 주인은 내가 시킨 음식 말고도 과일, 과자, 음료수 등을 갖다 줬는데 단순히 내가 한국인이란 이유였어. 그녀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했고 한국말도 조금은 할 줄 알았어. 그녀 옆엔 나와 동갑인 오빠가 있었는데 술에 취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흥이 넘치는 사람이었어. 게다가 이름이 미치나 시장에서 날 도와줬던 ‘사이먼'이랑 같아. 미치나의 사이먼은 진중하고 형같이 느낌이었다면 지금 내 앞에 사이먼은 살짝 미친- 삶이 늘 즐거운 사람이야. 자기도 한국말을 할 줄 안다며 자기 동생을 ‘엄마' 난 ‘오빠'라 불렀고, 내게 미얀마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며 숟가락을 들고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어.(심지어 그는 노래를 엄청 잘했어) 그때마다 동생은 부끄러워하며 오빠를 말렸지만, 난 오히려 그가 좋고 편했어. 인간관계라는 게 실상 상대와 나의 거리를 상황에 맞게 조절하는 건데, 그는 스스럼없이 내가 사용했던 숟가락을 가져가 노래를 불러도 무례하지 않은 사람이었어. 타고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상대방과 자신을 우열관계로 보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기 이들의 특징이기도 해. 난 그의 경계 없음이 좋았고 또 부러웠어. 내가 잃어버린 능력이니 배우고 싶기도 했고.


심지어 난 그를 따라 나가 마을 구경도 했어.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며 여러 군데를 데려갔는데 막상 가면 전혀 사진 찍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서 따라다녔어. 그는 내가 술을 못 마신다는 거에 아쉬워했고, 난 그가 영어를 거의 못한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두 가지 모두 큰 문제가 되진 않았어.
그렇게 같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몇 시간이 지났고 서서히 해가 지려고 했어. 갑자기 확 막막해지더라. 아무리 올 때보다 빨리 간다 해도 3시간은 걸릴 테고, 저 넓은 호수는 완전히 캄캄해질 텐데 거기서 혼자 노를 젓는 건 낭만보단 공포였어. 내가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자기 배를 같이 타고 가자고 했어. 내가 "내 배는?”이라고 묻자 그는 몹시 재밌는 일이 생각난 어린아이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날 끌고 갔어.


sXSqGY5DkZKsYmsOyysuABDv2o0




맞아. 그는 내 카약을 자기 배에 실었고, 우린 정말로 같은 배를 타게 됐어. 카약을 옮기며 둘 다 물에 빠져서 옷과 신발이 젖었지만 우린 그 상황에도 많이 웃었어. 그렇게 그의 배로 인도지 호수를 돌며 사진을 찍었고 노을이 잔향이 다 사라진 후에야 숙소로 이동했어.
그가 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데 특별한 이유가 없었어. 이유가 없다는 건 조건이 없단 뜻이기도 해. 솔직히 난 이게 익숙지 않아. 주면 받고 싶고, 받으면 줘야 할 것 같아. 그런 내 마음의 근저엔 '내 것'이란 소유가 있다는 것 또한 알아. 하지만 사이먼은 그렇지 않았어. 그가 물속으로 들어가 내 카약을 들어 올릴 때, 그의 삶의 방식은 내가 살아온 방식과 전혀 다른단 걸 느낄 수 있었어. 사실 난 물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여행 내내 품었던 생각 '나도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를 또 마음속으로 하고 있는 게 우스워 따라 들어갔어. 비록 아이폰이 물에 빠져버렸고, 보트는 타는 내내 추웠지만 행복했어. 사이먼의 큰 보트 위에 내 카약이 쏙 들어가 있는 모습의 내겐 따뜻한 포옹처럼 느껴졌거든.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큰 배가 될 수 있다면, 조건 없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내 삶이 더 행복해질 거란 확신이 들어서 이걸 세 번째 소원으로 정했어.

보트를 운전하는 그에게 “제주 뗀 바레"라고 말했어. 미얀마어 중 유일하게 내가 현지인처럼 발음할 수 있고 또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이기도 해. 그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제주 뗀 바레"를 한국어로 알려달라 했어. 내가 “고맙습니다”라고 다시 말하자 그는 그 캄캄한 호수에서 아주 큰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외쳤어. 완전히 이상한 발음이었지만 이 낯선 나라에서 듣는 '고맙습니다'라는 참 따뜻했어. 사이먼은 그렇게 몇 번을 더 외치다가 이번엔 나에게도 따라 해 보라 했어. 사실 그가 소리 지를 때 나도 따라 하고 싶었거든. 근데 신기하게도 처음엔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 호수 위엔 그와 나 둘 뿐이니 눈치 볼 게 전혀 없는데도 말이야. 그는 취했고 난 안 취한 탓도 있겠지만, 소리를 지르려 할 때마다 목소리가 내 안에 어떤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어. 그리고 그 벽 또한 '나' 혹은 '내 것'이란 자의식이 세운 거란 느낌이 들었어. 나는 어떤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자의식이 이 캄캄한 호수 한복판에서도 살아있는 거지. 오늘 이 벽을 깨진 못하더라도 월담이라도 해보잔 마음으로 처음엔 작게 “고맙습니다"하고 입을 뗐어. 그렇게 말하고 나니 조금 전 사이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마음속 한 부분이 따뜻해졌고, 작은 소리로 몇 번을 더 뱉은 후 나도 사이먼처럼 크게 말할 수 있었어. "고맙습니다"

선착장엔 카약을 빌려준 보트 가게 주인이 나와 있었는데, 조금만 더 늦었으면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며 화를 냈지만 다행히 사이먼과 아는 사이라 좋게 넘어갈 수 있었어. 우린 사이먼의 집으로 가 그는 술을 난 차를 마셨어. 그의 방엔 여러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 언젠가 이곳에 다시 와서 오늘 찍은 그의 사진을 줘야겠단 생각을 했어. 밤이 늦자 그는 날 숙소 앞까지 데려다줬고, 우린 몇 번의 포옹을 한 다음에 헤어졌어. 내 몸엔 아직까지 그의 술 냄새와 함께 온기가 남아있어.

그와 헤어진 뒤 마지막으로 호수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물가로 나갔어. 이제 미얀마 여행은 다 끝났고, 이 아름다운 호수에 다시 오려면 적어도 몇 년은 있어야 할 거야. 하늘엔 별이 정말 많았고 또 신기할 정도로 가까이 보여서- 별과 나의 거리가 멀지 않게 느껴졌어. 지도를 볼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현재 내 위치를 아는 거잖아. 현재 내 위치에 점을 찍는 일- 돌이켜보면 몇 년 간 내가 꿈 없이 살았던 건 현재의 날 부정했고, 미워했고, 실패한 삶이라 단정 지었기 때문일 거야. 걸음은 먼저 한 발을 디딘 후 다른 발을 옮기는 건데 난 그 디딤 발을 늘 허공에 띄워 놓았기에 아무 꿈도 꾸지 못했던 것 같아. 하지만 지금 난 여기 있어. 호수 앞에 앉아 수많은 별을 보면서, 물결이 밀려오고 또 떠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순간이 내겐 하나의 시작점으로 느껴져서 "고맙습니다" 혼잣말을 했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른 번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