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삶이 무너질 때, 우리는 춤을 출 수 있을까

by 여울
그리스인 조르바_그리스 1965 작품

이 영화는 처음부터 ‘이야기’라기보다 ‘태도’로 다가온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묻는 영화.
그리고 그 질문은 마지막 장면, 해변의 춤으로 응축된다.


영국에서 온 젊은 지식인 바질은 크레타 섬에 버려진 광산을 되살리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다. 그는 책과 사유로 삶을 이해해온 사람이다. 모든 일에는 계획이 있어야 하고, 실패는 피해야 하며, 감정은 다듬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 여정의 초입에서 바질은 한 남자를 만난다. 알렉시스 조르바. 말은 거칠고 행동은 즉흥적이지만, 삶 앞에서는 한없이 정직한 사람이다. 조르바는 인생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낸다.


둘은 함께 광산을 꾸리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같은 시간을 보낸다.
조르바는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사랑에 빠진다. 슬픔도 기쁨도 숨기지 않는다.
바질은 그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워한다. 동시에 끌린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사는 걸까.’
그리고 점점 깨닫는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삶을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구나.’


광산 사업은 실패한다.
기계는 무너지고, 계획은 조롱처럼 흩어진다. 바질은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때 조르바가 묻는다.
‘자네, 춤출 줄 아나?’


“이제 어떻게 하죠?”라는 바질의 질문에,
조르바는 이렇게 답한다.
‘이럴 땐 춤을 춰야지.’


이 장면에서 영화는 설명을 멈춘다.
두 사람은 모래 위에 서서, 어깨를 걸고, 서툰 발걸음으로 춤을 시작한다. 처음엔 느리게, 이내 점점 빠르게. 넘어질 듯하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실패의 한가운데서, 그들은 성공보다 깊은 어떤 것에 도착한다.


이 춤은 기쁨의 춤이 아니다.
위로의 춤도 아니다.
‘삶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살아 있음을 선택하는 몸의 언어’다.


바질은 이 순간 처음으로 삶을 ‘이해’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조르바는 끝까지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삶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며, 실패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리듬이라는 것을.


영화가 끝나고도 이 장면은 오래 남는다.
나에게도 끊임없이 묻기 때문이다.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 애써 쌓아온 것이 무너졌을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주저앉음인가, 자책인가, 아니면 춤인가.


조르바의 춤은 가볍지 않다.
그 춤은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말한다.
‘그래도 나는 삶을 놓지 않겠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순간은
모든 것이 실패로 보이는 자리에서
그래도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삶이 무너질 때,
우리는 울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넌지시 말한다.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서 한 번쯤 춤을 춰보라고.’


그 춤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방식이니까.


zorbathegreek1964-900x596.jpg






매거진의 이전글영화 카라멜루(Caramelo)를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