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B] vol. 9 – 깨지기 쉬운

by 나성훈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에 몰두하다 저녁을 맞이합니다. 어느 저녁에는 내가 왜 사는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건지, 나로 살기 위해 목적을 차용한건지 혼란스럽습니다. 비슷한 하루 하루가 지날 때면 기계 부속품이 된 기분입니다.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우리 안에 무언가 잃어서는 안되는 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지만 절대 잃어서는 안되는 그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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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카베는 육체적으로 가장 편한 수용소다. 그래서 아직 의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서 의식이 다시 깨어난다. 그리하여 공허하고 긴 날, 허기나 노동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어떤 상태로 만들려고 한 것인지, 우리 중 몇 명이나 죽었는지, 이것이 어떤 삶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것이 인간인가, 80p


Bee

‘카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병원입니다. 수용자 중 다치거나 약한 사람들은 ‘카베’로 갈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고 합니다. 말이 ‘행운’이지 지옥의 마지막 칸에서 한 층 위로 올라갔을 뿐입니다. 병원이라고는 하지만 대우는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지옥의 쉼터에서 잠시나마 머물 수 있게 된 유대인을 포함한 다양한 수용자들은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인 ‘의식’을 깨워 자신들이 처한 상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생존만이 아닌 삶을,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나마 남은 의식을 붙들고 깨닫습니다. 나치가 유대인과 수용자들에게 빼앗은 건 생명만이 아님을. 그건 바로 인간성 자체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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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오늘도 많은 이들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강정에서, 코로나19와 싸우는 병상과 일상에서,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투쟁 현장에서, n번방 사태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세월호 가족들의 마음 속에서.


타인의 생명과 존엄을 소중하게 여기는 개인이 많은 곳이 좋은 사회입니다. 나를 돌보고, 타인을 돌보며 인간의 인간됨을 지키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되는 것. 생명과 인간성. 내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여전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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