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듣고 싶은 말

두 번째 편지

by 박원진

비행기가 뜨는 순간 잠이 들어서 착륙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어.ᅠ꿈을 꿨는데 꿈속에서도 똑같이 비행기를 타고 양곤(Yangon)으로 가고 있더라. 가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더니 갑자기 숨을 못 쉬겠는 거야. 숨이 막혀 헉헉거리자 스튜어디스가 와서 안쓰럽게 쳐다보며 비행기 창문을 열어줬어. 손바닥 두 개만 한 창문을 여니까 연한 파란색 하늘이 보였고, 바람이 참 부드러웠어. 심지어 바람에도 파란 색깔이 묻어 있었어. 그제야 다시 숨이 트이고 호흡도 원래대로 돌아오더라. 그렇게 한참 동안 바람을 맞다가 잠에서 깨니 비행기는 어느덧 양곤에 도착해 있었어.


수영아. 네가 미얀마에 가봤을 수도 있지만 일단 이 나라에 대해 모른다 생각하고 편지를 쓸게. 그리고 네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나 풍경을 만나면 사진도 찍어서 같이 부칠게.

너는 내가 수많은 나라 중에서 왜 미얀마에 왔는지 궁금할 거야. 그 얘기는 차차 적을게.ᅠ오늘은 우선 차이나타운 쪽에 숙소를 잡고 하루 종일 걸어다녔어. 목적지 없이 다녔음에도, 하루 동안 본 크고 작은 파고다만 다섯 개가 넘어. 여기는 인구의 90퍼센트가 불교 신자라고 해. 상상이 되니? 한 나라의 인구 대부분이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니 정말 신기해. 그중 한 파고다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종교가 없고, 종교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도 있어. 그래서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 오기 전 거부감을 없애는 일부터 준비했어. 쉽게 쓰인 불교 서적을 읽고, 거의 매주 박물관에 가서 불교 관련 작품을 봤어. 다른 준비보다 종교에 집중한 이유는 인도 여행의 경험 때문이야. 힌두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인도에 갔고, 결국 지금까지 인도는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나라로 남아 있거든.ᅠ

불교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생기고 나니 사원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행위가 다르게 와 닿더라. 종교에 대한 극진한 예의로 느껴졌어. 맨발로 성전을 딛는 느낌은 어떤 걸까. 신의 몸에 혹은 마음에 내 살결이 닿는 기분일까.

혹시 사진을 찍지 못하더라도, 그저 그곳을 걷고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했어. 모든 것이 신비스러웠거든. 그런데 파고다 입구에 도착해서 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의 신비와 충격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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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엔 이 사진이 어떻게 보여? 처음엔 테러가 일어난 줄 알았어. 저 사람들은 기절하거나 죽은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 내가 기대했던 ‘신성함’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었어.ᅠ

파고다 안은 더 충격적이었어. 자는 사람은 양반이고, 가족끼리 돗자리를 펴고 앉아 도시락을 먹더니 담배까지 피우더라. 구석에서는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고(그래도 신에 대한 예의 때문인지 우산으로 가렸어). 그 광경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럴 거면 신발은 왜 벗어?’ᅠ

이런 식의 믿음이라면 90퍼센트란 수치가 놀랍지 않더라. 사실 종교를 갖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돈이 많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학벌이 있어야 하는 것도, 시험을 쳐야 하는 일도 아니지. 솔직히 이곳은 ‘성전’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아 보였어. 오히려 ‘시장’이나 ‘놀이공원’이라면 모를까.

처음과는 다른 의미로 신기해서 거의 3시간 동안 파고다를 열 바퀴 정도 돌았어. 한참 걷다 보니 기이해 보였던 장면 사이로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사람, 엄마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아이, 몇 시간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참선을 하는 스님이 보이더라.ᅠ그리고 멋진 할아버지를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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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쓰고 계신 모자는 내 모자와 바꾸고 싶을 만큼 멋졌어.ᅠ내가 처음에 할아버지를 사진 찍으려고 하자 카메라를 손으로 막으시는 거야. 실례했구나 싶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칠판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어. “이건 곧 지울 테니 새 걸 찍어.” 그러고는 뒤에 있는 새 칠판을 꺼내 보여주셨어.

설명을 들어보니, 신도들이 소원을 빌고 기부하면 칠판에 이름을 적어주는 것 같았어. 칠판 속 글씨는 읽을 수 없었지만 빽빽하게 적힌 걸 보면서 사람들에겐 소원이 참 많구나 싶더라.

옆에서 오랫동안 구경하고 있으니 할아버지는 “너도 소원 하나 빌어”라고 하셨어. 그런데 무엇을 빌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더라. 그래서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 할아버지는 웃으며 “오케이, 오케이”라고 하셨고.ᅠ

파고다를 몇 바퀴 더 돌면서 어떤 소원을 빌까 생각해 봤는데 모르겠더라. 떠오르는 건 많았지만 그게 정말 간절한지 묻는다면 내 대답은 “글쎄요”였어. 결국 소원이란 게 어떤 목표가 있을 때 생기는 거잖아. 하지만 목표 자체를 잊은 지 꽤 오래됐거든. 물론 돈도 많이 벌고 싶고, 더 좋은 카메라도 사고 싶고, 예쁘고 마음 통하는 여자 친구도 만나고 싶지만, 다시 한 번 그게 간절한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거야. “이뤄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몇 바퀴를 돌아 다시 할아버지 앞에 왔어. 이번에는 내가 여쭤봤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소원을 비느냐고. 둘 다 영어가 짧으니 대화가 잘 이뤄지진 않았지만 추측해 보면 대충 이런 소원이었어. 좋은 집, 아이를 낳고 싶다, 가족의 건강, 좋은 직장 등.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할아버지는 다시 “너는?”이라고 물으셨어. 나는 없다고 대답했어. 할아버지는 웃으며 “괜찮아”라고 하셨고. 딱히 더 할 말이 없어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파고다 밖으로 나왔어.ᅠ

양곤 시내를 걸으며 사진을 몇 장 더 찍었어. 이 도시는 무척 뜨거워. 어느 곳이든 활기가 넘치고, 사람들 몸은 활짝 열려서 본래 신체보다 더 크게 보여. 왜 어떤 도시에 가면 축 처진 어깨에 초점 잃은 눈빛의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 있잖아. 그에 비해 양곤은 모두 가슴에 용 한 마리씩 품은 듯 활기찬 곳이야.

시장 상인의 큰 목소리, 고기를 자르는 정육점 주인의 팔뚝, 국수를 한 움큼 입에 넣는 아저씨, 어깨 위로 커다란 짐을 올린 사람들…. 그 틈을 지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낯설어 보이는 게 아니라 내가 낯설게 느껴졌어.ᅠ잠시나마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곧 ‘내가 저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바뀌더라. 또 몇 년 동안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살아왔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어.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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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쪽으로 걷다 보니 강이 나왔고 마침 노을 질 시간이었어. 수십 척의 배 위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서 누군가는 양곤을 떠났고, 누군가는 양곤으로 돌아왔어. 강물에 하루가 다 담겨 있는 것 같더라. 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모여 강물이 이뤄지고, 또 많은 기도가 모여 노을이 되는 게 아닐까. 그 순간 얼마나 강으로 뛰어들고 싶었는지 몰라. 왠지 그러면 나도 분위기에 섞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어. 그래도 고마웠던 건 노을빛이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나도 같이 비춰줬다는 거야.ᅠ

수영아. 내게 소원이 없다는 말에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사는 건 아니야. 간절했던 걸 얻지 못한 뒤로 다시 새로운 무엇을 소망하는 게 두려워. 더는 두려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이게 현재를 가장 안전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어놓은 금 안에서 사는 것. 그런데 아까 본 노을은 이 금이 상관없다는 듯 비추더라.

수영아. 너도 아까 그 할아버지처럼 괜찮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오늘 노을을 보면서 계속 중얼거린 말도 “괜찮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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