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둘째 날 아침의 이스탄불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푸르고 뜨거웠다. 나는 붉은 벽돌빛을 머금은 성소피아 성당 앞에 섰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 줄, 신발을 벗고 스카프를 두른 채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 그 문 앞에 서는 순간,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느려졌다. 황제도, 술탄도, 오늘의 여행자도 이 문턱 앞에서는 모두 ‘순례자’가 된다.
‘성스러운 지혜.’ 이름 그대로 이곳은 지혜와 비극, 신앙과 정복의 시간이 켜켜이 포개진 장소였다.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솔로몬의 성전을 넘어서는 신의 집을 짓겠다는 열망으로 이 거대한 돔을 올렸다. 수천 명의 장인과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단 5년 만에 완성된 건축. 지름 31미터, 높이 55미터의 곡선은 하늘을 향한 인간의 동경이자, 신의 자비가 내려앉는 그릇처럼 보였다.
천 년이 넘도록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교회로 남아 있던 성소피아는 비잔틴 제국의 자부심이자 기독교 세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며 역사는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노약자와 아이들, 수도자와 시민들은 성소피아 안으로 몸을 숨겼다. 성가와 기도가 울려 퍼졌지만, 성전에 들어선 군사들은 그 안의 생명들을 가차 없이 꺾었다. 단 하룻밤 사이, 신앙의 집은 승리의 전리품이 되었고 교회는 모스크로 바뀌었다.
천장과 벽을 가득 채웠던 모자이크 성화들, 마리아와 아기 예수, 천사와 성자들의 얼굴은 두꺼운 회칠 아래로 감춰졌다. 그 위에는 알라와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원형 칼리그래피가 걸렸다. 뜯어낼 시간조차 없었던 그들에게 가장 빠른 방법은 ‘덮는 것’이었을 것이다. 외부에는 네 개의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내부에는 메카를 향한 미흐라브가 자리 잡았다. 기독교의 노래는 멎었고, 이슬람의 아잔이 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모자이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1934년,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성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전환했고, 회칠이 벗겨지며 비잔틴의 빛—마리아와 예수—가 다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2020년 7월 10일, 터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성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환원한다고 선언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인류 공동의 유산은 정치의 무대 위에 올려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 이후 우리는 더 이상 2층의 모자이크 성화들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성소피아를 떠올릴 때 가장 선명하게 남는 장면은 따로 있다. 알라와 무함마드의 거대한 칼리그래피 사이에, 예수와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묵묵히 함께 서 있는 풍경.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같은 공간을 견디듯 공존하는 모습이다.
빛과 어둠, 구원과 정복, 용서와 잊힘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이 긴장과 침묵의 균형. 그것이 바로 성소피아였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둥 하나 없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돔, 1500년의 시간을 견뎌낸 벽돌들. 누군가는 신을 위해 이곳에 몸을 누였고, 누군가는 정복을 위해 이 위를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역사의 무게와 침묵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성소피아는 건축도 유적도 아닌 ‘인류가 끝내 풀지 못한 질문’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