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B는 B에 관한 편지입니다. B는 Book, Bee, Be를 뜻합니다.
Book,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합니다. 문학, 역사, 철학 책 이야기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전합니다. Bee, 오늘 전하는 책 이야기에서 벌처럼 날카롭게 쏘는 구절을 뽑아 되새김합니다. 독서가 남기는 흔적, 그것이 Bee의 목표입니다. Be, 존재에 대해 탐구합니다. 나에 대해, 남에 대해, 물건에 대해, 세계에 대해, 정신에 대해. 탐구합니다.
letter.B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글쓴이 나성훈의 가장 본질적인 글쓰기입니다. 읽고, 쓰고, 연결합니다. letter.B 첫번째 편지를 전합니다.
Book
통조림이 든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토마토, 복숭아, 콩, 살구. 통조림 햄. 콘비프. 10갤런들이 플라스틱 통에 든 수백 갤런의 물. 종이 수건. 화장지, 종이 접시. 담요가 가득 든 비닐 쓰레기봉투. 남자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럴 수가. 남자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어서 내려와.
아빠? 내려와. 내려와서 봐.
남자는 등을 층계에 놓고 올라가 소년의 손을 잡았다. 어서. 남자가 말했다. 괜찮아.
뭘 찾아내신 거예요? 전부. 모두. 직접 한번 봐. 남자는 소년을 층계 아래로 이끌고는 병을 들어 높은 곳에서 불을 비추었다. 보이니? 보여?
이게 다 뭐예요, 아빠? 먹을 거야. 읽을 수 있어?
배. 배라고 적혀 있는데요. 그래 그렇게 적혀 있어. 그렇게 적혀 있고말고.
- 로드 158p (코맥 매카시 장편소설)
코맥 매카시의 유명한 소설 ‘로드’에는 아빠와 아들이 나옵니다. 멸망 직전의 세계를 헤매는 두 사람. 잿빛 하늘, 잿빛 눈, 잿빛 숲. 지구에 남은 건 없습니다. 길고 긴 절망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한줄기 빛처럼 나타난 어떤 집. 그곳에는 모든 게 있습니다. 도대체 끝날 것 같지 않는 회색의 향연 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빛에 눈이 부실 지경인 이 장면. 아빠는 아들에게 먹을 것을 마음껏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세상 모든 것을 찾아냈었다는 뿌듯함을 갖고 말합니다. ‘전부. 모두’ 절망 밖에 남지 않은 지구에서 아빠는 모든 것을 찾아 내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위협이 닥칠지 모르는 이야기. 이 책을 읽다 갑자기 이 구절을 만났을 때 그들이 여행을 그만 끝내고 이곳에서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고 작품이 멈추길 바랐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삶이 안온하게 마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난생 처음으로 음식 같은 음식을 먹고, 따뜻한 잠을 청합니다. 아마도 작품 전체에서 유일한 쉼터일 이 장면이 있어서 코맥 매카시의 ‘로드’ 이 절망의 책을 그래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Bee
“뭘 찾아내신 거예요?” “전부. 모두.” 저도 아이들이 있어서 그런지 이 책의 주인공 남자 같은 입장이면 모든 걸 걸고 아이의 생명을 살리려 달려 다닐 것 같습니다. 내일 같은 건 없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생명을 숨쉬게 할 수 있다면 땅을 다 파헤쳐서라도 먹을 걸 구해올겁니다.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어둡습니다. 이 어둠 중에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는 건 어둠에 어둠을 더하는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재난은 꼭 드러난 것만 재난은 아니고 인간 존재 양식 자체가 그 안에 재난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 책에서 얻은 동질감과 절망, 연민의 힘으로 지금 이 난관을 극복할 역설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Be
본인을 절망의 자리에 세우지 않고서는 타인의 고통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봐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이 시국에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약한 사람, 가장 절망한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그 자리에 나를 앉히고 ‘전부’ 이자 ‘모두’가 되어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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