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유

첫 번째 편지

by 박원진
돈므앙공항_3.jpg


수영에게.

공항 의자는 왜 하나같이 딱딱한 걸까. 나는 지금 태국 돈므앙 공항에 있어. 이 안을 돌아다니며 의자란 의자는 다 앉아본 것 같은데 편한 자리가 없어. 그나마 지금 누워 있는 의자가 가장 나아서 자리를 잡은 게 벌써 8시간 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한심해. 분명 여러 번 확인하고 표를 끊었음에도, 환승하러 와보니 비행기표에 다른 날짜가 찍혀 있었고 덕분에 18시간 동안 돈므앙 공항에 머물게 됐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웃기게도 친구가 생겼어. ‘류웨이’란 이름의 중국인인데 태국에서 유학 중이래. 귀엽게 생겼고 빨간 뿔테 안경을 썼어. 영어는 나보다 훨씬 못하는데(얼마나 못할지 짐작이 가지?) 말은 정말 많아. 한국 연예인에게 관심이 많아서 내가 모르는 연예인 이름까지 술술 외우더라. 류웨이가 다가와서 했던 첫마디가 뭔지 알아? 의자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러는 거야.

“Who are you?”

세상에, ‘후아유’라니. 이 말을 실제로 써본 적이 있니? 나는 중학교 이후론 들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이름? 직업? 국적?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류웨이가 되물었어.

“Do you speak English?”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돌이켜보면 그때 영어를 못한다고 할 걸 그랬나 봐.ᅠ그는 정말로 말이 많아.ᅠ

수영아. 너는 만약에 누군가 “후아유?”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거야? 나는 결국 이름과 국적을 말했거든. 그런데 마음속에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전혀 다른 대답이 올라오더라.

‘실패한 영화인.’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더 이상 영화 일을 하지 않아. 영화 일뿐만 아니라 그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도 만나지 않아. 아예 영화를 보지 않고 지낸 시간도 꽤 길어. 당연히 극장엔 가지 않았고. 요즘엔 가끔 영화를 보긴 하는데 예전처럼 영화에 대한 글을 쓰거나 ‘나도 저렇게 찍어야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아. 그냥 보는 것뿐이야.ᅠ그때는 몰랐어. 이렇게 몇 년이 지나서 스스로를 ‘실패한 영화인’이라고 부르게 될 줄은. 처음엔 이 말이 너무 아팠는데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어. 익숙해져도 아픈 건 똑같지만. 특히 조금 전처럼 갑자기 떠오를 때면 더더욱 그래. 이젠 겉으로 태연한 표정 정도는 지을 수 있어. 다만 이런 생각은 해. 도대체 언제까지 스스로를 이렇게 불러야 할까. 앞으로 나에게 다른 이름은 없는 걸까.


류웨이는 유명 연예인의 사진을 보여주며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어. 이 상황도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나. 만약 내가 아닌 누군가가 비행기표를 잘못 끊었다면 그 사람한테 엄청 화를 냈을 거야. 더 솔직히 말해, 나 자신이 ‘실패한 사람’이란 걸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되새길 때 한없이 비참해져. 할 수 있다면 이 몸에서 벗어나 공항에 있는 누구든 그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내 마음을 꺼내, 앞에서 떠드는 류웨이에게 보여주고 싶어.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ᅠ

여행 내내 너에게 편지를 쓸 테니ᅠ미리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네가 기억하는 사람과 달라.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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