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양연화를 보고

가장 아름다웠기에, 끝내 머물 수 없었던...

by 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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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은 손을 잡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고, 말하지 않았기에 더 깊이 스며드는 사랑이 있다.


1960년대 홍콩,
낡은 셋집의 좁은 복도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이웃으로 만난다.
기자 차우, 그리고 비서 리첸.
그들은 같은 날 이사 왔고, 각자의 배우자는 늘 부재중이다.
처음의 인사는 예의 바른 거리에서 멈춘다.
아직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


그러나 반복되는 우연은 곧 패턴이 되고,
그 패턴은 의심으로 변한다.
같은 시간의 외출, 같은 선물, 같은 거짓말.
서로의 배우자가 같은 사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 서서히 알아차린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단번에 오지 않는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공모자 같은 연대감’이다.
상처를 공유하는 사이,
그들은 상대의 고통을 흉내 내며 이해하려 한다.
“그 사람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연습처럼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진심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리첸이 입고 있는 치파오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언어다.
몸에 꼭 맞는 실루엣, 높은 깃,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 옷.
그 옷은 그녀의 삶처럼 단정하고,
그녀의 마음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연한 꽃무늬에서 붉은색으로,
그리고 다시 차분한 색으로 변해가는 치파오는
리첸의 감정이 피어나고, 억눌리고, 접히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차우와 리첸은
서로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다.
그래서 더 조심한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린, 그 사람들처럼 되지 말아요.’
이 말은 다짐이면서 동시에 선택이다.
사랑을 욕망의 방향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선택.
그 선택은 두 사람을 지켜주지만,
또 동시에 갈라놓는다.


이 영화의 사랑은
끝내 ‘사건’이 되지 않는다.
대신 침묵이 되고, 반복이 되고, 기억이 된다.
비 오는 골목, 국수 가게를 오가는 발걸음,
서로를 향해 멈췄다가 다시 돌아서는 시선들.
왕가위감독은 이 모든 장면을 느리게 쌓아
사랑이 다가왔다가 물러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별은 큰 장면 없이 찾아온다.
차우는 떠나고, 리첸은 남는다.
몇 년 뒤,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같은 공간을 스치지만 말을 걸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선택은
다시 꺼낼 수 없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앙코르와트.
차우는 돌기둥의 틈에 고개를 숙여
자신의 비밀을 속삭인다.
그리고 그 비밀을 세상에서 지운다.
사랑을 증명하기보다,
사랑을 보존하기 위한 방식으로.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이라는 뜻의 이 말은
이 영화에서 아이러니하게 사용된다.
그 시절은 가장 빛났기에,
끝내 함께 머물 수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사랑을 성취의 문제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기억되는가의 문제라는 것.
왕가위는 그렇게 말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늘 현재형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있다.’


그래서 화양연화는
끝난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끝내 꺼내지 않은 마음에 대한 영화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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