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 그것도 우리 팀에! 새로운 경력자가 들어왔는데 나이도 좀 많아 보이고, 옷 입는 스타일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꼰대스러움이 의심된다고요? 줄임말도 잘 모를 것 같고, 자기주장만 내세울 것 같고, 막 가르치려 들 것 같고... 그래서 가까이하기가 망설여진다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편견은 노노~ 알고 보면 우리 꼰대들도 쓰임새가 아주 많답니다. 잘만 사용하면 여러분의 업무와 직장생활을 훨씬 유익하게 만들어 줄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꼰대 사용법"을 알려 드릴 테니 적극 활용해 보세요.
우리 꼰대들은요, 자료 모으기를 엄청 좋아해요. 10년 넘게 업계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모아 온 업무 관련 자료들이 개인 PC에 가득하답니다. 유료 논문, 절판된 책, 외국서적 카피본 등 인터넷 검색으로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고급 자료들도 엄청 많아요.
그것뿐인가요? 그동안 모아 온 각종 보고서 양식과 엑셀 포맷, 계약서와 공문 샘플들이 넘치게 있으니까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다 쓰세요. 빈 페이지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남이 써 놓은 비슷한 거 가져다 수정하는 게 훨씬 일하기 쉽잖아요.
우리는 말이죠,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듯이, 직장에서 남는 건 자료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자료를 보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둔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유하는 걸 좋아해서 말만 하면 공짜로 다 드려요. 특히, 카톡으로 자료 공유하는 걸 좋아하니까 갑자기 몇십 메가짜리 전공서적 PDF 복사본이 카톡으로 날아와도 놀라지 마세요.
혹시, 대표님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드는 중인가요? 투자자 앞에서 발표할 IR 자료를 만드는 중이에요? 그렇다면 중간에 저희에게 살짝 공유해 주세요.
길다면 긴 직장 생활 동안 만들고, 보고하고, 피드백받고, 수정하고, 또 피드백받고, 또 수정하고, 다시 만들고, 다시 보고하고, 다시 피드백받고, 다시 수정하고... 하면서 보고서에 할애한 시간이 족히 1만 시간은 될 거예요. 저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이 정도 시간을 보고서 작성에만 쓰다 보니, 이제는 슥- 보면 어디가 논리적으로 안 맞는지, 근거가 빈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어디 어디에 오타가 있는지 한눈에 보여요.
물론, 일의 배경이나 이전에 합의된 부분, 자료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면 좀 더 많은 걸 짚어드릴 수 있겠지만, 다들 바쁘니 굳이 그런 것 까지는 설명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저희는 이미 오랫동안 설명 없이 알아서 해석하고, 알아서 해결책을 찾는 것에 훈련이 되어 있으니까요.
이왕 도움을 요청하셨으니, 많이 바쁘면 자료 수정도 저희가 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슬랙은 정신없고, 노션은 낯설고, 에어테이블이랑 태블로는 너무 어렵지만, 그래도 저희가 PPT랑 엑셀은 어디 가서 꿇리지 않거든요.
직장생활 좀 해 보니까,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네트워크가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그래서 굳이 상사들한테 대들지 않고, 동료들 경조사 있으면 연차 내서 지방까지 다녀오고, 후배들 고생할 때 술도 좀 사주고 했더니 아직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모시던 상사들은 다들 고위 임원이 되셨고, 함께 일 했던 동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고, 내가 일 가르친 후배들도 업계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들이 되어 있어요.
좋은 게 좋은 거다 싶어서 윗사람들한테 싹싹하게 하고, 다른 팀 동료들하고 얼굴 안 붉히고 웃으면서 일하다 보니까 간혹 저보고 정치질 한다고 뒤에서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괜찮아요. 제가 좀만 수그리면 우리 팀이 편하고 팀원들 인사평가도 잘 받고 그랬거든요.
여하튼, 제 리멤버 명함첩에 저장된 명함이 7천 개가 넘으니까요, 영업이나 제휴, 협력업체가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괜찮은 회사들 소개해 드릴게요.
그거 알아요? 조직 문화가 수평적이고 나이와 연차가 중요하지 않은 회사라고 해도 짬바*는 무시할 수 없다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의 의견과 방향성이 더 합리적인데, 대표님이 자꾸 자기 멋대로 하려고 고집을 피우는 상황이라면, 저희 같은 꼰대를 적극 활용하세요.
긴 설명 필요 없고, "저 좀 도와주세요." 한 마디면 버선발로 나서서 도와줄 거예요. 상황이나 당신의 전략에 대해서 깊게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희는 무조건 당신 편이니까요. 그냥 대표님과의 회의 자리에 옆에 앉혀만 두세요. 내용은 들으면서 파악할게요.
아마도 상황은 이렇게 흘러갈 거예요. 당신이 먼저 대표님에게 의견을 말하면, 대표님이 반대 의견을 말하고, 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을 거예요. 두 분이 계속 설전을 벌이다가 의견 합치가 안되면 대표님이 저를 바라보며 제 의견을 묻겠죠? 그때 저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대표님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전 직장에서 유사한 사례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oo님이 이야기한 전략이 의외로 잘 통할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리소스 최소화해서 부분적으로 테스트해 보고,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의사결정자들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반면, 결정을 뒤로 미루는 걸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짬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우리도 이 정도는 안다는 말씀~!)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요? 아... 진상 고객이랑 통화해야 하는데, 겁이 난다고요? 그런 거라면 저희한테 맡기세요. 저희가 지난 오랜 직장생활 동안 연마한 기술이 하나 있어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기술인데요, 제가 지금 그 고객과 통화할 테니까 잘 보세요.
(...) 너무 그렇게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건 조금 부담스러워요.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냐고요? 제가 조금 조언을 드리자면요, 고객이든 상사든 꼭 뭘 원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화를 풀 수 있는 욕받이를 필요로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그 화를 온몸으로 받아내면 절대 안 돼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셔야 해요. 어차피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도 당신도 금방 잊어버릴 일이에요.
다만, 조심할 건 건성으로 듣고 있다는 티가 나지 않게 해야 해요. 성심성의껏 듣고 있는 척하시고, 리액션도 해 주시고, 중간중간 죄송하다고 해 주세요. 안 죄송해도 그냥 죄송하다고 해 버려요.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길어봐야 10분이에요. 눈 딱 감고 10분만 참았다가 수화기 내려놓고 허공에다 "ㅆㅂㅅㄲ" 욕 한 마디 던지고 잊어버려요. 참, 욕하기 전에 수화기 잘 내려놓았는지 꼭 확인하시고요.
표정이 또 안 좋아 보여요. 이번엔 무슨 일이죠? 아... 다른 팀에서 자꾸만 자기네 일을 우리 팀에 떠넘기려고 한다고요? 그쪽 팀장이 꼰대 중에 상꼰대라 대화가 안 통한다고요? 그런 거라면 저희한테 맡기세요. 꼰대는 꼰대를 알아보는 법! 꼰대끼리 통하는 그런 게 있답니다.
근데, 그 팀은 왜 자꾸 일을 우리한테 떠 넘기는 거예요? 아~ 그 팀에 요즘 수주가 많이 되어서 일이 많군요.
그러면, 우리가 좀 일을 나눠서 도와줄 순 없는 거예요? 아~ 사업 분야가 달라서 우리가 맡기 어려운 일들도 있군요.
사업 분야가 다른 업무는 구체적으로 어떤 거예요? 아! 그중에 몇 개는 제가 좀 아는 분야네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그 팀에서 넘기려고 하는 일 중에 우리 팀에서 잘할 수 있는 거 몇 개랑 제가 할 수 있는 거 몇 개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못 한다고 하는 걸로요. 이렇게 하면 절반 정도만 받아오면 될 것 같은데요. 대신에,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실적은 우리 팀으로 잡는 걸로 하고요. 그 정도면 할 만하다고요? 좋아요, 그럼 제가 그렇게 이야기해 볼게요.
참, 그 팀 팀장님 전화번호 혹시 있으면 알려 주실래요? 왜냐고요? 미팅 전에 점심이나 같이 하려고요. 원래 R&R 조정 같은 힘겨루기는 미팅에서 하는 게 아니고, 미팅 전에 편한 자리에서 하는 게 잘 먹히거든요. 미팅은 거들뿐...
저희같은 꼰대들... 이렇게 딱 한달만 사용해 보세요. 한 달만 지내보면 꼰대도 꽤 쓸만하다는 생각이 드실 거에요. 우리 좋은 동료가 되어서 이 험난한 직장생활을 함께 헤쳐나가 보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