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숨기지 않았던 한 인간의 기록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을 다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충격도 자극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람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았구나’라는 묵직한 여운이었다.
이 영화는 한 천재 화가의 전기가 아니라, 욕망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낸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영화의 원제 Tod und Mädchen, ‘죽음과 소녀’.
이는 쉴레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 욕망과 죄의식은 그의 그림 속에서 늘 함께 존재했다.
20세기 초 비엔나.
젊은 화가 에곤 쉴레는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을 받으며 화단에 등장하지만, 곧 그늘진 길을 선택한다.
금빛 장식과 관능적 아름다움 대신, 그는 뒤틀린 신체와 날 선 선으로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다.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의 삶에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여동생 게르티,
연인이자 뮤즈였던 발리,
그리고 아내가 되는 에디트.
발리는 그의 가장 솔직한 시간을 함께 통과한 사람이었다.
사랑이었고, 동반자였고, 그림의 일부였다.
그러나 쉴레는 사회적 안정과 결혼을 택하며 그녀를 떠난다.
그 선택은 성공으로 이어지는 듯 보이지만,
떠나보낸 사랑은 죄책감이 되어 그림 속에 남는다.
그의 인물들은 점점 더 고독해지고, 시선은 점점 더 정면을 응시한다.
쉴레는 결국 미성년자 누드 드로잉 혐의로 체포된다.
법정에서 그의 그림이 불태워지는 장면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받지 못한 예술’이 사회로부터 받는 폭력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예술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가 아니라
‘사회는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영화는 계속해서 질문하게 한다.
이후 그는 에디트와 결혼하지만, 삶은 그에게 오래 머물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전쟁, 질병, 그리고 스페인 독감.
임신 중이던 에디트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사흘 뒤 쉴레도 그녀의 뒤를 따른다.
스물여덟.
그가 남긴 것은 수백 점의 그림과, 끝내 설명되지 않는 질문들이다.
영화를 보며 계속 마음에 맴돌았던 질문이 있다.
‘그의 욕망은 정말 죄였을까?’
쉴레의 그림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외설이 아니라 정직함에서 온다.
그는 인간을 미화하지 않았고, 욕망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말하는 듯하다.
‘이것이 인간이다’라고.
영화는 발리와 에디트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압축하지만,
그의 그림을 알고 나면 알게 된다.
쉴레가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여인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진실’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대표작 ‘죽음과 소녀’는 비극이라기보다 고백처럼 다가온다.
사랑과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는 늘 그 사이 어딘가를 지나며 살아간다는 고백.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예술보다 인간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욕망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던 한 사람.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다.
쉴레에게 욕망은 타락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였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그림이 더 선명해진 이유도,
삶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가 남긴 문장은 이것이다.
‘욕망을 숨기지 않는 삶은 불편하지만, 거짓되지는 않다.’
에곤 쉴레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자신의 삶을 미루거나 덮어두지 않았다.
그의 그림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그가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욕망과 진실 앞에서
얼마나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영화는 여전히 내게 질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