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 Bradford: Keep Walking 전시 관람기
전시를 보며 나는 먼저 바스키아를 떠올렸다.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장 미셸 바스키아.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늘 중심이 아닌 경계에 서야 했던 삶. 거리의 낙서 ‘SAMO’로 등장해 분노를 화면에 새겼고, 스물일곱에 요절했다. 그의 그림은 날것의 저항이었다. 상처를 감추지 않고 구조를 향해 직접 외쳤다.
그래서 나는 묻게 되었다.
마크 브래드포드는 어떤 방식으로 시대를 말하는가.
1961년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센트럴에서 태어난 브래드포드는 흑인이자 퀴어로서 사회적 소수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미용실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고, 도시의 전단지와 광고지, 포스터를 수집해 화면 위에 겹겹이 붙이고 다시 갈아낸다. 그의 작업은 추상이 아니라 도시의 표면을 벗겨 사회 구조의 지층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폭발 대신 겹침, 외침 대신 침식.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공간.
벽이 아니라 바닥이 작품이 된 곳.
겹겹의 종이가 전시장 전체를 덮고 있었다. 나는 그 위를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작품을 밟는다는 행위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이것은 훼손이 아니라 참여라는 것을. 우리의 발걸음이 또 하나의 층이 된다.
도시는 늘 누군가의 삶 위에 쌓인다.
길은 발걸음으로 만들어지고, 역사는 시간의 압력으로 남는다.
그 위를 걸으며 나는 관람자가 아니라 구조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사회의 일원으로 얼마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가.
나는 이 지층을 의식하며 걷고 있는가.
벽면에는 ‘Katrina’가 반복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그러나 이 단어는 단순한 재난의 기록이 아니다. 구조적 불평등이 드러난 사건의 이름이다. 피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글자는 겹쳐지고, 찢기고, 묻힌다. 외침이 구조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 윌리엄 도어시 스완. 19세기 말 스스로를 ‘드래그의 여왕’이라 칭했던 미국 최초의 퀴어 인권 운동가 중 한 사람. 노예로 태어났지만 공동체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인물.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지워져 있었지만, 브래드포드는 그것을 다시 화면 위로 끌어올린다.
작품 곳곳에 반복되는 문장.
“Here come the hurricane.”
폭풍은 예고가 아니다.
이미 와 있고, 반복되고 있는 상태다.
브래드포드는 폭풍을 그리지 않는다.
폭풍이 남긴 표면을 보여준다.
열차 시간표를 연상시키는 연작은 미국 흑인들의 ‘대이주’를 떠올리게 한다. 남부에서 북부로, 차별을 피해 이동해야 했던 사람들. 시간표는 정보가 아니라 떠나야 했던 역사적 증거다. 숫자는 눌려 있고, 종이는 벗겨져 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지층처럼 쌓여 있다.
신발이 남고 몸은 사라진 화면도 있었다. 이동의 흔적은 남지만 이름은 지워진다. 도시의 격자 구조처럼 보이는 화면에서는 길이 통로이자 경계가 된다. 지도는 중립적인 것 같지만,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권력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 작업들을 보며 나는 느꼈다.
같은 색이라도 어떤 바탕 위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찢긴 종이 위의 핑크는 달콤함이 아니라 퇴적된 기억의 색이다. 색의 층위는 곧 삶의 층위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 않은가.
예술로 보느냐, 그저 일상으로 흘려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는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는 지구본이 매달려 있었다. 하나의 둥근 세계. 그러나 크기와 위치, 간격은 모두 달랐다. 세계는 하나이지만, 경험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듯.
우리가 밟고 지나온 바닥,
마주한 폭풍,
이동과 불평등, 지워진 이름과 남은 흔적은
모두 이 하나의 지구 위에서 반복된다.
그 지구 앞에서 전시 제목이 다시 떠올랐다.
Keep Walking.
폭풍이 와도,
구조가 쉽게 변하지 않아도,
우리는 계속 걷는다.
바스키아의 외침과 브래드포드의 지속 사이에서 나는 생각했다.
분노로 외칠 것인가,
아니면 지층을 인식하며 걸어갈 것인가.
이번 전시는 나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오늘,
나는 조금 더 의식하며 걷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