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일기
오전에 운동을 마치고,
오후에는 정대표님께서 가끔 쉬기 위해 마련해 둔 속초 집으로 왔다.
작은 마당 한켠에는 목수국과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는,
아담하고 정갈한 집이었다.
예순이 되기 전, 생애 이벤트로 한 달 살이를 어디에서 해볼까
생각하던 터라 이곳은 어떨까 궁금해져
오늘은 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여장을 풀고,
정 대표님이 자주 간다며 예약해주신
봉포항 활어회센터의 쌍둥이횟집으로 향했다.
사장님은 정 대표님께서 연락을 주셨다며
털게와 활어회를 권했다.
게값을 애매하게 말씀하셔서 잠시 이상하다 싶었지만,
소개해주신 곳이니 믿고 먹기로 했다.
스키다시를 비롯한 서비스 메뉴들이 하나같이 맛있었다.
활어회에 털게찜, 특히 게살볶음밥은 일품이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데,
이미 정 대표님이 결제를 해두셨다는 말이 돌아왔다.
아까 가격을 물을 때 느꼈던 그 미묘한 기분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아, 이런 이유였구나.
돌아오는 길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더니,
입맛에 맞았는지 오히려 걱정을 하신다.
집도 내어주시고, 식사까지 챙겨주시다니.
생각지도 못한 마음이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창밖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유난히 정겨운 밤이다.
집에서 보다가 온
넷플릭스 시리즈 〈빨간머리 앤〉이
머릿속에서 자꾸 어른거렸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결국 1화를 끝까지 보았다.
앤이 마차를 타고 초록지붕 집으로 향하는 장면은
마치 새 아침의 빛이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반짝이는 강물, 그리고 앤의 붉은 머리.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삶의 문을 여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믿었던 앤이
처음으로 자신을 ‘누군가의 딸’로 상상하는 순간,
그 상상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자존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나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모두 한때 외롭고 상처받았던 존재다.
그럼에도 다시 세상을 믿고,
누군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용기를 낼 때
인생은 새로 시작된다.
오늘 앤을 통해 배운다.
상처는 결핍이 아니라,
사랑이 들어올 자리를 비워둔 흔적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 나는 감사한다.
내 삶의 초록지붕이 되어준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을 믿게 해주는 마음에게.
정언니 부부와 3박 4일을 함께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니는 형부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것을 간섭한다.
아침에 반지를 두고 나온 형부에게
언니는 곧바로 건네지 않고 내게 말했다.
“저럴 줄 알았어. 스스로 찾을 때까지 주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괜히 내 마음이 졸였다.
결국 운동을 마치고 나서야
형부는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제야 언니는 반지를 내밀었다.
“비싼 반지 끼고 오지 말랬잖아.
잃어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잔소리는 한참 이어졌다.
운전 중에도
“속도 좀 줄여요, 차간거리 유지해요.”
언니의 염려는 쉼 없이 이어졌고,
걱정하는 마음도, 듣는 마음도
둘 다 지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나 역시 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종종 많은 것을
‘남편의 문제’로 돌려 생각해왔다.
‘이렇게 하면 될 텐데.’
그 말이 내 안에도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경일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부부가 다툴 때는 거울을 두고 이야기하라.
자신의 표정을 보면
‘내가 이렇게 무서운 얼굴로 말하고 있었구나’
스스로 놀라게 된다.”
우리는 상대의 얼굴만 바라보느라
내 얼굴이 얼마나 굳어 있었는지 모른다.
문제 많은 집에는 거울 하나만 있어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정언니도, 나도
상대의 얼굴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오늘은 그 생각을 오래 붙잡는다.
누군가의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하루,
그 깨달음에 감사한다.
나를 거울 앞에 자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