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이 품고 다녔던 책, '제인 에어'를 보고

by 여울
제인에어, 영국 2011.04.20 개봉

빨간머리 앤 셜리가 늘 품에 안고 다니던 책이 있다.
바로 제인 에어.


‘빨간머리 앤’을 보며 나는 종종 궁금해졌다.
왜 앤은 그 많은 책들 중에서 하필이면 제인 에어였을까.
상상력이 넘치는 앤에게, 이 고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제인에어를 찾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앤이 좋아한 소설이 아니라, 앤이 ‘되고 싶었던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는 걸.


제인 에어와 앤 셜리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둘 다 고아로 시작한다.
둘 다 보호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지나, 세상에 홀로 던져진다.


제인은 19세기 초,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계급 사회 속에서 자란다.
앤은 그로부터 반세기쯤 지난 19세기 말,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의 작은 공동체에서 성장한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여자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작아지길 요구받는 세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둘은 다르게 반응한다.
제인은 침묵 속에서 자신을 단단히 세운다.
앤은 말과 상상으로 세상을 밀어낸다.

그래서 앤은 제인 에어를 읽으며 이렇게 느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나처럼 외롭지만, 나처럼 꺾이지 않는다.’


영화 속 제인은 늘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참고 남을 것인가, 떠나서 자신을 지킬 것인가.


가정교사로 일하던 손필드 홀에서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신분의 벽을 넘어선 사랑은 달콤했지만, 그 사랑 안에는 거짓이 숨겨져 있었다.
이미 아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진실을 숨긴 채 결혼하려 했다는 배신.


이때 제인은 떠난다.
사랑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지 않기 위해’ 떠난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말한다.
‘사랑은 나를 작게 만드는 방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 선택은 낭만적이지 않다.
가난하고, 외롭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그럼에도 제인은 자신의 양심과 존엄을 택한다.


앤이 이 장면을 읽으며 얼마나 숨을 죽였을지, 나는 상상해본다.


빨간머리 앤 속 앤은 말한다.
“상상력은 나를 구해주는 거예요.”

하지만 제인 에어는 상상력의 책이 아니다.
오히려 절제와 선택, 침묵과 결단의 이야기다.


그래서 더 중요했을 것이다.
앤에게 이 책은 ‘꿈꾸는 법’이 아니라
‘현실에서 나를 지키는 법’을 알려주는 이야기였으니까.


제인은 말 대신 선택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사랑 앞에서도, 신 앞에서도, 사회 앞에서도
‘나는 나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앤은 그 태도를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자신도 세상 앞에서 그렇게 말하기 위해.


제인 에어는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은 언제 존엄을 해치기 시작하는가.’
‘참는 것이 미덕이 되는 순간은 언제까지인가.’

그리고 답한다.
‘사랑보다 먼저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메시지가 19세기에 쓰여진 이야기라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앤의 가방 속에 제인 에어가 있었고,
그래서 나는 앤을 따라 이 영화를 보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 쓰고 있다.


앤은 제인 에어를 읽으며 성장했고,
나는 앤을 통해 제인 에어를 다시 만났다.

좋은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한 시대의 소녀가 다른 시대의 소녀에게 건네고,
그 소녀가 다시 우리에게 건네는 방식으로.


제인 에어는 말하지 않는다.
‘강해져라’고.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 자신을 떠나지 말아라.’

앤이 그 책을 끼고 다녔던 이유는,
아마 그 한 문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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